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By:  서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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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을 하고 십 년간 전장을 누볐다. 핏빛 속에서 군공을 세워눈부신 성과들을 이루었지만 정체가 탄로 나면 온 집안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는 날, 그녀는 죽음을 가장하고 여인의 모습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가족들이 반겨줄 거란 예상과 달리 이들에겐 이미 그녀를 대신할 존재가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 모두가 그녀에게 말했다. "남장하고 출정한 것은 대역죄, 이 사실이 드러나면 우리 집안은 멸문이다. 그러니 넌 절대로 공식 석상에 허씨 가문 여식으로 나타나면 안 돼." "너는 적녀다. 그러니 참아, 그게 네 운명이야." "그동안 유진 누님이 부모님을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돌봤는지 알아? 아버지 다리도 다 누님 덕분에 나은 건데 불평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 그녀는 그저 가족의 따뜻한 품이 그리웠을 뿐인데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이 와중에 그녀에게 베풀었어야 할 황제의 은혜를 모두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아버지는 위국공에 봉해졌고 어머니는 정일품 고명부인으로 책봉되었으며 양녀는 태자비로 간택되었다. 심지어 그녀의 동생은 전장에서 한 걸음도 뛴 적 없으면서도 전장의 신이라 불렸다. 오직 그녀만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한 채 철저히 외면당했다. 어쩔 수 없었다. 정체가 들통나는 순간, 온 가족이 몰살당할 수도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묵묵히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느 날 양녀로 들어온 허유진이 울며 그녀의 어머니께 호소했다. "변방에서 돌아온 영왕께서 제가 신책장군과 닮지 않았다고 했어요. 너무 무섭습니다. 만약 그분이 언니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그날, 평소와 달리 어머니는 다정히 생일상까지 차려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그녀는 벅찬 감정에 생일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목이 타들어가듯 아팠고 손가락 열 개는 전부 부러진 상태였다. 그들은 허정안의 모든 것을 빼앗아 양녀인 허유진에게 안겨주려 한 것이다. 목숨과 맞바꿔 얻은 영광이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이끈 재앙이 되었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눈을 떠보니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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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무더운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도성 외곽 송별정 옆에 세워져 있는 긴 장대에 한 여인이 벌써 사흘째 매달려 있었다.

이미 누더기가 된 옷차림, 씻지 못해 엉망이다 못해 풍기는 악취, 장군집 여식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땀방울이 허정안의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와중에 그녀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물... 물을...” 그녀는 구경꾼들을 향해 마지막 희망을 담아 간절히 애원했다.

혼신의 힘을 짜내어 내뱉은 절박한 한마디였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 미약해 바람 속에 묻혀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친동생이 억지로 먹인 벙어리 약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다.

그 순간, 날카롭지도 않은 무딘 화살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허정안의 복부를 꿰뚫었다.

“윽...!”

그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선혈이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구경꾼들이 놀라 소스라치며 황급히 길을 비켰다.

곧이어, 말을 탄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 화살을 쏜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그 소년은 다름 아닌, 허정안의 친동생 허명진이었다.

이윽고 그가 구경꾼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보십시오! 이 여자는 한때 제 누이였습니다. 어릴 적엔 하도 몸이 약해 부모님이 따로 별장에 데려가 돌볼 정도로 아주 지극정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성으로 돌아오더니, 완전히 미쳐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게 아닙니까? 어머니의 생신에서 참석한 장 공주님께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자신이 진짜 신책장군이라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장한 채 출정한 여식이라며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건 전사한 형님을 모독한 것뿐만 아니라, 조정과 대연국이 일구어 온 영광을 짓밟는 일입니다.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입니까!”

신책장군을 사칭했다는 말이 나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안쓰러운 눈동자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신책장군이 누구인가? 이 대연의 유일한 불패의 장군, 살아생전 치른 무려 스물아홉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장수였다.

