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1301 - Chapitre 1310

1312

제1301화

그는 두 눈으로 김단을 바짝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에서 무엇이든 읽어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머뭇거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이윽고 우문호가 나직이 불렀다.“김 낭자…”그제야 김단의 얼굴에 약간의 난감함이 떠올랐다.“둘째 황자 전하의 몸이 허약하시니, 하룻밤 더 곁을 지키는 것도 마땅합니다.”말을 마치며 김단은 침상 곁에 앉아 손을 내밀어 우문호의 이불을 살짝 끌어 올려 주었다.우문호의 눈동자에는 촛불이 어리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김단만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치 홀린 사람처럼.김단은 그런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다. 다만 앞서 전청에서 가까스로 최지습과 호흡을 맞추어 빈틈없이 연극을 해냈으니, 이때 흐트러지면 모든 공이 물거품이 될 터였다.그러므로 마음속으로는 진저리가 나더라도, 김단은 우문호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전하, 어서 쉬시지요. 저는 여기서 전하를 지키겠습니다.”그 말을 듣고 우문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침내 시선을 그녀에게서 거두었다. 긴 속눈썹이 두어 번 떨리더니, 끝내 서서히 눈을 감았다.무릇 김단의 신뢰를 얻고자 그 스스로 궤기산을 삼켰다. 목숨은 겨우 건졌으나 기혈을 지나치게 소모했고, 방금도 이리저리 오가며 한바탕 소동을 치른 터라, 이제는 정말로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거의 혼절하듯 잠들었다.김단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완전히 눈을 감자, 그녀는 낮게 불렀다.“영칠.”날랜 검은 그림자가 김단 곁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앉았다.“약왕곡의 주인.”“최지습이 무슨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영칠이 쉰 목소리로 답했다.“평양원군께서 약왕곡의 주인의 안위를 살피라 일렀소. 제겐 다소 깔보는 말씀이셨소. 제가 있는데 약왕곡의 주인께서 어찌 위태로우시겠소?”영칠의 말을 듣고 김단은 나직이 미소 지었다.방금 전 등을 우문호 쪽으로 돌린 채 최지습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는 곧바로 뜻을 알아차렸었다. 그 생각이 스치자 가슴속에 잔잔한 온기가 퍼졌다.아마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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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2화

긴 밤이 마침내 지나가고, 동녘 하늘에 희끗한 새벽빛이 번졌다.우문호가 천천히 눈을 뜨니, 침상 곁 조금 떨어진 의자에 김단이 앉아 의서를 들어 정성스레 읽고 있었다. 엷은 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내려 섬세한 이목구비를 더욱 맑고 성스러워 보이게 했다. 정녕 그를 두고 밤을 꼬박 지킨 것이었다.우문호의 첫 반응은 냉소였다. 그는 알 수 없었다. 세상의 여인들이 어찌 이토록 다루기 쉬운가. 자신이 써 온 허약을 가장하는 잔재주가 어찌 이리도 번번이 통하는지.그는 눈을 내리깜빡였다가 다시 떴다. 눈빛 속 비웃음은 이미 가시고, 연약하고 무구한 기색이 자리했다.“김 낭자…”한숨 같은 가느다란 부름이 고요한 방 안에 퍼졌다.김단이 고개를 들어 우문호를 보고, 따스한 미소를 띠었다.“전하, 깨어나셨습니까?”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전하께서는 어떠하십니까?”그녀는 말을 잇는 사이 손을 뻗어 그의 맥을 짚었다.우문호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솔직히 답했다.“가슴이 한결 편안하오. 어제보다 기력이 조금 더 붙은 듯하오.”김단은 손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전하의 맥상이 어제보다 훨씬 안정되었습니다. 큰 탈은 없을 듯하니, 편히 쉬며 기력을 돋우세요.”우문호의 눈빛이 부드럽게 돌았다.“목숨을 구해 준 은혜와 밤새 지켜 준 정, 모두 김 낭자에게 빚졌소. 나 때문에 대군자가와 사이에 서운함이 생겼다 하니 마음이 편치 않소. 병이 나으면 반드시 친히 찾아가 대군자가께 사죄를 올리겠소.”김단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어제도 말했듯, 이 일은 전하와 무관합니다. 어찌하여 자꾸 마음에 두십니까?”우문호는 속으로는 흡족했으나, 겉으로는 한없이 무구하고 가련한 얼굴을 했다.“허나 따져 보면, 끝내는 내 탓이니…”“전하께서 참으로 그러하신다면…”김단이 그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에는 옅은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우문호가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어찌하라는 것이오? 김 낭자가 기쁘다 하면 무엇이든 하겠소.”“그렇다면 소한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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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3화

