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Chapter 1 - Chapter 10

40 Chapters

제1화

무더운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다.도성 외곽 송별정 옆에 세워져 있는 긴 장대에 한 여인이 벌써 사흘째 매달려 있었다. 이미 누더기가 된 옷차림, 씻지 못해 엉망이다 못해 풍기는 악취, 장군집 여식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땀방울이 허정안의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와중에 그녀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물... 물을...” 그녀는 구경꾼들을 향해 마지막 희망을 담아 간절히 애원했다.혼신의 힘을 짜내어 내뱉은 절박한 한마디였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 미약해 바람 속에 묻혀졌다.그럴 수밖에 없었다. 친동생이 억지로 먹인 벙어리 약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다.그 순간, 날카롭지도 않은 무딘 화살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허정안의 복부를 꿰뚫었다.“윽...!”그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선혈이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구경꾼들이 놀라 소스라치며 황급히 길을 비켰다.곧이어, 말을 탄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 화살을 쏜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그 소년은 다름 아닌, 허정안의 친동생 허명진이었다.이윽고 그가 구경꾼들을 향해 소리쳤다.“모두 보십시오! 이 여자는 한때 제 누이였습니다. 어릴 적엔 하도 몸이 약해 부모님이 따로 별장에 데려가 돌볼 정도로 아주 지극정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성으로 돌아오더니, 완전히 미쳐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게 아닙니까? 어머니의 생신에서 참석한 장 공주님께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자신이 진짜 신책장군이라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장한 채 출정한 여식이라며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건 전사한 형님을 모독한 것뿐만 아니라, 조정과 대연국이 일구어 온 영광을 짓밟는 일입니다.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입니까!”신책장군을 사칭했다는 말이 나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안쓰러운 눈동자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라졌다.신책장군이 누구인가? 이 대연의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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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허정안은 푸른빛 학 자수가 놓인 외투를 걸친 채, 안에는 단아한 하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나 허리, 그 어떤 곳에도 비녀나 다른 장식을 하지 않은 매우 소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칼바람이 부는 눈보라 속에 걸으면서도 조금도 위축된 것 없이 허리가 꼿꼿하고 서슴없었다.그녀는 앞만 바라봤다. 회귀하게 되면서 그녀는 새 인생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전처럼 살 생각이 없었다. 과거에 허무하게 잃은 모든 것들을 되찾고 그들에게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이제는 자비는 없었다. 더는 피도 눈물도 없는 거머리 같은 작자들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은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아가씨, 잠시만요!”이때, 뒤에서 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정안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자마자 곧바로 서둘러 마부에게 돈을 지불하고 뒤따라온 것이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허정안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가는 모습에 놀라 물었다.“아가씨, 이게 도대체...?”“오라버니의 혼을 이끌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절을 올려야 한다. 넌 다시 마차로 돌아가거라.”“아닙니다. 저도 아가씨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소영이 허정안을 따라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허정안은 그런 그녀를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원래 하던 것을 계속했다. 소영의 충직함은 원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때문에 기생집에 팔릴 뻔했던 자신을 그녀가 구해준 뒤로, 소영은 유독 그녀를 따르게 되었다.