그 덕분에 대연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고 잃었던 땅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황제가 타국에 인질로 끌려가 겪은 치욕도 깨끗이 되갚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것! 감히 신책장군의 명예를 더럽히다니!”

“뻔뻔하구나! 그토록 뛰어난 장수가 나온 허씨 집안에서 어찌하여 이런 불초한 딸이 나왔던 말인가!”

분노한 사람들이 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워 그녀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아니야! 다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라고!'

허정안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내가 신책장군인데!

십 년 전, 다리를 다친 허함산에게 전장에 나가라는 거역할 수 없는 황명이 떨어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남장을 하고 허함산 대신 전장에 출정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네 살이었다.

그렇게 열다섯, 백 기병을 이끌고 적진을 기습하여 군량을 불태우고 변방의 포위를 풀었다. 열여섯에는 만군 속에서 적장을 쓰러뜨리고 대승을 거두며 잃었던 국토를 회복하였다. 스물에는 삼군을 지휘하여 북방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오랑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으며, 스물셋에는 북벌을 단행해 12개 성을 줄줄이 점령한 데 이어 적국의 군주마저 생포해 그자더러 삭발은 물론 자결까지 하게 하여 황제의 치욕을 씻었다.

그 공으로 그녀는 신책대장군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전투가 끝난 뒤, 혹시라도 남장한 사실이 드러날까 봐 어쩔 수 없이 전사한 척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토록 고대하였던 가족과의 재회, 하지만 그녀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배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새로운 딸을 키워, 그녀가 누려야 했을 모든 것을 물려준 상황이었다.

처음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허정안은 가족들에게 따져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말들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남장을 하고 전장에 나간 건 엄연한 대역죄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 우리 집안은 멸문당할 것이다. 허씨 가문에서 세상에 나서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여식은, 결코 네가 아니어야 한다.”

“너는 장녀다. 그러니 참고 견뎌라. 그게 네 팔자다.”

“네가 없었던 동안, 유진 누님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모셨는지 알아? 아버지 다리도 누님 덕분에 나은 거야. 그러니 불평 말고, 감사히 받아들여.”

십 년을 전장에서 구른 그녀는 이미 세상 풍파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단 하나, 따뜻한 집, 그리고 가족의 품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자신을 대신해 신책장군의 여동생으로 입궐하여 포상을 받는 허유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신책장군이 생전에 받지 못한 모든 포상을 허씨 집안에 내려줬다. 그녀의 아버지인 허함산, 허 장군은 위국공으로 봉작되었는데, 이는 아홉 대까지 세습이 가능한 그야 말로 철모자왕이라 할 수 있는 작위였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정일품 직위인 고명부인으로 임명되었고, 허유진은 군주로 책봉된 데 이어 황태자와의 혼사도 정해졌다.

심지어 허명진마저 소전신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그 모든 영광 속에, 오직 허정안만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부모님은 그녀에게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만약 드러나기라도 하면, 온 가족이 ‘임금을 속인 죄’로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라며 그녀를 죄인으로 몰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상류 가문들이 모인 연회에 다녀온 허유진이 허 부인 앞에서 울먹이며 말을 꺼냈다.

“변방에서 돌아온 영왕께서 제가 신책장군과 전혀 닮은 점이 없다고 하셨어요... 저, 너무 두려워요. 혹시라도 영왕께서 언니를 알아보시기라도 하면 어쩌죠...?”

그 말을 들은 허 부인의 안색은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허정안에게 유주의 한 부잣집 가문에서 혼처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주는 도성에서 멀고 먼 외진 곳이었고, 그녀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허정안이 거절하자, 허함산은 크게 분노했다.

“이 집안은 유주에서 손에 꼽히는 거부다. 그런데 왜 싫다는 것이냐? 설마 이 허씨 집안의 명성을 탐하는 것이냐?”

허정안이 차분히 말했다.

