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머문 소나무

햇살이 머문 소나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By:  서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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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향수와 담배 연기, 깊은 상처만을 안은 채 17년 만에 시골 고향으로 돌아온 햇살. 거친 유흥가를 전전하며 피폐해진 그녀 앞에, 변함없이 우직하게 자리를 지켜온 첫사랑 우식이 서 있다. 말 한마디 없이 묵직하게 곁을 지키는 우식의 온기 속에서 햇살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두 사람은 세상의 시선과 반대를 무릅쓴 채 마침내 서로의 손을 잡는다. 한 줄기 햇살처럼 찾아온 소소한 행복도 잠시, 단단해진 이들의 사랑 앞에 또다시 잔혹한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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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돌아온 바람, 그 길목에서

가을 초입의 서늘한 바람이 마을 어귀의 커다란 당산나무를 흔들었다. 여름 내내 귀를 찢던 매미 소리는 한풀 꺾였고, 바람에 마른 잎 몇 장이 느릿하게 길바닥을 굴렀다.

우식은 1톤 포터 운전석에 기대앉아 시동을 껐다.

굵은 힘줄이 도드라진 팔뚝이 핸들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 짙은 눈썹 아래로 길게 찢어진 눈이 차창 밖을 향했다.

마을 정류장 옆, 오래 비어 있던 작은 가게 터였다.

“우식아! 야, 소우식!”

낡은 스쿠터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포터 옆에 멈췄다.

춘식이 헬멧을 벗어 팔에 끼고 다가왔다.

“너 아침부터 목장에 안 있고 여기서 뭐 하냐? 아따, 오늘 물건 들어오는 날이라 정신없어 죽겄는디. 노향이가 우체국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니 봤다고 해서 와봤더니만.”

우식은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응.”

“응은 무슨 응이여. 하여간 니는 입에 거미줄 쳐도 모르겄다. 야, 너 소식 들었냐?”

춘식이 트럭 문에 팔을 걸쳤다.

“저 언덕배기 큰 전원주택 있잖여. 몇 년째 비어 있던 데. 오늘 사람 들어온단다. 시내에다 큰 바 차린다던디, 벌써 업자들이 들락날락하고 난리여.”

우식의 눈썹 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춘식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너 기억 안 나냐? 옛날에 우리 열다섯 때. 그 하얀 머리—”

“됐어.”

낮고 짧은 목소리였다.

춘식이 입을 다물었다가 혀를 찼다.

“에라, 곰 같은 놈. 말을 말어야지.”

스쿠터가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졌다.

우식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트럭에서 내렸다. 긴 그림자가 길바닥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짐칸에서 빈 상자를 하나 내려놓다 문득 아침의 어머니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이고, 허리야.

우식은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마을 약국에 들러 파스 몇 팩을 샀다. 약사가 이런저런 말을 붙였지만 그는 돈만 건네고 봉지를 받아 나왔다.

집에 가서 식탁 위에 올려두면 그만이었다.

그때였다.

바람 사이로 낯선 향이 스쳤다.

풀냄새와 흙냄새 사이에 섞일 수 없는, 짙고 달큰한 장미 향.

우식의 발이 멈췄다.

정류장 앞에 붉은색 외제차가 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뾰족한 검은 힐이 먼저 땅을 밟았다. 그 뒤로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오는 짧은 검은 원피스와 유난히 흰 다리가 드러났다.

여자는 차 문에 기대 담배를 꺼냈다.

찰칵.

라이터 불꽃이 번지고, 하얀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지는 긴 흰 머리카락.

하얀 눈썹 아래 둥글고 큰 눈.

왼쪽은 황금빛.

오른쪽은 에메랄드빛.

우식의 시선이 멎었다.

오햇살이었다.

열일곱 해 전, 들판을 뛰어다니며 혼자서도 시끄럽게 웃던 아이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달랐다.

눈 밑에는 지워지지 않는 피로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고, 입가에 걸린 웃음은 지나치게 가벼웠다.

햇살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맞았다.

