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Chapter 561 - Chapter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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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1화

시연은 조용히 손바닥을 꼭 쥐었다.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고유건이 한 말, 틀린 건 아니야.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결국 사람 생명은 다 똑같잖아...’ ‘하지만 사람 생명을 구하는 일과 아버지를 용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구해야 할까?’ ... 한편, 은범이 유건을 만나지 못한 채, HUA테크와 GP그룹의 협업은 이달 말로 종료될 예정이었다. 요 며칠 은범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골치 아픈 건 이 일 하나만이 아니었다. 어제는 성하그룹 쪽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분기 협업을 끝으로, HUA테크와의 재계약은 없을 거라는 소식이었다. 은범은 친구이자 HUA테크 상무인 백일재와 함께 성하그룹 대표를 찾아갔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종일 밖에서 뛰어다니던 은범이 집으로 돌아온 건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샤워하고 약 먹고 겨우 몸을 뉘었는데, 눈을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강수희가 서 있었다. 두 손엔 큼직한 장바구니와 비닐백. “은범아, 엄마가 국 좀 끓였어. 반찬도 몇 가지 가져왔고.” 은범은 말없이 돌아섰고, 강수희는 그 뒤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어머니.” 은범이 입을 열었다. “이런 거 인제 그만 좀 가져와요. 저, 이 정도 나이면 밥은 알아서 챙겨 먹어요.” 아들의 무뚝뚝한 반응에 강수희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그렇지만 밖에서 먹는 건 질릴 때도 있잖아.” 강수희는 가져온 반찬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했고, 냉장고에 넣기 전엔 스티커를 붙였다. “위에 라벨도 붙였으니까 먹을 때 볼 수 있을 거야. 넌 데우기만 하면 돼.” 더는 설득이 안 통할 것 같아서, 은범은 그냥 입을 닫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는데, 박일재에서 온 전화였다. 은범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설마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순간, 마음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전화가 연결되자,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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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2화

은범은 늘 그렇게 생각해 왔다. 만약 시연 때문이라면, 유건은 애초에 HUA테크와 손을 잡지 않았을 거라고.하지만, 일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닐 수도 있지! 잘 생각해 봐. 우리랑 제일 먼저 계약 끊은 사람, 고 대표잖아. 그리고 그럴 능력 있는 사람도, 고유건밖에 없어.] 은범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일재 말도 꽤 설득력이 있지.’ “그래도 난, 고 대표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 사람, 그 정도로 감정에 휘둘릴 인간은 아닌데...’ 쿵!갑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 쾅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은범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엌 쪽에서 강수희가 당황한 얼굴로 반찬통 하나를 떨어뜨린 상태였다. 다행히 뚜껑이 단단히 닫혀 있어 내용물이 쏟아지진 않았다. 그런데도, 은범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어머니... 왜 저렇게 당황한 눈빛이지?’ “일단 끊을게.” 전화를 서둘러 끊고, 은범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수희 옆에 앉아 반찬통을 주워 정리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강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은범아, 너 방금... 전화할 때 고 대표 얘기했지?” “네.” 은범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 척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떠보려면 지금이 기회였으니 말이다. “요즘 고 대표랑 우리 회사 계약도 끊겼고, 그 이후로 프로젝트가 두 개나 물 건너갔어요. 일재가 묻더라고요, 혹시 제가 고 대표한테 밉보인 건 아니냐고요.”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수희가 눈을 질끈 감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반응을 본 순간, 은범의 가슴은 묘하게 쿵 내려앉았다. ‘뭔가 있다. 어머니... 뭔가 아는 거야.’ “어머니.” 은범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저한테 뭐 숨기고 있는 거 있어요?” “엄마... 엄마는...” 강수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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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3화