“저희 가문의 명성은 모두 제가 싸워서 얻은 것들이 아닙니까?”

그녀가 막 말을 마치자, 허 장군은 곧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장수로 지내온 지 십 년,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목을 막아냈다.

그러자 허함산이 외쳤다.

“이 불효자식! 겨우 운 좋아서 몇 번 전장에서 이긴 것으로 감히 아비에게 대드는 것이냐! 키워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다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만하세요!”

이때, 허 부인이 나섰다.

“정안도 그간 변방에서 고생했는데... 우리가 너무했죠.”

그날 이후, 허 부인은 유난히 허정안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심지어 생일 연회까지 열어주면서 말이다.

그렇게 등불이 따스하고,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가 마련되었다. 허정안은 가운데 앉아, 부모와 동생들이 건넨 술잔을 받았다.

“정안아, 그동안 고생 많았다.”

허 부인이 말했다.

“이 잔을 들고, 그간 풍파는 모두 잊자. 이제 남은 인생은 평온하게 사는 거야.”

향긋한 술과 따뜻한 미소들, 허정안은 울컥해 눈물이 맺혔다.

'그래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다 함께 오순도순 앉아 미소 짓는 거.'

그녀는 드디어 가족들이 자신의 노고를 알아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겨우 눈물을 참으며 마신 그 술잔 안에... 연근산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가족들 모두 그녀를 걱정스럽기는커녕 싸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다리는 건드리면 안 돼. 걷지 못하면 시댁에서 받아주지 않을 거야.”

허함산이 말했다.

“그러면 손가락을 부러뜨려. 그러면 다시는 검도, 활도 못 들겠지.”

허 부인이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친동생, 허명진이 나섰다.

허정안은 온몸의 힘을 짜내 저항하고자 했지만, 이미 약에 몸이 잠식당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그녀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러자 허 부인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 하지만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후에 네가 혹시라도 실수로 무공을 드러내 정체가 발각될 수 있잖니? 다 널 지키기 위함이니, 이해하렴.”

허명진은 잔혹하고도 거침없이 그녀의 열 손가락을 부러뜨렸다. 정말 뼛속 깊이 파고드는 고통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자부심이었던 무공은 그렇게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렇게 겨우겨우 버텨 허 부인의 생신 연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고 장 공주가 허씨 가문을 찾았다. 허정안은 하녀들의 감시를 겨우 뿌리치고 장 공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이 신책장군임을 고백하고 도움을 청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미친 여자 취급을 받으며, 허함산의 명령에 따라 하인들에게 끌려 나갔다.

‘혹여 또다시 말썽을 부릴까 두렵다’는 이유로, 결국 허명진의 손에 의해 강제로 벙어리 약을 먹어야만 했다.

“그쪽이 돌아온 뒤로, 유진 누님이 얼마나 밤잠을 설쳤는지 알아? 그냥 전장에서 죽지, 왜 돌아왔어?”

벙어리 약은 독에 가까웠다. 목구멍을 불태우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허정안은 바닥을 뒹굴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허함산은 싸늘한 얼굴로 명했다.

“이 패륜녀를 도상 밖 장대에 묶어라! 제정신이 아니구나, 제 어미도 못 알아보고 해치려 들었다!”

그렇게 허정안은 장대에 묶인 채 사흘 밤낮을 버텼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구해주러 오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불쌍한 눈빛으로, 어떤 이들은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침을 뱉었다.

그렇게 지금, 허명진이 나타났다. 그가 군중을 향해 외치던 것을 멈추고 그녀에게 말했다.

“자기 입으로 죄를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장대에서 내려오는 걸 허락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허정안이 목소리를 잃은 걸 알면서도 직접 입을 열라고 했다. 이건 그녀에게 하는 말이 아닌, 그저 명분을 얻기 위한 연기일 뿐이었다.

허정안이 침묵하자, 사람들의 분노는 더 커졌다.