잠깐의 정적 끝에 햇살의 붉은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뭐야.”

공허하면서도 어딘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

“남의 얼굴에 구멍 나겠다, 우식아.”

우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바라봤다.

햇살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배꽁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구두 앞코로 비벼 껐다.

“왜. 이런 꼴로 돌아오니까 적응 안 돼?”

그녀가 웃었다.

“나 시내에 바 열 거야. 술 먹으러 오든가.”

우식은 손에 든 약국 봉지를 쥔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그림자가 가까워지자 햇살이 턱을 조금 들었다.

우식은 그녀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햇살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그러나 우식의 손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흰 머리 위에 내려앉은 마른 잎 하나를 집어내 바닥에 버렸을 뿐이었다.

“응.”

그 한마디를 남긴 우식은 그대로 햇살을 지나쳤다.

햇살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저만치 멀어지는 넓은 등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

향수 냄새도, 담배 연기도 아닌 익숙한 흙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에 남았다.

불쌍하다고 묻지도 않았다.

어디서 뭘 하다 왔냐고 캐묻지도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가을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한 번 더 훑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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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돌아온 바람, 그 길목에서
가을 초입의 서늘한 바람이 마을 어귀의 커다란 당산나무를 흔들었다. 여름 내내 귀를 찢던 매미 소리는 한풀 꺾였고, 바람에 마른 잎 몇 장이 느릿하게 길바닥을 굴렀다. 우식은 1톤 포터 운전석에 기대앉아 시동을 껐다. 굵은 힘줄이 도드라진 팔뚝이 핸들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 짙은 눈썹 아래로 길게 찢어진 눈이 차창 밖을 향했다. 마을 정류장 옆, 오래 비어 있던 작은 가게 터였다. “우식아! 야, 소우식!” 낡은 스쿠터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포터 옆에 멈췄다. 춘식이 헬멧을 벗어 팔에 끼고 다가왔다. “너 아침부터 목장에 안 있고 여기서 뭐 하냐? 아따, 오늘 물건 들어오는 날이라 정신없어 죽겄는디. 노향이가 우체국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니 봤다고 해서 와봤더니만.” 우식은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응.” “응은 무슨 응이여. 하여간 니는 입에 거미줄 쳐도 모르겄다. 야, 너 소식 들었냐?” 춘식이 트럭 문에 팔을 걸쳤다. “저 언덕배기 큰 전원주택 있잖여. 몇 년째 비어 있던 데. 오늘 사람 들어온단다. 시내에다 큰 바 차린다던디, 벌써 업자들이 들락날락하고 난리여.” 우식의 눈썹 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춘식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너 기억 안 나냐? 옛날에 우리 열다섯 때. 그 하얀 머리—” “됐어.” 낮고 짧은 목소리였다. 춘식이 입을 다물었다가 혀를 찼다. “에라, 곰 같은 놈. 말을 말어야지.” 스쿠터가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졌다. 우식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트럭에서 내렸다. 긴 그림자가 길바닥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짐칸에서 빈 상자를 하나 내려놓다 문득 아침의 어머니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이고, 허리야. 우식은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마을 약국에 들러 파스 몇 팩을 샀다. 약사가 이런저런 말을 붙였지만 그는 돈만 건네고 봉지를 받아 나왔다. 집에 가서 식탁 위에 올려두면 그만이었다. 그때였다. 바람 사이로 낯선 향이 스쳤다. 