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이유영도 강이한을 꼭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강이한의 미친 모습을 눈앞에서 봐버린 그녀는 좋은 엄마가 되어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미친 남자에게서 이 아이를 지켜줄 자신도 없었다.그 시각, 홍문동.식탁에 한지음과 강이한이 마주앉아 있었고 강이한은 통화 중이었다.그는 덤덤한 얼굴로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정국진은 아직 그쪽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거야. 그래. 그렇게 알고 준비해.”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전화를 끊었다.정국진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한지음은 이유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속으로 통쾌하다고 느껴지는 동시에 조금 걱정도 되었다.강이한은 진짜로 잔인한 사람이었다.10년을 사랑했던 여자에게마저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 사람이니 다른 사람이면 오죽할까!그녀는 힘겹게 테이블을 더듬어 주스병을 입가로 가져갔다. 긴장을 풀기 위한 수단이었다.“주스 많이 마시면 이따가 밥을 못 먹잖아.”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조금 전 통화할 때의 싸늘함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한지음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주스병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젓가락을 더듬어 손에 쥐었다. 옆에 있던 간병인이 도와주려 다가왔지만 한지음은 스스로 할 수 있다며 단호히 말했다.“그냥 도움을 받아.”강이한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한지음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그 모습은 마치 천사처럼 아름다웠다.너무 순수해서 강이한의 마음이 안쓰러울 정도였다.‘저렇게 순수한 아이를 이유영은 어떻게!’한지음이 말했다.“평생 암흑 속에서 남의 도움만 받고 살 수는 없잖아요. 스스로 살 수 있는 법을 알아가야죠.”그 말은 강이한의 죄책감만 더 가중시켰다.강이한은 무언가가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지금이야 이한 오빠가 옆에 있다지만 나중에 오빠가 내 옆에 없으면 어쨌든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잖아요. 평생을 너무 초라하고 비굴하게 살아가기는 싫어
세강의 안주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강이한은 평생이라는 단어를 뱉고 갑자기 갑갑함을 느꼈다.이유영에게 평생을 약속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들은 서로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평생을 약속했었다.그런데 고작 10년이 지났을 뿐인데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평생은 너무 무거워요. 지금이야 괜찮아 보이지만 어쨌든 난 시각 장애인이고 오빠는 대기업 수장이잖아요. 결국 난 오빠한테 짐만 될 거예요.”한지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은 짐이라는 소리에 다시 이성이 돌아왔다.‘젠장! 또 그 여자를 떠올려 버리다니!’“이한 오빠, 언니랑 화해해요. 난 오빠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지음아!”“진심이에요. 어쨌든 언니랑 오빠 사이에는 10년이라는 세월이 있잖아요.”그 말은 강이한의 분노만 더 가중시킬 뿐이었다.그는 10년 동안 자신이 온순하고 순진한 얼굴에 속아 본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수치스러웠다.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이유영을 지옥으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지음아.”“네?”“약혼식 준비할 거야.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아.”“누구랑요?”“너랑 나.”한지음은 속으로 크나큰 희열을 느꼈다.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오빠 이미지에 타격이 클 거예요. 언니랑 내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하지만….”“내 말 듣고 그렇게 하자. 응?”강이한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여전히 주저하는 한지음을 보며 그는 속으로 결심을 굳혔다.한지석은 그를 위해 목숨을 잃었는데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은 이유영의 이기심과 질투 때문에 평생 광명을 잃었다.그러니 그가 옆에서 돌봐주는 건 당연했다.게다가 진영숙도 호시탐탐 한지음을 보내버릴 생각을 하고 있으니 누구에게 맡겨도 안심할 것 같지 않았다.한지음은 아직 어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그리고 그 길을 그는 그녀와 함께 걸어갈 것이다.그는 이제 더 이상 이유영에게
진영숙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씩씩거리며 밖으로 향했다.“어딜 그렇게 가는 거니?”유혜정이 음침한 목소리로 진영숙을 불렀다.“홍문동이요!”진영숙은 이 한마디만 남기고 문을 나섰다.유혜정은 옆에서 멍하니 서 있는 강서희를 노려보며 말했다.“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따라가 봐!”유혜정도 조바심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유영 때문에 안 그래도 강이한은 가족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다.그런데 난데없는 한지음 때문에 또 서로 얼굴을 붉혀야 한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강서희는 착잡한 표정을 하고 진영숙을 따라갔다.한편, 조민정은 늦은 밤 병실을 방문했다.“이미 준비가 끝났습니다. 대표님 건강 상태가 별로 좋지 못하니 아마 병원에서 며칠 휴양하다가 대략 2주 뒤에 수술을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이때, 이유영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녀는 멍하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고개를 돌려 화면을 확인한 조민정의 표정도 착잡해졌다.그녀는 손을 뻗어 이유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하지만 현재의 이유영에게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다.강이한 때문에 하마터면 자연유산이 될 뻔하고 병원에 있는데 하필이면 이 시기에 한지음과 그의 약혼 소식을 접하다니! 머리가 멍하고 어지러웠다.그는 대놓고 한지음의 남은 생을 책임지겠다고 공표한 거나 다름없었다.동시에 대놓고 이유영과 세강의 얼굴에 먹칠한 것과 같았다.“나 괜찮아요.”이유영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이미 이렇게 될 줄을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사실 타격은 그리 크지는 않았다.“수술 날짜를 조금만 앞당길 수는 없을까요?”그녀는 강이한의 약혼식과 비슷한 날짜에 수술을 한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올라왔다.“의사 선생님이 제안한 거예요. 대표님 건강 상 문제도 있고 하니….”“내일 오전으로 수술 잡아주세요.”“대표님!”“내 말 듣고 그렇게 해요.”“하지만….”조민정은 여전히 머뭇거렸지만 이유영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결