진료 시간엔 병실 출입이 어려워서 은범은 외과 병동 건물 아래를 한참 서성이다가, 응급실과 외래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래... 오늘 시연이가 외래 근무일 수도 있잖아.’ 먼저 응급실을 찾았지만, 그곳엔 시연이 없었다. 이후 외래로 가보니 운이 좋았다. 시연은 정말로 외래에 있었다. 간호사가 환자를 부르고, 문이 열릴 때마다 시연은 환자와 마주 앉아 진지하게 상태를 묻거나, 진찰대 앞에 서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진지하게 집중한 듯한 그녀의 표정은 아주 안정되어 있었다. ‘별일 없나 보네. 고유건이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그 분노는 나한테만 쏟은 건가...?’‘시연이는 건드리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그래도 고유건,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구나.’ 은범은 그냥 돌아설 수도, 직접 물을 수도 없었다. 예전에 시연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 ‘되도록 얼굴 보지 말자’는 그 약속을 말이다. 그래서 은범은 조용히 외래 복도 한쪽에 앉아, 시연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점심 무렵.오전 진료가 끝난 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더니 병원 건물을 나섰다. 은범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갔다. ‘근데... 이상하네. 고유건이 붙여놓은 경호원은 어디 갔지?’ ‘내가 못 본 건가? 아니면... 오늘은 따로 없었던 건가?’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따로 있었다. 병원 문을 나와 좌측으로 꺾으면, 길은 세 방향으로 갈라진다. 하지만 시연이 선택한 길은... 진아 집이나 고씨 가문 본가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었다. ‘이 방향은 뭐지?’ 미간을 찌푸린 은범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삭에 가까운 몸으로, 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들어 보였지만, 묵묵히 나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시장?’ 마트보다 조금은 번잡하지만, 이곳의 채소와 고기들은 더 신선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닭이 당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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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4화

[너희 집안 때문에... 고 대표가 시연이더러 문란하다고 했어. 그래서, 시연이를 버린 거라고!]은범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고,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내가 시연이를 이렇게 만든 거야?’ ‘시연이가 이렇게까지 무너졌는데... 정작, 난... 그 이유도 모른 채...’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은범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고유건한테 가야 해. 오해든, 분노든, 뭐든 다 풀어야 해.’‘내가... 시연이 대신 말해야 해.’ 그날 밤, 은범은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부터 GP그룹 앞으로 향했다. 해가 채 뜨기도 전이었다. ‘여기서 마주친다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어젯밤부터 회사에 있었던 건가?’ 시계는 어느덧 오전 10시를 가리켰고, 불안해진 은범은 1층 로비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에 조심스레 물었다. 직원은 은범이 또 계약 관련 건으로 온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대표님,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안 나오셨다고요?” 은범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어디 계신지는...” “죄송합니다.” 직원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희가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은범은 더 묻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바로 백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군데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정보를 얻었다. [고 대표? 지금 태평컨트리클럽에 갔대.]“알겠어. 고마워.” 전화를 끊자마자, 은범은 곧장 차를 몰아 태평만으로 향했다. 그곳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골프장. 다행히 은범도 회원권이 있어, 어렵지 않게 입장할 수 있었다. 프런트에 물으니, 유건은 성하그룹 대표와 라운딩 중이라고 했다. ‘협상 중이겠지... 괜히 방해하면 안 돼.’ 그래서 은범은 탈의실 근처에서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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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5화

“형님!” “고 대표님!” 바로 그때, 주지한과 성하그룹 대표 공대식이 뒤늦게 골프장 클럽하우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순간 굳어졌다가, 곧바로 달려가 두 사람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놔!” 유건은 이미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제어 불가능한 분노로 이성을 잃은 채, 버둥거리며 외쳤다. “오늘 저 자식, 내가 진짜 죽여버릴 거야!” “하하하!” 은범도 미쳐 있었기에, 핏줄이 터질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죽여봐! 오늘 못 죽이면, 넌 진짜 개X끼야, 알아?!” “아이고!” 공대식이 은범을 힘껏 누르며 혀를 찼다. “노 사장님, 그 입 좀 다물죠? 지금 얼굴이 반쯤은 엉망이잖아요. 거울도 안 봤어요?” “지한아, 이 손 놔!” 유건이 이를 갈며 외쳤다. “형님...” 지한은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절대 이 손을 놓아선 안 돼.’ 이 상태로 풀어주면 유건이 또 한 대 날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보안팀 부를까요? 노 사장님 좀 모시고 나갈 수 있게요.” “안 돼!” “필요 없어!” 두 사람은 마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하이에나처럼 공대식과 주지한을 향해 동시에 외쳤다.일단 상황은 멈췄고, 은범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고 대표, 그날 병원에서... 나... 의식 없었어요. 아무것도 몰랐다고요. 며칠 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유건의 눈썹이 스치듯 꿈틀거렸다. “우리 어머니가 멋대로... 아버지를 시켜서 잠든 시연이를 침대 위에 올려 둔 거라고요...”“시연이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날... 시연이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뭐라고?” 유건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입술이 조금 떨릴 정도로 호흡도 빨라졌다. ‘그게... 진짜야? 그럼... 시연이는...’ 하지만 곧, 유건은 싸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 “그건 비즈니스에서 밀린 너희 집안이 만들어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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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6화

