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Chapter 21 - Chapter 30

40 Chapters

제21화

“영아, 저기 있는 작은 칼 좀 가져오거라.”허정안이 책상 위에 있는 과일용 칼을 가리키며 촛불을 밝혔다. 소영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지시에 따랐다.“아... 아가씨! 지금 뭐하시려고... 조심하세요!”허정안이 칼을 불에 달군 뒤, 손가락 위로 가져가는 것을 본 소영이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영왕의 방문은 오늘 내 계획의 변수였다. 그는 매우 속이 깊고 예리한 사람이야. 어떠한 허점도 남겨선 안 돼.”허정안이 손가락 끝과 엄지 검지 사이에 있는 굳은살을 도려내며 말했다. 그러자 피가 배어 나오며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소영이 준 흉터 연고 덕에 손등의 흉터는 많이 사라진 상태였고, 갈라졌던 다른 피부도 많이 부드러워진 상태였다. 그렇게 굳은살을 모두 도려내자, 남 보기엔 꽤 흉측해 보이는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허정안은 눈썹 하나 까딱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소영이 더 가슴 아파하며 지혈 연고를 발라주고 상처를 손수건으로 동여매었다.“아가씨, 안 아프세요?”“안 아파.”회귀 전에 겪은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통증 덕에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허정안은 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머릿속에서 복기했다. 영왕의 등장 외에는 모두 그녀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허명진은 이런 큰 사건을 저질렀으니, 허함철과 허 부인의 추궁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허명진이 스스로 빚진 일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허 부인이 아무리 허유진을 아낀다 하더라도, 결코 친아들과 비교할 순 없었다.만약 허명진이 도박에 빠지는 것을 허유진이 방조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굳이 허정안이 손을 쓰지 않더라도 두 모녀의 관계는 파투 날 것이다.모든 것은 겉보다는 안에서 무너뜨리는 편이 가장 유리했다. 허정안은 자신이 가져야 했던 것을 모두 되찾을 생각이었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허명진은 반 시진 째 안채에 있는 내당에서 매질을 당하고 있었다. 허유진은 불안한 표정으로 복도에 무릎 꿇은 채 상황을 지켜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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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어머니, 정말 잘못했어요. 깊이 반성하고 있어요.”허유진이 눈물이 가득 고인 눈빛으로 빌었다. 작은 체구에 손바닥만 한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자 저절로 연민이 생겼다. 하지만 허 부인은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다른 곳에 쏟았다.“너도 이제 알았을 것이다. 한 번 도박에 물들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명진이를 정말 망치고 싶었던 것이냐?”“제가 감히 어찌!”허유진이 연신 고개를 저으며 흐느꼈다.“제가 은전을 준 건 맞지만 도박하라고 한 적은 없어요. 명진이와 어울리는 명문자제들의 씀씀이가 어떤지는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전 그저 명진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그런 것뿐이에요. 맨날 남한테 얻어먹는 것도 속상한 일이잖아요.”하지만 허 부인은 고개를 돌린 채 계속해서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허명진은 그녀가 누구보다도 아끼는 귀한 아들이었다. 허함산 부부는 원래 야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럽게 신책장군으로 이름을 날리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허 부인은 이 탓에 혹시라도 아들이 나쁜 길로 빠질까 봐 일부러 용돈을 적게 준 것이었다.하지만 허유진은 딸인 데다가 평소 그녀와 사이가 각별하다 보니 조금 더 용돈을 건네주었던 것뿐인데 그 결과가 이것이라니... 허 부인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명진이가 그러더구나. 넌 진작 그 아이가 도박장에 발을 담근 걸 알고 있었음에도 말리지 않았다고.”허 부인은 싸늘한 목소리로 실망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허유진을 돌아보며 말했다.“왜 내게 미리 알리지 않았느냐? 왜 숨겨줘서 일을 더 크게 만들어! 만약 너의 아버지가 분노해 너를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한다면 난 말릴 방법이 없다. 그땐 어떻게 할 것이냐?”허유진은 무릎을 꿇은 채 온몸을 덜덜 떨며 눈물을 흘렸다.“어머니, 잘못했어요. 저는 그저 두 분이 알게 되면 명진이가 벌받을까 봐 겁이 났던 것뿐이에요. 저한테 매를 드시는 건 괜찮지만 명진이는 제발 봐주세요! 어머니가 명진이를 가졌을 때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 다 들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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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허 부인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수상한 사람은 없었느냐?”