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괜찮지. 걱정해 줘서 고마워, 소월아.”전연우는 손을 뻗어 장소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장소월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빠가 아프다는데 당연히 걱정되죠.”장소월은 죽을 한술 떠서 전연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를 보살피는 일은 진작 몸에 익은 듯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전연우의 눈빛은 장소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반대로 장소월은 빨리 죽을 다 먹이고 이곳에서 나갈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죽 한 그릇을 다 먹이는 데에는 거의 20분이 걸렸다. 전연우가 천천히 먹는 데다가 자꾸 기침해서 멈추게 되었기 때문이다.얼마 후 아줌마가 돌아오자, 장소월은 마치 구세주라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도련님, 체온을 체크해 보세요.”아줌마는 체온계를 들고 와서 전연우의 입에 물렸다. 잠시 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열은 39도까지 올라가 있었다.아줌마는 다급한 말투로 말했다.“안 되겠어요, 도련님. 얼른 병원으로 가요!”“병원은 귀찮아요. 일단 해열제를 먹어보고 다시 결정해요.”“알겠어요. 많이 힘드시면 곧바로 아가씨한테 말하세요. 도련님이 열이 펄펄 끓는 걸 알게 된다면 어르신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장소월의 눈빛은 약간 어두워졌다. 장해진은 친딸인 장소월보다도 전여준을 더 아꼈기 때문에 이번 일로 인해 애꿎은 아줌마만 날벼락 맞을지도 몰랐다.“제가 잘 설명 해줄 테니까 괜찮아요. 오빠 곁에는 제가 있을게요. 그러니 아줌마는 다른 일을 하러 가요.”“알겠어요. 약은 반시간 후에 먹어야 해요. 그리고 따듯한 물을 많이 먹고 땀을 내봐요.”장소월도 감기 환자의 간병 방법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아줌마가 나간 다음 장소월은 전연우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첫째로 일단 그의 무릎에 있는 컴퓨터부터 치웠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아플 때는 그냥 쉬어요. 오빠가 지금 할 일은 쉬는 것뿐이에요.”장소월은 거의 강제적으로 전연우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줬다. 눕힐 때 머리를
지나치게 리얼한 악몽 때문에 전연우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떴다. 감정은 아직도 장소월을 잃은 그때에 머물러 있었다. 숨은 탁탁 막혀서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고, 가슴은 미어지다 못해 칼에 찔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단순한 꿈으로 인해 이 정도의 반응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장소월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따라 죽으려던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디 이해가 안 되는 것뿐이겠는가? 이는 황당하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의 일이었다.“깼어요?”귀가에서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다름 아닌 백윤서였다.전연우는 벽걸이 시계를 힐끗 봤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가 되어 있었고 해도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내가 이렇게 오래 잤다고?’백윤서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눈물을 흘리고 난 자국인 듯했다.“윤이야, 너 왜 학교 안 갔어?”백윤서는 약간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역시 까먹었죠? 금요일에 저를 데리러 학교에 오기로 했었잖아요. 한참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길래 성은 오빠한테 전화 해봤더니, 오빠가 아프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미안해, 그건 생각지도 못했네.”전연우는 눈을 감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너무나도 리얼한 꿈 때문에 아직도 가슴이 불편했다.“이제 좀 괜찮아요? 물 마실래요?”“괜찮아.”“알겠어요.”백윤서는 고통스러운 듯한 모습의 전연우를 보고 말없이 그의 손을 잡으며 곁을 지켰다.이때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전연우는 천천히 눈을 떠서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네.”“연우 도련님, 식사 시간이 됐어요. 이제 좀 괜찮으세요?”아줌마가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전연우는 가슴이 무거운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소월이는요?”“아가씨는 아래층에서 식사하고 계세요. 혹시 볼 일 있으세요? 제가 가서 모셔 올까요?”‘소월이는 갑자기 왜 찾는 거지? 아프고 나더니 어디 이상해진 거 아니야?’전연우는 피곤한 듯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됐어요. 윤이야
