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짙은 향수와 담배 연기, 깊은 상처만을 안은 채 17년 만에 시골 고향으로 돌아온 햇살. 거친 유흥가를 전전하며 피폐해진 그녀 앞에, 변함없이 우직하게 자리를 지켜온 첫사랑 우식이 서 있다. 말 한마디 없이 묵직하게 곁을 지키는 우식의 온기 속에서 햇살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두 사람은 세상의 시선과 반대를 무릅쓴 채 마침내 서로의 손을 잡는다. 한 줄기 햇살처럼 찾아온 소소한 행복도 잠시, 단단해진 이들의 사랑 앞에 또다시 잔혹한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는데…….
View More가을 초입의 서늘한 바람이 마을 어귀의 커다란 당산나무를 흔들었다. 여름 내내 귀를 찢던 매미 소리는 한풀 꺾였고, 바람에 마른 잎 몇 장이 느릿하게 길바닥을 굴렀다.
우식은 1톤 포터 운전석에 기대앉아 시동을 껐다. 굵은 힘줄이 도드라진 팔뚝이 핸들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 짙은 눈썹 아래로 길게 찢어진 눈이 차창 밖을 향했다. 마을 정류장 옆, 오래 비어 있던 작은 가게 터였다. “우식아! 야, 소우식!” 낡은 스쿠터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포터 옆에 멈췄다. 춘식이 헬멧을 벗어 팔에 끼고 다가왔다. “너 아침부터 목장에 안 있고 여기서 뭐 하냐? 아따, 오늘 물건 들어오는 날이라 정신없어 죽겄는디. 노향이가 우체국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니 봤다고 해서 와봤더니만.” 우식은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응.” “응은 무슨 응이여. 하여간 니는 입에 거미줄 쳐도 모르겄다. 야, 너 소식 들었냐?” 춘식이 트럭 문에 팔을 걸쳤다. “저 언덕배기 큰 전원주택 있잖여. 몇 년째 비어 있던 데. 오늘 사람 들어온단다. 시내에다 큰 바 차린다던디, 벌써 업자들이 들락날락하고 난리여.” 우식의 눈썹 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춘식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너 기억 안 나냐? 옛날에 우리 열다섯 때. 그 하얀 머리—” “됐어.” 낮고 짧은 목소리였다. 춘식이 입을 다물었다가 혀를 찼다. “에라, 곰 같은 놈. 말을 말어야지.” 스쿠터가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졌다. 우식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트럭에서 내렸다. 긴 그림자가 길바닥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짐칸에서 빈 상자를 하나 내려놓다 문득 아침의 어머니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이고, 허리야. 우식은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마을 약국에 들러 파스 몇 팩을 샀다. 약사가 이런저런 말을 붙였지만 그는 돈만 건네고 봉지를 받아 나왔다. 집에 가서 식탁 위에 올려두면 그만이었다. 그때였다. 바람 사이로 낯선 향이 스쳤다. 풀냄새와 흙냄새 사이에 섞일 수 없는, 짙고 달큰한 장미 향. 우식의 발이 멈췄다. 정류장 앞에 붉은색 외제차가 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뾰족한 검은 힐이 먼저 땅을 밟았다. 그 뒤로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오는 짧은 검은 원피스와 유난히 흰 다리가 드러났다. 여자는 차 문에 기대 담배를 꺼냈다. 찰칵. 라이터 불꽃이 번지고, 하얀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지는 긴 흰 머리카락. 하얀 눈썹 아래 둥글고 큰 눈. 왼쪽은 황금빛. 오른쪽은 에메랄드빛. 우식의 시선이 멎었다. 오햇살이었다. 열일곱 해 전, 들판을 뛰어다니며 혼자서도 시끄럽게 웃던 아이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달랐다. 눈 밑에는 지워지지 않는 피로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고, 입가에 걸린 웃음은 지나치게 가벼웠다. 햇살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맞았다. 잠깐의 정적 끝에 햇살의 붉은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뭐야.” 공허하면서도 어딘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 “남의 얼굴에 구멍 나겠다, 우식아.” 우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바라봤다. 햇살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배꽁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구두 앞코로 비벼 껐다. “왜. 이런 꼴로 돌아오니까 적응 안 돼?” 그녀가 웃었다. “나 시내에 바 열 거야. 술 먹으러 오든가.” 우식은 손에 든 약국 봉지를 쥔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그림자가 가까워지자 햇살이 턱을 조금 들었다. 