사람들의 혐오 어린 시선을 받는 그녀를 보며, 허명진은 몰래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녀는 그저 가족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황명이 떨어졌는데,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도 따르지 않으면 죽음이었다. 그래서 대신 나간 전장이었는데, 돌아온 것이 겨우 이딴 취급이라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게다가 돌아온 후에도, 자신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지만, 혹시라도 가족이 어려움을 겪게 될까 두려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얻은 모든 공로, 피로 바꿔온 가문의 영광이,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칼날이 되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리도 잘못했기에, 적도 아닌 가족의 손에 죽는단 말인가?'

분노와 비통함이 몰려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왈칵, 견디다 못한 그녀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사흘 내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신 것은 결국 비릿하디 비릿한 피였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이번 생의 가장 큰 실수,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모든 공로를 가족에게 넘겨준 것,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상황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곧 온몸을 덮치는 한기와 함께 시야가 암전으로 물들었다.

이것이 바로 얼마 전 죽음을 맞이했던 그녀의 과거였다.

----------

“아가씨, 아가씨?”

하녀 소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허정안은 눈앞에 놓인 등불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사흘 전, 죽음에서 되살아난 것도 모자라 과거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 참혹했던 잔상은 틈만 나면 그녀를 괴롭혔다.

허정안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지금 어디까지 왔지?”

소영이 답했다.

“지금 도성 외곽까지 왔습니다. 한 시진 정도면 도착할 거예요. 곧 가족들을 뵐 수 있을 겁니다.”

신책장군으로서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전사한 척하고 남장을 풀어, 다시 여인의 모습으로 허씨 가문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소영은 어쩌다 보니 데리고 다니게 된 아이로, 당연히 그녀가 회귀한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허정안은 말없이 수레의 창문을 걷어 올렸다. 곧 차가운 겨울바람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살결을 스쳤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 풍경이, 적막하게 펼쳐져 있었다.

회귀하고 겨우 사흘째, 아직도 장대에 매달린 채 뜨거운 햇빛을 받던 기억이 생생한데, 차가운 바람을 만나자 겨우 현실감이 찾아왔다.

이 시기는 도성에 이미 신책장군이 전사했다는 사실이 전해질 무렵, 허씨 부부가 창평후 부인을 초대해 허유진을 신책장군의 유일한 여동생이라 소개할 자리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아마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그들은 허둥지둥 숨기려 들 것이다.

원래는 하루 전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만난 눈보라에 수레바퀴가 빠져 늦었다.

창평후 부인은 허씨 가문에 도착했을 텐데, 허정안은 아직 한 시진이 남았다. 이 만남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내 인생을 또다시 빼앗길 순 없어.'

회귀까지 했는데, 똑같이 살 순 없었다.

허정안은 소매 안에 넣어뒀던 밀서를 꺼내 한 글자, 한 글자 읽어갔다. 곧 그녀의 표정이 결연해졌고, 소영을 향해 말했다.

“나는 여기서 내릴 테니, 너는 이 마차를 타고 먼저 도성 안에 들어가 있거라.”

