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
가을 초입의 서늘한 바람이 마을 어귀의 커다란 당산나무를 흔들었다. 여름 내내 귀를 찢던 매미 소리는 한풀 꺾였고, 바람에 마른 잎 몇 장이 느릿하게 길바닥을 굴렀다.
우식은 1톤 포터 운전석에 기대앉아 시동을 껐다. 굵은 힘줄이 도드라진 팔뚝이 핸들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 짙은 눈썹 아래로 길게 찢어진 눈이 차창 밖을 향했다. 마을 정류장 옆, 오래 비어 있던 작은 가게 터였다. “우식아! 야, 소우식!” 낡은 스쿠터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포터 옆에 멈췄다. 춘식이 헬멧을 벗어 팔에 끼고 다가왔다. “너 아침부터 목장에 안 있고 여기서 뭐 하냐? 아따, 오늘 물건 들어오는 날이라 정신없어 죽겄는디. 노향이가 우체국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니 봤다고 해서 와봤더니만.” 우식은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응.” “응은 무슨 응이여. 하여간 니는 입에 거미줄 쳐도 모르겄다. 야, 너 소식 들었냐?” 춘식이 트럭 문에 팔을 걸쳤다. “저 언덕배기 큰 전원주택 있잖여. 몇 년째 비어 있던 데. 오늘 사람 들어온단다. 시내에다 큰 바 차린다던디, 벌써 업자들이 들락날락하고 난리여.” 우식의 눈썹 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춘식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너 기억 안 나냐? 옛날에 우리 열다섯 때. 그 하얀 머리—” “됐어.” 낮고 짧은 목소리였다. 춘식이 입을 다물었다가 혀를 찼다. “에라, 곰 같은 놈. 말을 말어야지.” 스쿠터가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졌다. 우식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트럭에서 내렸다. 긴 그림자가 길바닥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짐칸에서 빈 상자를 하나 내려놓다 문득 아침의 어머니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이고, 허리야. 우식은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마을 약국에 들러 파스 몇 팩을 샀다. 약사가 이런저런 말을 붙였지만 그는 돈만 건네고 봉지를 받아 나왔다. 집에 가서 식탁 위에 올려두면 그만이었다. 그때였다. 바람 사이로 낯선 향이 스쳤다. 풀냄새와 흙냄새 사이에 섞일 수 없는, 짙고 달큰한 장미 향. 우식의 발이 멈췄다. 정류장 앞에 붉은색 외제차가 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뾰족한 검은 힐이 먼저 땅을 밟았다. 그 뒤로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오는 짧은 검은 원피스와 유난히 흰 다리가 드러났다. 여자는 차 문에 기대 담배를 꺼냈다. 찰칵. 라이터 불꽃이 번지고, 하얀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지는 긴 흰 머리카락. 하얀 눈썹 아래 둥글고 큰 눈. 왼쪽은 황금빛. 오른쪽은 에메랄드빛. 우식의 시선이 멎었다. 오햇살이었다. 열일곱 해 전, 들판을 뛰어다니며 혼자서도 시끄럽게 웃던 아이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달랐다. 눈 밑에는 지워지지 않는 피로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고, 입가에 걸린 웃음은 지나치게 가벼웠다. 햇살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맞았다. 잠깐의 정적 끝에 햇살의 붉은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뭐야.” 공허하면서도 어딘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 “남의 얼굴에 구멍 나겠다, 우식아.” 우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바라봤다. 햇살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배꽁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구두 앞코로 비벼 껐다. “왜. 이런 꼴로 돌아오니까 적응 안 돼?” 그녀가 웃었다. “나 시내에 바 열 거야. 술 먹으러 오든가.” 우식은 손에 든 약국 봉지를 쥔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그림자가 가까워지자 햇살이 턱을 조금 들었다. 우식은 그녀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햇살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그러나 우식의 손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흰 머리 위에 내려앉은 마른 잎 하나를 집어내 바닥에 버렸을 뿐이었다. “응.” 그 한마디를 남긴 우식은 그대로 햇살을 지나쳤다. 햇살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저만치 멀어지는 넓은 등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 향수 냄새도, 담배 연기도 아닌 익숙한 흙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에 남았다. 