우식은 그녀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햇살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그러나 우식의 손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흰 머리 위에 내려앉은 마른 잎 하나를 집어내 바닥에 버렸을 뿐이었다. “응.” 그 한마디를 남긴 우식은 그대로 햇살을 지나쳤다. 햇살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저만치 멀어지는 넓은 등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 향수 냄새도, 담배 연기도 아닌 익숙한 흙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에 남았다. 불쌍하다고 묻지도 않았다. 어디서 뭘 하다 왔냐고 캐묻지도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가을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한 번 더 훑고 지나갔다.초여름 저녁, 시내 강변에서 작은 축제가 열렸다. 학교가 끝나자 네 사람은 곧장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정류장에 내리기도 전부터 음악 소리가 들렸고, 강변 길에는 어묵과 호떡, 솜사탕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춘식은 가장 먼저 포장마차로 달려갔다. “야, 저거 먹자!” 노향이 한숨을 쉬었다. “버스 타기 전에 핫도그 먹었잖아.” “그건 간식이고.” “저것도 간식이야.” 햇살은 웃으며 둘 사이를 지나갔다. 우식은 늘 그렇듯 조금 뒤에서 따라왔다. 강변 난간에는 색색의 전구가 길게 매달려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자 불빛이 하나씩 켜졌다. 햇살은 난간에 팔을 올리고 강 건너를 바라봤다. “예쁘다.” 우식이 옆에 섰다. “응.” “서울에도 이런 건 많은데.” “응.” “근데 여기가 더 좋아.” 우식이 햇살을 봤다. “왜.” “조용하잖아.” 햇살이 웃었다. “너처럼.” 그때 강 건너에서 폭죽 하나가 올라갔다. 펑. 햇살이 놀라 우식 쪽으로 한 걸음 붙었다. 팔이 닿았다. 우식은 움직이지 않았다. “안 놀랐어?” “응.” “나는 조금 놀랐는데.” “알아.” “어떻게 알아?” “봤어.” 햇살이 피식 웃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노향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우식이 햇살을 보는 눈은 늘 조금 달랐다. 말은 똑같이 짧았고 표정도 거의 없었지만, 햇살이 움직이면 시선이 따라갔다. 햇살이 웃으면 아주 잠깐 입술 끝이 풀렸다. 예전부터 보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가슴이 조금 아팠다. “야.” 춘식이 옆에서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어묵 국물.” “네가 웬일로 남 걸 챙겨.” “두 개 받았어.” 노향은 컵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김이 얼굴 가까이 올라왔다. “고마워.” 춘식이 괜히 앞만 봤다. “별걸 가지고.” 한참 뒤 네 사람은 다리 위로 올라갔다. 난간에는 자물쇠가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햇살이 하나를 들어봤다. “이건 왜 달아놨어?” 춘식이
봄비는 예고 없이 내렸다. 마지막 수업이 끝날 무렵 운동장 흙이 검게 젖었고, 처마 끝에서는 빗물이 줄처럼 떨어졌다. 춘식이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산 없는데.” 노향이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마트 앞까지만 같이 써.” 춘식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역시 진노향밖에—” “붙지 마. 좁아.” 둘이 먼저 복도로 나갔다. 햇살도 가방에서 노란 꽃무늬 우산을 꺼냈다. 몇 년 전 우식이 건네줬던 우산이었다. 맨 뒷자리 우식은 빈손이었다. 햇살이 물었다. “우산은?” “안 가져왔어.” “같이 가.” 우식은 작은 우산을 한번 봤다. “좁아.” “내가 작은데 뭐.” “내가 커.” 햇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비 맞고 가든가.” 우식은 잠깐 생각하더니 우산 손잡이를 받아 들었다. 둘이 현관 밖으로 나가자 바로 문제가 생겼다. 우식이 우산을 들면 햇살 쪽은 넉넉했지만 그의 오른쪽 어깨가 그대로 비에 젖었다. 햇살이 손잡이를 밀었다. “너 젖어.” 우식은 다시 햇살 쪽으로 기울였다. “괜찮아.” “안 괜찮아.” “난 괜찮아.” “나는 안 괜찮다고.” 햇살이 우식 쪽으로 바짝 붙었다. 어깨가 살짝 맞닿았다. 우식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빗소리가 우산 위로 촘촘히 떨어졌다. 햇살도 뒤늦게 가까워진 거리를 알아챘다. 고개를 들자 우식의 턱선이 바로 옆에 보였다. 괜히 앞만 봤다. “우식아.” “응.” “너 여자애랑 우산 같이 써본 적 있어?” “없어.” “내가 처음이네?” “응.” 햇살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나도.” “뭐가.” “남자애랑 같이 쓰는 거.” 