시연은 마스크에 장갑까지 단단히 착용한 채, 응급실 입구로 빠르게 걸어 나왔다. “어떤 상황이에요?” “소한테 받혔어요! 가슴 쪽을요!” “복부 쪽이잖아요.” 시연은 빠르게 환자의 상태를 스캔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여보내세요. 모니터 잡고, 간호사도 불러야 합니다. 아, 정맥 확보가 우선이고, 제모 준비랑 수술실에 보고도 해야 해요.” “채혈은 제가 할 테니까 수술실 세팅도 해주세요. 결과 나오는 대로, 혈액은행에 전달해서 수혈 준비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만삭에 가까운 배를 안고 있음에도, 시연의 동작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예전처럼, 아니 그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시연이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도 충분히 잘하고 있네.’ 유건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가 본 건 단 한 장면뿐이었다. 응급실 자동문이 ‘슥’ 닫히며, 시연의 뒷모습이 그 안으로 사라지는 장면. 참 절묘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참... 어색한 순간이기도 했다.유건은 아무 말 없이 로비 벤치에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가만히 문만 바라보며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시연이 진료차트를 손에 쥔 채, 빠르게 걸어 나왔다. “보호자는 어디 계세요?” “제가 보호자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간단히 설명해 드릴 거고, 동의서 작성도 하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시연은 보호자를 이끌고 다시 사라졌다. 사무실 쪽 문이 ‘딸깍’ 닫히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유건의 어정쩡한 시선뿐. ‘뭐 하는 거지, 나...’ 어느새 유건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시연이를 보러 오다니...’ ‘만나면... 대체 뭐라고 할 생각이었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날 있었던 일... 시연이 억울했을 가능성이 컸다. ‘기회를 안 준 것도 아니었잖아. 그날, 병원에서...’‘난 시연이한테... 내 나름의 여지를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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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7화

처음엔 놀랐지만, 시연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대답 대신,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런 걸 물어요?” 그 반응에 유건은 거의 확신했다. 즉, 시연은... 억울했던 거다. 비록 이젠 남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한때 부부였다.시연의 저런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유건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이걸 기뻐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억울한 게 아니었다면, 더 견딜 수 있었을까? 아니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까?’ 유건은 시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냥, 진실이 궁금해서.” “진실이요?” 시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 웃기네요.” “시연아.” 유건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미안해요.” 시연은 웃음을 거두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단단하게 다듬어진 목소리로. “이미 무덤에 들어간 얘기까지 꺼낸 이유가... ‘검시’하고 싶어서였어요?” “진실이 그렇게 궁금해요? 그럼 적어도, 그 ‘시신’한테 동의는 구했어요?”‘이 사람은 늘 이래. 자기가 정리해 놓고선, 나중에 궁금해지면 다시 와서 묻는다니까.’ ‘그땐 믿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뭘 들으려는 거야?’ “알겠어.” 유건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후회, 미안함, 그리고... 자책.“말 안 해도 돼. 내가 잘못했어.” 시연의 미소가 서서히 굳어졌다. 그리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야... 사과하러 온 거였어?’ 유건의 눈빛은 흔들렸고,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너한테 너무 미안해.” 시연은 눈을 크게 떴다. 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놀람이 컸다. ‘고유건이... 사과를... 했어?’‘그것도, 진심으로?’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다. 유건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시연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지? 이제 와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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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8화

발걸음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지만, 유건은 억지로라도 걸음을 옮겼다. ‘시연이는... 날 좋아하지 않아.’ ‘어떻게든 날 벗어나려고 했고, 그걸 막는 건... 아무 의미 없어.’ 잡을 수 없다면, 남자답게 놓아줘야 했다.‘내가 없어야 시연이가 더 편하고 행복하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아이가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뿐이야.’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없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니까.’ ...이틀이 지나고, 일상은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시연은 확신했다. ‘그날 고유건은 진짜로 사과하러 온 거였구나. 다른 의도는 없었어.’ 그렇게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날 오후, 시연은 정리해 둔 진료차트를 품에 안고, 의무 기록실로 향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렸고, 시연은 걸음을 멈췄다. 안에 있던 두 사람. 한 사람은 휠체어에 앉아 수액을 맞고 있는 장소미. 그리고, 그 옆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사람은... 유건이었다. 시연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다음 엘리베이터 타면 돼. 굳이 같이 탈 이유 없어.’ 소미는 시연을 힐끔 보더니, 유건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시연의 팔을 잡아당겼다. 순간, 시연은 깜짝 놀라 유건을 쳐다보았다. 유건은 시연의 맨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엘리베이터 타려던 거 아니었어?” “아... 다음 거 타려고요.” “지금 타.” 유건은 말을 마치자마자, 시연의 팔을 살짝 힘줘 당기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이끌었다. “비어 있잖아. 굳이 안 타고 기다릴 이유 없잖아.” 시연은 입을 열려다 닫았다. ‘말해봤자 소용없지. 이미 문 닫혔고... 빠져나갈 타이밍도 지났어.’ 그렇게, 시연은 진료차트를 품에 안은 채, 엘리베이터 구석에 가만히 기대섰다. 유건과는 거리감이 느껴질 만큼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우린 지금, 같은 공간에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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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9화