아마 지난 생에는 강이한과의 아이를 원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피임에 딱히 신경 쓰는 개념이 없었다.“지금 어디예요?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부드러운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순정동이요.”“알았어요. 지금 갈게요.”전화를 끊은 이유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아랫배에서 여전히 통증이 느껴졌다.하지만 세강그룹에서 나올 때만큼 괴롭지는 않았기에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 의사를 만나고 돌아온 조민정이 그녀를 보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외출하시려고요?”“맞아요.”“아직 퇴원하시면 안 돼요. 의사랑 상의해 봤는데 내일 수술하는 건 위험하고 일주일 뒤에나 가능하대요. 지금 대표님 몸 상태가 어떤지 잘 아시잖아요!”최근 이유영은 죽자 살자 일에만 몰두했기에 피로가 잔뜩 쌓인 상태였다.조민정의 손에는 피로회복제와 각종 보신에 좋은 약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이유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그 인간과 엮이니 몸까지 고생하네요.”자칫 잘못해서 목숨까지 잃을 뻔한 그녀였다.그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강이한에게만큼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며 속으로 다짐했다.그에게 마음을 주었던 여자들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맞지 못했다.“그런데 왜….”조민정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유영은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잠깐만 나갔다 오는 거예요. 루이스에게 연락할까요? 아니면 저랑 같이 갈래요?”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조민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류뭉치를 살폈다.이유영은 자신이 입원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업무가 조민정에게 돌아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루이스 불러주세요.”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조민정이 오늘 자신을 홀로 내보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사실 지금 상황을 놓고 봐도 루이스와 동행하는 게 차라리 안전했다.그 시각.진영숙과 강서희는 기세등등하게 홍문동에 도착했다. 강이한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너 미쳤
전에 이유영 때문에 당한 게 있기 때문에 진영숙은 절대로 한지음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이유영이 정국진의 조카가 아니고 평범한 신분이었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지석이한테는 유일한 여동생이에요.”“그럼 다른 방법으로 보답하면 되지 굳이 네가 직접 돌봐야 할 이유가 뭐 있어!”진영숙도 지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한지석의 여동생이라는 신분은 마치 사라지지 않는 주문처럼 그들 사이에 존재했다.‘하! 쩍하면 그 놈의 여동생!’“어머니는 이번 일을 겪고도 그렇게 느끼는 바가 없으세요?”강이한이 비웃음을 지으며 진영숙에게 말했다.진영숙은 불쾌함이 가득 담긴 그 눈빛에 화가 치밀었다.“어미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사실 그가 전하고 싶은 말은 이유영을 완전히 떠나 보내기로 한 후로 남녀 사이의 사랑에 대해 혐오감이 생겼다는 거였다.10년을 함께한 이유영에게마저 배신을 당했는데 어찌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재혼도 생각이 없으니까 아예 평생 한지음이나 보살피며 산다고?’이유영과 있었던 일로 하여 강이한 역시 사랑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한지음과 약혼하겠다고 한 이유는 책임감 때문이었다.“이한아!”진영숙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기세등등한 목소리와는 달리 안타까움이 담긴 말투였다.“어쩌면 유영이랑 우리 사이에 뭔가 오해가 생겼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대체 언제부터 그렇게까지 이유영을 감싸기로 하신 겁니까!”강이한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진영숙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전에 그가 그토록 바라던 게 아니었나?진영숙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후회가 몰려왔다.만약 이유영이 있을 때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줬더라면 어쩌면 한지음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 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늦었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아들이 이유영과 잘되기를 바랐다. 그랬기에 한지음의 존재가 너무도 거슬렸다.‘그년 그거 처음부터 작정했던 거였어!’“지음이는 내가 돌봐줄 수 있어!”진영숙이
“설마 오빠한테 가서 내가 이유영을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 내 눈을 자해했다고 말할 거야?”강서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 역시 비열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지만 한지음은 그보다 더 위에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한지음은 자신에게마저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러니까 지금 자기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 오빠한테 들러붙겠다?’“말했잖아. 평생 먹고 살 돈을 주겠다고. 왜 하필이면 오빠야?”강서희가 분노를 참으며 물었다.가능하다면 저 요망한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었다.그들이 손을 잡은 이유는 아무리 괴롭혀도 그 자리에 가만히 버티고 있는 이유영 때문이었다.전에 강서희는 갖은 수단으로 강이한 신변에 나타났던 여자들을 해치웠지만 유독 이유영만큼은 견고한 성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유영을 강이한의 신변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한지음을 끌어들였던 것이다.그녀의 바람대로 이유영은 떠났지만 어쩐지 더 상대하기 힘든 한지음이 그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게 되었다.