소영이 옆에 있는 이상, 허정안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회귀한 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두었다. 이번엔 절대로 서둘러 자신이 신책장군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것이다. 저번 생이라 할 수 있는 회귀 전처럼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신 신책장군의 유일한 여동생이라는 신분만큼은 절대로 허유진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창평후는 조정에서 제법 권세와 명망을 가진 집안이었다. 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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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소영과 장 상궁 모두가 자리에 얼어붙었다. 마차 안에서 소란을 들은 허정안은 예상했던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했다. 회귀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문지기가 그녀를 사기꾼 취급하며 내쫓으려 했다. 그녀는 단순히 자신이 오랫동안 떠나있었기에 문지기가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허유진이 그녀의 신분을 빼앗았다는 건 상상도 못 했었기 때문이다. 말다툼이 격해졌고, 결국 그녀는 하인과 몸싸움을 벌였다. 소란이 일어나자 그제야 허씨 부부가 얼굴을 내밀었고, 이웃에게 혹시라도 발각될까 봐 두려워 마지못해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그러면서 만에 상황을 대비해 이웃에겐 가난하고 먼 친척이 무턱대고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며 난동을 부렸다고 알렸다. 졸지에 먼 친척 신세가 된 그녀는 자기 집에서 눈치를 봐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이들이 정중히 자신을 모시게 할 작정이었다. 곧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가씨께선 장군님의 유품을 가지고 오느라 이제서야 변방에서 돌아오셨는데, 어떻게 아침에 이미 도착하셨단 말입니까?”옆에 있던 장 상궁도 거들었다.“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허씨 부부가 직접 나와서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니오?”그러자 문지기가 장 상궁 뒤에 있는 마차를 한번 힐끔 훑었다. 이날 장 공주는 눈에 띄지 않게 일부러 검소하게 나온 상태였다. 그랬기에 마차는 그녀의 신분을 나타내는 그 어떠한 상징도 없었다.“그분들이 한가한 줄 아시오? 당신들 같은 사기꾼을 만날 시간은 없소이다!”문지기가 코웃음을 치며 무례하게 말했다.“네 이놈! 하인 주제에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단 말이냐!”장 상궁은 살짝 화가 났다. 장 공주를 꽤 오랫동안 보필해 온 사람으로서, 어디 가서든 존중을 받으면 받았지, 이런 문전박대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가만히 듣고 있던 허정안이 마차의 장막을 걷고 높지 않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얼마 전에 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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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신책대장군 휘하에는 뛰어난 장수 둘이 있었다.그중 한 명이 바로 한표였다. 그만큼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많았다. 지난 십 년, 신책장군은 전투를 지휘해야 했기에 도성으로 돌아온 적이 없었다. 그러나 3년에 한 번씩 자신의 부하를 보내 정사를 보고하게 했었다. 한표가 바로 그 대표였다. 그는 신책장군을 대신해 도성에 돌아올 때마다 황제를 알현해 변방의 군정 보고를 해왔다.그렇다 보니 장 공주도 당연히 그를 알아보았다. 그 한표가 허정안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으며 예의를 표했다. 장 공주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죄송합니다, 큰 아가씨. 소인이 제대로 호위하지 못한 탓에 아가씨께서 홀로 도성에 돌아오게 했습니다.”허정안이 손목을 주무르며 소영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괜찮네. 군도 통솔해야 하고, 장례도 준비해야 하는데, 괜히 짐이 될까 봐 먼저 출발한 것뿐이네.”한표는 머리를 들어 허정안과 눈을 마주치며 다시 한번 죄송함을 전했다. 그러고는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으로 하녀장을 노려보며 말했다.“대장군께서 생전에 가장 아끼시던 분이 바로 이분이시니라. 그런데 감히 이분께 이런 치욕을 줘? 목숨이 아깝지 않으냐!”한표는 키가 팔척에 달하는 장신이자, 위엄이 넘치는 무장이었다. 서른이 넘는 나이에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적들을 도륙할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뿜어내는 인물이기도 했다.그런 그가 눈을 부릅뜨자, 하녀장은 더 이상 잡아뗄 수 없음을 느끼고 바로 허정안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자기 뺨을 연달아 몇 번 내리치면서 눈물을 쏟았다.“제가 눈이 뼜나 봅니다. 늙으면 눈치라도 빨라야 하는데, 감히 아가씨를 못 알아보다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그러나 다급해진 것은 그녀뿐만 아니었다. 