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프런트 매니저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하고 즉시 달려와 살펴보았다. 그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화들짝 놀랐다.그는 기성은을 보자마자 머리를 조아리며 다가왔다.“기 비서님, 이곳엔 무슨 일이세요?”소민아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절 찾아온 사람이에요.”그 말을 들은 프런트 매니저는 곧바로 호텔 경비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경비원이 소민아를 놓아주자 그녀는 곧바로 기성은의 곁으로 뛰어갔다.“기 비서님? 소월 언니한테 오신다는 말 못 들었는데...”기성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소민아는 확실히 놀랐다.하지만 누가 오든 마찬가지였다.기성은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서울엔 성세 그룹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성세 그룹 회장 최측근인 기성은의 등장은 사람들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성세 그룹과 소씨 가문은 모든 면에서 천지차이다. 그 작고 보잘것없는 소씨 가문에게 어떻게 성세 그룹이라는 뒷배가 있을 수 있겠는가!기성은은 아무 말 없이 소민아를 흘끗 쳐다보았다.“소민아 씨, 아가씨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해요. 대표님께서 저에게 먼저 이쪽으로 와 축하 인사를 전하라고 지시하셨어요.” 기성은이 손을 들어 올리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은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 몇 개를 들고 왔다. “비싼 선물은 아니지만 진심을 담아 준비했으니 받아주세요.”경호원들이 선물 상자를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모두 고가의 귀중한 보석과 액세서리였다.손님들은 모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제 눈이 잘못된 걸까요? 지난주 파리 패션위크에서 모델이 착용했던 4억 원이 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아니에요?”“아직 시중에 나오지도 않았잖아요? 성세 그룹 사람들은 어떻게 저걸 손에 넣은 걸까요?”“네, 구매 예약도 못 했어요.”“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저 파란색 다이아몬드 반지, 혹시 저번 자선 경매에서 60억에 팔린‘심해의 눈물’ 아니에요?”“소씨 가문과 성세 그룹은 대체 무슨 관계일까요? 이렇게나 쉽게 60억을 내놓다니요!”“그러
경호원이 전연우의 손에서 골프채를 건네받아 옆으로 가져갔다.장소월은 이어폰을 착용하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가장 먼저 소민아가 화를 내며 다투는 목소리가 들렸다.그 목소리...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그쪽 가족은 아직도 체면이라는 게 있긴 해요? 언니를 위한 선물이라고 말했잖아요. 당신들 뭐 하는 거죠? 두 사람 아직 결혼한 거 아니에요! 이걸 탐낼 자격 없어요. 배은망덕하고 수치심도 없는 뻔뻔한 사람들... 양아치들! 날강도들!”그러자 아주머니 한 명이 소민아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우리 것이야. 그냥 지금 가져가는 게 나아.”“그래요! 배짱 있으면 가져가요! 감히 손을 댄다면 내가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거예요.”기성은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았다.소민아가 단호하고도 강인한 표정으로 말했다.“주홍, 와서 우리 물건 다 가져가.”노부인은 탐욕스러운 얼굴로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돈, 돈, 이건 다 돈이다!몇 평생을 살아도 다 쓸 수 없는 거대한 액수의 돈 말이다.“소 비서님, 강도죄 형량이 몇 년인 줄 알아요?”“3년 이상 10년 이하입니다.”“맞아요. 하지만 빠뜨린 게 있어요. 이 물건들의 가치를 고려하면 무기징역으로 처벌당할 수도 있어요. 성세 그룹 물건은 아무나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소현아 씨, 자신의 물건은 앞으로 스스로 잘 관리해야 해요.”소현아는 노원우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올 거라고.”“지금 당장 네 친척들과 친구들을 데리고 내 집에서 나가! 난 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둘째 할머니가 눈을 부릅뜨고 일어섰다. “원우야, 저게 무슨 말이야? 그렇게 큰 집에서 우리가 아니면 누구랑 살겠다는 거야? 우릴 쫓아낼 생각을 하다니!"순간 노원우는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감히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노원우는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떠나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공황