허정안은 밀서를 다시 소매 안으로 넣고 수레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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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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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 Su Kim
완전 재밌어요 삭제안되고 계속 글이 올라왔으면 좋겠네요
2025-06-04 06:11:26
1
40 Chapters
제1화
무더운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다.도성 외곽 송별정 옆에 세워져 있는 긴 장대에 한 여인이 벌써 사흘째 매달려 있었다. 이미 누더기가 된 옷차림, 씻지 못해 엉망이다 못해 풍기는 악취, 장군집 여식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땀방울이 허정안의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와중에 그녀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물... 물을...” 그녀는 구경꾼들을 향해 마지막 희망을 담아 간절히 애원했다.혼신의 힘을 짜내어 내뱉은 절박한 한마디였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 미약해 바람 속에 묻혀졌다.그럴 수밖에 없었다. 친동생이 억지로 먹인 벙어리 약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다.그 순간, 날카롭지도 않은 무딘 화살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허정안의 복부를 꿰뚫었다.“윽...!”그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선혈이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구경꾼들이 놀라 소스라치며 황급히 길을 비켰다.곧이어, 말을 탄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 화살을 쏜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그 소년은 다름 아닌, 허정안의 친동생 허명진이었다.이윽고 그가 구경꾼들을 향해 소리쳤다.“모두 보십시오! 이 여자는 한때 제 누이였습니다. 어릴 적엔 하도 몸이 약해 부모님이 따로 별장에 데려가 돌볼 정도로 아주 지극정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성으로 돌아오더니, 완전히 미쳐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게 아닙니까? 어머니의 생신에서 참석한 장 공주님께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자신이 진짜 신책장군이라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장한 채 출정한 여식이라며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건 전사한 형님을 모독한 것뿐만 아니라, 조정과 대연국이 일구어 온 영광을 짓밟는 일입니다.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입니까!”신책장군을 사칭했다는 말이 나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안쓰러운 눈동자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라졌다.신책장군이 누구인가? 이 대연의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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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신책대장군 휘하에는 뛰어난 장수 둘이 있었다.그중 한 명이 바로 한표였다. 그만큼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많았다. 지난 십 년, 신책장군은 전투를 지휘해야 했기에 도성으로 돌아온 적이 없었다. 그러나 3년에 한 번씩 자신의 부하를 보내 정사를 보고하게 했었다. 한표가 바로 그 대표였다. 그는 신책장군을 대신해 도성에 돌아올 때마다 황제를 알현해 변방의 군정 보고를 해왔다.그렇다 보니 장 공주도 당연히 그를 알아보았다. 그 한표가 허정안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으며 예의를 표했다. 장 공주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죄송합니다, 큰 아가씨. 소인이 제대로 호위하지 못한 탓에 아가씨께서 홀로 도성에 돌아오게 했습니다.”허정안이 손목을 주무르며 소영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괜찮네. 군도 통솔해야 하고, 장례도 준비해야 하는데, 괜히 짐이 될까 봐 먼저 출발한 것뿐이네.”한표는 머리를 들어 허정안과 눈을 마주치며 다시 한번 죄송함을 전했다. 그러고는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으로 하녀장을 노려보며 말했다.“대장군께서 생전에 가장 아끼시던 분이 바로 이분이시니라. 그런데 감히 이분께 이런 치욕을 줘? 목숨이 아깝지 않으냐!”한표는 키가 팔척에 달하는 장신이자, 위엄이 넘치는 무장이었다. 서른이 넘는 나이에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적들을 도륙할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뿜어내는 인물이기도 했다.그런 그가 눈을 부릅뜨자, 하녀장은 더 이상 잡아뗄 수 없음을 느끼고 바로 허정안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자기 뺨을 연달아 몇 번 내리치면서 눈물을 쏟았다.“제가 눈이 뼜나 봅니다. 늙으면 눈치라도 빨라야 하는데, 감히 아가씨를 못 알아보다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그러나 다급해진 것은 그녀뿐만 아니었다. 