말을 잇던 김단은 눈을 내려 우문호의 태도를 그대로 비춰 보였다.“이번에 내가 천 리 길을 건너 당국에 온 까닭은 모두 소한 때문입니다. 목씨 가문에서 전하께서 소한을 손에 쥐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모르실지 모르나, 저는 소한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고 인연이 깊습니다. 부디 제가 이틀 밤 전하를 지킨 정을 생각하시어, 그를 한번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그 말에는 절절한 진심이 배어 있었고, 동시에 목씨 가문까지 끌어들였다.우문호는 미간을 깊이 찌푸린 채 두 눈으로 김단을 꿰뚫어 보려 했으나, 끝내 무엇도 가려내지 못했다.“그대…”입술만 달싹였을 뿐,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그는 눈앞의 이 여인이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소한만을 염려하는 것인지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김단은 벼락을 맞은 듯한 그의 꼴을 놓치지 않았다. 물러서기는커녕 미간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다그쳤다.“어찌 된 일입니까? 전하께서 어젯밤 그토록 굳게 하신 약조가… 모두 자를 속이기 위한 말이었습니까?”그녀는 한 걸음 더 다가서며, 횃불 같은 눈빛으로 우문호의 눈동자 깊숙한 곳을 찔렀다.“아니면 전하께서는 저에게 고마운 마음 조금도 없으셨습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그저 저의 의술과 선한 마음을 이용하시려던 것에 불과했습니까?”한 글자 한 글자가 우문호의 가슴을 쇠망치처럼 내리쳤다.그가 공들여 쌓아 올린 연약한 가면, 스스로 뻐기던 이간의 계책, 모든 판을 쥐고 있다는 우월감이 김단의 노골적이고 냉정한 문책 앞에 삽시에 휘청이며 무너져 내렸다.어젯밤 스스로 내건 약속은 이미 족쇄가 되었고, 지금 그녀의 추궁은 그를 도의의 불길 위에 올려놓았다.허정이었다고 시인할 것인가? 그럼 지금까지의 모든 준비가 물거품이 돼 버린다.부정할 것인가? 그러면 약속을 지켜 소한을 내놓아야 했다.엄청난 충격과 농락당했다는 느낌이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었으나, 권모에 젖어 온 세월이 그에게 일렀다. 지금은 결코 맞서 뒤집어서는 안 된다.그는 ‘약속을 지키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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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4화