“여기저기 다 조사해 봤지만 의식 때문에 모두 분주히 움직이느라 자세히 본 사람이 없답니다. 아시다시피 손님들도 워낙 많았잖아요.”“그렇다면 정안이가 가장 유력하겠구나. 유진이가 족보에 오르지 못하면 가장 큰 이득을 볼 사람일 테니.”허 부인이 말했다. 그러자 하녀장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부인께서는... 큰아가씨를 의심하고 계시는 겁니까?”그 말에 허 부인은 다시 곰곰이 생각하듯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아니다, 정안이는 매 사육 같은 거 할 줄 몰라.”게다가 이제 막 도성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옆에 있는 건 하녀 소영 뿐이었다. 아직 이 집안에서 믿을만한 이가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이토록 교활한 계략을 꾸몄을 리 없다.그러다 문득, 허명진에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명진이 말로는 정안이도 도박장 일을 알고 있다고 했어. 그걸로 자극하는 바람에 그 사고가 터졌다는데 누가 정안이에게 이 일을 알려준 걸까?”하녀장이 추측하듯 말했다.“혹시 주변 하인들한테 몰래 물어본 거 아닐까요? 명진 도련님께서 도박에 빠졌다는 건, 그 주변인들이라면 다 알고 있었을 테니 조금만 찔러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겁니다.”허 부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그럼 우선 그 멍청한 하인들부터 갈아치워야겠구나. 정안이는... 정말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가 따로 없구나. 트집 잡아 멀리 보낼 구실을 빨리 만들어야겠어.”그날 밤, 허정안은 허명진이 겨우 사당에 무릎 꿇은 지 두 시진 만에 허 부인의 명령으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분노가 터져버린 허함산은 허명진을 바로 순방사에 보내버리며 며칠 돌아오지 말 것을 명령했다.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는 곳에 며칠 고생하면서 교훈을 얻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며칠 뒤, 허정안은 소영과 함께 화원에 있는 옥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허유진이 하인들을 거느린 채 다가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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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허 부인이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허정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흡사 원수를 바라보는 듯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허정안은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 대한 반감이 이토록 뿌리 깊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이건 상대가 원하는 거 몇 개 이루어준다고 해도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그럼에도 허정안은 차분하고도 의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어머니, 너무 노하지 마세요. 제가 명진이를 일부러 자극했겠습니까? 그 아이가 제 말을 잘못 이해한 거예요.”그녀가 소매에서 한 편지를 꺼내며 허 부인께 건넸다. “지난번 한표 부장군께서 오라버니의 유품을 아직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 제가 직접 가지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죠. 다른 사람을 보내든지 하겠습니다.”허정안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군더기가 없는 깔끔한 태도에 허 부인은 순간 당황했다. 그녀는 곧바로 허정안이 두고 간 편지를 열어보았다. 편지는 허정안의 말대로 유품을 언급하는 내용이었고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신책장군이 파진곡을 연주했다고 알려진 고금도 보관 중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며칠 뒤 황궁에서 열릴 연회에 이 고금을 가져간다면 황제가 크게 기뻐하실 거란 얘기도 있었다.소영이 허정안의 뒤를 바짝 따라가며 물었다.“아가씨, 만약 부장군께서 보낸 물건을 부인께서 못 받게 하면 어떻게 하죠?”“맞아, 분명 중간에서 무언가 수작을 부리겠지.”허정안이 담담히 말했다.“하지만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바야.”그 말을 들은 소영은 순간 눈앞이 환해지면서 곧바로 그 뜻을 알아차렸다. 허정안은 소영과 함께 정원 뒤쪽의 좁은 길로 나가 후문으로 향했다. 그곳엔 하녀 하연이 미리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다. 허정안은 사실 진작에 허 부인이 자신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고 미리 하연에게 후문을 열어두라 일러뒀었다.지난번 홍미응을 내쫓다 향단을 망가뜨린 죄로 하연은 하녀장에게 큰 질책을 받았고 안채가 아닌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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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무관 후원, 소나무 아래에 안휘가 심심한 듯 입술을 삐죽이며 눈덩이를 발로 차고 있었다. 