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황후가 아이를 더 원하고 있다.” 소무경은 그녀의 침의를 벗기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수태가 잘되는 몸이니, 아이를 하나 더 갖도록 하거라.” 열 달 뒤, 서하연은 딸을 낳았다. 산파는 탯줄을 자르자마자 포대기조차 만져보지 못하게 하고는 아이를 안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벌써 두 번째였다. 궁 안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황후가 과거 폐하를 따라 전장을 누비다 몸을 상하여 더는 자식을 품을 수 없는 처지가 되지만 않았어도, 이 궁에 다른 여인이 들어올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태사(太師)의 적녀인 서하연은 그저 때를 잘 타고나, 황실의 대를 잇기 위해 이용되는 '씨받이' 에 불과할 뿐이었다.
Mehr anzeigen“듣자 하니... 그이가 숨을 거두었다더군.” 유해원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마치 다 부서진 풍구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 같았다.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 네 이름만을 애타게 부르면서 말이야.” 서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내가 이 십오 년이란 세월을... 어떻게 버텨 왔는지 알아?” 유해원이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네가 한 계단씩 위로 오르는 걸 지켜보았고, 네 아들이 태자의 자리에 앉는 걸 보았고, 네가 끝내 태후가 되어 군림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런데 나는! 이 썩어 문드러진 바닥에서 개처럼 짓밟히고 있었다고!” “그것이 네가 지은 죄의 대가다.” 서하연이 담담하게 말했다.“대가?”유해원은 악에 받쳐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그래! 내 업보고, 내가 자초한 일이지! 허면 넌? 서하연, 넌 이 십오 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행복했냔 말이야!” 서하연은 시선을 내리깔아 그녀를 응시했다. “그것이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지?” “의미가 있고말고!” 유해원은 쉰 목소리로 외쳤다.“난 비참하게 패배했으나 너 역시 온전히 승기를 거머쥔 자가 아님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으니까! 화려한 태후의 관을 쓰고 허울 좋게 앉아 있은들 속내는 어떻지? 네가 연모했던 사내는 너를 증오했고, 네가 증오했던 사내는 죽어 버렸으니 네 생은 결국 지독하게 고독할 뿐이야!” 길고 무거운 정적이 실내를 메웠다. 서하연은 이윽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유해원, 네가 틀렸다.” “...”“난 누구를 이기고 싶었던 적이 없어.”그녀는 삐걱거리는 창가로 걸어가, 메마르고 잡초만 무성한 황량한 뜰을 눈에 담았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저 처음부터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오직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남는 것. 십팔 년 전, 처음 이 궁에 발을 들였을 때는 그저 한 가닥 순수한 진심만을 바랐지. 허나 이내 이곳엔 진심 따윈 없다는 걸 깨닫고 존엄을 원했다. 하지만 그 존엄마저 무참히 짓밟히자, 내겐 오직
서하연이 궁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은 평온한 호수에 거대한 암석이 내리꽂힌 듯 순식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조정은 충격에 휩싸였고 내명부는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소무경은 무자비한 철혈의 수단으로 황궁을 짓누르던 모든 의혹을 찍어 눌렀다. 황후는 당시에 간신 무리에게 해를 입어 어쩔 수 없이 가짜 죽음으로 몸을 피했던 것이라며, 이제 모든 진실이 명백하게 밝혀졌으니 마땅히 황후의 자리를 되찾아 주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감히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폐후 유해원은 여전히 냉궁에 갇혀 있었고 당시 사건에 연루되었던 모든 궁인들은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였으니까. 그 피비린내를 맡고도 다음 제물이 되기를 자처할 어리석은 자는 없었다.그렇게 서하연은 다시 장춘궁으로 발을 들였다. 모든 전각이 그녀가 떠나기 전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멈춰 있었다. 