아침노을은 녹은 금을 뿌리듯 누각 창틀을 스쳐 들어와, 차가운 바닥 위에 긴 빛의 자락을 끌었다.김단은 문가에 멍하니 서서, 둥근 등받이 의자에 기대 앉은 창백한 얼굴만 바라보았다.그녀는 거의 잊을 뻔했다. 마지막으로 이 얼굴을 또렷이 떠올린 때가 언제였던가. 십수 해를 그녀의 삶에 머물던 이 사람은, 어느새 소리 없이 막을 내리고 퇴장해 버린 듯했다. 기억의 모퉁이에 흐릿한 잔영만 남긴 채.이 순간, 조각 창살을 넘어온 아침노을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고도 잔혹하게 덮었다. 지나치게 선명한 윤곽은 뜻밖에도 매화당에 한때 만발하던 매화를 떠올리게 했다.꽃은 필 때 여전히 시간을 놀라게 하지만, 한때 그녀의 심장을 떨게 하던 그 감정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다행이었다.거의 동시에, 소한의 흐려진 눈동자가 번쩍 오므라들며 그녀를 꽉 붙들었다.이어 격렬한 분노가 그의 얼굴에 번졌다.보이지 않는 힘에 꿰뚫린 듯, 맥 없던 손이 놀라운 힘을 터뜨렸다. 그는 팔걸이를 부여잡고, 몸을 가두던 의자에서 버둥이며 일어섰다.몸은 바람 속의 등불처럼 심하게 흔들렸고, 다리는 떨렸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비틀거림이 아슬아슬했으나, 그는 지독할 만큼 고집스레 그녀를 향해 옮겨왔다.쇠약의 끝, 처참한 꼴이었다.그러나 그녀 앞에 다다르자,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는 것이었다.그 힘은 놀랄 만큼 거셌고, 거슬릴 수 없는 결연함이 실려 그녀를 자기 뒤로 거칠게 끌어당겼다.언제 스민 것인지 핏발 선 두 눈은 죽어 가는 외로운 이리처럼 섬뜩한 살기를 뿜어 우문호를 박아 두었다. 쉰 목소리였으나 한 글자 한 글자 얼음송곳 같았다.“둘째 황자 전하… 설마 그 지경까지… 여인을 미끼로… 나를 협박하시겠소?”우문호의 눈끝에 스치는 비웃음이 독사처럼 번쩍 지나갔다.그는 소한의 문책을 아랑곳하지 않고 김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걸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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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5화

“전하, 명찰하소서.” 우달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은 극비라 아랫사람이 입을 굳게 닫았나이다. 새어 나간 바 전혀 없사옵니다. 더구나 아랫사람은 발소리조차 숨기고 다녔으니, 강호의 고수라 하여도 알아채기 어려웠을 것이옵니다. 규중에서 지낸 김 낭자가 어찌 미리 알 수 있겠사옵니까.”그 말이 우문호를 문득 일깨웠다.우달의 수완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경공은 황도에서도 손꼽히는 경지였다.그가 작정하고 흔적을 감추면 눈치챌 자가 드물 터였다.그렇다면… 약한 체하여 동정을 사는 계책, 정녕 통할지도 몰랐다.다만 김단과 소한은 어린 시절부터 자란 사이라, 정이 남다르니…우문호의 입가에 자기만족의 서늘한 기색이 스쳤다.그래, 왜 통하지 않겠는가.그는 어려서 어미를 잃고 부황에게 냉대를 받았다. 그때 가련하면서도 사려 깊게 참고 견디는 모습으로, 조금씩 황조모의 단단한 마음을 비집어 열었다. 뒤에는 중전마저도 그에게 몇 치의 참된 연민을 보태지 않았던가.당국 후궁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두 여인도 끝내 이 부드러운 칼날을 피해 가지 못했다. 하물며 고작 김단 하나쯤이야.생각이 거기 미치자, 어릴 적 우연히 본 한 폭의 그림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의 눈동자에는 곧바로 짙고도 끈질긴 음침함과 독기가 치밀어 올랐다.김단, 반드시 손에 넣고야 말겠다.목씨 가문 또한 그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바로 그때, 뜰 안이었다.우문호의 그림자가 문틈에서 사라지는 순간, 활시위처럼 팽팽하던 소한의 몸이 와락 풀렸다. 김단의 손목을 틀어쥐던 힘도 순식간에 빠져나가, 방금의 폭발이 남은 기력을 모조리 갉아먹은 듯했다.그의 몸은 축 늘어지듯 비틀렸고, 숨결은 해진 풀무처럼 거칠어져 들숨마다 찢기는 통증이 실렸다.그는 어렵사리 눈을 들어 김단을 보았다. 미간에는 짙게 가라앉은 책망과 뒤늦은 두려움이 엉겨 있었다.“너… 어찌 황도에 온 것이냐. 혹 또 제멋대로 한 것이더냐. 오라버니는… 어찌 함께 오지 않았느냐.”물음이 하나씩 이어질 때마다,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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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6화