“기 비서님, 소월이는 왜 안 왔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 “아가씨는 이미 도착해 대표님과 아래층에서 골프를 치고 계십니다. 대표님께서 파티는 저에게 알아서 마무리하라고 지시하셨으니, 아가씨를 만나고 싶으면 지금 가도 돼요."“그럼 부탁드릴게요. 기 비서님. 감사합니다.”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씀을요.”노원우가 후회에 가득 찬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현아야...”소현아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돌렸다. “내가 말했잖아. 날 괴롭힌 만큼 벌 받게 될 거라고.” 그녀는 그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매정히 돌아서 자리를 떠나버렸다.한 무리의 사람들만 남아 고성을 지르며 언쟁을 벌였다.노원우의 친척들은 급기야 단상으로 올라가 노원우를 원망했다.“원우야, 이게 무슨 일이냐? 현아 쟤 왜 저러는 건데? 네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주면 집으로 보답하겠다고 했던 말 잊으면 안 돼!"“이 결혼 대체 하는 거야, 마는 거야?”“맞아! 형, 나 아직도 형이 주겠다던 집만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신혼집도 없이 어떻게 결혼해?”“이 보석들을 내 딸이 결혼할 때 혼수를 준비하는 데 쓴다면 나중에 부잣집 사위를 맞을 수 있을 텐데... 노원우, 너 말 바꾸면 안 돼!”“다들 닥치세요!”노원우가 소리쳤다.“돈 돈 돈 돈, 돈 빼고 아는 게 있기나 해요?”“소씨 집안을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탈탈 털어야 그만할 거예요?”소민아의 말이 맞다. 그들은 그저 돈밖에 모르는 기생충들이었다.뒷이어 형사들이 안으로 출동했다.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노원우 씨, 당신을 협박 및 감금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에겐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의 집에 무단침입해 절도죄를 행한 몇몇 분들도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두 형사는 노원우에게 수갑을 채우고 곧바로 연행했다.뭔가 잘못된 것을 감지한 다른 친척들은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아
그녀가 또다시 말했다.“고마워.”장소월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경호원이 막고 있던 손을 내려놓자마자 소현아는 장소월을 와락 껴안았다. 얼마나 세게 안았는지 장소월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기까지 했다.소현아는 장소월의 품에 폭 안겨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나한테 전화도 안 하고... 나 진짜 죽을 뻔했단 말이야.”그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장소월은 그녀의 목과 등 군데군데 남아있는 검붉은 멍 자국을 발견했다...“민아 씨가 이미 다 말해줬어. 현아야...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소현아는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늦었어. 다시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난 행복해. 선물도 많이 받았으니 용서해 줄게."“이제 눈 똑바로 뜨고 다녀야 해. 다시는 그런 나쁜 놈한테 속으면 안 돼!”“그럴 일 없을 거야! 앞으로는... 네가 곁에 있으면 아무도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해.”노원우는 원래 소씨 집안의 후원을 받는 가난한 집 학생이었다. 소현아도 서울대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에 관한 정보들은 모두 아버지의 프로필에서 봤었다.대학 시절, 소현아는 구석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을 당하던 노원우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를 도와주었다.그 후... 노원우는 명확한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소현아에게 접근했다.노원우는 항상 소현아를 모든 면에서 세심하게 배려하며 정성껏 챙겨주었다.소현아의 아버지 역시 노원우를 딸을 평생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심지어 두 사람에게 교제를 부추기기도 했다.처음에 소현아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신장에 문제가 생기자 선뜻 아버지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한 노원우에게 감동해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다.하지만... 그 이후 노원우는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소씨 집안에 들어가 살면서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친척들을 모두 집안으로 불러들여 이것저것 일을 맡겼다.처음