우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우산 손잡이를 쥔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논길에는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생겨 있었다. 햇살이 큰 웅덩이를 피해 우식 쪽으로 붙을 때마다 팔이 스쳤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거리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마을 갈림길에 다다르자 햇살의 집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열여섯이 된 햇살은 교문 앞 벚나무 아래에서 우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보다 조금 길어진 교복 치맛자락 아래로 운동화 끝이 까딱거렸다. 멀리서 우식이 걸어오자 햇살이 손을 흔들었다. “소우식!” 우식은 뛰지 않았다. 평소처럼 천천히 다가왔다. “왜 먼저 왔어.” “오늘 미술실 일찍 가려고.” 햇살은 가방 지퍼를 열어 안쪽을 보여줬다. 필통 옆에는 나무 들꽃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우식의 시선이 멈췄다. “아직 가지고 다녀?” “응.” “왜.” 햇살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네가 줬잖아.” 그게 이유의 전부라는 얼굴이었다. 우식은 더 묻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가자 춘식과 노향이 창문 쪽에서 또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춘식은 새로 자른 머리를 자랑했고, 노향은 군밤장수 같다고 놀렸다. 햇살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너희는 한 살 더 먹어도 똑같다.” 노향이 코웃음을 쳤다. “너희 둘도 그렇거든.” “우린 왜?” 햇살이 묻자 노향은 대답 대신 우식 쪽을 한번 봤다. 우식은 아무것도 모른 채 책을 꺼내고 있었다. 방과 후 네 사람은 지난해와 같은 논길을 걸었다. 돌담 아래에는 노란 들꽃이 다시 피어 있었다. 햇살이 걸음을 멈췄다. “얘네 또 왔다.” 쪼그려 앉아 한참 들여다보던 손이 꽃대로 향했다가 멈췄다. 우식이 물었다. “안 꺾어?” “응.” “왜.” “두고 볼래.” 햇살은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꺾으면 금방 시들잖아.” 우식의 시선이 가방으로 내려갔다. 안에는 시들지 않는 꽃이 있었다. 햇살도 그걸 알아챘는지 웃었다. “나는 이미 하나 있잖아.” 춘식이 앞에서 소리쳤다. “빨리 와! 배고파 죽겄어!” 노향이 바로 받아쳤다. “넌 하루 종일 배고프냐?” 네 사람은 우식네 농장으로 향했다. 예주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딸기를 씻어 내왔다. “올해 첫 딸기여. 먹어봐.” 햇살은 제일 작은 것을 집었다. 우식이 큰 딸기 하나를 햇살 접
겨울이 시작되던 아침, 운동장 위로 첫눈이 내렸다. 수업 종이 울리기 전부터 아이들은 창가에 붙어 있었다. 춘식이 가장 먼저 창문을 열었다. “야! 진짜 온다!” 노향이 바로 창문을 닫았다. “추워. 닫아.” 햇살은 창밖을 보며 손바닥을 유리창에 댔다. 하얀 눈이 흙빛 운동장 위에 하나씩 내려앉았다가 금세 녹았다. “우식아.” 맨 뒷자리에서 책을 펴던 우식이 고개를 들었다. “응.” “눈 쌓이면 눈사람 만들자.” “응.” “진짜?” “응.” 춘식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나는 눈싸움.” 노향이 코웃음을 쳤다. “너는 맨날 싸울 생각뿐이냐.” 점심 무렵부터 눈발이 굵어졌다. 수업이 끝났을 때 운동장 한쪽에는 얇게 흰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네 사람은 가방을 교실에 던져두고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춘식은 시작부터 눈을 뭉쳐 노향에게 던졌다. “야!” 노향이 곧장 더 큰 눈덩이를 만들어 쫓아갔다. 햇살은 웃으며 눈을 모았다. “우식아, 이거 굴려.” 작은 눈덩이를 건네자 우식은 말없이 운동장 바닥을 굴렸다. 몇 번 지나지 않아 햇살 허리만 한 눈덩이가 됐다. “너무 큰데?” “네가 하랬잖아.” 햇살이 배를 잡고 웃었다. 둘은 한참을 낑낑대 눈사람을 세웠다. 햇살은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팔을 만들고, 작은 돌멩이로 눈과 입을 붙였다. 마지막에는 자기 목도리를 풀어 눈사람 목에 둘렀다. 우식이 봤다. “추워.” “얘가 더 추워 보여.” “눈인데.” “그래도.” 우식은 잠시 햇살을 바라보다 자기 목도리를 풀어 햇살 목에 둘렀다. 햇살의 입이 멈췄다. “너는?” “안 추워.” “거짓말.” “괜찮아.” 검은 목도리에서는 볏짚과 비누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햇살은 괜히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내일 돌려줄게.” “응.” 그날 집에 돌아왔을 때 전화가 울렸다. 태만이었다. 이번 주에 내려오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햇살은 수화기를 빛나에게 건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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