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지는 이유영의 손을 잡고는 그녀의 손바닥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이유영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예전에도 그랬다.매번 이유영이 상처를 받았을 때면 소은지가 아무 말 없이 이유영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너랑 엔데스 명우는 지금 어떤 상황이야?”이유영은 살짝 걱정되어 물었다.어찌 됐든 이유영은 소은지가 도대체 왜 엔데스 현우랑 한편이 되었고 또 엔데스 명우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점에 대해서 그녀는 정말 소은지가 걱정되었다.말이 끝나자마자 소은지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새빨간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사람에게 아주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의미심장한 웃음은 마치 위험천만한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일단 폭발하게 되면... 이 속에 엮인 수많은 사람이 다 같이 무너지게 될 것만 같았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이유영은 소은지의 눈빛에 숨겨진 예리함 때문에 충격받았다. 그녀는 소은지의 이런 면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예전에 직장에 있었을 때 소은지는 처사가 단호하고 깔끔한 성격이었다.그리고 오늘의 이런 예리함과 한데 잘 어울려서 사람에게... 그녀가 곧 태생부터 여왕인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더구나 오늘의 그녀는 엄청난 지위를 가지기까지 했다.소은지는 마치 파리에 딱 맞게 태어난 사람 같았고 천생이 엔데스 가문의 여자가 될 사람인 것만 같았다.하지만 이 순간 이유영은 이런 소은지를 보면서 걱정이 끊임없이 생겨났다.소은지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놈? 아무래도 2년이나 되는 빚이니 천천히 청산해야 하지 않겠어?”“설유나는?”설유나 때문에 소은지는 방법을 써서 엔데스 현우랑 손을 잡게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설유나는 소은지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설유나?’“그놈은 지금 그 여자의 곁을 잘 지켜주고 있어.”소은지는 사람을 붙여 시시때때로 설유나를 감시하고 있었으며 엔데스 명우가 병원을 떠나기만 하면 소은지에게 연락이 오곤 하였다. 그리
소은지가 떠난 뒤 이유영은 걱정이 태산인 얼굴을 하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소은지의 일은... 줄곧 그녀의 마음속 응어리였다.주방에서 임소미는 월이에게 밥을 먹여주고 있었다. 꼬맹이는 아주 반듯하게 임소미의 품에 안겨있었다.밖에서 돌아온 여진우는 이유영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결국, 이유영은 여진우와 함께 서재로 들어갔다. 여진우는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용건이 있어?”“그 사람... 죽었어?”이유영은 냉랭하게 물었다.그 사람은 강이한을 말한 것이었다.비록 어젯밤에 이성을 잃었다고 하지만 이유영은 자신이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말투에 여진우는 흠칫하였다.“넌 그 사람을 닭으로 생각하는 거야!?”“...”‘닭? 이게 무슨 비유야?’여진우는 아주 바빠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것도 무슨 일이 있는 것 때문인지 지금 책장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면서 이유영에게 말했다.“강이한 같은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이유영의 힘이 별로 세지 않은 것을 보았으니 여진우도 발길질을 몇 번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별문제가 없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이유영의 행동은 그저 강이한에게 상처를 낸 정도뿐이었다.말이 끝나자 여진우는 분위기가 조금 썰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후로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보아하니 너는 정말 그 사람을 무척이나 미워하는구나.”강이한에 대한 그녀의 미움은 그가 괜찮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눈빛에서... 증오의 감정이 끊임없이 차 넘치는 정도였다.“별일 없는 거야?”‘참 명줄이 끈질기기도 하네!’여진우는 대답했다.“그런데 이번 일을 겪었으니 그놈은 아마 아이를 데리고 서주로 갈 거야.”“...”‘서주로 간다고!?’강이한은 더는 파리에 남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서주 쪽의 상황도 지금 몹시 긴박했기에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파리에 남게 되면 이유영이든 아니면 이온유이든 그는... 그들을 대처할 방법이
