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열여덟, 스물 다섯: Bab 41 - Bab 50

100 Bab

제41화

가늘던 빗방울이 어느새 거센 비가 되어 쏟아졌다.나의 눈물인지 비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고 공기 중에는 짠맛이 퍼지는 것 같았다.그렇게 정민규는 나를 혼자 땅에 버려두고 차를 몰고 가버렸다.어둠과 추위가 나의 의지를 짓누르면서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에 가두었다.이 무시무시한 악몽은 하마터면 나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뻔했다. 자다가 놀라서 깨어나 보니 이미 새벽이었다.나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식은땀이 옷에 스며들어 너무도 축축했다.다행히 모든 게 지나갔고 앞으로 누구에게도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단성대학교가 하도 넓어서 만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아마 영원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작다고 하면 또 작아서 인연이 있다면 자주 만날지도 모른다.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이젠 완전히 그들 사이에 끼어버린 제삼자가 돼버렸다. 그들 앞에 나타나진 않았지만 대화에 항상 내 얘기가 끼어있었다.아직은 학기 초라서 학업이 그리 바쁘지 않았다. 뜻밖에도 두 사람을 자주 우연히 만난 바람에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나상민이 학생회의 일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학생회 선거도 포기했다. 또 정민규가 동아리에 들어갔다는 소리에 아무 이유나 대고 완곡하게 거절했다.세 사람은 마치 시계 같았는데 나상민과 정민규는 시침과 분침처럼 진세라의 주변을 맴돌았다.그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나는 가끔 룸메이트들과 등산을 하거나 산책하곤 했다.“은성아, 우리 무조건 동아리에 가입해야 해. 안 그러면 학점 8점을 채울 수 없어. 지금 지원하면 남은 건 기획동아리뿐이야. 넌 똑똑해서 건의안 제출도 잘할 수 있을 거야.”룸메이트가 기획동아리 홍보지를 건네주었다. 내용을 본 순간 살짝 골치가 아프긴 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니 정민규 같은 성격이라면 절대 이런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을 것 같았다.“내일 점심까지니까 오늘 오전에 가서 지원해.”나는 입술을 깨문 채 손에 든 신청서를 꽉 쥐고 망설였다.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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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누군가 했더니 정민규였다. 정민규가 손에 든 지원서를 내밀었다.“아직 안 늦었죠?”회장은 정민규를 보고 흠칫 놀란 나머지 손을 거두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쳐다보았다.내가 어색하게 손을 거두는 걸 보고서야 회장도 정신을 차렸다. 회장은 입술을 적시고 지원서를 받은 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안 늦었어. 우리 기획동아리에 마지막으로 가입한 걸 환영해. 은성 학생, 두 사람 거의 동시에 가입했어. 이런 우연이 다 있나.”나와 정민규를 훑어보는 회장의 시선에 나는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다.‘젠장. 그나저나 얘가 왜 여기 있어? 내 기억에 농구를 좋아했었는데 농구동아리나 가입할 거지. 아니면 진세라랑 아무 동아리나 가입해도 되는데 왜 굳이 기획동아리야? 설마 이게 운명이라는 거야? 벗어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운명?’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운명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지 않았다. 운명은 바꿀 수 없지만 내 운을 바꿀 수는 있다.“자, 동아리 회원들 다 모여봐. 개강 시즌 행사가 있는데 우리가 기획을 만들어야 해.”회장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모두 활동실로 모여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대학교 분위기는 고등학교처럼 딱딱하지 않아서 다들 자유롭게 앉아 있었다.나는 일부러 구석진 자리를 골랐는데 뜻밖에도 정민규가 내 옆에 앉았다. 내가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또 옆으로 다가왔다.어젯밤의 꿈이 계속 떠올랐다. 그에게 잔인하게 버림받았고 깊은 두 눈에는 따뜻함이라곤 전혀 없었다.결혼은 여자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 보이지 않는 족쇄,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었다.끔찍했던 결혼 생활이 나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자신감이 넘치던 나를 자신감이 없는 여자로 만들었고 행복했던 나를 불행하게 했으며 희망에 가득 찼던 나를 절망에 빠뜨렸다.이 모든 것의 근원은 정민규의 무정함과 싸늘함이었다. 심지어 나를 혐오했고 다른 여자를 위해 끊임없이 나에게 상처를 줬다.“개강 시즌이라 행사를 진행할 거야. 다들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얘기해봐.”회장은 무척이나 열정적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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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뜻밖에도 어젯밤에 아주 꿀잠을 잤다.