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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열여덟, 스물 다섯: Chapter 31 - Chapt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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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한순간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고민욱은 소파에 앉아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처음에는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곧 결정을 내렸다.그는 담배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더니 짙은 연기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은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그런 눈빛이었다.“어쨌든 네 몸에는 내 피가 흐르고 있고 성도 고 씨야. 이 집안을 위해 뭐라도 해야지. 계속 그렇게 멍하니 서 있기만 할 거야? 설마 내가 직접 다리를 놓아주길 기다리고 있어?”역시 고민욱은 나를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는 물건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눈에 난 그저 사고팔 수 있는 장난감에 불과하단 말인가?이유 모를 분노가 가슴을 짓눌렀다. 지금 나에겐 집이 없다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부모님이 이혼한 후로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친아버지가 있는 곳은 집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딸과 아내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친어머니가 있는 곳 역시 집이 아니었다. 친어머니의 행복한 삶에는 내가 없었다.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으니 그들이 행복을 좇는 길에 짐이 돼서는 안 되었다.고민욱이 그동안 나를 키운 건 그저 필요할 때 언제든지 팔아넘길 수 있는 장난감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나를 이용하여 계약을 따내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려 했다.하지만 나는 순진하게도 마지막 남은 정이라도 기대하고 있었다. 정말 이보다 더 가소로운 일이 있을까?나는 자신을 비웃었다. 오랫동안 함께 산 세 사람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어쩌면 전생에 가정을 이루고 일찍 마음속에 사랑의 씨앗을 품은 건 사랑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에게서 보상받으려고 그랬을지도 모른다.“걔가 저지른 일을 왜 내가 책임져야 해요? 날 정씨 가문 아니면 나씨 가문에 팔아넘기려고 그동안 키운 거예요? 난 그저 거래에 이용되는 카드일 뿐인가요?”지금의 난 독립적인 인격과 경제력을 가졌다. 이건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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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나는 그 여자아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바로 진세라의 여동생 진슬기였다.순간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한때는 나도 이런 상상을 했었다. 정민규와 가정을 꾸려서 평범하고 소소한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날에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주는 그런 모습을.하지만 나는 그런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되었고 정민규를 내 반쪽으로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 되었다.두 사람이 점점 가까이 왔고 정민규도 나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나는 돌아서서 다른 아이의 손을 잡았다.“자, 선생님이 무용 슈즈 갈아 신겨 줄게.”내가 몸을 숙여 웃으면서 말하자 아이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발에 부드러운 무용 슈즈를 신겨 주었다.두 사람이 내 곁으로 다가왔고 정민규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여전히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여기서 아르바이트해?”그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차가운 태도가 불편했는지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방학이 지나면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갈 것이다. 앞으로 만날 일도 별로 없어서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내가 무시하자 정민규는 진슬기를 내게로 밀었다.“고 선생, 슬기 무용 슈즈 좀 신겨 줄래?”기대에 찬 그의 눈빛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뭐라 하진 않고 진슬기가 내민 무용 슈즈를 갈아 신겨 주었다.진슬기는 진세라와 많이 닮긴 했지만 진슬기가 좀 더 밝아 보였다.사랑하면 상대의 가족도 다 예뻐 보인다고 했던가. 미래의 가족과 잘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듯싶었다.나는 어리석게도 진세라를 사랑하는 정민규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알아보지 못하고 졸졸 쫓아다니다가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고 선생, 슬기 춤에 재능이 좀 있어?”정민규가 또 물었다. 돈 버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쳐다보진 않고 대답만 했다.“슬기 잘해.”짧게 대답하고는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갔다.문 너머로 정민규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내가 슬기를 괴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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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나는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이런 일이 생겨서 저도 마음이 좋지 않아요. 근데 아무리 그래도 함부로 모욕해선 안 되죠. 증거가 있다면 경찰에 신고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명예훼손이고 인신공격입니다. 법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미친 사람처럼 욕을 하는 그녀를 당연히 봐줄 내가 아니었다.‘다들 인간이 된 건 처음인데 내가 왜 양보해야 해?’그런데 나의 말은 최연희를 완전히 자극하고 말았다. 얼굴이 흉악하게 변하더니 한 마리의 맹수처럼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으로 나의 뺨을 후려쳤다.