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Chapter 11 - Chapter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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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허정안이 찾아왔다는 소리에, 방안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그리고 잠시 뒤, 하녀가 다시 나와 그녀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방 안은 봄처럼 따스했고, 고급 은색 숯이 화로 두 개에 피워져 있었다.고급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창틀 옆으로 허 부인과 허유진이 서로에게 기댄 채 새장 속에 갇혀 있는 홍미응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꼬리의 매를 본 허정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가 예상했던 그 새가 맞았다. 비록 아직 덜 자란 상태라 크기가 고양이만 했지만, 여전히 살점을 쉽게 뜯을 수 있을 듯한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었다. 허정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새장 옆에 서 있는 하녀를 바라봤다. 크게 눈에 띄는 외형은 아니었지만, 공손히 모은 손 사이로 호루라기가 쥐어져 있는게 보였다. “어쩐 일이냐?”허 부인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요즘 할 일도 많은데, 굳이 문안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아도 된다.”허정안이 고개를 돌려 허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어머니, 왕 유모는 어디에 갔어요? 제가 돌아오고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계속 안 보이네요.”허 부인이 허정안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였다. 장자가 약하게 태어난 것은 딸의 탓이라며 말하던 산파의 말을 찰떡같이 믿은 허 부인은 허정안을 유모에게 맡기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왕 유모는 허정안을 자기 친딸처럼 여기며 돌봐주었다. 왕 유모는 그만큼 허정안에겐 중요한 존재였다.허 부인이 의자에 앉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짓했다. 그러자 하녀장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허정안 곁을 지나며 허 부인에게 차를 건넸다.“왕 유모? 왕 유모라면 얼마 전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제 나이도 적지 않은데, 편히 노후를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왕 유모는 올해 오십도 되지 않았어요. 하녀장이랑 비슷한 나인데, 퇴직하기에는 아직 이르잖아요. 다시 복귀시키고 싶어요.”그러자 허 부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와중에 또 말썽을 피우려는 것이냐? 내가 내보낸 하인이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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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누군가가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매달리는 건 허정안도 처음이었다. 낯선 감각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의 머리를 살짝 눌러 밀어냈다.“똑같이 생긴 낙엽 열 장을 주워 오면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마.”아이는 그 말에 아주 신이 나서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그제서야 주변이 고요해졌다. 곽영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이 녀석은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네 말은 바로 듣는구나.”“어느 집 아이길래 큰사부님께서 직접 가르치고 계시는 겁니까?”허정안의 기억이 맞다면, 곽영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새 제자를 받고 있지 않았다. 곽영이 웃으며 답했다.“아주 귀한 집 자식이지. 나도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일단 앉아라.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오마.”회귀 전, 그녀가 죽었을 무렵엔 이미 두 스승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만약 두 분이 살아 있었다면, 그녀도 그토록 비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자, 이번에 새로 들어온 차인데. 한 번 마셔보거라.”곽영이 찻상을 들고 와 그녀 옆에 앉았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뗐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전보다 훨씬 침착해졌구나. 변방에서 지낸 세월이 적잖은 수련이 된 모양이구나.”그는 허정안이 남장을 한 채 아버지를 대신해 오라비의 이름으로 출정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장 공주에게 얘기했던 것처럼, 오라비를 따라 변방에 살다 온 줄만 알고 있었다.허정안이 쓰게 웃었다.“큰사부님, 저 요즘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무슨 문제?”