풀냄새와 흙냄새 사이에 섞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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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마을회관 앞은 아침부터 부산했다. 처마 밑에 매달린 낡은 풍경이 바람에 가볍게 울렸고, 마당 한쪽에서는 막 걷어온 고추 냄새가 알싸하게 퍼졌다. 평소 같으면 마루에 둘러앉아 바둑을 두거나 고추 꼭지를 따던 어르신들이 오늘은 하나같이 계단 아래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 시선 끝에 햇살이 서 있었다. 회관 앞에는 붉은 시루떡을 담은 상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햇살은 배꼽이 살짝 드러나는 짧은 상의에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오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진한 향수 냄새가 흙냄새와 섞여 낯설게 퍼졌다. “어르신들, 안녕하세요. 저 햇살이에요. 이번에 다시 들어왔어요. 떡 좀 드세요.” 햇살은 아무렇지도 않게 떡 봉지를 하나씩 건넸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아이고, 햇살이라고? 빛나네 딸래미 맞제?” 한 할머니가 떡을 받아 들고 햇살을 위아래로 살폈다. “근디 옷을 워째 그라고 얇게 입고 댕긴다냐. 배때지 시리겄다.” 햇살이 입꼬리를 올렸다. “제 배인데요, 뭐. 많이 드세요.” 그 말에 몇몇 할머니가 피식 웃었다. 그때 회관 담벼락 쪽에서 침 뱉는 소리가 들렸다. 노진태였다. “야, 오햇살.” 건들거리며 다가온 진태가 대놓고 햇살을 훑었다. “서울 가서 아주 제대로 놀다 왔나 보다? 어르신들 눈 둘 데도 없게 차려입고.” 햇살의 표정이 식었다. “눈 있으면 알아서 둘 데 찾겠지.” “성질은 여전하네.” 진태가 비웃으며 한 걸음 붙었다. “서울에서 뭘 하고 살았길래 더 까칠해졌냐?” 손이 햇살의 어깨 쪽으로 올라왔다. 햇살은 피하지 않았다. 둥글고 큰 두 눈이 차갑게 진태를 올려다봤다. “손 치워, 진태야.” “이게 진짜.” 진태의 손이 이번에는 팔을 향했다. 탁. 짧은 소리와 함께 손목이 옆으로 튕겨나갔다. 햇살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들어섰다. 우식이었다. 진태가 손목을 움켜쥐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씨. 소우식. 넌 또 뭐야?” 우식은 대답하지 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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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시골 중학교의 봄은 흙먼지와 벚꽃잎이 뒤섞여 날렸다. 열린 교실 창문으로 아직 찬 기운이 남은 봄바람이 들어왔다. 우식은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운동장 어귀로 낯선 승용차 한 대가 들어왔다. 며칠 전부터 마을에서 가장 큰 전원주택에 누가 이사 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우식은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잠깐 바라보다 시선을 내렸다. “야야! 전학생 온단다! 서울에서!” 교실 문이 쾅 열렸다. 춘식이 뛰어 들어오자 뒤따라온 노향이 그의 뒤통수를 탁 쳤다. “아따, 시끄러워! 전학생 오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뛰어댕겨?” “너는 소문도 못 들었냐? 머리가 하얗고 눈 색깔도 다르다던디.” “사람 눈이 눈이지.” 아이들이 웅성거릴 때 담임이 들어왔다. 그 뒤로 작은 여자아이가 따라 들어섰다. 교실이 금세 조용해졌다. 햇빛을 받은 긴 머리카락이 눈이 시릴 만큼 희었다. 눈썹까지 새하얀 얼굴 한가운데 둥글고 큰 두 눈이 또렷했다. 왼쪽은 황금빛. 오른쪽은 에메랄드빛. 아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 누군가는 몸을 앞으로 숙였고, 누군가는 옆자리 친구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자아이는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활짝 웃었다. “안녕! 오햇살이야. 잘 부탁해.” 목소리가 이름처럼 환했다. 햇살의 시선이 교실 끝까지 흘러가다 창가 뒷자리에 멈췄다. 또래보다 훨씬 큰 몸집에 짙은 눈썹, 좀처럼 표정이 보이지 않는 얼굴. 우식과 눈이 마주쳤다. 햇살이 먼저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우식은 잠시 바라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쉬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햇살의 자리로 몰렸다. 그 틈을 비집고 노진태가 책상 앞에 섰다. “야, 전학생.” 진태가 햇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너 눈이 왜 그러냐? 머리는 또 뭐야. 귀신이냐?” 진태의 손가락이 하얀 머리칼 끝을 툭 건드렸다. 햇살의 웃음이 사라졌다. “손 치워.” “뭐?” “기분 나쁘니까 치우라고.” 햇살은 물러서지 않았다. 커다란 두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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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들꽃처럼 스며드는