저녁 여섯 시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잔잔했던 하늘은 어느새 흐려졌고,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유건의 표정은 조금 무거웠다. 소미의 검사 결과가... 예상보다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겠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질까 봐... 그게 걱정이야.’ 유건이 그렇게 천천히 병원 1층 로비를 빠져나오던 중, 현관 앞, 처마 밑에 서 있는 시연이 눈에 들어왔다. 우산 없이 비를 피하는 모습이었다. 유건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조용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우산 없어?” 그 목소리에 시연은 고개를 들었고,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깜빡했어요.” “그 집 쪽으로 가는 거지?” “네.” “비 많이 와. 내가 데려다줄게.” 유건의 차는 지하 주차장에 있었고, 차까지 함께 내려가면 비에 젖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시연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 순간, 유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왜? 내가 데려다주는 게 싫어? 아직 네 ‘전남편’도 아닌데, 차를 태워주는 것조차 거절할 만큼... 싫어졌어?” “그런 거 아니에요.” 시연은 다급히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진아한테 연락했어요. 곧 데리러 온대요.” ‘진짜...?’ 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속이 꽉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핑계 같아. 나랑 조금이라도 마주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거겠지.’ “그럼 나도 같이 기다릴게.” “네...?” 시연은 당황스러웠다. ‘같이 기다린다고? 왜? 설마, 내가 거짓말하는지 확인하려고?’ 하지만, 여긴 병원. 그가 서 있겠다는 걸 그녀가 막을 권리는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병원 입구 처마 아래,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말도 없이, 눈빛도 없이. 오직 들려오는 건... 비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뿐. 잠시 후, 멀리서 진아가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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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0화

그래서일까... 우주에게 ‘아빠’라는 개념은 너무 희미했다. 시연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우주의 아빠. 우주한테도 아빠가 있어. 모든 사람은 다, 자기만의 엄마랑 아빠가 있는 거야.” 우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작은 손가락이 살짝 꼼지락거렸고, 표정엔 혼란이 가득했다. ‘당연한 말을 하는 건데... 우주는 그조차도 낯설구나.’ 시연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우주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우주가 입을 열었다. “아빠도, 엄마처럼... 없는 거야?” 그 말에 시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목이 잠기듯 아팠고, 눈시울이 금세 뜨거워졌다. “왜 그렇게 생각해?” 우주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졌다. “아빠, 한 번도 우주 보러 안 오잖아.” 시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이 콱 막힌 느낌이었다. ‘내가 괜한 얘기를 했어. 그냥 말하지 말걸.’ ‘간 이식 못 받는 거, 그건 그 사람 인생의 업보야.’‘자식한테 무심했던 대가일 뿐인데...’ 그 현실을, 그녀는 장애가 있는 여린 우주에게 말할 수 없었다. “우주야, 누나가 아끼는 딸기 하나 줄게.” 시연은 애써 미소 지으며 조심스럽게 분위기를 바꿨다. “입 주변에 잼 다 묻었어. 어휴... 완전 고양이 같네, 고양이!”결국, 시연은 우주와 함께 저녁 식사하지 않고, 병원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내일 수술을 앞둔 환자가 있었고, 수술 전 설명이 하나 남아 있었다. ...시연은 병동에서 그 일을 마치고 나오던 길이었다.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이 시연을 불렀다. “시연아.” “교수님?” 대학병원 교수이자, 시연의 수련 책임자인 양석현이었다. 양석현은 평소에 워낙 바빠 병동에서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이 시간에 연구실로 따로 부르다니... 무슨 일이지?’ 시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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