하지만 후원 입구로 허정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얼굴에 반가움이 스쳤으나 다시 부루퉁하게 변했다.안휘가 허정안에게 달려가 말했다.“늦었잖아요!”허정안이 외투를 벗어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오늘 마차가 없어서 걸어왔다. 대신 너랑 전보다 더 오래 있어 주마.”그러자 안휘가 깜짝 놀란 눈으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자수가 놓인 신발이 눈에 흠뻑 젖어 있었다.“왜 가죽 장화 안 신었어요? 겨울엔 다들 그걸 신던데....”“없으니까.”안휘가 입을 크게 벌리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왜요? 설마 허씨 가문에서 사부님한테 쩨쩨하게 굴어요?”“그래, 맞다. 그들은 내게 가죽 장화를 내준 적이 없고 나도 살 여력이 없어.”허정안은 매우 덤덤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안휘는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아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매에서 은전 한 무더기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이걸로 제일 좋은 사슴 가죽 장화를 사서 신고 이걸로는 담비 털이 달린 외투를 사서 입어요! 그게 가장 따뜻하대요! 나머지는... 음... 알아서 다 써버려요!”안휘가 건네준 돈은 거의 삼백 냥에 가까웠다. 허정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너무 많다.”“괜찮아요! 사부님은 돈이 없지만 전 엄청 많거든요!”안휘가 허리에 양손을 얹으며 말했다. 어린 나이에도 제법 건방진 도련님의 기질이 엿보였다. 허정안은 안 그래도 돈이 필요했던 상황이라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대신 돈 받은 만큼 더 혹독하게 제대로 가르쳐주리라 마음먹었다. 물론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이렇게 베푸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니 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안휘는 겉보기와 달리 무공을 배울 땐 제법 진지하고 성실했다. 어느새 한 시진이 지났고 하인이 다가와 휴식을 권했지만 아이는 거절하고 계속 수련에 매진했다.지난 다섯 날 동안, 안휘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티가 났다. 확실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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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또다시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소영은 조심히 발걸음으로 문에 달린 천막을 젖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품속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가 들려있었다.“아가씨, 이거 좀 드셔 보세요. 원 아주머니께서 주신 거예요.”허정안은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 있었다. 좀 이따가 환안고를 바르기 위함이었다. 이전에 굳은살을 도려내느라 입었던 상처도 이제 거의 아물었다. 게다가 저번에 안휘가 건네준 은전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많이 채워 이젠 제법 사람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허정안이 소영이 건네준 군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느긋하니 물었다.“부장군은 왔다 갔어?”“안 그래도 그 말씀 드리려고 했어요.”소영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원 아주머니한테 듣기로는 며칠 전에 방문하셨는데, 마침 어르신은 외출 중이라 부인이 직접 맞이하셨대요. 그리고 무언가를 받는 모습도 보였답니다.”벌써 나흘이 지났지만 허 부인은 이 얘기를 허정안에게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아가씨, 정말 부인께서 그 유품을 가로챈 것일까요?”소영이 이렇게 묻자 허정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 부인의 성격상 이렇게 단순하게 가로채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밖에서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아가씨, 부인께서 옷과 장신구를 가져다드리라고 했습니다.”허정안이 손에 쥐고 있던 고구마를 내려놓으며 손을 닦았다. 그런 다음 시리도록 차가운 눈동자로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들어오거라.”하녀장이 네 명의 하녀들을 대동한 채 안으로 들어왔다.허정안이 귀가한 지 어느덧 한 달, 허 부인이 사람을 시켜 선물을 보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하녀장이 한 하녀가 들고 있는 고운 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큰아가씨, 이건 전부 요즘 유행하는 겨울 비단입니다. 작은방에서 갓 올라온 것을 부인께서 바로 아가씨께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어요.”허정안이 손을 들어 천을 만져보았다.“확실히 값비싸 보이는 비단이긴 하네. 하지만 색이 너무 화려해. 나와 어울리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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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그러자 텅하는 소리와 함께 줄이 툭하고 끊겼다. 