정민규가 전화를 하거나 문자라도 보내 세팅에 대해 상의할 줄 알았다. 하지만 밤새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마치 이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거나 내 도움이 필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원래 동아리에 가입할 생각이 없었는데 학점 8점을 채우려고 어쩔 수 없이 동아리에 가입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와 한 팀이 된 걸 진세라가 오해할까 봐 나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그 생각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더 이상 씁쓸함이 나를 휘감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자유로울 줄은 몰랐다.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옆에 어떤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평소에도 연애하는 커플들이 문 앞에 수두룩했다. 이렇게 일찍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걸 보고 참 좋은 남자 친구라 생각했다.그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하던 그때 그가 일어섰다.“네가 왜 여기 있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일찍 잠도 안 자고 왜 우리 기숙사 밑에 있는 거지?’“내가 왜 여기 있냐고?”정민규는 이를 꽉 깨물며 나를 노려봤다. 나에게 무척이나 화난 듯 보였지만 나는 뭘 잘못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미리 말하는데 요즘 진세라를 만나지도 않았고 화나게 한 적도 없어.”나는 선을 긋자 정민규는 카톡 대화창을 열어 나에게 보여주었다.“내 카톡을 차단했더라? 대체 왜?”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아침 댓바람부터 우리 기숙사 밑에 서 있었던 이유가 내가 왜 카톡을 차단했는지 물어보려고 그랬던 거야?’대화창에 발송하지 못한 메시지가 떡하니 있었다.[아이디어 있어?]정민규의 말투다웠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그가 나를 찾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그를 차단해서 메시지를 받지 못했던 것이었다.정민규의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밤새 잠을 못 잤는지 눈 밑에 짙은 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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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내가 가만히 서 있자 정민규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아침 안 먹어?”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후 분위기가 너무 어색했다. 나는 도망치듯 그와 함께 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내가 계산할 때 정민규는 무거운 물건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회의장에 도착한 우리는 야외 세팅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미 다른 선배들이 무대를 간단하게 만들어놓았기에 야외 세팅만 하면 되었다.나는 사 온 물건들을 모두 꺼내서 세팅했다.학점을 위해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데 누군가의 뜨거운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누가 쳐다보는지는 알지 못했다.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물건들을 하나씩 세팅했다.중간 쉬는 시간에 정민규가 음료수를 건넸다.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억지로 내 손에 쥐여주었다.“다 같은 학생인데 이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 없어.”평소의 그답지 않았지만 공짜로 주는 걸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날씨가 더운 바람에 이마가 땀범벅이 되었다. 탄산음료 한 모금이 너무나도 시원했다.잠깐 쉬고 난 후 우리는 계속해서 세팅을 이어갔다. 그때 발밑이 갑자기 흔들리는 것 같더니 작은 기둥 하나가 내 쪽으로 넘어졌다.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피하는 것조차 깜빡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두 다리가 마치 천근처럼 느껴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하늘이시여, 제발 이런 장난 하지 마세요. 겨우 환생했는데 기둥에 깔려 죽으라고요?’그런데 그때 따뜻하고 넓은 팔이 나를 끌어안았다.그 사람이 나를 뒤로 잡아당긴 순간 기둥이 그의 손에 부딪힌 다음 옆으로 넘어졌다.“으악...”뒤에서 정민규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나는 그제야 기둥이 넘어지면서 정민규의 손에 부딪혔다는 걸 알았다.정민규는 나를 천천히 놓아주었고 따뜻했던 온기도 점차 사라졌다.“괜찮아? 병원에 데려다줄게.”