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는 차가운 눈으로 황준엽의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인턴사원을 보며 다가갔다. 기획부 팀장도 바로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이 여기 앉으시려 하잖아? 얼른 일어나지 않고!”이유미는 구세주를 만난 듯 서둘러 말했다.“네, 팀장님.”하지만 그녀가 일어나기도 전에, 황준엽은 그녀를 석 잡았다.“참, 대표님이 앉으면 앉는 거지 너는 왜 일어나? 술도 못 마시면서 앞으로 직장 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보아하니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네? 자... 내가 가르쳐줄게.”“저희 회사 직원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전연우는 황준엽의 손목을 덥석 잡고 점점 힘을 주었다.갑자기 분위기는 굳어졌다.황준엽은 손목의 통증을 느꼈지만, 많은 사람들의 앞이라 체면 때문에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고 그저 헤헤 웃으며 말했다.“방금 장난이었어요. 전 대표님 여기 와서 한 잔 받아요. 오해를 풀자고요.”이유미는 곧 기획부의 팀장에 의해 끌려나갔고, 몇 명의 고참 직원만 남았다.몇 년 전, 황준엽은 실수로 사람을 치어 죽였는데, 상대 가족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번거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고, 장씨 가문에도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장씨 가문의 일 처리 수단에 대해서 황준엽은 잘 알고 있었다.서울 지하세계의 왕이라 위에서도 개입하기 어려웠다.그는 전연우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경멸하고 하찮게 여기고 있었다.장씨 가문은 그저 지하세계의 통치자일 뿐이니... 언젠가 무너질 것이다.황준엽은 엄청난 재벌은 아니지만, 적어도 출신만으로 전연우를 발밑에 밟을 수 있었다.전연우와 같은 신분은 평생 열심히 노력해도 그를 따라올 수 없었다.업계 협력 미팅의 절차에 따라, 그들은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그다음은 천하일성의 카지노로 향했다. 이곳은 영업 허가증도 있는 정규적인 카지노였다.세 시간 후, 엘리베이터 안은 온통 황준엽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전 대표님,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요. 자그마치 2억을 잃게 했네요. 이 프로
“다시 올라가서 갈아입고 올게요.”“그럴 필요 없으세요. 아가씨만 좋아하신다면 옷이 타버렸다고 해도 도련님은 신경도 안 쓰실 겁니다.”기성은은 전연우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 카지노에서 그의 행동은 확실히 일부러 황준엽에게 져준 것 같았다.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든, 항상 알 수 없는 믿음을 주었다. 그를 따라다니며 사람을 죽이고 방화를 저지른다고 해도 기성은은 그를 철석같이 믿을 것이다.“대표님?”기성은은 옆에서 정신이 팔린 전연우를 불렀다.백윤서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까?‘그래, 윤서 씨와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서 정이 깊은데, 인씨 집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오늘 밤 황준엽은 온 세상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전연우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었다.이번 황씨 가문과의 협력은 구덩이를 파서 황준엽이 직접 뛰어내리게 만든 것이다.기성은이 전연우의 옆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따라다녔는데, 어떻게 그의 성격을 모를 수 있겠는가?전연우는 누구에게나 충분히 독한 사람이지만, 자신에게도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이다.신분의 우세로 잘난 체하는 부잣집 자식들은 전연우의 눈에 그저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그들을 조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기성은은 그들이 과거에 겪었던 일들을 회상했다.전연우는 유일하게 자신이 기꺼이 복종하고 따르고 싶은 사람이었다.차를 몰고 돌아가는 길에 전연우는 눈썹을 찡그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위병이 도진 모양이다. 불규칙한 식사로 얻은 위병이 아니라, 몇 년 전에 ‘화물 운송’을 할 때 누군가의 칼에 마침 위가 찔려 남은 후유증이었다. 오늘 전연우는 술을 꽤 많이 마셨다.그의 모습을 본 기성은은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30분 후, 전연우가 어렴풋이 깨어났고, 서철용이 병상 옆에 서서 수액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운이 좋았어. 조금만 더 늦었으면 수술방에 들어갔을 거야. 다행히 아직 위출혈은 없어.”“마시면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그렇게 많이 마셨어?
