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음이 바들바들 떨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네, 저 갈게요!”말이 끝나자, 유 아주머니의 그 위험하던 예리함은 다시 따뜻한 미소로 변했다.“참 잘 됐어요. 아가씨가 말을 잘 들으니, 주인님도 기뻐하실 거예요!”한지음의 꼭 쥔 주먹은 유 아주머니의 이 말을 듣고 더욱 화가 나 오금이 저릴 지경이였다.…다시 파리 쪽으로 돌아왔다!이유영은 끝내 엔데스 가문의 다섯째 도련님을 만나러 가지 않았고 박연준과 함께 식사했다.매번 박연준과 식사를 할 때면 그는 엄청 배려심 많고 다정하게 스테이크를 잘라서 이유영에게 건네주었다.“오늘의 맛이 어떤지 한번 먹어봐요.”“네, 고마워요.”이유영은 넘겨주는 스테이크를 건네받고 포크로 한 조각을 찍어 입어 넣었다. 이유영의 동작은 아주 우아하고 현숙했다… 다만 부족한 게 있다면 키가 좀 작은 것이었다.이유영을 바라보는 박연준의 눈빛에는 온유함과 부드러움뿐만 아니라 그리고 깊고 그윽했다!강이한에 대해선 두 사람 모두 자동으로 입에 꺼내지 않았다.“오늘 맛이 괜찮네요.”이유영이 박연준에게 말했다.매번 박연준이 이유영을 데리고 식사를 할 때면 그는 종래로 이유영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항상 이유영 입맛에 맞는 음식들로 잘 골랐다.2년이란 시간 동안을 지내다 보니, 박연준은 이유영 자기 자신보다도 이유영을 잘 아는 것 같았다.박연준은 이유영을 한눈 보더니 입을 열었다.“엔데스 다섯째 도련님께서 약속을 신청했다면서요?”“네 일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요.”이유영은 아주 담담하게 답했다.“그 사람 성격이 좀 급해요. 그 애 탓하지 마세요.”“연준 씨 말을 들으니, 두 사람 사이가 괜찮나 보네요?”“네.”박연준은 자기 앞에 놓인 와인잔을 들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이유영은 멈칫했다.아무리 박연준이 이곳 파리에서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어도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래도 조금 놀랐다. 그때 당시 청하시에 있었을 때와 지금 파리의 모든 것을 비교했을 때, 정리해 보면, 박연준은 청하시
이렇게 박연준의 손은 허공에 뜨게 되었지만, 그는 전혀 화내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거뒀다.이유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책망도 없었다. 심지어 아까보다 더 부드러웠다.“화났나 보네요!”이유영은 말없이 그저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하지만 이런 고요함이 더 그녀의 기분에 신경 쓰게 만들었다.“유영 씨?”말이 없는 이유영을 보자, 박연준은 그녀의 손을 살짝 끌어당겼다.그래도 여전히 말이 없었다. 심지어 박연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오늘 강이한을 만난 것부터, 그리고 엔데스 도련님 일까지 다 돌이켜보고 나니 이유영은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2년 동안… 연준 씨는 내 곁에 나 모르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안배해 둔 건가?’아무리 박연준이 자기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도 이런 선을 넘는 행위는 이유영한테는 조금 부담스러웠다.박연준이 자기를 보호한다는 이유라고 한들… 그래도 안 되었다!원래 데이트였던 이번 식사는 결국 불미스럽게 끝났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백산 별장에 도착해 이유영이 문을 열고 내리려는 순간, 박연준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유영 씨는 지금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해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유영은 순간 제자리에 굳었다.‘어떻게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냐고?’진짜 말해서 그는 전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뒤돌아 박연준이랑 눈이 마주쳤다…!“청하시에서 여기로 온 이후부터 저는 쭉 유영 씨를 지켰어요!”이유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박연준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마음속이 따뜻해졌다.박연준의 부드럽고 엄숙함이 깃든 눈을 바라보는 순간, 이유영은 마치 그때의 청하시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처음 박연준을 만났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이 남자는 그때도 이런 엄숙한 분위기가 그윽했고, 심지어 그때는 박연준이 도대체 이후에 어떻게 자기 와이프랑 지낼지 의심도 했었다.이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키고는 가슴속의 아픔을 꾹 짓누르며 말했다.“