끌려가던 사람들은 소현아를 보자마자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소현아! 네가 꾸민 짓이지! 다 너 때문이야!”“잡아가야 하는 건 저 여잔데 왜 우릴 데려가요!”“맞습니다, 형사님. 우리는 모두 아무 잘못도 없는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무슨 착오가 있었을 거예요.”경찰이 그들에게 소리쳤다. “조용히 하세요”“젠장, 이 난장판을 만든 건 저 두 개년들이야. 소현아 기다려. 나오면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형사는 여전히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붓는 아주머니에게 일갈했다. “감옥 생활을 몇 년 더 늘리고 싶은게 아니라면 다들 닥쳐요! 저분은 당신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우리보다 돈이 많기나 해요?”장소월은 더 이상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데로 가자.”“그래.”경찰차가 와 그들을 앉히고 데려가고 나서야 시끄럽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소현아, 거기 서.”장소월과 소현아 앞에 요정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막아섰다. 소현아 옆에 있는 여자를 본 그녀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소녀는 재빨리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엄마가 경찰에 끌려간 건 다 너 때문이야. 내가 얼마나 어렵게 대학에 들어갔는지 너도 알잖아. 학교에서 나한테 감옥에 간 엄마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난 앞으로 어떻게 학교를 다녀?”“가능한 한 빨리 집을 나가겠다고 했잖아. 꼭 이렇게 소란을 피워야 만족하겠어?”이제 겨우 몇 살밖에 안 된 꼬마는 소현아의 치마를 붙잡고 울먹였다.“현아 누나, 우리 엄마 괜찮겠죠?”장소월은 마음이 약해져 어쩔 줄 모르는 소현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악역은 여전히 그녀의 몫인가 보다.장소월은 소현아를 막아서며 차갑게 말했다. “네 엄마가 잘못한 게 없다면 여기서 울 필요 없어. 경찰이 다 명백하게 조사할 거야. 현아한테 말해도 소용없어. 학교는... 이미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웠잖아.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이야. 그렇게
“난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오직 장소월을 걱정시키기 싫어 한 말이었다.어릴 적부터 소현아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을 정도로 공주님처럼 곱게 자랐다. 하지만 최근 2, 3년 동안 갖은 고초를 겪은 탓에 손등에는 화상 상처가 가득 뒤덮여 있었고, 부드럽던 손은 잔뜩 거칠어져 있었다.그때 기성은이 다가와 말했다.“아가씨, 시간이 다 됐으니 이제 가야 합니다.”형사 한 명도 다가왔다. “소현아 씨의 진술이 필요합니다. 죄송하지만 경찰서까지 같이 가주실 수 있을까요?”소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소월아, 그럼 난 갈게.” “그래.”소현아는 아쉬운 감정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소월아, 나 혼자 가기 무서워.” 장소월이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벙긋거리자, 기성은이 말을 가로챘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경찰서에 따라가서 모두 처리하겠습니다.”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되겠네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현아를 보호해 주세요.”“당연하죠.”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뒤에야 장소월은 천천히 고급 리무진으로 걸어갔다. 경호원이 차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장소월이 허리를 굽혀 들어가 앉자 전연우는 레드 와인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마셔봐.”장소월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롱 원피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오랫동안 마시지 않았어.”“괜찮아. 조금은 마셔도 돼.”그는 검은색 셔츠 소맷자락을 걷어 올려 단단한 팔뚝을 드러냈다. 뼈마디가 뚜렷하게 솟아나 있는 손가락으로 잔을 잡으니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전연우... 나 알코올 알레르기 있어.”그녀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술의 힘을 빌렸던 적이 있었다. 당시 술을 마시기 위해 매번 알레르기 약을 먹곤 했었다.전연우가 손을 멈추었다. 그녀에게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그였다.“왜 이제야 얘기하는 거야?”“말할 필요 없었어.”그녀가 말했다고 해도 그는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장소월은 예전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취