장 공주가 급히 장 상궁에게 부축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한표가 그녀를 발견하고 서둘러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소인, 장 공주마마를 뵙습니다.”장 공주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안 그래도 하얗던 하녀장의 얼굴이 더 창백하게 질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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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허정안은 예전부터 효성이 지극한 아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열네 살에 집안을 책임지겠노라며 남장하고 아버지를 대신에 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허함산과 허 부인은 허정안이 반드시 자신들의 말에 따를 것이라 확신했었다. 허정안은 창백한 입술을 꾹 다문 채 허 부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허 부인이 눈물을 닦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그래, 네가 우리 집 큰딸이 아니면 누가 큰딸이겠느냐. 하지만 나와 너의 아버지가 유진이도 딸로 받아들였으니, 너도 동생으로 받아들여야지. 그러니....”그렇게 말하며 허 부인이 허정안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곧바로 느껴지는 마디마디 굳은살에 충격을 받은 듯 몸이 굳어지더니, 서둘러 손을 다시 놨다.허정안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회귀 전에도 허 부인은 비슷한 반응을 했었다. 그땐, 자신을 향한 안쓰러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날 하녀장과 하는 말을 우연히 엿듣게 되었는데,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그 애는 어릴 적부터 자기주장이 강하고, 혼자서도 뭐든 잘 해냈잖아. 저절로 손이 가고 이유 없이 마음이 쓰이는 유진이랑 달라. 굳이 보듬어줄 필요 없어.”허정안도 처음부터 칭송받는 신책대장군은 아니었다. 처음 전장에 출정했을 땐, 오히려 남들보다 더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병사에 불과했다. 신책장군의 명성을 쌓은 건 모두 그녀의 뼈와 살을 가는 노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대가로 아름다운 피부도, 곱고 여린 손도 잃었다.허정안은 허 부인의 말대로 장 공주에게 허리를 숙이며 대신 자비를 구했다. 당연히 진짜 허유진을 동생으로 받아들였다거나, 또는 허 부인의 말에 따라야겠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공주마마,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그러자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허유진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고개를 들었다.장 공주가 말했다.“지금 이년을 위해 내게 간청하는 것이냐?”허정안이 피 묻은 군복과 붉은 홍영장식을 품에 안은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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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소영이 정문을 밀고 막 들어가려던 순간, 갑자기 몇몇 하녀들이 튀어나와 그녀를 밀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결국 소영은 그 힘에 못 이겨 휘청이며 바닥에 넘어졌다.“감히 아가씨 거처에 손을 대려 해? 어림도 없다!”하녀들이 매우 매섭고도 사나운 눈빛으로 말했다.소영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며 허정안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이 단호한 표정으로 하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소영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벌떡 일어나 한편에 놓여 있던 돌을 집어 들어 하녀들을 향해 던졌다.“주인도 못 알아보는 것들! 너희들이야말로 감히 이 집의 진짜 아가씨를 보고 뭐 하는 짓이냐!”소영은 온 힘을 다해 소리쳤고, 하녀들은 그에 놀라 슬금슬금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안으로 돌진해 사정없이 이곳저곳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허정안은 그런 소영을 아주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곳은 결코 안일한 마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다. 자칫하면 뼈까지 흔적도 없이 집어삼켜질 수도 있는 마귀의 소굴, 소영 또한 허정안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이 정도도 못 이겨내면 허정안 곁에 남을 자격이 없었다.한편, 본채 안방.허 부인과 허유진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어머니, 만약 제가 마지막에 기절한 척하지 않았다면 오늘 살아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다시 보지 못했을지도 몰라요.”“아유, 가여운 내 딸. 얼마나 힘들었니? 아무 말 말고, 일단 푹 쉬거라.”“하지만... 