“대표님.”조민정은 앞 차가 강이한의 차인 것을 알아보고 온몸의 경계를 다 세우며 이유영을 불렀다.이유영은 찡그린 미간을 살살 어루만지며 루이스한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네!”차에서 내리려던 루이스는 이유영의 말을 듣고 동작을 멈췄다. 옆에 있던 조민정은 더 바짝 긴장을 세웠다.이유영은 깊게 한숨을 들이키고는 눈을 떴다.어차피 마주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마주하게 되어 있다…!‘이 사람이 이렇게 찾아온 이상,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물어볼 게 참 많았을 거야.’이유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탁-’ 문이 열리면서 강이한의 기다랗고 큰 손바닥이 이유영의 눈앞에 훅 들어왔다.매우 젠틀한 동작이었지만 강렬한 패기가 느껴졌다.조민정은 걱정스럽게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끝내, 이유영은 강이한의 손에 자기의 손을 올렸다.그러자…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강지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살짝 사그라진 것을 느꼈다.강이한의 차에 탄 이유영은 그저 창밖을 내다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말해 봐. 이번에는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불렀어?”“당신 혹시 풍산이 파리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어?”풍산?박연준!이 두 자 사이에 일정한 연관이 있는 건 분명했다. 박연준이 풍산의 배후 주인이며 그리고 그 신비한 주인님이 이 몇 년 동안 무슨 일을 벌였는지 이유영은 당연히 알고 있다.“알아.”“그런데도 당신이랑 박연준을 그리 가깝게 지내게 하다니, 당신 외삼촌도 참 마음씨가 어지간히 넓으신 게 아니네.”강이한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이유영은 강이한을 바라보며 똑같이 비꼬는 말투로 답했다.“나도 전에는 마음씨가 참 넓었었지!”마음씨가 넓기로 이렇게 독사 같은 사람이랑 같이 결혼까지 갔지.이유영의 말이 끝나자, 작은 차 안의 공기는 또다시 꽁꽁 얼어붙었다.앞에 앉은 기사님과 이시욱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났다.이유영의 비꼬는 눈빛에는 사람을 몰아세우는 예리함, 그리고… 그녀만의 소탈함이 담겨 있었다.이런 말을
강이한은 덥석 이유영의 손목을 잡았다!두 사람 눈이 서로 마주친 때, 강이한은 모든 것을 다 자기 손에 장악하고 있는 사람처럼 눈빛에는 온통 예리함만 가득했다.비록 이유영이 지금 위에서 강이한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강이한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마치 이 남자는 여전히 그녀가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유영이 아무리 노력해서 높이 올라간다고 해도 강이한은 여전히 손쉽게 그녀의 인생을 조종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목을 조를 것조차 쉬운 죽 먹기였다.그렇다고 해도 이유영은 지금 눈에 두려움이 일도 없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눈에 비친 폭풍 후 고요함을 보고 천천히 살금살금 아까처럼 다시 손을 그의 옷깃 안으로 집어넣었다.차가운 손가락은 살며시 그녀의 아랫배에 있는 10인치 길이의 흉터를 쓰다듬었다. 강이한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 흉터가 맹장 수술로 인한 흉터라고 할 생각은 하지 말고!”아까 강이한이 갑자기 이렇게 무례한 행동을 한다고 했더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유영이 당황한 틈을 타서 이 일에 대한 질문에 손쓸 겨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강이한이 아이를 물어보자, 이유영의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방금보다 더 차가워졌다.심지어 일말의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당신 그럼 내가 그때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말하는 이유영은 웃고 있었으나 그 웃음은 마치 도깨비처럼 서늘했다!2년이나 평온했던 그녀의 두 눈에는 여성 사업가의 예리한 눈매만 남아 있었는데 지금 보니 색다른 독기까지 갖고 있었다!하지만 그 눈에는 유독 강이한에 대한 미움만 없었다!왜 미움이 없는 걸까?그건… 이제 아무렇지 않기 때문이다!그녀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이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 대해 미워할 게 뭐가 있는가?2년이란 시간 동안에 얻은 것들, 새로 가진 것들만으로도 이미 이유영에게 지난 과거를 내려놓을 이유가 충분했다…!그리고 이유영은 얻음 속에서 진짜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그래서