아줌마에게 이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 자리로 짐 싸서 나가. 여태 많이 봐준 줄 알아.”아줌마가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알겠어요. 사장님.”장해진은 손에 들었던 회초리를 내팽개치고는 위층 안방으로 올라가 버렸다.장소월은 아주머니를 모시고 방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묵묵히 약을 찾아 조심스레 발라 주었다. 아줌마는 얼마나 아프고 억울하셨을까... 아주머니가 이 집안에 헌신한 세월이 얼만데, 아버지는 어찌 이리 매정하게 대할 수가 있지?아줌마가 소월이를 위로하며 말했다.“아가씨가 왜 눈물을 흘리세요. 저 괜찮잖아요.”“회초리에 맞았잖아요! 장해진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때릴 수가 있죠?”“쉿. 조용히 하세요.” 아줌마의 따스했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 “아가씨, 그러나 그분은 아가씨의 아버지인걸요. 이렇게 버릇없이 굴면 안 돼요.”소월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알겠어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방에 돌아온 소월이의 눈에 띈 것은, 대문 앞에 주차해 있는 차 한 대였다. 조수석에는 와인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있었다. 어렴풋하게 옆모습만 보였지만, 소월이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그의 담임이자 새어머니, 강만옥이다. 그녀는 거울을 들고 한껏 매혹적인 자세로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었다.장해진은 전연우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는 서둘러 떠나버렸다. 장해진이 강만옥에게 단단히 홀린 게 틀림없었다. 이제 집도 돌아오지 않는 지경이라니.소월이는 떠나는 차를 응시하다 강만옥이 고개를 이리로 돌리자, 커튼 뒤로 숨어버렸다. ‘봤을까? 못 봤으면 좋겠는데...’전연우는 원래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강만옥과 그가 손을 잡은 걸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그가 눈치라도 챈다면...전연우는 보기와 다르게 무서운 인간이었다. 그녀가 의심 갈 행동을 하나라도 한다면 꼬리를 물고 늘어질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소월이는 물을 꺼내 따르고는 발걸음을 다그쳐 위층 안방으로 돌아왔다.백윤서가 다급하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돌아보고는 말했다.“제가 한 그릇이라도 떠다 줄까요? 소월이가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요.” “내가 갈게.” 전연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백윤서는 불안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연우가 소월이와 단둘이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말리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저 보내기로 했다.이 무렵, 소월이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마침 자려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문 뒤편에 있던 전연우가 모습을 드러냈다.이는 소월이가 유일하게 그에게 불만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는 방에 들어올 때 노크하지 않는다.“윤이가 수제비 만들었는데 같이 먹을래? 맛있어.”“저는...”소월이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연우는 이미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있었다. 말투는 온화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에게서 냉기가 느껴졌기에 소월이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극도의 불안감 속에 심장이 점차 쿵쾅쿵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가 숟가락으로 그릇 속의 수제비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먹을래, 아니면 내가 먹여줘?”“제... 제가 스스로 먹을게요.” 막 수제비를 담은 그릇은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릇을 받아 든 손가락이 몹시 뜨거워 났지만, 소월이는 티도 내지 못했다.그녀를 바라보는 전연우의 눈빛은 차가웠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속에 형용할 수 없는 냉담함이 느껴졌다.“소월아, 혹시 요새 무슨 일 있니? 오빠한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자꾸 피하는 것 같네?”온화함을 가장한 태연한 말투 속에 칼이 숨겨져 있었다. 엄청난 위압감이 몰려들어 소월이를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게 꽁꽁 묶어놓는 듯했다.“혹시 있으면 오빠에게 말해줄래? 네가 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심장이 멈춘 듯싶었다가, 또 견딜 수 없게 쿵쾅댔다. 숟가락을 든 소월이의 손이 떨려왔다.“아뇨... 없어요.”소월이가 목구멍으로 튀어나