작은 물컵 안에서 노란 들꽃 세 송이가 아침 햇살에 흔들렸다. 햇살은 한참 꽃을 들여다보다가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 맨 뒤에 앉은 우식은 턱을 괸 채 여전히 창밖만 보고 있었다. 햇살이 그의 책상 앞에 두 손을 짚었다. “우식아.” 대답은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구리빛 귀끝이 아주 조금 굳어 있었다. 햇살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었다. “너희 집 한우 농장 엄청 크다며? 나 놀러 가도 돼?” 우식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응.” “오늘 바로?” “응.” 햇살이 활짝 웃었다. 옆에서 훔쳐보던 춘식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들이밀었다. “야, 나도 갈래! 우식이네 소 진짜 많어. 근디 냄새가 아주 끝내준다.” “나는 왜 빼냐?” 노향도 끼어들었다. “둘만 가면 얘가 말을 안 해서 햇살이 숨 막혀 죽겄네.” 우식이 눈을 한번 느리게 감았다 떴다. 방과 후, 네 사람은 논길을 따라 농장으로 향했다. 낮은 산 아래 넓게 자리 잡은 축사 지붕이 멀리서부터 보였다. 가까워질수록 볏짚과 마른 풀 냄새가 짙어졌고, 안에서는 소 울음소리가 묵직하게 번졌다. 햇살은 입구에 서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축사 처마 밑에서는 참새 몇 마리가 짚 부스러기를 쪼고 있었고, 햇살은 처음 맡는 냄새조차 신기한지 연신 고개를 돌렸다. 우식은 그런 햇살보다 반걸음 뒤에서 조용히 걸었다. “와. 진짜 크다.” “그라제? 내가 뭐랬냐.” 춘식이 제가 주인이라도 된 양 어깨를 으쓱하자 노향이 바로 면박을 줬다. “니네 집도 아니잖아.” 그때 장화를 신은 춘덕이 축사 안에서 걸어 나왔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과 굵은 손마디가 우식과 닮아 있었다. “오메, 친구들 왔냐?” “안녕하세요!” 햇살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춘덕의 시선이 하얀 머리와 서로 다른 빛의 눈동자에 잠시 머물렀다가 금세 부드러워졌다. “니가 빛나 씨 딸래미구나. 햇살이라고 했제?” “네. 오햇살이에요.” “이름 한번 좋다. 들어와라.” 집 쪽에서도 문 여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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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따스한 온기가 가득한 집
며칠 뒤, 종례가 끝난 교실은 책상 끄는 소리와 아이들 떠드는 소리로 금세 어수선해졌다. 우식이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햇살이 기다렸다는 듯 앞을 막아섰다. “우식아. 오늘 시간 있지?” 우식이 가만히 내려다봤다. 햇살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활짝 웃었다. “우리 엄마가 너희들 놀러 오래. 피자랑 치킨이랑 케이크 해준대. 우리 엄마 그런 거 진짜 잘해.” 옆에서 가방 지퍼를 닫던 춘식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뭐여? 피자? 치킨?” “먹는 얘기만 나오면 귀가 열리냐?” 노향이 혀를 찼다. “아따, 시내까지 나가야 먹는 걸 집에서 맹근다고? 나 간다. 무조건 간다.” 햇살이 깔깔 웃다가 다시 우식을 봤다. “너도 갈 거지?” 그러고는 우식의 교복 소매 끝을 살짝 잡아당겼다. 우식의 시선이 그 손끝에 잠시 내려앉았다. “응.” “좋았어.” 햇살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놓고 앞장섰다. 방과 후, 네 사람은 언덕길을 따라 마을에서 가장 큰 전원주택으로 향했다. 넓은 대문을 지나 현관 옆에는 물감이 묻은 작은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고, 창가에는 말리는 중인지 꽃잎 몇 장이 종이 위에 펼쳐져 있었다. “엄마! 우리 왔어!” 문이 열리기도 전에 햇살의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그래, 어서 들어와.” 주방에서 흰 앞치마를 두른 빛나가 나왔다. 앞치마 한쪽에는 밀가루가 묻어 있었고 손등에는 마르다 만 파란 물감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빛나가 아이들을 차례로 바라보다 환하게 웃었다. “햇살이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춘식이, 노향이, 그리고 우식이 맞지?” “저를 아세요?” 