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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or: 생생이
"그만 가주십시오."

정시월은 눈을 감은 채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쉬고 싶습니다."

서정호는 굳게 감긴 정시월의 눈과 창백한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더는 그녀에게서 예전의 그 밝고 당당하며, 불꽃처럼 생기 넘치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마치 가시라도 박힌 듯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푹 쉬거라."

서정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는... 시간을 더 내어 너와 함께하겠다. 그리고... 네게도 조금 더 신경 쓰도록 하지."

서정호가 돌아서려던 순간, 한 시녀가 다급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바로 박해주의 시녀 명희였다.

"왕야! 큰일 났습니다! 아씨께서... 갑자기 피를 토하시고 혼절하셨습니다! 어의께서 살펴보신 결과, 기이한 독에 중독되셨다고 합니다. 반드시 음기가 가장 강한 이의 피를 약으로 써야만 독을 풀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서정호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음기가 가장 강한 이의 피가 필요하다고?"

명희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침상 위의 정시월에게 향했다.

서정호는 곧바로 정시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시월아, 내 기억이 맞다면... 넌 음한 팔자를 타고났다지?"

정시월은 눈을 떴다.

초조함과 기대가 가득한 서정호의 얼굴을 바라보던 정시월은 문득 웃었다.

이것이 서정호가 방금 말한 "네게 더 신경 쓰겠다"는 것이던가.

그녀가 그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피를 내어주어야 한다는 뜻에서 말이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여위고 창백한 손목을 내밀었다.

오래된 상처와 새로 생긴 딱지가 뒤섞인 손목이었다.

"베십시오."

서정호는 정시월이 이토록 순순히 응할 줄은 몰랐다.

마음 한구석이 이유 없이 세차게 조여들며 기묘한 불편함이 피어올랐지만, 지금 서정호의 마음은 온통 박해주의 안위로 가득해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여봐라, 그릇과 칼을 가져오너라!"

날카로운 칼날이 손목의 살을 가르자, 따뜻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백옥 그릇 안으로 떨어졌다.

한 그릇, 또 한 그릇...

정시월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입술에서는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고, 몸은 피를 흘린 탓과 고통 때문에 가늘게 떨렸으며, 이마에는 촘촘한 식은땀이 맺혔다.

그러나 정시월은 여전히 이를 악문 채 신음 한마디 내지 않았다.

서정호는 눈앞의 선명한 핏빛을 바라보다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정시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서정호는 정시월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일까.

어째서 심장이 아프게 조여 오는 것일까?

"이제 되었습니다"

어의가 그리 말했을 때, 정시월의 손목은 이미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서정호는 금창약과 붕대를 가져와 직접 정시월의 상처를 감쌌다.

"이번 일은... 고맙다. 앞으로 반드시 네게 보답하겠다."

"필요 없습니다."

정시월은 손을 빼내어 스스로 상처를 눌렀다.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또렷했다.

"왕야께서는 제게 한 가지만 주시면 됩니다."

"무엇이냐? 내가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겠다."

서정호가 곧바로 말했다.

정시월의 시선이 서정호의 허리에 매달린 낡은 향낭에 닿았다.

그것은 혼인 전, 정시월이 꼬박 사흘 밤을 새우고 수없이 손가락을 찔려가며 직접 수놓은 것이었다.

원앙을 수놓으려 했지만, 솜씨가 서툰 탓에 완성된 것은 오리 두 마리처럼 보였다.

그것을 그에게 건네던 날, 정시월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왕야, 제가 더는 왕야를 사랑하지 않는 그날까지 꼭 달고 있어야 합니다."

그때 서정호는 코웃음을 치며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그것을 주워들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떼지 않은 채 허리에 매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시월이 그것을 돌려달라고 하다니...

'설마... 화가 나서 이러는 것인가?'

'피를 내어준 일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서정호는 이유 없이 심장이 움찔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허리에 매단 향낭을 움켜쥐었다.

"무엇에 쓰려는 것이냐?"

정시월은 그저 서정호를 바라보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내어주십시오."

"왕야! 해주 아씨의 상태가 위급합니다. 해독에 필요한 피를 지금 당장 보내야 합니다!"

명희가 다급히 재촉했다.

서정호는 평온하지만 완고한 정시월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명희의 손에 들린 피가 담긴 그릇을 바라보았다.

서정호는 이를 악물었다. 결국 허리에 매단 향낭을 풀어, 피로 물든 정시월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피가 담긴 그릇을 들어 올린 채, 서둘러 별채를 떠났다.

정시월은 손에 쥔 거칠고 볼품없는 낡은 향낭을 힘껏 움켜쥐었다. 세게 쥔 탓에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한때 보물처럼 아끼던 정표였건만, 이제 정시월의 손에 남은 것은 차가운 감촉뿐이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서정호는 수많은 진귀한 보약을 사람을 시켜 보내왔고, 그것들은 별채의 작은 창고를 가득 채울 만큼 쌓여갔다.

하지만 서정호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줄곧 서오원에 머물며 독에 당한 박해주를 돌보고 있었다.

정시월은 그 값비싼 보약들을 바라보았지만, 눈빛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아무리 좋은 보약을 가져다 바친들, 정시월이 흘린 피와 이미 죽어버린 마음까지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날, 서정호는 오랜만에 별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월아, 그동안 왕부 안에만 있어 답답했을 텐데, 내가 데리고 나가 바람이라도 쐬게 해주마."

서정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오늘 경성 외곽에서 봄 연회가 열린다더구나. 여러 가문의 자제들과 부인들도 많이 참석할 터이니, 너도 나가서 마음을 풀거라."

정시월은 거절하지 않았다.

마차에 오른 뒤에야 정시월은 안에 자신과 서정호 두 사람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해주는 데려가지 않으십니까?"

정시월이 무심한 듯 한마디 물었다.

서정호는 잠시 멈칫했다.

정시월이 그런 것을 물을 줄은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해주? 그 아이를 왜 데려가야 하느냐?"

정시월은 창백한 입술 끝을 살짝 끌어올렸다.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예전에는... 어떤 자리에 가시든 늘 곁에 두지 않으셨습니까?"

처음 혼인했을 때만 해도 서정호는 정시월에게 그저 냉담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해주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서정호 앞에 나타나 정시월이 질투심에 자신을 떠밀어 아래로 떨어뜨렸다고 울며 하소연했다.

그날 이후 서정호는 이런 방식으로 정시월을 모욕하기 시작했다.

궁중 연회이든, 가정 연회이든, 나들이든 상관없이 반드시 박해주를 곁에 데리고 다녔다.

그로 인해 정실 왕비인 정시월은 온 경성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마치 과거의 일들이 떠오른 듯 서정호의 얼굴은 순간 굳어졌다.

서정호의 말투에는 어색함이 묻어났다.

"예전은 예전일 뿐이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나도 노력해서..."

"저를 사랑하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입니까?"

정시월이 그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렇다면 참으로... 고된 일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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