불쌍하다고 묻지도 않았다. 어디서 뭘 하다 왔냐고 캐묻지도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가을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한 번 더 훑고 지나갔다.몇 달이 흘렀다. 늦은 아침,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거실 바닥을 길게 덮고 있었다. 진성은 소파에 앉아 셔츠 소매를 걷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일한 탓에 눈가에는 아직 피곤이 남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반쯤 마신 커피와 담배갑이 놓여 있었다.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 진성이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맨발로 서 있었다. 평소라면 나오자마자 뭐라도 한마디 붙였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한 손은 등 뒤에 숨겨져 있었다. “왜.” “이거 봐.” 햇살이 손을 내밀었다. 작은 임신 테스트기였다. 진성의 시선이 그 위에 멈췄다. 두 줄.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햇살은 오히려 눈을 반짝였다. “우리 아이 생겼대.” 진성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햇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 “싫어?” 그제야 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햇살 앞까지 다가온 진성이 테스트기를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확실해?” “두 번 했어.” 햇살이 등 뒤에서 하나를 더 꺼냈다. “이것도 두 줄.” 진성의 입술 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햇살은 그 표정을 보자마자 웃었다. “좋지?” “응.” “그럼 좀 웃어봐.” 진성은 말없이 햇살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햇살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 답답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 두 팔은 허리를 감쌌다. 진성의 손이 햇살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병원 가자.” “오늘?” “응.” “출근은?” “안 가.” 햇살이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오빠는 가야지.” “너랑 병원 가.” “과보호 시작했네.” 진성은 대답 대신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햇살은 기분 좋은 듯 웃다가 테이블 위 담배갑을 발견했다. 곧장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거.” 진성이 눈을 내렸다. “뭐.” “이제 밖에서 펴.” “알아.” “집에서는 절대 안 돼.” “응.” 햇살은 자기 담배갑도 화장대 위에서 가져왔다
분장실 안은 잠시 조용했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방에 들어갔다. 햇살은 흐트러진 머리를 빗어 내리다 손목을 한번 내려다봤다. 아까 진성이 잡았던 자리였다. 자국이 남을 만큼 세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진성이 들어왔다. 한 손에는 검은 보온 가방이 들려 있었다. “뭐야.” “밥.” 진성이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도시락통 두 개가 나왔다. 계란말이와 볶은 김치, 장조림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햇살이 눈을 깜빡였다. “이거 오빠가 했어?” “아니.” “그럴 줄 알았어.” “아침에 샀어.” 햇살은 피식 웃었다. “근데 왜 이제 줘.” “먹을 시간 없었잖아.” 진성은 도시락을 햇살 쪽으로 밀었다. “먹어.” 햇살은 젓가락을 들었다가 멈췄다. 진성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오빠는?” “됐어.” “같이 먹자. 오빠도 안 먹었잖아.” “안 배고파.” 햇살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화났어?” 대답이 없었다. 햇살은 몸을 돌려 진성을 올려다봤다. “나한테?” “아니.” “거짓말.”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그럼 아까 왜 그렇게 잡았는데.” 진성의 눈이 햇살 손목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벽에서 등을 뗐다. “미안해.” “보기 싫었어.” “뭐가.” “다.” 햇살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빠.” “알아. 네 일인 거.” “그것만?” “내가 선 넘은 것도.” 햇살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알면 됐어.” 그녀는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진성 입 앞으로 내밀었다. “먹어.” “너 먹어.” “입 벌려.” 진성이 가만히 쳐다봤다. “빨리.” 결국 입을 벌렸다. 햇살은 계란말이를 넣어주고 웃었다. “잘하네.” “애 취급하지 마.” “오빠가 맨날 나한테 하잖아.” 진성이 옆 의자를 끌어 앉았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복도에서는 음악이 웅웅 울렸고, 멀리서 장미가 누군가를 혼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햇살은 밥을