허정안은 다행히 순발력이 좋아 다치는 것을 피했지만 보통 사람이었다면 손이 베었을지도 몰랐다.소영이 놀라움과 걱정이 섞인 표정으로 다급히 다가왔다.“아가씨, 고금이 망가졌어요!”“애초에 이건 내 고금이 아니다.”허정안은 예상했던 상황이라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눈빛에는 싸늘한 조소를 담고 있었다. '이제야 알겠네. 어머니께서 왜 사흘씩이나 걸려 내게 이 고금을 가져다줬는지. 가짜를 만드느라 그랬구나?’진짜 고금은 아직 그들 손에 있을 것이다. 허정안은 얼마 전에 한표와 나눴던 편지가 허 부인의 욕심을 자극했음을 직감했다. ‘진짜 고금은 분명 연회 날, 허유진 손에 들려 있겠지.’정말 악질이었다. 진짜 고금은 양녀 딸에게 주고 가짜는 친딸에게 주는 꼴이라니. 만약 그녀가 이 가짜 고금을 연회장에 가져간다면 분명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좋지 않은 상태의 고금을 연주하다가 줄이 끊어진다면 적잖은 부상도 입게 될 게 뻔했다. 허정안은 결국 모진 수모와 함께 허유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이래야 내 어머니지.”허 부인은 냉정하지만 욕심이 많았다. 동시에 명성 욕구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서슴없이 남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소영이 다급히 물었다.“그러면 어떻게 하죠? 정말 이 고금을 들고 입궁하실 건 아니죠?”허정안이 다시 보자기를 당겨 가짜 고금을 덮었다.“당연히....”그리고는 청량하고도 기백 어린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적이 제 발로 덫에 들어왔으니 이제 사냥하러 가야지.”이번 연회에 그녀는 모두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자신과 국공부는 결코 가까운 사이가 아님을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관계를 정리할 때가 왔다. 그렇게 밤이 되었고, 허함산이 안채 문에서 어깨에 쌓인 눈을 털었다. 그러자 허 부인이 곧장 다가와 겉옷을 받아주며 물었다.“오늘 순방사에 가셨다면서요? 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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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궁중 연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고 허정안은 이른 아침부터 단장하기 시작했다.오늘은 여전히 흐린 겨울 날씨에 매서운 북풍이 불고 있었다. 소영이 물었다. “아가씨, 오늘 어느 옷을 입고 입궁하실 건가요?”허정안이 의미심장하게 답했다.“이따가 또 갈아입게 될 텐데 아무거나 줘. 그리고 색감이 좀 화려한 옷도 하나 챙기고.”그렇게 허정안은 이 나이 때 처녀가 입기엔 상당히 평범한 청색 치마에 까마귀 깃털처럼 빛나지만 어두운 외투를 걸치고는 소영이 직접 짠 토끼털 장갑까지 챙겼다. 복도를 걷고 있자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에 온몸이 차가운 기운으로 뒤덮였다. 하녀장은 바람이 덜 들어오는 복도 모퉁이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큰 아가씨, 부인과 유진 아가씨께선 마차 안에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슬그머니 허정안 뒤에서 소영이 들고 있던 고금을 바라보았다. “그래, 알겠다.”허정안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였다면 하녀장이 앞장서 길을 인도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차로 가는 길 내내 하녀장은 허정안보다 두어 걸음 뒤처져 있었다. 그렇게 복도를 다 벗어나고 대문과 몇 걸음 남지 않던 순간, 갑자기 어린 하녀가 모퉁이를 돌며 허정안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곧 따뜻한 고기죽이 그녀가 입고 있던 외투와 치맛단에 쏟아지며 짙은 자국을 남겼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하녀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박았다.“이 미천한 것이, 눈깔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것이냐!“하녀장이 어린 하녀의 뺨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하녀의 한쪽 얼굴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큰 아가씨, 정말 송구합니다. 서원에 머무는 박씨 부인댁 하녀인데... 어떻게 벌하시겠습니까?”“됐다.”허정안이 전혀 화나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올 테니 하녀장은 어머니께 상황을 전달해 두어라.”그러자 하녀장이 다급히 붙잡으며 말했다.“안 그래도 눈이 쌓여 가는 길이 쉽지 않을 텐데 지금 옷 갈아입으시면 입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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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사람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외진 곳에서 갑자기 마차가 망가졌다. 이건 누가 봐도 계획된 상황이었다. 허정안은 소영과 함께 마차에서 빠져나온 뒤 외투를 더 단단히 여몄다.“한표 집으로 가자. 이 근처일 것이다.”말 한 필만 있으면 이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눈발이 섞인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덕분에 얼굴의 감각은 거의 사라졌고 온몸은 곧 동상에 걸릴 듯 덜덜 떨렸다.