이유영은‘직접’이 단어에 중점을 가해 말했다.이 말은 또한 강이한에게 2년 전 자기가 왜 감옥에 있게 되었는지를 일깨워주었다.이유영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은 삽시에 힘을 줄였다.그리고 원래 분노에 차 있던, 이유영을 바라보던 강이한의 두 눈도 이제는 조금 조금씩… 아픔이 더해졌다.강이한이 입을 열기 전에 이유영은 손을 들어 자기의 옷을 확 풀었다. 흉측한 화상 자국들을 드러내고는 외투를 벗어 던졌다.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니 팔에도 상처들이 가득했다.“보여? 이건 고작 3분의 1밖에 안 돼. 이 상처들에 얼마나 많은 마취제를 썼는지 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약을 발랐는지 알아?”강이한은 말문이 막혔다.설령 저번 날에 이미 흉터들을 봤다고 해도, 지금 이렇게 옷을 벗고 다시 큰 면적의 화상 자국들을 눈앞에서 직접 보니 강이한은 저도 모르게 동공이 축소되었다.입술을 버금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혀가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모든 감각을 다 잃었다.말이 없는 강이한을 본 이유영은 더욱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크게 다쳐서 화상을 입은 건 둘째 치고, 다치지 않았다고 한들… 나는 그 아이를 가지지 않았을 거야!”이유영은 중간에 잠시 멈칫하더니 뒤의 한마디는 태도가 더욱 결연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조금 부드러워진 눈빛은 또 이 말에 자극받아 삽시에 빨개졌다.…두 사람은 어떻게 헤어졌는지 모른다.아이 얘기에 있어서 결국 강이한은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이유영 배에 그 10인치 되는 자국이 있다고 해도 결국은 아무런 해명도 받아낼 수 없었다.지금의 이유영은 강이한에 대해 무척 소탈했다. 너무 소탈한 나머지… 마치 두 사람이 전혀 만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이유영은 이제 태연자약하게 강이한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의 핍박에 찬 질문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차근차근 대답할 수 있었다.“도련님.”차 안에서 이시욱은 걱정스레 강이한을 보며 말했다.그들은 아직 로열 글로벌 문 앞에 있다.이유영이 들어간
말이 끝나자!이시욱과 기사님은 강이한의 기운이 아까보다 몇 푼 더 차가워진 것을 느꼈고 두 사람은 식은땀을 흘렸다.따라서 강이한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 속에는 강한 비웃음이 담겨있는 듯했다.“하!”'내가 감옥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조사를 한다고?'보아하니 2년 동안 이유영은 한 번도 청하시의 일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이유영...!'진짜로 2년 동안 나를 잊고 지냈다고?'이 2년 동안, 이유영의 모든 관심은 로열 글로벌에 있었다. 마치 그녀의 세상에는 강이한이라는 사람이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시동 걸어!”이시욱과 기사님이 마음 졸이고 있을 때 강이한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리고 이 한마디를 듣고 두 사람 모두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난 일주일 동안!강이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힘겨운 일주일을 지냈다.그들도 강이한과 이유영의 사이가 좋아지지 않는 한... 그들의 삶도 힘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담배 냄새가 엄청 짙게 차 안을 풍겼다.“이시욱.”“네.”“알아봐, 그 아이!”강이한은 말 하면서 담배꽁초를 차창 밖으로 내던졌다.눈 밑은 깊고 아득했다.비록 이유영이 아이를 이미 지웠다고 말했지만! 그리고 이유영 몸에 있는 큰 면적의 화상들을 보면 그때 당시 상황에 아이를 남겨두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이한도 알고 있다.하지만 이유영 아랫배의 흉터가 그리 긴 것도 그렇고, 흉터의 위치도 그렇고 아무리 보아도 다른 수술로 인해 생긴 것은 아닌 것 같았다.이시욱은 멈칫했다.아까 강이한과 이유영이 나눈 대화를 그들도 차 안에서 다 들었다.그리고 이유영을 찾으러 오는 길에 그들은 도저히 강이한이 아이의 일에 관해 물으려고 온 것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전에도 강이한이 이시욱더러 조사해 보라고 시켰었지만, 이 부분에 대해 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었다.“네.”이시욱은 고개를 끄덕였다.이 시각, 이시욱의 심정은 매우 무거웠다.이시욱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꺼냈다.“2년 전의