오직 세월의 흔적을 대변하듯 소윤성이 타던 작은 목마와, 혜안의 손때가 묻은 딸랑이가 전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장춘궁에 발을 디딘 첫날, 태자 소윤성은 유모의 치맛자락 뒤로 몸을 숨긴 채 겁먹은 눈으로 낯선 여인을 훔쳐보았다.“윤성아.”소무경이 기꺼이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 어머니다.”아이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무언가에 이끌리듯 격렬하게 달려와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어마마마!”아이가 목을 놓아 조그맣게 흐느꼈다. “아바마마께서 어머니는 아주 먼 곳에 가신 거라 하셨어요... 정말, 정말로 돌아오신 건가요?” 서하연은 제 품에 파고드는 작고 소중한 아들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메말랐던 눈시울이 그제야 붉게 물들었다. “그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 멘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어미가 돌아왔단다.” 혜안이는 아직 너무 어려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핏줄의 이끌림 덕분인지 본능적으로 어미를 따르며 그녀의 어깨에 뺨을 비벼 대고 꺄르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만큼은 서하연 역시 자신이 견뎌 낸 모든 수치와 고통이 온전히
태자 책봉 대전은 추분으로 낙점되었다. 조정을 가득 메운 백관의 하례 속에,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고작 세 살밖에 안 된 소윤성은 황색 태자복을 입은 채 소무경의 손을 잡고 태화전 앞의 한백옥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아이는 아직 어린 태가 완연했으나 걸음걸이만큼은 지독히도 올곧았다. 그 미간에 서린 침착함은 도저히 그 나이대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소무경은 아들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서하연을 떠올렸다. 아이의 서늘한 눈매가 그녀를 쏙 빼닮아 있었다. 대전이 막을 내린 후, 성대한 궁연이 이어졌다. 화려한 가무가 흐르고 술잔이 바쁘게 오갔다. 소무경은 어좌에 우두커니 앉아 눈앞의 번화한 풍경을 응시했으나, 정작 내면은 지독한 공허함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문득 지난해 이맘때가 떠올랐다.그때만 해도 서하연은 후궁들의 가장 높은 상석에 앉아, 조용히 춤을 감상하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 시절의 그는 그녀에게 단 한 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야 사무치게 보고 싶어 손을 뻗었으나, 정작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태자 책봉식이 끝난 지 사흘 뒤.마침내 서하연의 서찰이 궁으로 흘러들었다. 서찰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신첩 서씨, 폐하를 뵙기를 청하나이다.] 서찰이 당도한 지 채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양심전의 주인이 직접 움직였다. 아랫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소무경이 손수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었다. 그는 몸을 비틀거리며 서가의 정청으로 뛰어들어 왔다.그러다 그곳에 소복 차림으로 서서 자신을 고요하게 응시하는 서하연을 발견한 순간, 소무경은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지독한 악몽에서 겨우 깨어난 것인지도 몰랐다.“하... 하연아.”소무경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왔다.“정녕 너란 말이냐?”서하연은 소리 없이 무릎을 굽히며 법도에 맞추어 절을 올렸다. “신첩, 폐하를 뵙나이다.” 소무경은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었지만 감히