“중복 결혼은 범죄야, 전연우.”“무서워?”그는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장소월이 대뜸 아버지의 말을 꺼냈다. “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너도 장씨 집안에서 오랫동안 지냈으니 나보다도 더 잘 알 거야. 장례를 치른 뒤 최소 3년은 지나야만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는 걸.”장소월이 도망치려 했지만 전연우는 그녀를 놓아주기 만무했다. 도리어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손깍지를 낀 다음 무릎에 올려놓았다.“난 인내심이 별로 없어.”장소월은 그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을 꽉 막고 있는 무언가를 너무나도 분출해 내고 싶었다.“대체 나와 결혼해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난 아이를 낳을 수 없고, 그 아이는 가짜잖아. 나와 결혼하려는 건... 그저 네 그 못 말리는 소유욕 때문이잖아. 넌 그저 네가 갖고 싶은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은 거야. 시간이 지나면 또 날 쓰레기 치우듯 매정하게 버려버리겠지.”“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너에 대한 내 마음이 그저 한순간의 욕심이 맞는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나보다 널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장소월은 다시는 그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용기를 내어 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송시아가 다시 태어나 두 번째 생을 살고 있다고 너한테 말했었지?”그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그녀를 단단히 잡고 있던 손에도 점차 힘이 풀렸다. 장소월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내뱉었다.“일이 이렇게까지 됐으니 이제 솔직히 털어놓고 싶어... 왜냐하면 난 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지도, 또다시 너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싶지 않아.”“전연우... 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우리가 함께하면 좋은 결과는 결코 없을 거야. 네가 나한테 가져다주는 건 고통뿐이야...”“전생에... 우리 결혼했었어!”“전생 우리의 8년이라는 결혼 생활 동안, 넌... 집에도 거의 오지 않
이제야 내내 그의 마음속에 박혀있던 의구심이 풀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장소월은 은경애가 안고 온 아이를 무시하고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지난 일을 모두 떠올리는 것은 심장을 관통하는 수백만 개의 화살과 다르지 않았다.그는 두 평생을 아울러 그녀에게 상처를 안겼다...장소월은 도저히 그와 계속 함께할 수 없었다.방으로 들어온 장소월은 침대 끝에 앉아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허리를 굽힌 채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전연우가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단지 사실을 인정하고 그녀를... 보내주길 바랄 뿐이었다.감정을 진정시킨 장소월은 문득 소현아가 자신의 손에 쥐여주었던 쪽지가 생각났다.하지만 차에 전연우가 타고 있어 미처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구겨져 있던 쪽지를 펼쳐보니 하얀 종이에 몇 글자가 적혀 있었다.[메일 확인해봐.]장소월은 침대 머리맡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메일함 페이지를 열었다.그녀는 허이준이 자신의 해외 메일함에 보낸 메일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모두 아직 읽지 않은 메일이었다.[전연우를 조심해!][전연우가 네 휴대폰에 감시 어플을 깔아놨어. 전연우는 네가 보내는 모든 메시지를 열람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보낸 이 메일을 본다면 뭐든 서둘러 답장하지 마.][누군가 네가 원래 국내에서 등록했던 이메일 주소로 보내면, 이메일은 자동으로 다른 IP 주소의 이메일 주소로 전송돼.][강영수에게 큰일이 생겼어. 인경아가 강영수를 치료하기 위해 전용기를 준비해 미국으로 보내려 했지만, 비행기는 공중에서 폭발해 버렸어. 그 비행기엔 인시윤도 함께 타고 있었대. 전연우가 모든 언론 기사를 막은 것 같아.]장소월은 핸드폰 버튼을 누르며 메일을 하나하나 확인했다.[소월아... 강씨 집안에 일이 생겼어... 강씨 노부인이 돌아가셨고, 강씨 저택은 전연우가 혼자 독차지했어. 지금 네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네. 위험해지면 곧바로 나한테 전화해!]메일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장소월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