“곧 수능인데, 네가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영향받으면 안 되지.”소월이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진심을 전하듯 낮게 중얼거렸다.“사실 저도 강 선생님을 정말 좋아해요. 학교에서 저를 잘 돌봐주었거든요. 선생님께서 정말 아버지를 따르길 선택한다면, 저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그리고, 저 이미 어느 학교에 갈지 결정했으니 강 선생님께서 더 이상 걱정 안 하셔도 돼요.”전연우가 물었다.“그래? 오빠에게 알려줄래?”장소월이 대답했다.“낙성의 사범대를 졸업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졸업 후에는 먼저 시골 학교에 신청할 거예요.”전연우의 검은 눈동자가 빛났다. 그의 시선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소월을 고집스레 위아래로 훑었다.“낙성... 너무 멀어. 비행기를 타도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소월아, 나는 네가 이렇게 먼 도시에 가는 걸 원치 않아.”“여기서 잘살고 있는데 왜 하필 그렇게 먼 곳까지 가려는 거야.”원치 않는다고?전연우, 너는 원치 않는 게 아니라 내가 네 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손바닥 위에 놓고 감시하고 싶은 거겠지.장소월은 미리 생각했던 변명을 거침없이 늘어놓았다.“아줌마가 알려주셨어요. 어머니가 도시의 유능한 지식인이셨고 교육 지원활동을 통해 아버지를 만났대요. 그래서 저도 교사를 하고 싶어졌어요. 또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는 것도 뜻깊고 재밌는 일일 것 같아요.”“기왕 교사가 될 거, 제일 좋은 사범대학에 다녀야 하지 않겠어요? 서울사범대에 관해 알아봤는데 낙성이 환경이나 자원이 더 좋아요.”“오빠. 오빠는 제 편을 들어줄 거죠? 아버지도 설득해 주세요...”장소월은 괜히 아양을 부리며 전연우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오빠... 제발요...”전연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짜증이 순간 얼굴에 비쳤다가 이내 사라졌다.전연우의 표정을 살피던 장소월은 그제야 그가 가까운 신체접촉을 꺼린다는 것이 생각나 급히 잡았던 손을 놓고 몸을 움츠렸다.“정말 잘 생각해야 해. 일단 서울을 벗어나면, 네 주
장소월은 눈으로 전연우를 배웅했다.문이 닫히자, 소월이는 쿵쾅쿵쾅 방망이질하는 심장을 쓸어내렸다.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겠지?그녀도 은연중에 계속 암시했었다. 수능이 끝나면 서울을 떠나 멀고도 먼 낙성으로 갈 것이라고.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 시골의 교육지원에 참가할 것이다. 그의 피의 복수에 조금도 방해되지 않게.전연우는 완전히 그녀를 죽은 사람처럼, 원래 장가에 존재하지 않았듯이 지워버릴 수 있었다.일단 이 집을 떠나기만 하면, 소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릴 것이다. 영원히,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이불 위의 얼룩을 보면서 소월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연우는 정말이지 작은 것도 꼭 되갚아야 하는 성격이었다. 소월이가 오늘 아침 금방 바꾼 이불 시트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만 봐도.전연우도 그녀더러, 밤에 덮을 이불이 없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몸소 느끼게 하고 싶었나 보다.장롱 속의 이불은 모두 오랜 기간 씻지 않은 데다가, 소월이가 또 먼지 알레르기까지 있었으므로 한번 잘못 덮었다가는 한밤중에 병원에 실려 갈 게 뻔했다.이 남자는 정말이지 뒤끝이 길었다.쪼잔한 사람! 속 좁은 고집쟁이!소월이가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휙 바닥에 내던졌다. 내일 다시 가져가 씻을 요량으로 두꺼운 외투를 찾아 덮고는, 침대 위에 누웠다.이튿날 아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투명한 햇살이 유리 장막을 드리운 듯 밝게 방안에 비쳐 들어왔다.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장소월은 평소와 달리 지끈거리던 머리도, 밤새 괴롭히던 코막힘도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언제 생겨났는지 모를 회색 무늬 이불에 덮여있는 자신을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바로 이불을 옆으로 걷어차 버렸다.이 색은, 전연우에게만 있는 것이었다.설마, 전연우가 어젯밤에 몰래 방에 들어온 건가?장소월의 얼굴이 삽시에 창백해졌다. 괜찮았던 머리가 다시금 쿵쿵 울렸다.요즘 전연우가 그녀의 방에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누가 봐도 이건 별로 좋을 일이 아니었다.‘분명 문을