나는 바로 정민규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이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어쨌거나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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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계속 사랑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행복하고 달달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그저 제삼자였다. 어쨌거나 사랑받지 못하는 자가 제삼자니까.무슨 기분으로 기숙사에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침대에 누워서도 정민규가 나를 안았던 장면이 계속 떠오르면서 기분이 이상했다.‘걔 성격상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도와줬을 거야.’나는 머릿속의 잡생각들을 억지로 지운 다음 잠을 청했다.꿈속에서 정민규와 진세라는 다정하게 기대어 있었고 나는 남의 행복을 훔쳐보는 도둑처럼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었다.그러다가 문득 두 눈을 떴다. 꿈이라서 너무 다행이었다.다음 날 아침 나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혼자서 야외 세팅을 끝내려 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여보세요.”나는 예의 바르게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나 아파.”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순간 나는 흠칫 놀랐다.‘왜 나한테 전화한 거지? 두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주려고?’“오늘 수업이 없다며? 정말 나를 간호해줄 생각은 없는 거야?”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오늘 수업이 없는 걸 정민규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더러 병원에 와서 간호해달라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대체 날 뭐로 생각하는 거지? 함부로 부려먹어도 되는 하인?’“정민규, 너의 매력과 능력이라면 굳이 내가 간호할 필요는 없을 텐데.”그의 신분과 지위라면 그를 간호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여기서부터 프랑스까지 줄을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내가 간호해야 하는가?게다가 그의 곁에는 진세라가 있는데 내가 간호해도 과연 괜찮을까?정민규가 억울한 말투로 말했다.“어쩜 이렇게 양심이 없어? 난 널 구하려다가 골절된 거라고. 지금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옆에 좀 있어 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불만이야?”나는 어색한 나머지 입술을 깨물었고 눈빛에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곧이어 나를 속이기 위한 수작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 마음껏 즐기지 못해서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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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정민규를 거절하면 나는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고 받아들이면 그와 엮일까 봐 두려웠다.“강요하진 않을게. 정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뭐. 역시 좋은 사람한테는 좋은 보답이 없다니까.”정민규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소리는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내 마음속에서 계속 맴돌았다.“지금 갈게.”정민규가 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나는 가겠다고 대답했다.며칠 만난다고 해도 정민규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그에게서 멀어지면 될 일이었다.그의 말을 들어보니 아직 아침을 못 먹은 것 같아 택시를 타고 병원 근처 식당에 들러 음식을 사서 병원으로 갔다.정민규는 침대에 우아하게 누워 있었다. 단지 손뼈가 골절된 것뿐인데 왜 입원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를 보더니 바로 불렀다.“어젯밤에 여기서 밤새 관찰했는데 아무 문제 없었어. 지금 퇴원 절차를 밟아야 하니까 네가 사인해줘.”그러고는 다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나는 미안함이 밀려왔다.결국 어쩔 수 없이 대신 퇴원 절차를 마무리했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정민규는 단성에 별장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기숙사에서 지냈기에 낮에는 그를 돌볼 수 있어도 밤에는 불가능했다.“미리 말해두는데 난 밤에 기숙사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밤에는 다른 사람한테 간호해달라고 해.”별장에 도착한 후 나는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그는 식탁 위의 음식을 힐끗 보고는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내가 알아서 먹길 바라는 거야? 지금 이 꼴로 젓가락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해?”나는 당황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밥을 먹여줘야 했다. 만두 하나를 골라 정민규의 입에 넣어주었다.‘이번 생에는 정민규 수발만 들면 되겠지.’식사를 마친 후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는 하인을 부려먹는 것처럼 나에게 이것저것 시켰다. 