춘식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빛나가 웃었다. “누가 제일 말이 많은지도 들었는데?” 노향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아줌마, 정확하게 들으셨어요.” “야!” 거실 안으로 들어서자 고소한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큰 식탁 위에는 치즈가 노릇하게 녹은 피자와 바삭하게 튀긴 닭, 잘라 놓은 과일이 놓여 있었다.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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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노을 끝에 머문 사람
토요일 오후, 햇살의 집 앞마당에는 빨래가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춘식은 평상에 엎드려 과자를 집어 먹었고, 노향은 빛나가 내준 매실차 잔에 얼음을 휘휘 저었다. 햇살은 마당 한쪽에 이젤을 세워놓고 우식의 얼굴을 그린다며 연필 끝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식아, 웃어봐.” 우식은 의자에 앉은 채 가만히 햇살을 봤다. “싫어.” “한 번만.” “싫어.” 춘식이 옆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야, 햇살아. 돌멩이한테 웃으라는 게 빠르겄다.” 노향의 손바닥이 춘식의 등을 철썩 때렸다. 그때였다. 언덕길 아래에서 묵직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햇살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검은 세단 한 대가 대문 앞에 천천히 멈췄다. “아빠다.” 연필이 이젤 위로 툭 떨어졌다. 햇살은 신발도 제대로 끌어 신지 않은 채 대문으로 뛰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검은 머리를 반듯하게 넘기고 있었다. 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팔에는 값비싼 시계가 채워져 있었고, 말끔한 차림과 달리 얼굴에는 긴 이동 끝의 피로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빠!” 태만의 표정이 금세 풀렸다. “천천히 와.” 햇살이 그대로 품에 안기자 태만은 한 손으로 딸의 등을 감싸 안았다. “오늘 안 온다며.” “시간 났어.” “나 보고 싶어서 왔지?” 잠깐의 침묵 뒤 태만이 웃었다. “응.” 햇살은 그 한마디면 됐다는 듯 활짝 웃었다. 현관에서 나오던 빛나도 걸음을 멈췄다. 태만의 시선이 곧장 빛나에게 닿았다. “왜 맨발이야.” 그 말에 빛나가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애들 차려주느라 정신없었네.” 태만은 차에서 작은 쇼핑백 하나를 꺼내 빛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야?” “신어.” 안에는 부드러운 실내화가 들어 있었다. 빛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걸 사려고 서울서 여기까지 왔어?” “그건 아니고.” “그럼?” 태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햇살이 옆에서 킥킥 웃었다. “엄마, 아빠 또 저런다.” 춘식이 우식 귀에 대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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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저녁밥이 식기 전에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기울 무렵, 빛나는 부엌에서 된장찌개 냄비를 올렸다. 보글보글 끓는 국물 냄새가 거실까지 퍼졌고, 햇살은 새로 받은 스케치북을 식탁 한쪽에 펼쳐놓은 채 연필로 우식의 얼굴을 고치고 있었다. “눈이 너무 무섭게 됐나?” 춘식이 옆에서 그림을 들여다보다 코웃음을 쳤다. “원래 무서워.” “아니거든?” 햇살이 바로 받아치자 노향이 피식 웃었다. 우식은 말없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림 속 자기 얼굴을 한번 보고 햇살을 한번 봤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현관 가까이에 놓인 태만의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햇살은 그걸 볼 때마다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오늘은 아빠가 저녁까지 먹고 간다. 빛나가 상을 차리며 물었다. “태만 씨, 밥 한 공기면 되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태만이 대답하려던 순간,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짧은 진동음이었다. 