언니가 절 받아주지 않았는데... 더 이상 민폐를 끼치기 싫어요. 차라리 절 다른 곳으로 보내주세요.”“안 돼!”허 부인이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여기가 네 집인데, 어디로 간다는 말이니? 그런 말 말거라.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구나.”그러자 허유진이 다시 허 부인의 품에 안긴 채 눈물을 터트렸다. 허함산 또한 옆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맞장구쳤다.“정말 생각도 못 했네. 정안이가 이토록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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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허함산은 손에 들린 회초리를 어색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허 부인은 여전히 물러나지 않고 계속 허정안을 몰아붙이려 했다.“정안아, 네가 오자마자 집을 때려 부쉈다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화가 안 날 수 있겠니?”“제가 부순 게 잘못됐나요?”허정안이 되물었다. 그러자 허함산이 재빨리 답했다.“아니다, 잘했다. 이렇게 다 없애면 의심 살 일도 없겠지.”처음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태도, 허 부인은 당혹스러웠으나 더는 명분이 없어 입을 닫았다.허정안은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그녀는 누구보다 아버지, 허함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우선순위는 늘 명예와 부였다. 허함산에게 있어서 좋은 딸이란 자신의 체면을 지켜줄수 있는 그런 딸이었다. “기왕 회초리를 들고 오셨으니, 아까 저를 모욕했던 하인들을 벌주시지요.”그가 회초리를 들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하인들에게 목격되었다. 허정안의 제안은 그의 체면을 지켜줄 수 있는 나쁘지 않은 대안이었다.허 부인이 급히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그 하인들은 유진이를 오랫동안 보필해 온 이들인데... 어찌....”“그러니까, 더 벌을 받아야지. 도대체 어떻게 교육을 받았기에,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허함산이 허 부인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회초리를 쥔 채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하인들이 용서를 구하며 비는 외침이 들려왔다. 허 부인은 창백한 얼굴로 돌아서서 허정안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너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하녀장도 벌받게 하더니, 이제는 아버지를 부추겨 다른 하인들까지 매질하게 해? 기어이 이 집안을 이렇게 뒤집어야 속이 풀리겠냐?”“하녀장은 눈이 멀어 저를 알아보지 못했고, 다른 하인들 또한 같은 이유로 저를 모욕했습니다. 분수를 모르는 자들을 허씨 가문에 그대로 두는 것이야말로 체면을 해치는 일입니다.”허 부인은 그 말에 다시 말문이 막혔고, 결국 자신이 허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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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이건 절대로 호의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눈치 빠른 소영이 재빨리 문으로 다가가 열리지 않도록 발을 걸었다.“둘째 도련님, 큰 아가씨께선 아직 세안도 마치지 못한 상태입니다. 지금 들어가시면 안....아악!”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명진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분노에 찬 기세에 소영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며 비틀거렸다. 바닥에 넘어지려던 찰나, 허정안이 발을 뻗어 의자를 밀었고 소영은 자연스레 바닥이 아닌 안락한 의자 위로 안착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허명진이 안으로 첫발을 내딛는 동시에 벌어진,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났다. 그가 머리를 내밀었을 때, 허정안의 손에 들려 있던 젓가락 중 한 개가 슉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허명진이 고개를 돌려보자, 젓가락은 이미 벽에 깊게 꽂혀 있었다.그는 더욱 격분했다.“허정안, 이 나쁜 년! 젓가락이 나한테 맞았으면 어쩌려고, 감히!”올해 열일곱인 허명진은 이미 순방사에서 활약 중이었다. 비록 당장은 주 업무가 순찰이긴 하지만, 한 단계만 더 올라가면 궁중 수비를 담당하는 황실 친위대로 배치될 수도 있었다. 거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친위대 총령으로 된다면 그야말로 천자의 근신.그만큼 순방사는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고, 세 단계로 진행되는 무과 시험을 전부 통과해야만 입문이 가능했다. 허명진은 열다섯부터 이 시험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하지만 신책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허함산이 위국공으로 봉해지고 나서야 특별히 채용된 것이었다. 그리고 어제가 바로 그의 첫 근무일로, 그가 집에 없었던 이유였다. 