식사부터 화장실까지 돌봐줘야 했고 그의 기분도 맞춰줘야 했다.“난 껍질 있는 사과는 안 먹어. 잘라줘.”정민규는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고 나는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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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바지 허리끈을 잡고 있었는데 깁스를 해서인지 허리끈을 묶기 어려워 보였다. 만약 그가 바지를 제대로 입지 않았다면 알몸을 볼 뻔했다.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너...”정민규에게 뭐라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민망한 나머지 바로 뛰쳐나왔다.‘짜증 나, 정말.’쿵쾅거리는 심장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얼굴이 점점 더 빨개져서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해 답답했다.나는 긴장된 마음을 진정하려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머릿속에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바지 허리끈을 움켜잡고 있던 정민규의 모습이 떠올랐다.침대 위에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이불을 본 나는 계속해서 이불을 정리했다. 정민규가 나온 후에야 이불을 옆에 두었다.나는 정민규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돌렸다. 반면 그는 불량한 느낌을 풍겼는데 전에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왜? 쑥스러워?”그의 목소리가 하도 매력적이어서 조금만 더 들으면 깊이 빠져들 것만 같았다.그때 내가 사랑했던 건 그의 외모뿐만이 아니라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는 성격이었다.하지만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정민규는 뭐든지 다 잘했고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단점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넌 부끄럽지도 않아?”조금 전 그의 행동을 생각하니 너무 민망했다.전생에 우리는 부부로서 잠자리도 했지만 현재의 나는 소녀처럼 순수했고 얼굴이 어려지면서 마음도 순진했던 그때로 돌아갔다.정민규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축 늘어진 바지 허리끈을 나에게 내밀었다.“손이 멀쩡했더라면 바지 허리끈을 묶지 못할 리가 있겠어?”아무래도 묶으려고 한참 동안 애를 쓰다가 포기한 듯했다. 그의 말에 나는 얼굴이 더욱 화끈 달아올랐다.“뭐 하는 거야?”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숙녀인 겉모습과 달리 마음속은 엉큼하기만 했다.그때 머릿속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하얀 천사는 나에게 남자는 순결을 잃은 여자를 꺼린다면서 조신해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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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따뜻한 숨결이 내 귓가와 볼에 닿았다.나는 원래 매우 예민한 편이라 누군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면 얼굴이 붉어지는 건 물론이고 귓불까지 빨개지곤 했다.정민규는 손을 뻗어 나를 품에 안더니 고개를 숙였다. 얇은 입술이 나의 볼을 살짝 스쳤다.깊은 눈동자에 광활한 은하수를 품은 듯 한 번 보면 빠져나올 수 없었다.그의 입술이 점점 더 내 입술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손으로 허리끈을 잡은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숨조차 쉬지 못했다.내 인생을 쥐고 흔들었던 남자인데 두 번째 만남에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어릴 적에 너무 멋진 사람을 만나면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설령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피할 수 없을 것이다.마치 사랑의 함정처럼, 사랑의 그물처럼 저도 모르게 꽁꽁 묶어버렸다.정민규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으려던 순간 나는 기대하는 마음마저 피어올랐다.그런데 그때 뒤쪽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진세라였는데 눈물을 글썽이며 나와 정민규를 쳐다보고 있었다.나는 재빨리 정민규의 품에서 벗어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잡고 있던 허리끈을 놓았다.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이 불륜 현장을 들킨 내연녀 같아 민망하기 그지없었다.진세라는 나를 꿰뚫어버릴 것처럼 째려보았다.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어색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역시 사람은 한번 사랑에 빠지면 무한한 덫에 걸린다.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정민규를 다시 마주하기 어려웠고 그가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하지 않았다. 내가 계속 답장하지 않자 정민규도 흥미를 잃었는지 전화하지 않았다.