빛나의 손이 국자를 든 채 멈췄다. 태만은 화면을 보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통화하고 올게.” 마당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햇살이 따라봤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림을 다시 붙잡았다. 하지만 한참 뒤에도 태만은 들어오지 않았다. 찌개에서는 김이 줄었고, 갓 지은 밥에서는 윤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춘식이 배를 움켜쥐었다. “배고픈디.” “조금만 기다려.” 햇살이 대답했다. 빛나는 아무 말 없이 불을 가장 약하게 줄였다. 마당에서는 낮게 통화하는 태만의 목소리가 끊겼다 이어졌다. 우식의 시선이 햇살에게 머물렀다. 연필 끝이 같은 선을 몇 번이고 문지르고 있었다. 결국 현관문이 열렸다. 태만은 들어오자마자 재킷을 집어 들었다. 햇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미안하다.” 그 한마디에 햇살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 “밥 먹고 간다며.” 태만이 대답하지 못했다. 빛나는 식탁 끝을 손으로 짚었다. “급한 일이야?” “응.” “얼마나?” “오늘 안에는 들어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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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비 냄새가 머문 자리
다음 주 내내 비가 오락가락했다. 아침에는 해가 비치다가도 점심 무렵이면 먹구름이 산등성이를 덮었다. 논두렁 가장자리에는 빗물이 고였고, 젖은 흙냄새가 교실 열린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햇살은 창가에 턱을 괸 채 운동장을 바라봤다. 책상 옆에는 작은 우산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분홍색 바탕에 노란 꽃이 그려진 우산이었다. “너 그거 새로 샀냐?” 춘식이 우산을 집어 들려 하자 햇살이 냉큼 낚아챘다. “건들지 마.” “아따, 우산 가지고 뭘 그라고 애지중지한대.” 노향이 힐끗 보더니 웃었다. “누가 준 거구만.” 햇살의 눈이 슬쩍 맨 뒷자리로 갔다. 우식은 책을 펴놓고 있었다. 어제 방과 후였다.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졌고, 햇살은 처마 밑에서 비를 구경하며 서 있었다. “금방 그치겠지.” 그렇게 말하고 십 분을 기다렸는데도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그때 우식이 아무 말 없이 우산 하나를 내밀었다. “너는?” “있어.” 정작 우식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햇살이 눈을 가늘게 뜨자 우식은 교문 옆 자전거 보관대를 가리켰다. 거기엔 낡은 검은 우산 하나가 기대어 있었다. 그제야 햇살은 꽃무늬 우산을 받아 들었다. 오늘 아침 다시 돌려주려 했지만 우식은 받지 않았다. “놔둬.”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햇살은 우산 손잡이를 괜히 한번 쓰다듬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하나둘 교실을 빠져나갔다. 춘식과 노향은 마트에 들른다며 먼저 뛰어갔고, 햇살은 우산을 펴려다 복도 끝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엄마?” 빛나가 학교 현관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 몇 개를 들고 있었다. “비 오길래 데리러 왔지.” “나 우산 있는데.” “그러네.” 빛나의 시선이 꽃무늬 우산에 닿았다. 햇살이 먼저 말했다. “우식이가 줬어.” 빛나가 아주 작게 웃었다. “그랬구나.” 현관을 나서려던 순간, 우식이 뒤에서 걸어왔다. 빛나는 그를 보자 종이봉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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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논길에 번진 웃음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친 아침, 마을은 온통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논두렁 풀잎마다 빗방울이 매달렸고, 학교 운동장 끝 웅덩이에는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햇살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자기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종이봉투를 발견했다. 안에는 어제 엄마가 구운 쿠키 두 개가 들어 있었다. 햇살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맨 뒷자리를 돌아봤다. 