곽영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허정안은 간략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며, 이야기의 중점을 허 부인의 편애와 허유진의 공식 입양에 두었다. “어머니가 허유진을 공식적으로 가문에 입적하려 하고 있습니다. 며칠 후면 사당을 열어 조상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족보에 올릴 계획입니다. 그래서 큰사부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조정에서 힘 있고, 올바른 마음으로 말을 해줄수 있는 분을 한 명만 제게 붙여 주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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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다음 날 아침, 허정안이 막 아침 식사를 마친 참이었다.하녀장이 갑자기 찾아오더니, 답지 않은 알랑거리는 웃음을 띤 채 말했다.“큰아가씨, 문안드립니다. 부인께서 말씀을 전하시라고 하셨습니다. 왕 유모의 소식을 찾았답니다.”“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왕 유모 복귀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갑자기 소식을 찾았다니?”하녀장이 두 손을 모으고 굽신거렸다.“아이고, 아무렴 큰아가씨의 일인데 부인께서도 마음이 안 좋으시지요. 겉으론 안 된다고 하셨지만, 가시고 난 뒤 바로 사람을 시켜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부인께선 그저 표현이 좀 서투실 뿐, 친 딸이신데 당연히 항상 마음에 두고 계시지요.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이렇게 알리고 오라고 지시하신 것만 봐도 모르시겠습니까?”허정안은 입술을 꾹 다물며 헛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참았다.“그렇다면 어머니의 배려에 감사해야겠네. 그래서, 언제쯤 왕 유모를 다시 데려올 수 있나?”“아이고, 안 그래도 그 때문에 의견을 여쭈러 왔습니다. 왕 유모께서 돌아오시는 걸 거부하셔서... 아가씨께서 직접 가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허정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녀장은 더 강한 기세로 그녀를 설득하려 들었다.“어릴 적부터 아가씨를 키워온 사람인데, 그래도 아가씨가 직접 가시면 분명 돌아올 겁니다. 부인께서도 왕 유모가 돌아오면 잘 챙겨주시라고 하셨습니다.”“그러면 언제 출발하면 되나?”“내일이요! 제가 일찍 마부 보고 마차를 서쪽 문 쪽에 대 놓으라고 하겠습니다.”“그래, 좋다. 수고 많았다, 하녀장.”“아이고, 별말씀을요.”하녀장이 공손히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자마자 소영이 얼굴을 찌푸린 채 다가왔다.“아가씨, 부엌에 있는 원 아주머니께 물어봤는데, 내일이 바로 유진 아가씨를 정식으로 족보에 올리는 날이랍니다. 다른 친척분들께도 이미 초대장을 다 돌리셨고, 주방은 지금 제사 준비로 아주 바쁘더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왕 유모의 일을 들먹이며 나갔다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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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사당 안, 의식이 예정되었던 시간이 다가오자 거의 아흔 살에 가까운 가문의 원로가 지시했다.“제단을 올려라!”제단을 올리는 것은 사당 앞 제단에서 향을 세 가닥 피워 조상에게 세 번 절을 하는 절차를 말한다. 만약 이 세 가닥의 향이 꺼지거나 부러지지 않고 끝까지 탄다면, 조상이 이 의식을 수락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야 비로소 사당의 문이 공식적으로 열린다. 허유진은 제단에 꽂힌 향 세 가닥을 바라보며 애써 흥분을 감췄다. 이 의식만 넘어가면 그녀는 진짜 허씨 집안 딸이 되는 것이다. 명문가의 딸이라는 이름만 있으면 무엇을 하던 수월해질 터였다. 그런데 이때, 한 하인이 허둥지둥 달려와 허함산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큰어르신이 도착하셨는데, 전각 앞에서 기다리신다고 합니다.”그러자 허함산이 미간을 찌푸렸다.“의식이 시작됐는데, 전각 앞엔 왜? 어서 들어오지 않으시고.”그러자 하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말을 덧붙였다.“그게... 큰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만약 나오지 않으시면, 큰아씨와 함께 이곳으로 들어오시겠답니다.”허함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뜰 앞에 모인 친족들을 한 차례 훑어본 뒤, 옆에 있던 호부시랑에게 양해를 구했다.“대인, 잠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나갔다가 오겠습니다.”“아버지, 어디에 가시는 거예요?”허유진이 그 모습을 보고 허 부인에게 물었다. 이 중요한 의식에 자리를 비우다니, 이상했기 때문이다. 허함산은 잔뜩 언짢은 표정으로 하인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유진아, 넌 잠시 하녀장과 여기에 있도록 하거라. 내가 무슨 일인지 보고 오마.”허 부인도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전각 안, 허함현이 지팡이를 짚은 채 일갈했다.“나는 허유진이 우리 족보에 오르는 것에 동의하지 못하겠다!”허함산이 언짢은 듯 말했다.“아니, 형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대신 키워달라는 것도 아니고, 제가 입양해 돌보겠다는데 왜 동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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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차가운 겨울바람이 등 뒤로 불어왔다. 