저녁에 대충 정리를 마치고 책을 읽으려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진세라가 왜 나에게 전화했는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다.“할 얘기 있어. 지금 만날 수 있을까? 좀 급해.”처음으로 나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정확히 해야 하는 말이 있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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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진세라의 말에 나는 2초 정도 넋을 놓았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은성아, 나랑 민규 축하해줄 거지?”나는 진세라의 기대에 찬 모습을 보면서 손을 빼냈다.“미안하지만 두 사람은...”나의 축복이 없어도 잘 지낼 것 같았다.“우리 친한 친구 아니야?”나는 어이가 없었다.‘얘가 지금 날 바보 취급하나?’최근 정민규가 조금 달라졌다는 걸 나도 느꼈다. 하지만 한 번 크게 덴 후로 조심해야 한다는 걸 항상 명심하고 있었다.나는 이제 이루고 싶은 꿈이 있고 갖고 싶은 인생이 있다. 과거의 상처는 저 멀리 버리고 싶었다.“진세라.”나는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며 씩 웃었다.“가장 중요한 건 네가 곧 정씨 가문의 손주며느리이자 정민규의 약혼녀가 된다는 거 아니야? 근데 왜 네 눈에서 두려움이 느껴지는 걸까?”나에게 속마음이 들킨 진세라는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순진한 모습으로 돌아갔다.“무슨 뜻이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진세라의 연기력은 그야말로 훌륭했다. 이러니까 전생에 배우가 됐지.“못 알아들었으면 됐어.”나는 더는 그녀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냥 가버렸다.기숙사에 돌아와 보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았다.‘정민규랑 진세라가 약혼한다고? 그럼 정씨 가문에서 엄청 좋아하겠네.’나는 정민규와 결혼했을 때를 떠올렸다. 우리가 관계를 가진 후 사실 정씨 가문은 보상으로 고민욱에게 돈을 주었다.그때 나는 받지 말라고 했었다. 정민규를 좋아하긴 했지만 기회를 엿봐서 그와 결혼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때 당시 조운 사람들은 내가 ‘뻔뻔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더 이상 정민규에게 매달리지 않았다.하지만 한 달 뒤에 상황이 달라졌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몸이 여기저기 아팠다. 기운이 없었고 식욕도 없었으며 메스껍기도 했다.큰 병에 걸린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는데 고민욱과 김다비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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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나는 이혜린의 손을 내리면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냥 오늘 좀 피곤해서 그래. 다른 애들은?”“몰라, 곧 들어오겠지. 걔네는 쇼핑하러 갔어. 난 안 가고 운동장에서 산책 좀 했어.”“그래. 그럼 나 먼저 샤워할게.”“응. 몸이 안 좋으면 일찍 쉬어.”샤워를 마치고 나와보니 다들 기숙사에 있었다. 그들과 얘기를 잠깐 나눈 후에 침대에 누웠다.10시쯤 정민규가 문자를 보냈는데 간병인이 사정이 생겨서 못 온다고 내일 일찍 병원에 오라고 했다.화면에 떠 있는 문자를 본 나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진세라랑 곧 약혼한다면서 왜 또 날 건드리는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나는 휴대폰을 베개 밑에 뒤집어 놓고 눈을 감았다.밤 12시에 나는 휴대폰을 꺼내 정민규에게 송금한 후 그의 연락처를 차단했다. 밤새 꿈도 꾸지 않고 편히 잤다.개강 초라서 수업 시간표도 아직 나오지 않았고 대부분 시간이 남아돌았다.최근에 인터넷에서 패션 디자인에 관한 아르바이트를 찾아 이력서를 냈지만 아직 대학교 1학년이라 그런지 모두 거절당했다.내가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그때 갑자기 권수아가 헐떡거리면서 뛰어 들어왔다.“은... 은성아...”권수아는 배를 붙잡고 숨을 크게 쉬었다.“네 고등학교 동창 정... 무엇인가 하는 애. 걔가 널 찾아왔어.”나는 흘낏 쳐다봤다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내가 없다고 해.”권수아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몸을 똑바로 세우고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지금 여자 기숙사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걔를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들어왔을걸.”“은성아.”권수아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걔 얼굴은 잘생겼는데 쉽게 건드려선 안 되는 사람인 것 같아.”이혜린도 내 옆으로 다가왔다.“내려가서 잠깐 만나는 건 어때? 안 그러면 이따가 사람들이 널 더 주목할지도 몰라.”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민규의 성격이라면 정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돈도 있고 능력도 있으니까.하지만 나는 두려웠다. 이혜린의 말처럼 그가 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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