김단은 미간을 좁혔다. 가슴속의 낯선 기운이 끝없이 커졌다.그녀는 소한을 살피다가 끝내 물었다.“소한, 어찌하여 여기에 있소?”소한은 손을 거두고 비틀거리며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모르겠다.”그는 다시 의자에 몸을 내려놓았다. 더는 버티지 않아도 되는 듯 거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손을 들어 은근히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 동작에는 소년 시절의 까칠하고 성마른 기색이 어렴풋이 배어 있었다.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쉰 목소리에는 안개 같은 혼미가 깃들어 있었다.“나는… 다만 심한 상처를 입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온몸 뼈가 부서진 듯 아팠지. 그다음은 온통 혼미했지. 해가 드는지 지는지도 모르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거친 숨을 몇 차례 몰아쉬었다. 그저 떠올리는 일만으로도 기운이 다 빠지는 듯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이곳이었다.” 그는 눈을 들어 김단을 곧장 보았다. 눈동자에는 노골적인 의문과 억울함이 어려 있었다.“우문호가 말하길, 내가 죽을 상이었을 때 자기가 구했다 하더군. 또… 반역을 저질러 황도에 오게 되었다고도 했다.”여기서 소한의 얼굴에 격한 분노와 믿기지 않는 표정이 번쩍 일었다.“가당치 않다!”그의 낮은 외침이 내상을 건드렸다. 이마의 핏줄이 붉어졌다.그는 가슴께를 힘주어 눌렀다. 그러나 눈빛은 상처 입은 외로운 이리처럼 사납고 완고했다. 김단을 똑바로 응시하며, 마치 확언을 받아 내려는 듯 쏟아냈다.“내가 어찌 반역을 하겠소? 내 형님은 중상을 입고 한양으로 돌아와 아직도 병상에 누워 있소. 아버지도 연세가 높으시다오. 소씨 가문의 문호와 짐이 모두 내 어깨에 얹혀 있거늘, 내가 어떻게 그들을 버리겠소!”숨이 섞인 목소리에는 거센 분노가 묻어났다.“나 소한은 하늘을 이고 땅을 딛고 선 사내요. 비록 몸이 부서진다 해도, 나라를 등지고 문중을 화에 빠뜨리는 그따위 천박한 짓은 결코 하지 않소. 우문호, 그는 거짓을 말하고 있소!”김단은 이런 소한을 보자, 가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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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7화

소한은 마침내 천천히 눈꺼풀을 내려, 짙은 속눈썹이 창백한 얼굴 위에 두 겹의 무거운 그늘을 드리웠다.한순간 힘줄이 몽땅 뽑혀 나간 듯, 그는 차가운 등받이에 깊이 가라앉았다. 보이지 않는 어둠이 전신을 조금씩 삼키며 더 무거워졌고, 끝내 소리 없는 절망의 바다로 가라앉는 듯했다.“분명…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이지 않소?”창밖의 아침놀은 더욱 눈부시게 타올랐으나, 방 안의 두 사람은 이미 얼음처럼 싸늘한 깊은 못속으로 가라앉은 듯했다.김단은 스스로의 손목을 힘주어 집었다. 손톱이 살을 깊이 파고들자 날카로운 통증이 번쩍이며 간신히 정신이 맑아졌다.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켜며 목끝의 떨림과 눈가의 쓰라림을 눌렀다.“내가 그대를 고칠 수 있소.”말과 함께 품에서 구요현망침을 꺼내어 소한 앞에 천천히 펼쳤다.소한과 약왕곡 사이에는 인연이 있었다.김단은 소한이 약왕곡의 어느 사람과 아는 사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그가 거느린 군의 상처약은 모조리 약왕곡에서 나왔다.그래서 김단은, 소한이라면 이 침을 알아볼 것이라 짐작했다.과연 그러했다.소한의 눈빛이 미묘하게 밝아졌다.“이것이 약왕곡의 물건이오. 어찌 그대 손에 있소?”김단의 입가에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으나, 어딘가 짙은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그대 말이 맞소. 많은 일이 있었지. 그러니 나를 믿으시오. 내가 반드시 그대를 낫게 하겠소.”소한은 고개를 젖히고 김단을 바라보았다.익숙한 얼굴인데, 기억 속보다 한층 성숙해 보였다.그 눈동자에는 분명 자신만이 비치는 듯했지만, 그는 느꼈다. 그 눈이 이제는 자신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그녀는 차분하고도 자심해졌다. 더는 예전처럼 그에게 매달리기만 하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분명 좋지 않은 일들이 참으로 많았으리라.그러나 그녀가 천 리를 달려 그의 곁에 서 있으니, 어쩌면 모든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소.”마침 그때 뜰문이 불쑥 열렸다.나인 몇 명이 찬합을 들고 들어왔다. 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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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8화