우식은 책상에 엎드려 팔을 베고 있었다. “우식아.” 눈만 들렸다. 햇살이 쿠키를 하나 꺼내 흔들었다. “이거 우리 엄마가 만든 건데?” “응.” “근데 왜 나한테 줘?” “먹어.” 햇살이 잠깐 멈췄다가 웃었다. “너 진짜 이상해.” 우식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춘식이 교실로 들어오다 봉투를 발견했다. “뭐여? 쿠키 남았어?” 손이 뻗는 순간 햇살이 봉투를 품에 끌어안았다. “안 돼. 내 거야.” “니네 엄마가 만든 거잖여!” “그래도 내 거.” 노향이 뒤에서 혀를 찼다. “아침부터 먹을 걸로 싸우냐, 둘이.” 햇살은 쿠키를 반으로 쪼개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바삭한 소리와 함께 버터 향이 퍼졌다. 나머지 절반은 잠깐 들여다보다가 우식 책상 위에 툭 올려놨다. “같이 먹어.” 우식이 눈을 떴다. 햇살은 이미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점심 무렵부터 햇빛이 완전히 들었다. 젖어 있던 운동장 흙은 군데군데 색이 옅어졌고, 아이들은 체육 시간이 끝나자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며 교실로 돌아왔다. 햇살은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신발 밑창을 털다가 그대로 미끄러졌다. “어?” 몸이 뒤로 기울기 전에 팔목이 잡혔다. 우식이었다. 햇살은 한쪽 발을 들고 휘청거리다 그의 팔을 붙잡았다. “와, 큰일 날 뻔했다.” 우식은 햇살이 제대로 선 걸 확인한 뒤 손을 놓았다. “조심해.” 햇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방금 두 글자 넘게 말했다.” 우식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멀찍이 있던 춘식이 배를 잡고 웃었다. “야! 오늘 경사 났다! 소우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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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작은 숨결 곁에 핀 꽃
주말 아침, 밤새 내려앉았던 이슬이 논둑 풀잎마다 맺혀 있었다. 햇살은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우식과 나란히 농장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 예주에게서 새끼 송아지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아침부터 마음이 들떠 있었다. “진짜 조그매?” “응.” “일어났어?” “응.” “걸어?” 우식이 잠깐 햇살을 봤다. “조금.” 그제야 햇살이 만족한 듯 웃었다. 비가 그친 뒤라 논길에서는 젖은 흙냄새가 짙게 올라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벼 잎이 한쪽으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고, 돌담 아래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색색으로 피어 있었다. 햇살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우식아, 잠깐.” 길가에 쪼그려 앉은 햇살이 노란 꽃 하나를 조심스럽게 꺾었다. 그 옆의 보랏빛 꽃도, 하얗고 작은 꽃도 한 송이씩 모았다. 우식은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이거 봐. 예쁘지?” “응.” 햇살은 꽃대를 길이별로 맞추더니 가방에서 머리끈 하나를 꺼냈다. 몇 번이고 묶었다 풀기를 반복하자 작고 투박한 꽃다발 하나가 만들어졌다. “송아지 처음 보러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잖아.” 우식의 시선이 꽃다발로 내려갔다. “먹이면 안 돼.” “안 먹여. 보여만 줄 거야.” “응.” 햇살은 꽃다발을 가슴 앞에 들고 다시 걸었다. 농장에 가까워질수록 마른 볏짚 냄새와 구수한 여물 냄새가 바람을 타고 섞여왔다. 축사 쪽에서는 낮고 묵직한 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왔냐?” 춘덕이 장화를 신고 축사 문 앞에서 나왔다. 햇살은 고개부터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송아지 보러 왔어요.” “허허, 소문 한번 빠르다. 예주가 벌써 말했냐?” “네.” 햇살이 꽃다발을 들어 보였다. “얘한테 줄 것도 가져왔어요.” 춘덕이 꽃을 보고 웃었다. “아이고, 송아지가 사람보다 호강하겄네. 근디 먹이지는 말어라.” 햇살이 우식을 힐끗 봤다. “똑같은 말 하시네.” 집 쪽에서 예주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햇살이 왔냐? 송아지 보기 전에 뭐라도 좀 먹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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