전연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폭탄을 투하해 버리고 유유히 떠나는 서철용을 쳐다보았다. 그 말을 들은 백윤서는 곧바로 전연우에게 캐물었다.“연우 오빠, 왜 소월이에 대해 얘기한 거예요? 소월이한테... 무슨 일 있는 거예요?”기침 몇 번에 또다시 위통이 몰려왔다. 전연우는 이토록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을 아무한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예전 그의 위병은 좀처럼 도지지 않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장소월이 항상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술자리에서 누군가 전연우에게 술을 권할 때마다 장소월은 상대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었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망치고 돌아오면 항상 장해진의 엄벌을 받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연우가 한 잔이라도 덜 마시도록 노력했다.아침, 점심, 저녁, 그녀는 매 끼니마다 직접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기도 했다.장소월이 그를 멀리한 이후, 전연우는 늘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백윤서는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 전연우의 모습에 실망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그녀가 전연우의 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악몽을 꾼 탓에 잠이 안 와요. 그래서 나와서 걷고 있었어요.”전연우가 큰손을 그녀의 머리 위에 올리고 쓰다듬었다.“들어가서 자. 내일 학교에 가야 하잖아?”“내가 죽을 먹여줄게요. 술만 먹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잖아요.”백윤서가 보온병을 열어 따끈따끈한 야채죽 한 숟가락을 떠 호호 불고는 전연우의 입가에 가져갔다.전연우는 그녀의 눈가에 어려있는 기대감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다 먹고 나니 어느덧 새벽 3시였다.백윤서는 그제야 느릿느릿 정리하기 시작했다.전연우가 말했다.“곧 날이 밝아. 여긴 기성은이 치우면 되니까 돌아가서 쉬어.”백윤서가 침대 옆에 고개를 숙이고 서서 말했다.“오빠, 혼자 자기 무서워요. 잠깐만 옆에 누워 있어 주면 안 돼요? 어렸을 때도 항상 제 옆에 있어 줬잖아요. 오빠가 옆에 있어야 마음이
백윤서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길에서, 백윤서는 뾰로통한 얼굴로 조수석에 앉아있었고 전연우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두 사람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차 안을 짓눌렀다.학교에 도착하자 백윤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기성은이 말했다.“윤서 씨, 아침밥을 가져가세요.”백윤서는 그의 말을 무시해버리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기성은이 걱정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대표님, 윤서 씨는 아직 어린 아가씨입니다. 그냥... 먼저 사과하는 게 어떨까요?”전연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눈에 익숙한 모습이 들어왔다.장소월이 만두를 들고 우유를 마시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강아지 한 마리가 그녀의 옆으로 달려와 사납게 짖어댔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만두와 우유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황급히 학교 안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경비원은 다급히 강아지를 쫓아냈다.그녀는 한동안 달린 뒤 고개를 돌려 강아지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몇 년 전 그녀는 광견에게 하마터면 물릴 뻔했었다. 하여 강아지에게 떨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자리 잡은 것이다.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장소월의 모습에 전연우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피어올랐다.장소월은 교실로 가던 중 다시 6반에 돌아가 책상에 엎드려 쿨쿨 자고 있는 강용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소월아, 소월아, 소월아!”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장소월이 고개를 돌렸다. 소현아가 만두 두 봉지와 우유를 들고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장소월은 걸음을 멈추고 소현아를 기다렸다.소현아가 들고 있던 음식을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네 것이야. 조금 전 강아지 때문에 놀라 떨어뜨리는 거 봤어. 그래서 내가 같은 거로 사 왔어.”소현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고마워.”이미 사 왔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장소월
장소월이 교실에 돌아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백윤서가 들어왔다.예상보다 일찍 퇴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음 주면 올림피아드 경기가 진행된다.장소월은 오늘 다시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왔다.이번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천천히 남은 수업을 받으며 조용히 졸업하는 날만 기다리면 된다.1등만 하면 그녀가 원하는 일에서 절반의 성공을 이룬 거나 다름없다.오늘 장소월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공부했다. 점심시간, 소현아가 그녀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교실에 찾아왔고 두 사람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그 길에서 장소월은 많은 학생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또한 그녀를 보고 있는 여학생들의 손엔 모두 잡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워낙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 더는 관심을 쏟지 않았다.얼른 밥을 먹고 다시 올림피아드 반에 가야 한다.그때 소현아가 말했다.“소월아, 쟤들 이상하지 않아? 다들 널 보고 있어.”장소월도 이를 느꼈던지라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내 얼굴에 뭐 묻었어?”“아니. 매일 예쁘기만 한 걸.”소현아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장소월은 소현아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시간이 없어 필기 노트만 건네주었다. 그녀가 알기 쉽게 다시 정리해 놓은 것이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모두 기억한다면 60점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올림피아드 반에 들어가니 백윤서는 이미 일찌감치 도착해 있었다.그때, 장소월을 본 고건우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하나 추가한 책상도 그가 직접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이준이가 네 책을 가지러 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네.”장소월이 책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넌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았어. 전교 2등이 하나뿐인 자리를 가져갔다고 다른 학교 선생님들이 투덜거리더라고. 저번 회의에선 우리 학교 많은 선생님들이 널 칭찬했어. 내가 다 뿌듯하더