김단의 몸이 문득 굳어 버렸다.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가 오래 잠겨 있던 어느 구석을 찔러 온 듯, 숨결마저 한순간 멎었다.소한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이어갔다.“그대는 늘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해 글을 읽지 못하고, 참새처럼 짹짹대었지. 오직 병과를 들고 있을 때에야 잠시 고요해졌소.”그래서 열일곱의 소한은 줄곧, 김단이 병과를 좋아한다고 믿었다.김단은 천천히 눈길을 들어, 깊은 못 같은 두 눈에 쉽사리 가늠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아 소한의 탐색하는 시선을 마주받았다.그제야 소한은 미묘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얼굴의 부드러움이 서서히 굳고, 미간이 희미하게 좁혀지며 눈빛에 의혹의 그늘이 스쳤다.“왜 그러오?”말끝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긴장이 얹혔다. 그의 시선은 그녀 얼굴의 아주 작은 떨림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달라붙었다.그 눈길에 덴 듯, 김단은 비로소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일어나, 손에 든 병과를 상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소한을 등진 채 내뱉은 목소리는 먼지처럼 가볍게 떨어지면서도, 적막한 공기를 분명히 두드렸다.“이제는 좋아하지 않소.”짧은 한마디가 마음의 호수에 던져진 돌처럼, 소한 가슴속에 외로움의 물결을 원을 그리며 번져 갔다.그는 상 위에 되돌려진 그 접시를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김단의 숙인 옆얼굴로 눈길을 올렸다. 거대한 당혹과 무력감이 그를 와락 움켜잡았다.이 느낌이, 너무도 낯설었다.분명 그녀는 예전엔 그 곁에 붙어 다니길 가장 좋아했다.그런데 어찌하여, 지금은 천 리나 떨어진 듯한 거리만 느껴지는가.그는 자신이 다섯 해,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의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 사이 두 사람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으리란 것도.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혼약이 남아 있는 게 아니던가.소한의 목울대가 빳빳이 당겼다. 그는 묻고 싶었다. 두 사람의 혼약이 아직 남아 있느냐고.그러나 그토록 간단한 한마디가, 칼날을 문 듯 목에 걸려 끝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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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9화