장 공주가 급히 장 상궁에게 부축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한표가 그녀를 발견하고 서둘러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소인, 장 공주마마를 뵙습니다.”장 공주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안 그래도 하얗던 하녀장의 얼굴이 더 창백하게 질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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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허정안은 예전부터 효성이 지극한 아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열네 살에 집안을 책임지겠노라며 남장하고 아버지를 대신에 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허함산과 허 부인은 허정안이 반드시 자신들의 말에 따를 것이라 확신했었다. 허정안은 창백한 입술을 꾹 다문 채 허 부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허 부인이 눈물을 닦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그래, 네가 우리 집 큰딸이 아니면 누가 큰딸이겠느냐. 하지만 나와 너의 아버지가 유진이도 딸로 받아들였으니, 너도 동생으로 받아들여야지. 그러니....”그렇게 말하며 허 부인이 허정안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곧바로 느껴지는 마디마디 굳은살에 충격을 받은 듯 몸이 굳어지더니, 서둘러 손을 다시 놨다.허정안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회귀 전에도 허 부인은 비슷한 반응을 했었다. 그땐, 자신을 향한 안쓰러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날 하녀장과 하는 말을 우연히 엿듣게 되었는데,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그 애는 어릴 적부터 자기주장이 강하고, 혼자서도 뭐든 잘 해냈잖아. 저절로 손이 가고 이유 없이 마음이 쓰이는 유진이랑 달라. 굳이 보듬어줄 필요 없어.”허정안도 처음부터 칭송받는 신책대장군은 아니었다. 처음 전장에 출정했을 땐, 오히려 남들보다 더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병사에 불과했다. 신책장군의 명성을 쌓은 건 모두 그녀의 뼈와 살을 가는 노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대가로 아름다운 피부도, 곱고 여린 손도 잃었다.허정안은 허 부인의 말대로 장 공주에게 허리를 숙이며 대신 자비를 구했다. 당연히 진짜 허유진을 동생으로 받아들였다거나, 또는 허 부인의 말에 따라야겠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공주마마,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그러자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허유진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고개를 들었다.장 공주가 말했다.“지금 이년을 위해 내게 간청하는 것이냐?”허정안이 피 묻은 군복과 붉은 홍영장식을 품에 안은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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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소영이 정문을 밀고 막 들어가려던 순간, 갑자기 몇몇 하녀들이 튀어나와 그녀를 밀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결국 소영은 그 힘에 못 이겨 휘청이며 바닥에 넘어졌다.“감히 아가씨 거처에 손을 대려 해? 어림도 없다!”하녀들이 매우 매섭고도 사나운 눈빛으로 말했다.소영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며 허정안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이 단호한 표정으로 하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소영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벌떡 일어나 한편에 놓여 있던 돌을 집어 들어 하녀들을 향해 던졌다.“주인도 못 알아보는 것들! 너희들이야말로 감히 이 집의 진짜 아가씨를 보고 뭐 하는 짓이냐!”소영은 온 힘을 다해 소리쳤고, 하녀들은 그에 놀라 슬금슬금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안으로 돌진해 사정없이 이곳저곳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허정안은 그런 소영을 아주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곳은 결코 안일한 마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다. 자칫하면 뼈까지 흔적도 없이 집어삼켜질 수도 있는 마귀의 소굴, 소영 또한 허정안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이 정도도 못 이겨내면 허정안 곁에 남을 자격이 없었다.한편, 본채 안방.허 부인과 허유진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어머니, 만약 제가 마지막에 기절한 척하지 않았다면 오늘 살아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다시 보지 못했을지도 몰라요.”“아유, 가여운 내 딸. 얼마나 힘들었니? 아무 말 말고, 일단 푹 쉬거라.”“하지만... 언니가 절 받아주지 않았는데... 더 이상 민폐를 끼치기 싫어요. 차라리 절 다른 곳으로 보내주세요.”“안 돼!”허 부인이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여기가 네 집인데, 어디로 간다는 말이니? 