“그리곤?”“그리곤 윤성이를 정당한 태자의 자리에 올릴 것입니다.” 서하연은 아버지를 곧게 응시했다. “아버지, 이 강산은 장차 제 아들의 것이자, 우리 서가의 것입니다. 제가 황제라는 자리를 다투지 않는다면 설마 저 유가의 잔당들에게 내어주란 말씀입니까? 장차 새로이 조정을 채울 후궁들에게 순순히 양보하란 말입니까?”서기백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버지께서 제가 정말 생각을 끝낸 것이냐고 물으셨지요.”서하연의 목소리는 지독하리치만큼 덤덤했다. “아주 잘 생각했습니다. 한 걸음 물러서면 낭떠러지일 뿐입니다. 하지만 한 걸음 나아간다면, 사지 속에서도 기어이 살길을 쥐어짤 수 있겠지요.”“그 살길이, 궁 안에 있다는 것이냐?”“제 살길은 제 손안에 있습니다.” 서하연은 미소를 지었다.“궁 안이든 궁 밖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윤성이가 있고 서가가 건재하는 한, 저는 어디서든 악착같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녀는 아버지 앞으로 걸어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투박한 서기백의 손을 따스하게 맞잡았다. “아버지, 저를 걱정하시는 마음은 잘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저를 믿어주십시오. 두 번 다시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서기백은 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차가운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 서슬 퍼런 안광에 서기백은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다.”그가 딸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이 애비가 네 칼이 되어주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서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낡은 《전국책》 한 권을 소리 없이 꺼내 들었다. “아버지, 이제 우리는 세 가지 일을 행해야 합니다.” “말해보거라.” “첫째, 황후가 폐위되어 조정이 뒤숭숭한 틈을 타 유가의 세력을 철저히 청산해야 합니다. 무관 쪽은 아버지가 직접 나서기 곤란하시겠지만, 문관 쪽은 탄핵할 자는 탄핵하고 권력을 박탈하여, 단 한 명도 조정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서기백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일은 이미
출궁을 앞두고, 소무경은 장신궁을 찾았다. 마당에서 볕을 쬐고 있던 서하연은 그의 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법을 갖추었다. “짐은 서산에 사흘간 머물 것이다. 너는... 몸을 잘 추스르고 있거라.” 서하연의 여전히 붉게 부어오른 뺨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무슨 말인가를 덧붙이려던 소무경은 끝내 입술을 다물며 말을 삼켰다. “신첩, 폐하를 배웅하옵니다.” 소무경은 한동안 미동도 없이 서 있더니 소매 안에서 자그마한 백자 병 하나를 꺼내 놓았다. “어혈을 가라앉히는 고약이다. 바르거라.”서하연은 그
그날 밤 소무경이 처소로 찾아온 것은 자시(子時)가 가까워진 무렵이었다.이제 막 자리에 들려던 서하연은 전갈을 듣고 서둘러 겉옷을 걸쳤다. 지밀시녀인 청아가 머리를 얹어주려 서두르자, 서하연은 가만히 손을 내저었다.“괜찮다.”매서운 밤바람을 날것으로 품고 들어선 소무경은, 속적삼 차림에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서하연을 보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폐하를 뵙옵니다.”서하연이 고개를 숙이며 엎드려 예를 갖추었다.“일어나거라.”소무경은 탁상 옆에 가 앉으며 스스로 찻잔을 채웠다.“황후가 공주의 이름을 정했다. 하은이라 하기로
“이곳에서 무슨 소란이냐?”공기를 찢는 묵직한 호통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소무경은 어느새 궁문 앞에 서 있었다. 조회를 방금 마친 듯, 조복조차 갈아입지 못한 차림새였다.그의 시선이 얼음장 같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뺨이 붉게 부어오른 서하연에게 머물렀다. 이어 잔뜩 독기를 품은 유해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소무경의 미간이 깊게 비틀렸다.유해원은 소무경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낯빛을 바꾸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기다렸다는 듯 억울한 척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폐하, 숙비의 오만방자함을 좀 보시옵소서! 신첩이 그저 약간
이튿날, 동틀 녘의 푸르스름한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이었다. 봉의궁의 상궁이 예고도 없이 서하연의 처소로 들이닥쳤다.어젯밤 폐하가 숙비의 처소를 나서실 때 기색이 몹시 좋지 않으셨으니, 이는 필시 숙비가 시중을 제대로 들지 못해 폐하의 성심을 어지럽혔음이 자명하니 황후가 친히 황실의 규율을 가르치겠다는 전갈이었다.길에는 밤새 내린 눈이 얄팍하게 깔려 있었고, 벼려진 칼날 같은 아침 삭풍이 살을 감쌌다.서하연이 봉의궁 전각 앞 광장에 다다랐을 때, 황후 유해원은 여우 털 가죽옷을 걸치고 화로를 품에 안은 채 회랑 아래 안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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