김남주가 긴 부츠를 신고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프런트 직원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저 이상한 사람 누구예요?”강한 그룹에서 오랫동안 일한 직원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들의 대표님에겐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자친구는 대표님에게 이별을 고했고 또한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사람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인해 대표님은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다행히 강한 그룹에서 힘을 써 외부에 알려지는 걸 막았기 때문에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다만 그 후 그 여자는 아무도 모르게 홀연히 사라져버렸다.예전 그녀와 대표님은 뜨겁게 사랑했었다. 회사에서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강씨 집안에선 그녀를 탐탁지 않아 했지만 강영수가 그녀를 지키고 있으니 감히 어찌하지 못했다.사라진 지 몇 년이나 흐른 지금,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던 회의가 끝이 났다.진봉이 잡지 하나를 들고 걸어왔다.“지금까지 이미 10만 부나 팔렸습니다. 소월 씨는 아직 모르는 것 같습니다. 대표님, 잡지사에 소송을 걸까요?”잡지 표면엔 바닷가에서 다정히 손을 잡고 산책을 하고 있는 한 쌍의 연인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남자는 뒷모습만 보였지만 여자는 그 옆모습이 확연히 찍혀있었다.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는 여자의 눈빛엔 사랑과 따뜻함이 듬뿍 담겨있었다. 누가 봐도 남자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었다.그 두 사람이 바로 강영수와 장소월이었다. 그들이 해성에서 산책을 할 때 누군가 몰래 사진을 찍어 잡지 표면에 실은 것이다.이 잡지사는 전문적으로 커플 사진을 찍는 회사였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잡지사라 판매량이 많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표지 사진으로 인해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고 10만 부나 되는 잡지가 단시간 내에 빠르게 팔린 것이다.지금은 이미 매진 되어 어디에서든 찾아볼
진봉을 본 김남주가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오랜만이야! 강영수.”강영수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다.“누가 너한테 돌아오라고 했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했잖아!”김남주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스르륵 쓸어내리고는 그의 앞에 멈춰 섰다.“날 보고 싶어 했던 건 너잖아? 너 설날 밤 내내 내 곁에서 날 지켜줬었잖아. 잊었어?”“시끄러워. 진봉, 경호팀에 연락해 끌어내. 앞으로 한 발자국도 회사에 들이지 마. 또다시 이 여자를 들어오게 한다면 프런트 직원 모두를 해고시킬 테니까 명심해.”진봉이 말했다.“네. 대표님.”강영수는 더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사무실에서 나왔다.김남주가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영수야, 내가 왜 널 떠났는지 알고 싶지 않아?”그 말에 강영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동시에 진봉은 김남주의 눈빛에서 무언가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강영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점점 멀어져가는 강영수의 모습에 김남주는 심장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강영수, 넌 평생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진봉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김남주 씨,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대표님은 이제야 겨우 괜찮아지셨습니다. 더는 찾아와 힘들게 하지 마세요. 대표님께서 주신 그 돈이면 남은 평생 편히 살 수 있잖아요.”김남주가 다시 선글라스를 쓰고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진봉, 당시 나와 영수가 헤어진 데엔 네 공로도 작지 않았어.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하지만... 아가씬 다른 남자 때문에 대표님을 버렸잖아요. 대표님께서 예전 아가씨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잘 알 거예요. 지금 사진 속 저 여자분에게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저 여자분에게 다른 마음은 먹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지금의 대표님은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당신은 이제 영원히 대표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없어요.”진봉의 말은 모두 사