하지만 지금... 박연준과 함께 서주로 가겠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임소미는 이해가 안 되었다.서주와 파리의 상황에 대해 임소미는 잘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정국진은 이유영의 이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는 그윽하게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것이 바로 네 결정이야?”“네, 아빠. 이것이 제 결정이에요.”“넌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아빠가 저를 지켜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아요. 하지만...”여기까지 말한 이유영은 뒤의 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지 못했지만, 정국진은 여전히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정씨 가문은 줄곧 그녀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하지만 강이한 때문에 그녀는 진작에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누군가가 그녀를 지켜준다고 하도 그녀를 깊은 구렁텅이 속에서 빼낼 수는 없었다.지금 유일한 방법은 이유영 자신의 손에 달렸다.만약 꼭 이런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면 그러면 지금 이유영을 탓할 것이 못 되었다.“그럼 월이는? 미련이 안 남겠어?”임소미는 애처로운 말투로 말했다. 강이한이 월이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자 그녀는 또 마음이 아팠다.이유영은 품속에 있는 아이를 잠시 보고는 입을 열었다.“이 일을 해결하지 않는 한 저랑 제 딸은 영원히 편안한 날을 보낼 수 없어요.”이유영의 말이 맞았다. 영원히 편안하게 지낼 수 없었다.월이에게 이런 아버지가 있는 것 때문에 아이도 엄마처럼 편안하게 지낼 수 없었다.임소미는 어쩔 수 없이 정국진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정국진의 눈빛은 깊고 싸늘했다. 이 일에 있어서... 그는 결국 이유영을 지지하는 편에 섰다.임소미는 입술을 벌름거리며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가까지 나온 말들을 다시 도로 삼켜버렸다.끝에는 정국진이 입을 열었다.“진우랑 함께 가.”그랬다. 여진우가 있었다.만약 여진우와 함께 가게 되면 그들도 그나마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그리고 이번에 이유영은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었다.“네.”‘이렇게 해서 두 분이 조금이
만약 전에 박연준이 이유영을 접근했던 이유가 강이한과 이유영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은 달랐다.이정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의 눈빛은 조금 더 어두워졌으며 그를 쳐다보았다.이정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어찌 됐든 사모님이 전에 박연준 씨와 사이가 틀어졌던 것은 박연준이 사모님을 이용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알았다고?’이정의 말이 맞았다.이유영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여러 번이고 이유영에게 박연준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일깨워주었던 것이었다.이유영에게 박연준이 그녀를 접근한 데는 무조건 목적이 있다고 누누이 말했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사실을 알고 난 뒤 사이가 틀어졌다면서 왜 또다시 붙어있는 거지? 설마 정말 이정의 말대로 그렇고 그런 사이야? 이번에 두 사람은... 다른 건가? 근데 어디가 어떻게 다르지?’이런 질문들이 강이한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용솟음치고 있었으며 그의 사유를 한 번 또 한 번 충격하였다.현장의 분위기는 다시 굳어져 버렸다.강이한의 분위기는 점점 더 싸늘해졌고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고 생각했을 때 의사가 갑자기 다가와서 말했다.“강이한 씨, 이온유 아가씨가 많이 위독합니다. 지금 이미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냉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정말 다사다난한 나날들이었다.이정과 이시욱이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 강이한은 이미 달려 나갔다. 수술실 문 위의 빨간 불은 그토록 눈이 부셨다.하지만 이 순간 이온유가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강이한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전공의가 위급 통지서를 들고나왔다.“어찌 됐든 꼭 우리 온유를 살려주세요! 만약 온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들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히스테리한 고함이 온 복도에서 울려 퍼졌다.이정과 이시욱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강이한이 위급 통지서를 바닥에 갈기갈기 찢어 놓은