한지음은 입가에 비웃음을 살짝 머금고 말했다.“강서희, 그 여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 다 알아. 너에 비하면 네 오빠가 더 믿음직하다고 판단해서 말이지!”강이한의 옆에 있으면 평생 그 남자가 가져다주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으니 이만한 상대가 어디 있을까?“이유영은 굳이 우리가 뭘 하지 않아도 네 오빠가 알아서 지옥으로 보낼 거야.”“그래서 우리가 했던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야?”분노한 강서희가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너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지. 네가 한 짓이 나보다 덜하다고 말할 수 있어?”“뭐라고?”“너랑 나 사이에서 네 오빠는 누구 말을 믿을 것 같아?”“그게 무슨 소리야?”“자신 있으면 해보자고!”강서희는 처음으로 한지음이라는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느끼게 되었다.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녀의 눈에 한지음은 지옥에서 돌아온 저승사자로 보였다.한편 진영숙은 어떻게든 강이한을
그녀는 문밖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도 나와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저택 내부는 어둡고 고요했다.이유영은 박연준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밖에서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밤바람이 차서 저도 모르게 오한이 느껴졌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박연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유영은 추위에 떨며 외투를 여몄다.이때, 어깨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졌다.어느새 다가온 루이스가 검은 외투를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이유영도 거절하지 않고 감사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건강 상태가 좋지 못해서 그런지 춥고 온몸이 떨려왔다.지난 생에서 임신사실을 금방 알았을 때는 홍문동에서 화재를 당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여자는 임신했을 때 유난히 취약했던 것 같았다.임신 반응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유영은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계속해서 박연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았다.이유영은 박연준의 저택 앞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지만 남자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루이스는 추위에 떠는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그만 돌아가요.”“루이스.”“네, 대표님.”“박 대표 어디 있는지 좀 알아봐 줘요.”이유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은 약속시간을 어기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녀와 이미 만나기로 약속해 놓고 아무 이유 없이 사라졌을 리가 없었다.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대략 5분쯤 지나 소식이 도착했다.루이스는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무거운 얼굴로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30분 전에 박 대표님은 박 회장 측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비행기에 태워졌답니다.”이유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온몸에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 루이스를 바라보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알겠어요.”어쩌면 이게 박연준에게는 오히려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강
이유영은 현재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그들의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아마 서로 물어뜯으려고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시간이 지나면 결국 꼬리가 잡히기 마련이고 강이한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건 그녀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스스로 그들을 처벌하기 보다는 차라리 강이한이 진실을 알게 되고 지옥으로 추락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았다.어차피 시간은 많고도 많았다.그녀는 강이한이 그 긴 시간 동안 평탄치 않기를 누구보다 기원했다.그녀가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 열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루이스가 미리 연락을 해두었기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다.소화에 부담되지 않는 따뜻한 죽과 간단한 반찬들이었다.이유영은 죽 한술을 떠먹자마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그 모습을 본 집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서 물었다.“음식이 입에 안 맞으신가요?”“아니에요.”이유영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그녀 역시 왜 이렇게 괴로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 생에는 임신반응 같은 걸 느껴볼 여유가 없어서 몰랐는데 이번 생에는 생생하게 느껴졌다.억지로 음식을 삼키려고 했지만 더 이상 넘어가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화장실로 달려가서 연신 구역질을 했다.조금 전에 겨우 먹었던 죽이 그대로 나왔다.그래도 여전히 속이 더부룩하고 울렁거렸다.이 순간이 되어서야 이유영은 엄마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아이를 낳으려면 엄마가 참 많은 희생을 해야 하는구나.’아마 남자들은 절대 그런 고생을 동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마저도 직접 느껴보고 나서야 힘든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갑자기 엄마가 떠올랐다.‘나를 낳으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수했을까?’머리가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실망도 커져갔다.그리고 한지음의 엄마와 한지음까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비틀거리며 화장실을 나와 루이스를 호출했다.루이스가 공손한 자세로 다가왔다.이유영은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