“작년 수능 등급 비율을 봤는데 충분히 저의 성적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 있어요.”장소월의 말에 장해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여기 서울에 남든지, 그게 아니라면 다니지 마. 대학에 붙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어차피 결국 해야 하는 건 결혼이야. 얼마 뒤에 있을 연회에 같이 가. 만나봐야 할 사람들이 있어.”장소월은 아버지가 이리 말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장해진은 여자라는 신분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에게 여자란 그저 후대를 번식하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었다. 결혼 후에는 집에만 있으면서 남편을 섬기고 아들을 떠받들어야 하는 존재였다.“아버지. 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제가 아는 친구들도 이미 외국으로 유학하러 갔어요. 문정이 기억하세요?”장해진이 호기심이 생긴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서창수 딸?”“네. 문정이가 IELTS 준비하겠대요. 유학 후에, 외국에 정착하다 국적도 바꿀 거래요. 아버지, 낙성에 가는 건 외국 유학보다 나은 선택이에요. 적어도 방학하면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나중에 누군가 학력을 물을 때 고등학교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만큼 창피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저는 아버지에게 부끄러운 딸이 되고 싶지 않아요.”장해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체면이었다. 흙수저 가정에서 태어나, 배운 것 없어 가방끈이 짧았던 그였기에. 지금의 회사마저 모두 전연우에게 맡기고 있는 터였다.장소월의 이 말이 드디어 장해진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 그는 불만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꼭 낙성에 가야겠어?”소월이가 힘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저를 걱정하시는 건 잘 알아요. 그렇지만 제가 낙성에 가면 할머니도 돌볼 수 있어요! 약속할게요. 절대 아버지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거예요.”할머니는 그녀의 최후 패였다. 장해진은 비록 누구에게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머니에게만큼은 효자 중 효자였다. 몇 년간 할머니를 서울에 모시려 설득하였지만, 할머니는 한사코 거절하였다. 꼭 낙성의 가난하고 편벽한
집에 방이 많지는 않았다. 장해진이 혼자 조용히 자는 것을 좋아해서, 2층의 서재와 안방은 모두 금지구역이었다.3층에는 장소월과 전연우가, 4층에는 백윤서가 살았었다.지금 소월이더러 3층 방을 내놓으라 하니 소월이는 어쩔 수 없이 5층으로 가야 했다. 이 집안에서 제일 높은 층이기도 했다.그러나 5층의 유일한 좋은 점은 매우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방에는 큰 베란다가 있어 꽃을 기르고, 차를 마시거나 야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낮부터 밤까지 방에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만큼 좋은 곳이었다.소월이는 진통제 몇 알을 삼키고 쓴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물을 조금 마시고는 곧이어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이때 아주머니가 흐린 얼굴을 하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아무리 강만옥이 들어와 산다고 했어도, 방을 아가씨가 옮겨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장소월은 아주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띠었다.“사실 이 방에 누가 살든 다 똑같아요. 저는 이곳보다 5층의 방이 더 좋아요. 거기엔 엄마가 그렸던 그림들이 많이 남아있으니까요.”“엄마 사진도요. 혹시 알아요? 엄마가 꿈에 나와줄지. 이미 너무 오래 꿈에서 엄마를 만나지 못했어요.”그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아줌마는 미안함과 측은함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 소월이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아가씨, 언제 이리 커서 어른스러워졌어요?”‘왜냐하면 저는 이미 성인이 됐거든요. 아주머니, 저는 사실 많은 걸 알고 있어요... 저에게 조금만 시간을 더 주세요, 나중에 꼭 데리러 올게요.’소월이는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 자주 사용하던 작은 물건을 옮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인테리어회사 사람들이 찾아왔다. 소월이가 쓰던 낡은 가구들을 모두 바꾸고 페인트칠했다. 아기자기했던 벽은 창백한 백색으로 바뀌었다.뒤이어 개인 브랜드 의류회사가 대량의 옷과 드레스를 위층으로 올려보냈다.장해진은 종래로 여자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소월이가 알기로, 장해진과 3년을 교제했던 대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