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따귀 소리는 없었고 얼굴에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훤칠한 키의 누군가가 내 앞에 나타났다.“병원입니다. 여기서 싸우지 마세요.”매혹적인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는데 정민규였다.정민규가 나를 감쌀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놀란 얼굴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진세라가 멀지 않은 곳에 애처롭게 서 있었는데 눈가가 붉어진 채 정민규를 바라보고 있었다.최연희는 분노를 터트리다가 웬일인지 정민규를 보고는 바로 얌전해졌다.“슬기 아직 어려서 사고가 날 수도 있죠. 여기서 무용 선생님을 나무라기보다 조용히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어요? 시끄럽게 떠들면 의사한테도 방해가 되잖아요.”최연희를 대하는 정민규의 태도가 별로 좋지 않았고 말투도 냉랭했다.나는 그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얼굴을 찌푸렸다.“만약 정말 문제가 있다면 경찰이 무용 선생님을 조사하겠죠.”정민규는 최연희의 분노와 불만을 알아차린 듯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나는 정민규가 나를 감싸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데 도와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최연희는 뭐라 말하려다가 다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세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핏발이 선 두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마치 내가 죄인인 듯 그녀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하지만 나는 그녀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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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진세라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 얘기가 있는 듯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네 동생 수업 안 왔는데.”진세라가 나를 찾아온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오더니 내 앞길을 막았다.“전에 일은 내가 사과할게. 엄마가 그렇게 흥분할 줄은 몰랐어. 그래서 특별히 너한테 사과하려고 왔어.”그녀는 일부러 착한 척하며 그날 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한다면 그때 나섰어야지.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와서 사과하는 게 아니라.”그때의 침묵은 최연희가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둔 거나 다름없었다. 오늘 그녀가 나를 찾아온 게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소통 방식이 싫었다.“할 얘기 있으면 그냥 해. 빙빙 돌리지 말고.”나의 태도는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말투에도 약간의 거리감과 냉담함이 있었다. 이런 사람과는 할 얘기가 딱히 없었다. 진세라는 마치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듯 멍하니 쳐다보았다.“그날 일을 아직 신경 쓰고 있다는 거 알아. 그래서 용서까진 바라지 않아. 근데 너무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진세라는 나를 보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의 태도에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산들바람에 그녀의 치맛자락이 흩날렸다. 진세라의 꿍꿍이를 몰랐다면 정말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세라는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말했다.“단성대학교에 합격했다고 들었어. 등록은 언제쯤 하려고?”걱정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나는 오히려 짜증이 밀려와 얼굴만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뜻밖에도 진세라는 화를 내지 않고 혼자 말했다.“등록하러 같이 갈래? 나랑 민규도 등록해야 해서 며칠 전에 미리 가서 집을 꾸며야 하거든.”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힘들게 밑밥을 깔더니.“학교에 다녀야 하니까 민규가 거기서 집을 사겠다지, 뭐야. 오랫동안 찾아다니다가 겨우 괜찮은 집을 골랐어. 너도 알다시피 새집을 꾸미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잖아.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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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이튿날 아침 나는 어쩌다가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연속 일주일 수업했으니 아이들도 휴식이 필요했다.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집을 대충 청소했다. 어제 먹은 찌그러진 캔 두 개도 쓰레기통에 버렸다.어쩌면 이것이 나의 삶에도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삶을 맞이할 희망에 부풀어 있던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이곳에 사는 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갑작스러운 노크에 의아하기만 했다. 문구멍으로 고민욱과 고은빈인 걸 확인한 순간 깜짝 놀랐다.“은성아, 문 좀 열어봐. 아빠야.”고민욱은 초조한 기색으로 계속 문을 두드렸다.그가 대체 왜 우리 집에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두 사람이 바로 들어왔다.고민욱은 초조한 표정이었고 고은빈은 마지못해 끌려온 듯한 표정이었다.“그날 아빠가 잘못했어. 너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닌데. 아빠 마음을 이해해 주면 안 돼? 지금 정신이 사업에만 팔려 있어서 네 기분을 헤아리지 못했어.”생각지도 못한 말에 다른 사람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아빠의 잘못을 용서해주고 앞으로 아빠한테 화내지 말았으면 좋겠어. 네가 밖에 있는 며칠 동안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끼니는 잘 챙겨 먹었어? 잘 지내긴 했고?”그동안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없던 고민욱이 이제 와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그가 조금이라도 내 감정을 생각했다면 나를 이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마치 가격표가 붙은 상품처럼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이 나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고민욱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라 생각하면서 나를 발밑에 밟아두고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날카로운 눈빛으로 옆에 있는 고은빈을 쳐다보았다. 