하지만... 강영수 이 자식 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야!김남주는 혼자 외롭게 해외에서 살다가 자신이 고용한 파파라치로부터 사진을 받았다. 강영수가 다른 여자와 다정히 손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귀국해버린 것이다.그녀는 이 모든 것이 진실인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조금 전 사무실 책상 위 사진을 본 뒤에야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높이 솟아있는 강한 그룹 건물을 올려다보니, 김남주는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따라서 검은색 아이라인도 천천히 씻겨 내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김남주는 아예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그녀와 멀리 떨어져 지나쳤다.몇 분 뒤, 검은색 승용차가 김남주의 앞에 멈춰 섰다.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이 차에서 내렸다.“김남주 씨, 사모님께서 김남주 씨가 돌아온 걸 아시고 뵙자고 하십니다. 차에 타세요.”김남주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수석에 앉아 차에 있는 휴지로 눈물을 닦고는 다시 화장을 했다.“몇 년이나 흘렀는데 그 노친네는 아직도 안 죽었나 봐?”운전기사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아가씨, 말조심하세요!”김남주는 조금 전 목놓아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예전에도 그렇게 말했어. 너희들 대표님도 나한테 뭐라고 못하는데 네가 뭔데 날 꾸짖어!”운전기사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30분 뒤, 김남주를 태운 차가 강씨 저택에 도착했다.그녀는 익숙하게 안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집안에 들어가려 하자 도우미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아가씨, 노부인께서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김남주는 아래턱을 빳빳이 올리고 도우미를 따라갔다.검소한 차림의 백발의 노부인이 마당 안 벤치에 앉아 팥죽을 먹고 있었다.“오랜만이에요! 아직 생전이실 줄은 몰랐네요!”노부인은 그녀를 무시해버린 채 계속하여 팥죽을 즐겼다. 그녀가 허허 웃으며 옆에 서 있는 도우미에게 말했다.“소월이의
한참 고민하던 소현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천효연의 납작한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 그럼 아가씨도 강지훈 씨의 아기를 가져요. 그럼 자꾸 나한테 와서 자지 않을 거잖아요!” 천효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녀는 은빛 치아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주변 도우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바보가 이토록 충격적인 말을 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주인님과 효연 아가씨의 잠자리 빈도를 생각하면, 주인님이 허락만 하셨다면 그들의 아이는 이미 몇 명은 됐을 것이다. 이 바보는 입만 열면 효연 아가씨의 급소를 찌르곤 한다! 규영과 미진도 소현아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천효연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자 규영이 황급히 나서서 분위기를 무마했다. “효연 아가씨, 저희 현아 아가씨는 어린아이와 같은 분이라 이런 걸 잘 모르십니다. 부디 마음에 두지 마세요.” 소현아는 긴장감에 옷자락을 꽉 말아 쥐며 말했다. “제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나요?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좀 멍청해서 그래요. 혹시 제 말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말해주세요. 사과할게요.” 그녀는 자신이 조금 떨어지는 지능 때문에 자주 말실수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예전 이것 때문에 자주 괴롭힘을 당했었다. 한때는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상황을 알아차린 엄마가 말해주셨다. 마음속에 말을 담아두면 병이 생기기 마련이니 그냥 용감하게 말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릇된 말을 했을 땐 제대로 사과해서 용서를 빌면 된다고도 하셨다. “맛있는 거 줄게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네?” 한참을 기다려도 천효연이 대답하지 않자, 소현아는 탁자 위의 간식을 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천효연의 불쾌한 향수 냄새가 또다시 코를 찔렀다.소현아는 즉시 코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또다시 천효연을 화나게 할까 봐 최선을 다해 참아냈다. 천효연은 자신 앞에 내밀
잔뜩 일그러지는 소현아의 얼굴을 본 천효연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 바보가 먼저 선수를 친다고? 천효연은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소현아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배를 만지려 했다. “현아 씨, 아기 태어나려면 몇 달 남았어요? 나도 아이 정말 좋아해요. 전에 현아 씨가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 강지훈 씨가 그랬어요. 아기가 태어나면 나더러 맡아 키우라고요.” 농담하듯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소현아를 쳐다보는 그 눈동자엔 독사 같은 살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소현아는 불시에 벌떡 일어섰다. 자신의 말에 자극을 받았다고 생각한 천효연은 득의양양하게 아래턱을 들어 올렸다. 소현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커다란 눈동자를 사방으로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불안하고 다급한 표정이었다. “현아 아가씨!” 규영과 미진이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애처롭게 서 있는 소현아를 본 그들은 급히 달려왔다. 소현아는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규영은 곧바로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화장실로 모셔다드릴게요.” 그녀는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소현아를 1층 화장실로 데려갔다. 화장실 안에서 구역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천효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효연 아가씨, 죄송합니다. 요즘 현아 아가씨의 입덧이 좀 심해요. 임산부라 요즘 많이 예민하십니다. 가까이 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약 현아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주인님 성격 아시죠?” 미진은 느긋하게 가져온 음식을 펼쳐놓으며 경고를 담아 공손하게 말했다. 천효연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고작 도우미 주제에 감히 내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해?” 미진은 겁을 먹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봐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천효연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잠시 뒤, 화장실에서 구역질 소리가 멈췄다.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