허정안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허정안, 식책장군이 아니라 허씨 집안의 장녀야.'그녀는 신책장군으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자신의 여동생도 함께 변방에 머물고 있음을 소문내게 했다. 언젠가 죽음을 위장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발판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최근 3년을 변방에 머물다 온 줄로 알고 있었다. 비록 영왕에게 얼굴이 알려져 있긴 했지만, 둘은 그리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홍산 전투 때, 전술을 논의하기 위해 이틀 가량 함께 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담담히 행동하고, 시치미를 뗀다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며, 허정안은 다시 원래의 침착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녀는 허함산 뒤를 따라 침착하게 영왕 옆을 지나쳤다.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은 듯, 등 뒤로 마치 꿰뚫을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위국공을 뵙습니다.”호부상서 최 대인이 예를 갖춘 채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놀라셨죠? 고 시랑께서 이곳 증인으로 나서신다는 얘기를 듣고, 저도 참관하고 싶어 조용히 찾아왔습니다.”허함산이 손을 모아 예를 갖췄다.“별말씀을요. 최 대인께서 자리해 주신다면 제 딸아이의 신분도 더 확실해질 텐데, 저희가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최씨 가문에서 방문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었다. 황후의 외가, 최씨 가문은 이 넓은 도성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 중 명문이었다. 최 상서는 허정안을 한 번 힐끔 쳐다본 뒤, 말없이 영왕과 함께 사당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연이어 다른 사람들도 얼굴을 비추며 인사를 건넸다. 허정안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았다. 영왕 소호연은 군 지휘자로 오래 활동해 온 인물로서, 매우 특별한 지위에 있었다. 그만큼 조정의 대신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그를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허함산 또한 그를 본 적 없기에, 그가 그저 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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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가녀린 모습이었지만, 허정안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과거 회귀 전, 허명진이 그녀에게 연근산을 먹인 뒤 손가락 열 마디를 하나하나 부러뜨리며 내뱉은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네 의견이 중요한 것 같아? 넌 반드시 유주에 시집가야 해. 부모님이 아시기 전에, 네 예물로 내 만 냥 빚을 갚아야 하니까.”그제야 허정안은 알게 되었다. 허명진은 도박에 중독되여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허유진이 오백냥을 쥐여주며 호기롭게 돈을 써보라고 자유를 주었다. 그렇게 그는 호기심으로 도박에 손을 댔고, 완전히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엔 오백 냥, 그다음은 천 냥, 점점 불어나더니 어느새 만 냥이 되었다. 도박장은 그를 마치 걸어 다니는 금송아지처럼 붙잡고 돈을 뜯어냈고, 갚지 않으면 국공부로 찾아가겠다고 협박했다. 겁먹은 허명진이 집안에 고백하려 했지만, 허유진이 그를 막았다. 그러고는 허정안을 유주에 시집보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며, 풍족한 예물이 들어오면 일부만 떼어내도 거뜬히 빚을 갚을 수 있을 거라 꾀어냈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만 된다면, 부모님께 들킬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허명진은 그렇게 주저함 없이 허정안을 해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허정안은 돈을 바꿀 때만 유용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었다.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허명진은 식은땀을 줄줄이 흘렸다. “그, 그게....”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때, 상황을 지켜보던 소호연이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 누이를 해칠 땐 그토록 서슴없더니, 어찌 이유를 대라니까 이토록 비겁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게 남자로서 할 짓이냐?”허 부인은 본능적으로 허명진을 감싸며, 발끈 소리쳤다.“그럼 그쪽은 뉘시기에 남의 집에서 이리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죠? 무슨 자격으로 우리 아들을 걷어차고, 이리 모욕까지 주는 겁니까? 집에서 예절 교육을 어떻게 받았기에... 참.”평소였다면 말을 가렸을 테지만, 오늘은 일이 자꾸만 꼬인 데다가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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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허명진의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이 내렸다. 