고은빈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여 나에게 사과했다.“내가 잘못했어, 언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농담 하지 않을게. 내가 경솔했으니까 작은 일로 화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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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쟤가 대체 무슨 재주로 걔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모르겠어. 앞으로 잘 지켜봐. 절대 또 집을 나가게 해선 안 돼.”고민욱은 고은빈을 꾸짖으면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고 했다.나는 깔끔한 롱원피스로 갈아입고 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고민욱은 성의를 마음껏 보여줬다. 직접 집까지 데려다주니 오히려 마음이 더 불안했다.집으로 돌아와 짐 정리를 마치고 나가자마자 씩씩거리는 고은빈과 마주했다.“네가 나씨 가문과 관계가 좋다고 해서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건 큰 오산이야. 어젯밤에 나상민이 왜 널 찾으러 집에 왔는지 모르겠어. 네가 집에 있었더라면 널 데려오라고 아빠를 협박하지도 않았을 텐데.”입이 가벼운 고은빈 덕에 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어젯밤에 나상민이 나를 찾으러 고씨 저택에 왔는데 만나지 못했다. 고은빈이 내가 집을 나간 사실을 얘기한 바람에 나상민은 나를 대하는 고민욱의 태도를 알게 되었다.그러면서 나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준다면 나씨 가문과의 계약은 꿈도 꾸지 말라고 고민욱을 협박했다. 회사가 이제 겨우 의지할 데가 생겼는데 그냥 포기할 리가 있겠는가?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고은빈과 함께 와서 사과했고 나를 데려간 것이었다.나는 그제야 고민욱이 왜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순간 그의 임기응변 능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욱은 여전히 나를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물건으로 여겼다.하지만 나상민에 대한 나의 감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는 마치 전생의 궤도를 벗어난 듯 진세라를 위해 의도적으로 나에게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심지어 나에 대한 태도도 전혀 달랐고 마치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정민규와의 팽팽한 대립과 진세라와의 기 싸움 모두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나상민의 목적은 대체 무엇일까?그사이 나는 집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나상민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평소처럼 무용학원에서 수업을 했고 집과 무용학원만 다녔다.가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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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내가 거절하기도 전에 나상민은 캐리어를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다.“나 혼자 할 수 있어.”나는 다시 캐리어를 가져오려 했지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상민은 캐리어를 끌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더니 여자 기숙사 근처에 도착해서야 발걸음을 멈췄다.나는 신입생 명단을 꺼내 기숙사 방 번호를 확인했다. 나상민은 고개를 숙여 한번 훑어보더니 재빨리 캐리어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그의 행동에 놀라 말을 잃은 나는 그냥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기숙사에 도착한 후에는 캐리어를 내려놓고 침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 나 혼자 할 수 있어.”나는 나상민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고 엮이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아주 열정적으로 신이 나서 움직였다.“고은성 맞지? 남자 친구 너무 멋진데? 아주 남성미가 폭발이야.”다른 룸메이트들이 나상민을 남자 친구로 오해하자 나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다들 내 말을 듣지 않았고 나상민마저도 짐을 정리하면서 룸메이트들과 수다를 떨었다.정리를 마친 후 나상민은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한 움큼 꺼내 룸메이트들에게 나눠주었다.“은성이가 여기 처음 와서 낯설어하니까 서로 도와주면서 잘 지냈으면 좋겠어. 잘 부탁할게.”햇살처럼 환하게 웃는 나상민의 모습은 활기찬 소년 같았다. 순식간에 룸메이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연락처도 손쉽게 알아냈다.나는 어색한 나머지 시간을 확인하고는 나상민을 급하게 내보냈다.“선배님, 다음에 또 놀러 와요.”활발한 룸메이트들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더욱더 어색해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이젠 내가 선배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나는 나상민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아래층까지 배웅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룸메이트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상민에 대해 물었다.“우린 진짜 그런 남녀 사이가 아니야. 그냥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어.”룸메이트들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큰소리로 떠들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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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내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그때 나상민은 내 옆에 앉아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더니 금세 모두와 친해졌다.나상민이 왜 여기에 나타났나 했더니 진작 룸메이트들을 매수해두었던 것이었다.한창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불청객 두 명이 나타났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세상 참 좁아.’진세라가 정민규의 팔짱을 낀 채 웃으면서 다가왔다.“은성아, 여기서 다 만나네?”‘왜 자꾸 어딜 가나 두 사람을 만나는 거야?’