이정이 떠난 뒤 이시욱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도련님.”그는 입술을 벌름거리며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술실 위에 켜진 빨간 불을 보고는 결국 입가까지 나온 말들을 다시 도로 삼켰다.서주의 상황이 긴급했다.그는 반드시 제일 이른 시일 안으로 돌아가야 했다....강이한 쪽의 광기에 비하면 이유영은 오히려 며칠 동안 조용한 나날을 보낸 셈이었다. 요 며칠 월이를 데리고 돌아온 뒤로부터 강이한은 줄곧 그들의 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강이한이 없으니 그들은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저 표면적이라는 것을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이온유의 상태가 악화하였다는 소식을 그녀도 전해 들었다.이건... 폭풍우 전야의 고요함이 분명했다.바로 이때 집사가 부랴부랴 위층의 어린이 놀이방으로 달아 들어오며 말했다.“아가씨!”“왜요?”이유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집사의 안색이 심각한 것을 보자 그녀는 조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순간 집사가 말했다.“강이한 씨께서 오셨습니다.”“...”말이 끝나자 이유영의 안색은 확 어두워졌다.그러고는 뒤에서 월이를 돌봐주던 보모를 보면서 말했다.“월이랑 잠시 놀고 있으세요.”“네, 아가씨.”이유영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집사를 바라보았다.“집사님도 여기에 계세요.”“네.”전에 강이한에게 당했던 적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아이의 곁을 떠날 때면 반드시 적어도 3명을 월이의 곁에 붙여두곤 하였다.3명의 보모가 지금 다 월이의 곁에 있었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집사까지 이곳에 남겨두었다.어찌 됐든 강이한 그 미친놈은 이온유를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었다.아래층으로 와보니 강이한이 퇴폐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몸에 있는 흰색 셔츠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으며 가슴에는... 핏자국이 있었다.지금 강이한의 낭패한 모습은 딱 일주일 전 이유영의 낭패한 모습과 비슷했다.그녀는 미친 듯이 각 병원을 돌아다녔으며 거의 병원의 모든 수술실을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물렸다.강이한의 눈 속에 드러나 있는 실망을 보고서도 이유영은 한없이 평온하기만 했다.“아빠한테 사랑 못 받는 애라고 나까지 걔를 사지로 내몰 수는 없잖아?”누가 봐도 강이한 들으라고 하는 말에 그는 몸을 벌벌 떨며 대꾸했다.“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는!”“아무것도 못 먹은 지 벌써 3일째야.”하지만 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평온한 말투로 내뱉는 엄청난 말에 강이한은 가슴이 답답해 나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아직 두 살밖에 안 된 아이야. 그래서 남이 주는 건 먹지도 않아. 그런 애를 넌 진짜 죽일 생각이었던 거야?”“...”다시 한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강이한이 뭐라도 해명을 해보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입을 열어봤자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이내 다시 다물었다.이유영의 말대로 아직은 고작 2살이었다, 3일은 아이가 버텨내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시간이었다.“유전자 검사했으니까 이제 네 딸인 거 알겠네.”다 알면서도 월이를 이용해 이온유의 수술을 진행하려고 했다는 게 이유영이 강이한을 절대 용서 못 하는 이유였다.끝도 없는 차별이 한 아이의 목숨을 뺏어버릴 뻔했던 것이다.“유영아.”“애가 어떤 분유 마시는지 물어본 적은 있어? 어떤 분유를 마시는지도 모르면서 왜 멋대로 분유를 바꿔. 분유를 바꿀 때도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바꿔야 한다는 것도 모르잖아 넌. 애가 뭘 좋아하는지 넌 관심조차 없었잖아.”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는 이유영에 강이한은 그야말로 유구무언이었다.이소월도 제 딸인데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 뭘 먹여야 하는지 물어보기는커녕 이유영의 귀찮은 연락을 피하려고 일부러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방치하고 전화가 꺼지도록 내버려 두었다.“어떤 분유를 먹는지, 종류는 어떻게 바꾸는지, 이유식은 뭘 먹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혼자 판단해.”이유영의 말투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그 말투가 너무나 평온해서 오히려 강이한의