그러나 허유진의 주장에, 바다 망망대를 헤매다 겨우 방향을 찾은 사람처럼 다시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맞아요. 맞습니다!”그가 서둘러 맞장구쳤다.“전 그저 유진 누님에 대해 몇 마디 했을 뿐인데, 다짜고짜 천한 피라면서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댔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두 충동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제 탓입니다.”허유진이 먼저 나서서 방향을 유도하자, 허명진은 거기에 살을 보태며 모든 죄를 허정안에게 덮어씌웠다.그러자 옆에 있던 허 부인도 말을 덧붙였다.“정안아, 어찌 이리 마음이 좁을 수 있단 말이냐? 기어이 온 집안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하겠느냐??”“어머니, 정말 저 말도 안 되는 변명... 믿으시는 겁니까?”허정안이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들이 아무리 거짓된 눈물로 그녀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려 해도, 그녀는 조금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허정안이 다시 담담히 말을 이었다.“유진이를 족보에 올리겠다는 얘기, 저도 오늘 여기 와서 처음 듣는 겁니다. 그런데 전부터 반대하고 나섰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퍼졌고, 허 부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해 잊고 있던 사실이 이제야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유모의 소식을 미끼로 허정안을 꿰어내라 명령한 건 자신이었고 행동으로 옮긴 것은 하녀장이었다. 두 사람만 입을 다물면, 허정안이 아무리 뭐라 떠들어도 부인하면 그만이었다.“네가 모른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거짓을 고하다니, 내가 널 그리 가르쳤느냐?”그런데 이때, 허함현이 지팡이를 짚은 채 앞으로 나왔다.“전... 정안이가 정말 몰랐으리라 생각합니다.”그러자 허 부인의 안색이 다시 창백하게 질렸다. 허함현은 사람들 앞에서 오늘 허정안과 마주쳤던 순간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밝혔다. 그리고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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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홍미응을 관리하던 하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에 호각이 쥐어져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하인과 함께 힘을 합쳐 팔을 휘저으며 아직도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는 새를 쫓아내려 했다. 그렇게 한참의 씨름 끝에 홍미응을 제압했지만, 허유진은 살점이 살짝 떨어질 정도로 귀에 상처를 입고 귀걸이도 잃어버렸다. 게다가 방어하느라 몸을 웅크리고 있던 탓에 상의도 새에게 찢겨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허유진은 그 충격에 울지도 못하고 멍한 얼굴로 엉망이 된 자기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이고, 유진아. 괜찮아? 많이 아프지?”허 부인이 울먹이며 물었다.하지만 허유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허 부인은 그녀가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린 거라 여겨 하녀들에게 서둘러 그녀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가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허정안은 회귀 전 과거가 떠올랐다. 허유진이 고의로 저 맹수 같은 새를 훈련해 자신을 할퀴게 했던 순간을,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 이번에 상처 입은 것은 자신이 아닌 허유진이었다. 그리고 허 부인이 했던 말도 기억났다.“그것 하나 못 피하느냐? 새 탓을 하지 말고, 탓하려거든 너 자신을 탓해.”담담하게 뱉은 그 목소리에, 허정안은 마치 비수가 꽂힌 듯 큰 상처를 받았다. 허 부인은 그녀가 속살이 비칠 정도로 다친 모습에도 전혀 당황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허유진이 다치자, 허 부인은 상황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영왕에게 간단히 인사만 올리며 자리를 떠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의식도 중단되었다. 원로 어르신이 허함산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위국공,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노부도 한마디 안 할 수가 없겠구나. 아무리 봐도 유진이라는 저 아이, 흉조다. 의식은 실패했고, 조상님께서도 저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 일로 귀한 분들까지 곤욕을 치렀으니, 나도 좋게 볼 수가 없구나. 정말 저 아이를 아낀다면, 그냥 족보에 올리지 말고 양녀로 두는 것이 나을 듯싶다. 괜히 족보에 오르게 되면, 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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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복숭앗 물줄기를 타고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정적이 흘렀고, 허정안의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혹시 무공을 익힌 적 있나?”