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허정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사부님! 사부님!”소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익숙한 그림자가 보였다.“아가씨, 저 아이는 무관에서 아가씨의 가르침을 받던 그 아이 아닌가요?”허정안도 덩달아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안휘가 마차 창문에 몸을 반쯤 내민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휘는 매우 늠름하고도 윤기가 좌르륵 도는 밤색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평범한 복장이 아닌 무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마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곧 마차가 그녀 앞에 멈췄고 안휘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사부님! 이 눈보라에서 걸어가면 어떻게 해요! 입궁하는 길이죠? 얼른 타세요. 우리도 입궁하는 중이니까. 같이 가죠! 아버지도 허락하셨어요!”안휘의 볼은 그새 추위에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아주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허정안은 잠시 주저했다. 표식이 없는 마차였다. 안휘가 도대체 어느 집안 가문의 자제인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아이를 제외하면 어른이 단둘뿐이라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또 어떤 구설에 오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허정안은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입궁하는 것. 상대가 누구든 변명은 추후에 어떻게든 만들어내면 그만이라 생각했다.“그러면 실례하마.”그렇게 허정안은 소영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마차 안에 들어선 순간,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오조금용이 수놓아진 자줏빛 조복을 본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오조금용은 황족의 표식이었다. 그렇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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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말은 많이 할수록 실수하기 쉬운 법이다. 허정안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침묵을 유지했다. 다행히 영왕도 말수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둘 사이에 더 이상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꼬마 황손 소안휘였다. 아이는 끊임없이 허정안 주위를 맴돌며 말을 걸어댔다. “오늘도 또 가죽 신발 안 신으셨어요? 안 추워요?”아이가 눈망울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자 영왕의 시선도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입궁을 앞두고 있었기에 허정안은 평소와 달리 살짝 화장한 상태였다. 단아하게 내려앉은 긴 속눈썹, 바다같이 깊은 눈동자, 그리고 윤기 나는 검은 외투, 온몸에서 기개가 뿜어져 나왔다. 영왕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토끼털 장갑을 끼고 있어 손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허정안은 그 시선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한 채 안휘에게 차분히 답했다.“살 시간이 없었습니다. 다음엔 꼭 그리할게요.”“에이... 또 존댓말... 그래도 황손이라 부르지 않았으니 봐줄게요. 그리고 절대로 은전 아끼지 마요! 없으면 제가 또 줄게요!”소안휘가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아이도 자신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아무리 그녀라도 반말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안휘는 불만스럽지만 일단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허 낭자, 그렇게 은전이 부족한가?”듣고 있던 영왕이 갑자기 물었다.하지만 허정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안휘가 흥분해 외쳤다.“사부님는 정말 불쌍해요! 집에서 은전도 제대로 주지 않는지 맨날 이것저것 다 없어요! 사부님 데려다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면 안 돼요?”허정안은 변방에서 십 년 넘게 살면서 별의별 상황을 다 겪어왔기에 웬만해선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무해하지만 지나치게 솔직한 발언에는 면역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허 낭자가 그렇게 빈곤하다고?”허정안은 바로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설명했다.“영왕 전하 오해이십니다. 저는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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