이게 이유영한테는 가장 의외였다.이온유를 살리겠다고 다시 그 얼굴을 들이밀 정도로 강이한이 독한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차별의 끝을 달려가고 있는 강이한에 이유영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유영아, 온유는 사실...”강이한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움직였지만 이내 다시 입을 다물었다.저 사실 뒤에 무슨 말이 따를지 이유영은 아직도 몰랐다.전에 강이한이 비슷한 말을 꺼낸 적이 있었지만 그는 그때도 말을 하다 말았다.강이한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다시 이유영의 차가운 눈을 보며 말했다.“너도 이제 엄마잖아. 아이가 엄마라는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잖아. 온유한테는 네가 엄마야. 제발 이렇게 매정하게 굴지만 말고 좀 도와줘...”강이한의 말에 이유영은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박연준이 치밀하게 계획한 일이니 이온유는 이유영을 엄마라 믿고 있을 게 분명했다.하지만 이유영에게는 친딸인 이소월이 있었기에 이온유가 월이보다 우선이 될 순 없었다.그래서 이유영은 여전히 차가운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온유 일은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해, 하지만 소월이를 희생하면서까지 걔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돌아가 줘 이만.”엄마의 마음으로 보면 이온유는 정말 불쌍한 아이였지만 그 아이의 엄마가 된 게 이유영의 뜻이 아니었기에 남이 계획한 일에 자신을 희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그리고 이온유는 한지음의 딸이었기에 도와주고 싶지도 않았다.강이한은 이토록 결연한 이유영을 보며 가슴이 아파와 더 말해보려고 했지만 병원에서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에 강이한은 이유영의 눈치를 한번 보고 전화부터 받았다.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밖으로 새어 나오는 음성만 들어도 아주 급한 일이라는 건 이유영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그걸 증명하듯 통화를 마친 강이한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왔다.“알,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자마자 강이한은 바로 이유영을 보며 말했다.“유영아, 그냥 내가...”강이한이 절망적인 말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강이한은 생명을 이토록 가볍게 여기는 이유영이 실망스러웠다.누군가의 죽음이 이토록 부질없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강이한은 오늘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하지만 이유영이 한지음에게 차가운 건 생명의 무게를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그녀가 바로 죽음의 아픔을 몸소 느꼈던 사람이라서였다.홍문동, 그리고 감옥에서의 화재까지 두 차례의 화재에서 죽어 나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한지음 한 사람의 죽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살이 불에 타는 느낌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몸에는 평생 지우지 못할 화상 흉터가 남겨져 있었다.그런 그녀를 매정하다 질책할 자격이 강이한에게는 없었다.이유영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한지음이 잠시나마 겪었던 그것들은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하지만 강이한은 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죽은 게 다 자신이 부탁해서라고 떠들어대고 있었다.이유영이 다시 살아난 것도 다 자신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라고 말할 것 같은 강이한의 기세에 이유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설령 진짜 강이한 덕분에 살아난 것이라 해도 그가 이소월을 빌미로 잡아 이온유를 살리려 할 때 이유영은 이미 영원히 그와 적이 되기로 결심했다....그렇게 강이한이 떠나고 이유영은 이온유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사람처럼 박연준이 올 때까지 소월이와 놀아주고 있었다.“날 찾았다며?”이유영에게로 다가간 남자는 부드럽게 말하며 이소월과 장난을 쳤다.그런데 신기하게도 낯선 사람에게는 곁을 주지 않았던 소월이가 박연준을 보자마자 배시시 웃으며 두 팔을 벌려 그에게 안기려 했다.박연준은 자연스레 소월이를 안아 들고 말했다.“살 많이 빠졌네.”“...”박연준의 말에 소월이가 제 친아빠인 강이한한테 끌려가서 아무것도 못 먹고 와서도 울기만 했던 지난 3일을 떠올리던 이유영은 또 한 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너도 아는 걸 얘 친아빠란 사람은 전혀 모르더라.”“...”박연준은 강이한이 모르는 게 아니라 그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금은 온 신경이 이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