영왕이 갑자기 뜬금없이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허정안은 그가 일부러 떠보려고 꺼낸 말임을 알고 조심스레 답했다.“어릴 적, 오라버니를 따라 좀 배운 적은 있으나, 그리 잘하지는 못합니다.”영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대 오라버니 덕에 내가 예전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지. 나는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 혹시 곤란한 일이 있다면,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감사합니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전하를 위해 한 일이 어찌 은혜라 할 수 있겠습니까. 충신이 된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빌미로 제가 감히 사사로운 이익을 취할 수 있겠나이까.”그녀의 말은 한치의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답안이었다. 영왕이 잠시 웃음을 흘렸다. 허정안은 그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건 큰 실수였다. 순식간에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번뜩였다. 그의 시선엔 의심이 가득 차 있었다. 허정안은 수많은 전투를 치러왔고 적장들을 베었지만, 영왕보다 강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은 여태껏 만나본 적이 없었다. 둘이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4년 전, 홍산 전투 때였다. 그때도 이미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몇 배는 더 큰 위압감을 풍겼다. 발톱을 숨기고 있는 맹수처럼,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누구든 물어뜯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황의 탄신일이 멀지 않았다.”영왕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허정안은 순간 멈칫했지만, 그 말의 뜻을 파악하기도 전에 영왕은 발걸음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멀리서 그를 기다리던 최 상서가 그녀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작별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멀어져 갔다. 마차 안, 최 상서가 소매를 여미며 난로에 손을 가져다 댔다.“위국공이라는 자, 참으로 눈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친딸은 내팽개치고 양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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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허함현에겐 딸 하나와 아들 하나가 있었다. 허명욱이 바로 그의 아들이자, 허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을 호칭하는 이름이었다. 그는 올해 열여섯으로, 1년 전 무과에 급제했다.대연국의 법도에 따르면, 무과에 급제한 이들은 모두 이부에서 관직을 정해주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허함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둘째 집이 지금 얼마나 어수선한지 좀 전에 보고 오지 않았느냐? 우리까지 괜히 끼어들어 번거로운 일 만들지 말자꾸나.”그러자 허주연은 다급해졌다.“아버지는 늘 남이 먼저죠! 그럼, 명욱이는 어떻게 해요? 둘째 숙부가 사고 쳤을 땐, 언제 저희까지 생각했었나요?”“내가 다른 사람에게 말해 보마. 굳이 둘째를 끌어들이지 말자꾸나.”“둘째 숙부가 지금 위국공인데, 우리 처지에 이보다 더 좋은 인맥이 어디 있어요?”허함현은 뭐라 더 얘기하려 했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허정안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정안아, 어떻게 여기까지 나왔느냐?”허정안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아까 백부님께서 절 위해 나서주셨잖아요. 감사하다고 꼭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허함현이 미소를 지었다.“괜찮다. 날도 추운데, 어서 들어가 보거라.”“말뿐인 감사, 누가 못해?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행동으로.”허주연이 옆에서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주연아!”허함현이 나무라자, 그녀는 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도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정안아, 네 동생이 아직 어려서 그렇다. 마음에 두지 말 거라.”“괜찮습니다, 백부님. 주연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허정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더 나눴고, 허함현은 허정안의 배웅을 받으며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허정안은 다시 혼자가 되었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영이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죠?”소영이 약간 긴장된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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