분위기가 꽤 좋았었는데 두 사람이 나타난 바람에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은성이 네 친구들이야?”룸메이트들은 진세라를 본 적이 없었다. 순진하고 착해 보이는 진세라의 얼굴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그냥 동창이야.”내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곳에서 진세라를 만난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즐거웠던 기분도 이 순간 무거워지고 말았다.“안녕, 난 은성이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야.”그녀는 무척이나 활기찬 모습이었다. 다른 룸메이트들도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이런 우연이 다 있나. 우리도 밥 먹으러 왔는데 만난 김에 같이 먹자.”진세라는 모르는 사람들도 신경 쓰지 않고 정민규의 팔을 잡아끌더니 나의 옆에 앉았다.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어색해졌고 달리 방법이 없었던 나는 그 자리에 억지로 앉아 있었다.“우리 전에 같은 반이었는데 은성이 공부 엄청 잘했어.”진세라는 나의 룸메이트들과 친해지고 싶은지 과거 일을 줄줄이 말했다. 어떤 일들은 나마저도 기억이 흐릿해진 일들이었다.그녀가 온 후로 내 마음도 복잡해졌다.하지만 아까 분명히 진세라가 내 옆에 앉으려고 했는데 어느샌가 정민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 남자 사이에 끼어있어 너무도 불편했다.나는 물컵을 들고 스스로 뜨거운 물을 따랐다. 그런데 물병을 내려놓다가 그만 실수로 뜨거운 물을 쏟고 말았다. 뜨거운 물이 순식간에 내 몸에 쏟아졌다.“으악!”극심한 통증에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물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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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전생이든 지금이든 정민규가 진세라에게 무한정 쏟는 편애는 바꿀 수 없었다.다행히 이번 생에 나는 고백하지 않았고 망신도 자초하지 않았다. 때를 알고 물러설 줄도 알아야 했다. 나는 더는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룸메이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긴장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너무 심하게 데었는데?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하지만 룸메이트들이 조금 전에 수군거렸던 얘기도 들었다. 그들은 진세라가 일부러 자기 몸에 뜨거운 물을 붓는 걸 정확히 보고 그녀가 얼마나 교활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내젓고는 치마에 묻은 뜨거운 물을 털어냈다.“괜찮아, 별거 아니야.”병원에 갔다가 원수 같은 두 사람을 만난다면 오히려 멘탈이 붕괴될 것 같았다.불행한 일은 하나로도 족했다. 또 일어나면 정말 버틸 수 없을 것이다.내가 병원에 가지 않으려 하자 나상민이 나의 손을 붙잡았다.“절대 대충 넘어가면 안 돼. 흉터 생기면 어떡하려고? 병원에 가서 제대로 검사해봐야지. 이제 막 대학교에 들어왔는데 못생겨지고 싶어?”나상민의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웠고 룸메이트들도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다.“그래. 이거 무시해도 되는 일이 아니야. 만약 진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해?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분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나는 나상민과 함께 병원에 왔다. 의사는 바로 간단하게 응급처치를 해줬다. 다행히 제때 치료를 받아서 별문제는 없었다. 며칠간 샤워할 때만 조금 주의하면 된다고 했다.나와 나상민이 복도를 걸어가던 그때 진세라를 세심하게 보살피는 정민규를 보고 말았다.마치 시각장애인의 지팡이처럼 진세라를 부축한 채 약을 가지러 다녔다. 커다란 병원을 바쁘게 오갔지만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전생이든 지금이든 정민규는 진세라를 정성껏 챙겨줬지만 나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그는 사랑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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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하지만 나상민은 진세라가 정민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과소평가했다는 걸 영원히 알지 못했다.사람들 앞에서 진세라와 정민규만이 완벽한 선남선녀였고 천생연분이었다. 반면 나는 그들의 게임 속 한 조각일 뿐이었고 나타나서는 안 될 제삼자, 그들의 사랑을 파괴한 제삼자였다.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사랑받지 못한 자가 제삼자라는 말이다.나는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 진세라는 새로 선물 받은 목걸이를 자랑했다. 정민규가 경매장에서 거금을 들여 산 것이었다.햇빛도 없는 흐린 날이었지만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너무나 눈부셨다.“고은성, 아직도 모르겠어? 민규는 널 사랑하지 않아. 네가 민규 아내면 뭐?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야말로 제삼자야.”진세라는 나를 보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지금 내 꼴이 얼마나 비참할까?’스스로 자신의 약점을 넘겨주었고 그녀가 심장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계속 짓밟도록 내버려 두었다.“난 너희들의 게임에 끼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앞으로 날 귀찮게 하지 마. 정말로 진세라를 사랑한다면 행동으로 보여줘.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떠밀지 말고.”나는 이 말을 차갑게 내뱉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그들의 사랑놀이에 휘말리는 것보다 독립적이고 온전한 인격이 되고 싶었다.기숙사로 돌아온 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룸메이트들이 다친 건 괜찮은지 많이 걱정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가 다시 깊은 침묵에 빠졌다.그날 밤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 동안 뒤척이다가 겨우 꿈속에 빠져들었다.꿈속에서 나는 다시 그 익숙하고 아무도 없는 별장으로 돌아갔다. 집이긴 했지만 그 어떤 따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나는 자연스럽게 안방 문을 열었다. 정민규는 술 냄새를 풍기면서 시뻘건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품에 끌어안았다.나를 사랑하는 걸까?“은성아...”정민규는 나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고는 커다란 손으로 허리를 더듬었다. 마치 나를 품에 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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