방 안에는 독한 양주 냄새와 짙은 향수가 뒤섞여 있었다. 햇살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잔에 얼음을 넣고 술을 따랐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처음부터 술보다 햇살을 더 오래 보고 있었다. “오늘도 예쁘네.” “오늘만요?” 햇살이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잔을 받았다. “말도 잘해.” “그래야 돈 벌죠.”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햇살이 고개를 조금 돌리는 순간 길게 늘어진 흰 머리카락이 어깨 뒤로 넘어갔다. 남자의 시선이 목덜미에 멈췄다. 옅게 남은 붉은 자국.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뭐야.” 햇살의 손이 잠깐 멈췄다. “뭐가요.” 남자가 손가락으로 자기 목을 가리켰다. “남자친구?” 햇살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었다. “아님 다른 손님?” 입가에 걸렸던 웃음이 아주 조금 굳었다. 남자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 몸을 기대왔다. “오늘 내가 덮어줘야겠네.” 햇살은 잔을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경쟁심 있어요?” “남자가 원래 그렇지.” “피곤하게 사시네.” 말은 능글맞았지만 햇살은 머리카락을 앞으로 끌어당겨 목을 가렸다. 남자는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문밖 복도. 진성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자리였다. 햇살이 들어간 방문. 장미가 전화를 끊으며 진성을 흘겨봤다. “또.” 진성이 고개를 돌렸다. “뭘요.” “눈.” “일하는 중입니다.” “문 뚫리겠다.” 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지. 가게에서는 선 지키라고.” “알아요.” “아는 놈 표정이 왜 저래.” 진성이 턱을 한번 문질렀다. 그때 닫힌 문 안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곧 남자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잠시 뒤, 침대가 움직이는 둔탁한 소리가 벽 너머로 희미하게 이어졌다. 진성의 턱이 굳었다. 장미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방 안에서는 햇살의 짧게 끊긴 숨소리와 남자의 거친 호흡이 간간이 새어나왔다. 진성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천천히 주먹으로 말렸
앨리의 네온사인이 막 켜질 무렵이었다. 검은 승용차가 건물 앞에 멈추고 햇살이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 평소보다 급하게 묶은 흰 머리가 어깨 아래로 흐트러져 있었고, 입술에는 대충 덧바른 붉은 립이 남아 있었다. 뒤이어 진성이 차에서 내렸다. 둘이 나란히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카운터에 서 있던 장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니들 빨리빨리 안 다녀?” 햇살이 걸음을 멈췄다. 장미의 시선이 햇살을 한번 훑고 곧바로 진성에게 꽂혔다. “햇살은 그렇다 치고, 계진성!” 진성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장미가 팔짱을 꼈다. “가드가 손님보다 늦게 출근해서 어쩌자는 거야?” 햇살이 슬쩍 손을 들었다. “언니, 그게—” “넌 입 다물어.” “왜 나만.” “너는 원래 제멋대로고.” “너무하시네.” 장미가 다시 진성을 노려봤다. “얘가 늦으면 니가 끌고라도 왔어야지.” 진성의 시선이 아주 잠깐 햇살에게 갔다. “못 끌고 왔습니다.” 분장실 앞에 모여 있던 미정과 수지가 동시에 입을 가렸다. 햇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성을 쳐다봤다. “야.” 장미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못 끌고 왔는데.” 진성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수상했다. 미정이 작게 중얼거렸다. “둘이 같이 사는 사람들 맞네.” 수지가 옆구리를 찔렀지만 이미 늦었다. 장미가 천천히 햇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햇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왜 그렇게 봐요.” “너 목.” 햇살의 손이 반사적으로 목덜미에 올라갔다. 진성이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아이고, 내가 미쳐.” 햇살이 얼른 머리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일단 출근은 했잖아요.” “한 시간 늦게!” “정확히는 오십이 분.” “오햇살.” “네.” 장미가 손가락으로 분장실을 가리켰다. “십 분 안에 준비해.” “네, 마담님.” 