그런 말 말거라.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구나.”그러자 허유진이 다시 허 부인의 품에 안긴 채 눈물을 터트렸다. 허함산 또한 옆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맞장구쳤다.“정말 생각도 못 했네. 정안이가 이토록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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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허함산은 손에 들린 회초리를 어색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허 부인은 여전히 물러나지 않고 계속 허정안을 몰아붙이려 했다.“정안아, 네가 오자마자 집을 때려 부쉈다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화가 안 날 수 있겠니?”“제가 부순 게 잘못됐나요?”허정안이 되물었다. 그러자 허함산이 재빨리 답했다.“아니다, 잘했다. 이렇게 다 없애면 의심 살 일도 없겠지.”처음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태도, 허 부인은 당혹스러웠으나 더는 명분이 없어 입을 닫았다.허정안은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그녀는 누구보다 아버지, 허함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우선순위는 늘 명예와 부였다. 허함산에게 있어서 좋은 딸이란 자신의 체면을 지켜줄수 있는 그런 딸이었다. “기왕 회초리를 들고 오셨으니, 아까 저를 모욕했던 하인들을 벌주시지요.”그가 회초리를 들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하인들에게 목격되었다. 허정안의 제안은 그의 체면을 지켜줄 수 있는 나쁘지 않은 대안이었다.허 부인이 급히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그 하인들은 유진이를 오랫동안 보필해 온 이들인데... 어찌....”“그러니까, 더 벌을 받아야지. 도대체 어떻게 교육을 받았기에,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허함산이 허 부인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회초리를 쥔 채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하인들이 용서를 구하며 비는 외침이 들려왔다. 허 부인은 창백한 얼굴로 돌아서서 허정안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너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하녀장도 벌받게 하더니, 이제는 아버지를 부추겨 다른 하인들까지 매질하게 해? 기어이 이 집안을 이렇게 뒤집어야 속이 풀리겠냐?”“하녀장은 눈이 멀어 저를 알아보지 못했고, 다른 하인들 또한 같은 이유로 저를 모욕했습니다. 분수를 모르는 자들을 허씨 가문에 그대로 두는 것이야말로 체면을 해치는 일입니다.”허 부인은 그 말에 다시 말문이 막혔고, 결국 자신이 허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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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이건 절대로 호의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눈치 빠른 소영이 재빨리 문으로 다가가 열리지 않도록 발을 걸었다.“둘째 도련님, 큰 아가씨께선 아직 세안도 마치지 못한 상태입니다. 지금 들어가시면 안....아악!”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명진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분노에 찬 기세에 소영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며 비틀거렸다. 바닥에 넘어지려던 찰나, 허정안이 발을 뻗어 의자를 밀었고 소영은 자연스레 바닥이 아닌 안락한 의자 위로 안착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허명진이 안으로 첫발을 내딛는 동시에 벌어진,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났다. 그가 머리를 내밀었을 때, 허정안의 손에 들려 있던 젓가락 중 한 개가 슉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허명진이 고개를 돌려보자, 젓가락은 이미 벽에 깊게 꽂혀 있었다.그는 더욱 격분했다.“허정안, 이 나쁜 년! 젓가락이 나한테 맞았으면 어쩌려고, 감히!”올해 열일곱인 허명진은 이미 순방사에서 활약 중이었다. 비록 당장은 주 업무가 순찰이긴 하지만, 한 단계만 더 올라가면 궁중 수비를 담당하는 황실 친위대로 배치될 수도 있었다. 거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친위대 총령으로 된다면 그야말로 천자의 근신.그만큼 순방사는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고, 세 단계로 진행되는 무과 시험을 전부 통과해야만 입문이 가능했다. 허명진은 열다섯부터 이 시험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하지만 신책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허함산이 위국공으로 봉해지고 나서야 특별히 채용된 것이었다. 그리고 어제가 바로 그의 첫 근무일로, 그가 집에 없었던 이유였다. 허정안은 여전히 탁자 앞에 앉은 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입 다물어. 내가 나쁜 년이면 넌 뭔데?”“흥! 감히 너 따위가 나와 비교해? 어머니한테서 다 들었어. 돌아오자마자 집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지? 어제 내가 없길 다행으로 여겨! 안 그랬다면 넌 진작에 쫓겨났을 테니까!”