극형을 당한 듯 소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온몸에 한 줌 기력도 남지 않은 듯했으나 그는 끝내 집요히 물었다.“어찌 되었소?”김단의 낯빛이 굳었지만 대답은 담담했다.“일없소. 우선 고이 쉬시오.”말을 마치고는 이불을 끌어 그의 몸에 덮어 주었다.소한은 한번 눈을 감았다가, 지치기로는 극에 달했음에도 여전히 염려를 놓지 못하고 말했다.“아무 데나 다니지 마시오. 우문호를… 조심하오.”김단은 입끝을 살짝 당겨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잠에 들었다.그리고 소한이 눈을 감는 그 순간, 어렵사리 올려 보였던 김단의 미소는 단박에 사라졌다.소한의 체내에 도는 독은 골식독이라 불렸다.원래 중상자를 겨냥해 쓰는 독이어서, 이를 들이킨다 해도 당장은 목숨을 앗지는 않으나 뼈에 달라붙은 악창처럼 피맥 구석구석을 좀먹는다.소한의 경맥이 거의 끊어지고 사지에 힘이 빠진 것의 절반 넘게가 바로 이 골식독 탓이었다.김단에게 이 독을 푸는 일은 어렵지 않다.그의 머릿속 어혈을 풀어내는 일은 더욱 어렵지 않다.허나 지금 이 어혈과 골식독이 서로 스며들어 뒤엉키며 기이한 공생을 이루고 있었다.무거운 어혈의 정체가 독에겐 온상과 방패가 되어 주고, 독의 음랭한 부식의 기운은 되려 어혈의 가장자리를 갉아 먹어 서서히 불어나게 한다.만약 억지로 어혈을 먼저 풀어 헤치면, 끓는 기름에 찬물을 붓는 격으로 골식독이 사납게 폭주하여 단숨에 소한의 뇌경맥을 태워 버릴 것이다.거꾸로 독을 먼저 뽑아내면, 받쳐 주고 깎아내리던 힘을 잃은 그 어혈이 천적을 잃은 덩굴처럼 광폭히 퍼져 뇌를 압박하리니, 그 끝 또한 차마 감당하기 어렵다.찬땀이 김단의 관자놀이를 타고 살그머니 흘러 내려, 굳게 다문 입가에 떨어져 씁쓸한 짠맛을 남겼다.이 발견이 안겨 준 한기는 창밖의 칼바람보다도 깊어, 순간 사이에 사지백해를 얼려 들었다.그녀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으나 손끝이 뜻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미미하게 떨렸다.맑고 냉정하던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지금껏 없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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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10화

우달이 김단을 이끌고 우문호의 침전 앞에 이르렀다.두터운 비단 발 한 귀퉁이가 소리 없이 젖혀지자 방 안 모퉁이의 화로에서 숯불이 탁탁 튀며 따스한 기운이 방안을 가득 덮었다.엷은 약향도 함께 끓어오르는 듯 퍼져, 어디 모르게 병내가 배어 있었다.우문호는 창가에 놓인 널찍한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다. 월백빛 침의를 느슨히 걸친 채 먹빛 긴 머리를 묶지 않고 어깨에 흘려 내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어 유리처럼 창백했다.한 손은 굽힌 무릎 위에 축 늘어뜨리고, 다른 손은 왼쪽 가슴 한가운데를 세차게 눌렀는데,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손마디가 푸르스름하게 질린 듯했다.발걸음 소리를 듣고 우문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눈빛 저편에 얼음 밑 암류 같은 고통이 잠깐 일렁였으나, 곧 일부러 그 위에 온화한 미소를 얹었다.“김 낭자……”우문호의 목소리는 낮고 쉬었으며 숨도 가빴다. “소 장군은… 어떠하오?”김단은 대꾸하지 않고 곧장 다가가 그의 손목을 붙들어 맥을 짚었다.큰 탈이 아님을 확인하고서야 손을 놓으며 말했다. “전하의 흉구 불편은 허증에서 비롯되었사옵니다. 보아하니 관저의 어의가 지은 약은 효험이 미미하오니, 잠시 뒤 다른 처방을 올리겠사옵니다.”그 말을 듣자 우문호의 눈동자에 미세한 한기가 스쳤다.김단의 태도가 지나치게 냉담하다고 느낀 듯했다.그때 김단이 불쑥 입을 열었다. “우문호.”이름을 곧장 부르는 낮은 음성이었다. 크지 않았지만 우문호를 멍하니 멈춰 세우기에 족했다.그는 김단을 바라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이물감을 느꼈다.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바로 부른 여인은 지금껏 없었다.혹, 무엇을 눈치챘단 말인가?“저와 소한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으나, 이제는 전하 또한 그와 다름없는 내 환자입니다. 다음에 어디 불편하거든 억지로 버티지 말고 곧장 우달을 보내십시오. 전하를 외면치 않겠습니다.”그 한마디가 고요한 호수에 던진 조약돌처럼 우문호의 눈동자 깊숙이 잔물결을 일으켰다.말투는 지극히 성실했고, 알아차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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