햇살은 냉큼 안으로 도망갔다. 문이 닫히자 직원들 웃음소리가 터졌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좁은 방 안을 요란하게 울렸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늦은 오후 볕이 흐트러진 이불 위에 길게 번졌다.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다시 침대로 끌려온 햇살의 흰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오빠, 하… 우리 출근….” 숨에 섞인 목소리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진성은 햇살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이마를 맞댔다. “알아.” “알면 좀….” “지금은 말고.” 짧게 떨어진 말에 햇살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려다 다시 숨을 삼켰다. 두 팔이 진성의 목을 더 깊게 감쌌다. 양다리도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진성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출근하자는 애가.” “누가 먼저 그랬는데.” “너.” “미쳤어?” 햇살이 그의 어깨를 툭 쳤지만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진성은 대답 대신 햇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어진 입맞춤은 길었고, 서로의 숨이 가까이 섞였다. 방 안에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이불이 움직이는 소리만 한동안 이어졌다. 얼마 뒤. 흐트러졌던 숨이 겨우 잦아들었다. 햇살은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진성의 품 안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얇은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린 채 그의 팔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진성이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찰칵. 라이터 불꽃이 잠깐 켜졌다. 햇살은 진성이 한 모금 빨기도 전에 담배를 뺏어 자기 입에 물었다. “야.” “한 모금만.” “네 거 있잖아.” “오빠 거가 맛있어.” 진성이 기가 막힌 듯 바라봤다. 햇살은 태연하게 연기를 내뿜었다. “왜.” “내놔.” “싫어.” 진성이 손을 뻗자 햇살은 담배를 든 손을 반대쪽으로 쭉 뻗으며 몸을 피했다. “못 뺏지?” “오햇살.” 낮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햇살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알았어.” 담배를 돌려주려다 다시 한 모금 빨았다. 진성이 한숨을 쉬었다. “너 진짜.” “좋아하잖아.” 이번에는 진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햇살은 그 침묵이 마음에
며칠 뒤, 아침부터 봄비가 한차례 지나갔다. 논두렁의 흙은 짙게 젖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어린 벼 냄새와 축축한 풀냄새가 마을 길을 따라 번졌다. 우식은 축사 일을 마치고 장화를 벗었다. 춘덕이 여물통을 살피다 말했다. “오늘 오후에는 비 더 온다드라.” 우식이 고개를 들었다. “응.” “사료 창고 문짝도 한번 봐라. 지난번 바람에 덜컹거리더만.” “응.” 춘덕은 아들을 한번 바라보다 더 말하지 않았다. 마당 쪽에서는 예주가 빨래를 걷고 있었다. “우식아! 시내 나갈 거면 두부 좀 사 와.” “응.” “그리고 또 그 언덕이나 쳐다보다 늦지 말고!” 우식의 손이 잠깐 멈췄다. 예주는 혀를 찼다. “내가 말을 말아야제.” 우식은 대꾸하지 않고 트럭 열쇠를 집었다. 시내로 가는 길목, 춘식이네 마트 앞에는 노향이 서 있었다. 손에는 작은 우편 봉투 몇 개가 들려 있었다. 춘식은 가게 밖까지 따라나와 우산 하나를 들이밀고 있었다. “노향아, 이거 가져가.” “나 우산 있어.” “니 거 살 부러졌잖여.” “쓸 만해.” “비 더 온다니께.” 노향이 한숨을 쉬었다. “너 요즘 왜 이렇게 참견이 많아.” 춘식이 목덜미를 긁었다. “좋아서 그러지.” 말이 떨어진 뒤 둘 다 멈췄다. 노향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춘식 역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알아챈 얼굴이었다. “뭐?” “아니, 그게.” 춘식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니가 좋다는 게 아니라, 챙기는 게 좋다고.” 노향이 피식 웃었다. “그게 더 이상해.” 그때 트럭이 앞에 멈췄다. 우식이 창문을 내렸다. “탈 거야?” 노향이 고개를 저었다. “우체국 금방이야.” 춘식은 괜히 우식에게 눈을 흘겼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우식은 무슨 말인지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앞을 봤다. 마트를 지나 언덕길로 접어드는 순간,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천천히 앞유리를 쓸었다. 그리고 우식의 시선이 자연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