허정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쯧쯧 찼다.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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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방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허함산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이 불효 자식! 당장 무릎을 꿇어라! 기껏 키워줬더니, 이딴 식으로 보답해?”하지만 허정안은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소매에서 종이 뭉텅이 하나를 꺼냈다.“그만 화내시고, 제가 쓴 송서부터 읽어보시지요.”그러자 허함산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읽어 나갔다. 그의 얼굴에는 삽시에 먹구름이 끼였고, 이내 하인들을 향해 외쳤다.“다들 물러가 있어!”그의 명령에 하인들은 모두 일사불란하게 밖으로 빠져나갔고, 분위기가 급히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허정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이때, 허함산의 손에서 종이를 건네받은 허 부인이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글을 마저 읽지도 않은 채 바닥에 내던졌다.“지금 스스로 남장하고 아버지를 대신해 출정한 것을 관에 자백하겠다는 것이냐? 우리 가문을 멸문시킬 작정이냐!”허함산도 격노하며 소리쳤다.“감히! 네까짓 게 지금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 내겠다는 것이냐!”허정안은 그런 두 사람을 검은 두눈으로 바라보았다. 휜칠한 얼굴에는 분노와 처참함이 쓰여져 있었다.“아버지, 어머니, 저는 가문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지 않아도, 명진이가 제대로 입단속을 하지 못하면 진짜 파멸입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네 동생이 그럴 리 없다!”허 부인이 악이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허정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반박했다.“오늘 명진이가 저한테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자신이 어리지만 않았어도, 딸인 제가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 대신 출정했을 거라고 했습니다.”허함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허 부인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둘은 예전에도 자주 이 일로 얘기를 나눴었는데, 허명진이 몰래 엿듣고 고스란히 허정안에게 말한 모양이었다.“허정안, 네가 감히 날 모함해!”허명진이 이를 악문 채 그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곁에 있던 허유진도 나지막이 거들었다.“명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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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이 일까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그 아이가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니, 이 정도는 받아도 된다. 이 어미가 반드시 너를 이 국공부 족보에 올려주마.”허 부인이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허명진도 거들었다.“아버지 다리도 유진 누님께서 고쳐드린 건데, 진작 족보에 올랐어야 했습니다!”“며칠만 기다리거라. 아버지한테도 이미 말해 뒀으니, 조상님들께 인사드리는 의식만 치르면 된다.”허 부인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허유진이 허 부인의 품에 기대며 살갑게 속삭였다.“어머니가 계셔서 정말 좋아요. 어머니가 제 곁에 있어준다면, 다른 건 다 언니한테 양보해 줄 수 있어요.”“바보 같은 녀석. 내가 얼마나 너희 둘을 사랑하는지, 아직도 모르느냐?”허 부인이 두 남매를 껴안고 웃음을 터트렸다.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허명진은 더 이상 함부로 허정안을 건드리지 못했다. 허정안은 원래대로 표화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허 부인이 따로 하인을 붙여주지 않아 거의 소영이가 모든 것을 혼자서 관리해야 했다. 청소하러 오는 하녀도 하루에 한 번, 대충 쓸고 닦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둘만 이 커다란 표화원에 있으니, 분위기는 꽤 썰렁했다.소영이 분노에 찬 얼굴로 말했다.“유진 아가씨가 비싼 약재를 사 온 덕에 둘째 도련님의 허리 병이 나았다면서, 부인께서 매일 칭찬한답니다. 아니, 이곳 국공부가 얻은 부귀영화 다 아가씨 덕분인데, 그건 왜 생각 안 하고 다 그 여자만 편애하는지 모르겠어요.”국공부가 황제로부터 받은 포상은 모두 신책장군의 공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집 재산은 모두 허 부인이 단단히 손에 틀어쥐고 있었다. 일반적인 가문이라면, 딸이 열두 살쯤 되면 집안 살림을 배우는 것이 정상이었다. 허유진은 이미 자신의 이름으로 된 수많은 토지와 점포가 있었다. 하지만 허정안에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은 나날이 형편없어지고 있었으며, 오늘은 난방용 숯마저 줄었다. 최소 사흘 치는 돼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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