“이 대표님, 저도 이 일에 대해 보고드리려고 했습니다.”루이스는 이유영의 말투에서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따라서 강이한의 차에서 두 사람이 또 한바탕 싸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2년 전처럼, 두 사람을 어디에 던져 놓든 바로 한판 싸울 수 있었다.“얘기해 보세요.”이유영은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 앉았다.그리고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물이 들어가니, 그의 속도 조금 괜찮아졌다.루이스는 말했다.“이 2년 동안, 그분이 감옥에 있는 것, 이외의 기타 모든 것들은 전부 지워졌습니다.”“지워졌다고요?”“네!”이유영은 어리둥절해졌다.'지워졌다고?'그게 무슨 뜻인지 이유영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예쁜 눈을 잠시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그녀의 눈 속에는 날카로움이 더해졌다.“자네의 뜻은 그 사람이 어떻게 나왔는지 조사해 낼 수 없다는 건가요?”“네, 그분이 손을 쓴 것 같습니다. 아마도 대표님을 모르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이유영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눈 밑에는 날카로움이 짙게 반짝였다.강이한이 스스로 지웠다고?'내가 모르게 하기 위해서...!?'그렇다면, 일이 더 재밌어 지는데!이유영이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루이스는 말을 어어 내려갔다.“한지음 씨는 지금 모리나 호텔의 로열 스위트룸에서 지내고 있습니다.”이유영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은 순간 싸늘해졌다!한지음...!2년 동안 강이한과 똑같이 이유영이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하하!”풍자한 웃음이었다.눈 밑에는 조롱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강이한 이 사람, 한편으로 나한테 아이에 관해 묻고, 다른 한편으로 한지음을 곁에 데리고 있다니.'“강이한이 한지음한테 참 잘하나 보네요!”이게 잘하는 거지 잘하는 게 뭐 따로 있나. 이런 상황에도 한지음을 데리고 있다니.비록 청하시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강서희의 처지가 별로 안 좋다는 것을 이유영은 은은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지음...!루
이유영은 그나마 지현우를 많이 의지했다.지난 2년 동안 이유영이 회사를 빠르게 장악하는 데 지현우의 공이 빠질 수 없었다. 그의 능력에 겨우 비서라는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만약 지현우가 혼자서 회사를 차린다면, 심지어 우리 회사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수도 있겠다.''그러나 지금 아예 연차를 반년이나 썼다니, 설마 다른 곳에서 스카우트해 간 건가?'이렇게 생각하자 이유영의 심장은 쿵쾅거렸다.곧 인사팀 부장이 찾아왔다.“이 대표님, 지 비서님이 집에 엄청 중요한 일이 있으시다면서 전화만 한 통 하고 가셨습니다.”“휴가 신청서 없이요?”“네.”이유영이 조금 불쾌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인사팀 부장은 등에 식은땀을 흘렸다.이유영이 물었다.“무슨 일을 처리하는 데 반년이나 걸리죠?”이유영의 물음에 인사팀 부장은 온몸을 떨었다.'그 당시 저도 이렇게 물었죠!'하지만 지 비서가 한마디 설명도 없이 떠났는데, 인사팀 부장인들 무슨 방법이 있나요?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유영은 무조건 바로 해고했을 텐데 지현우는... 다르다. 설령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유영은 그저 화를 낼 뿐이지 해고한다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먼저 나가보세요.”이유영은 마음이 심란하여 손을 흔들었다.2년 동안, 그녀의 주변은 줄곧 평온했다. 하지만 갑자기 짧디짧은 며칠 사이에 많은 일들이 벌어진 것 같았다.심지어 이유영 쪽에서 잘 알지 못하는 일들도 많았다.따라서 그녀의 마음은 매우 불안했다!강이한이 오늘 자신한테 한 질문이 떠올라, 이유영은 핸드폰을 들어 정국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대편에서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유영아.”“외삼촌, 다 안배됐나요?”“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외삼촌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마음이 살짝 놓였다.감방에서 썩을 줄 알았던 강이한이 돌아왔다. 사람은 역시...제일 가까운 사이라도 상대방을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마치 지금의 이유영처럼, 지난 1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봐온 것은 강이한의 표면일 뿐이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