허정안은 여전히 탁자 앞에 앉은 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입 다물어. 내가 나쁜 년이면 넌 뭔데?”“흥! 감히 너 따위가 나와 비교해? 어머니한테서 다 들었어. 돌아오자마자 집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지? 어제 내가 없길 다행으로 여겨! 안 그랬다면 넌 진작에 쫓겨났을 테니까!”허정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쯧쯧 찼다.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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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방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허함산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이 불효 자식! 당장 무릎을 꿇어라! 기껏 키워줬더니, 이딴 식으로 보답해?”하지만 허정안은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소매에서 종이 뭉텅이 하나를 꺼냈다.“그만 화내시고, 제가 쓴 송서부터 읽어보시지요.”그러자 허함산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읽어 나갔다. 그의 얼굴에는 삽시에 먹구름이 끼였고, 이내 하인들을 향해 외쳤다.“다들 물러가 있어!”그의 명령에 하인들은 모두 일사불란하게 밖으로 빠져나갔고, 분위기가 급히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허정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이때, 허함산의 손에서 종이를 건네받은 허 부인이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글을 마저 읽지도 않은 채 바닥에 내던졌다.“지금 스스로 남장하고 아버지를 대신해 출정한 것을 관에 자백하겠다는 것이냐? 우리 가문을 멸문시킬 작정이냐!”허함산도 격노하며 소리쳤다.“감히! 네까짓 게 지금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 내겠다는 것이냐!”허정안은 그런 두 사람을 검은 두눈으로 바라보았다. 휜칠한 얼굴에는 분노와 처참함이 쓰여져 있었다.“아버지, 어머니, 저는 가문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지 않아도, 명진이가 제대로 입단속을 하지 못하면 진짜 파멸입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네 동생이 그럴 리 없다!”허 부인이 악이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허정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반박했다.“오늘 명진이가 저한테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자신이 어리지만 않았어도, 딸인 제가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 대신 출정했을 거라고 했습니다.”허함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허 부인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둘은 예전에도 자주 이 일로 얘기를 나눴었는데, 허명진이 몰래 엿듣고 고스란히 허정안에게 말한 모양이었다.“허정안, 네가 감히 날 모함해!”허명진이 이를 악문 채 그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곁에 있던 허유진도 나지막이 거들었다.“명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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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이 일까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그 아이가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니, 이 정도는 받아도 된다. 이 어미가 반드시 너를 이 국공부 족보에 올려주마.”허 부인이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허명진도 거들었다.“아버지 다리도 유진 누님께서 고쳐드린 건데, 진작 족보에 올랐어야 했습니다!”“며칠만 기다리거라. 아버지한테도 이미 말해 뒀으니, 조상님들께 인사드리는 의식만 치르면 된다.”허 부인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허유진이 허 부인의 품에 기대며 살갑게 속삭였다.“어머니가 계셔서 정말 좋아요. 어머니가 제 곁에 있어준다면, 다른 건 다 언니한테 양보해 줄 수 있어요.”“바보 같은 녀석. 내가 얼마나 너희 둘을 사랑하는지, 아직도 모르느냐?”허 부인이 두 남매를 껴안고 웃음을 터트렸다.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허명진은 더 이상 함부로 허정안을 건드리지 못했다. 허정안은 원래대로 표화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허 부인이 따로 하인을 붙여주지 않아 거의 소영이가 모든 것을 혼자서 관리해야 했다. 청소하러 오는 하녀도 하루에 한 번, 대충 쓸고 닦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둘만 이 커다란 표화원에 있으니, 분위기는 꽤 썰렁했다.소영이 분노에 찬 얼굴로 말했다.“유진 아가씨가 비싼 약재를 사 온 덕에 둘째 도련님의 허리 병이 나았다면서, 부인께서 매일 칭찬한답니다. 아니, 이곳 국공부가 얻은 부귀영화 다 아가씨 덕분인데, 그건 왜 생각 안 하고 다 그 여자만 편애하는지 모르겠어요.”국공부가 황제로부터 받은 포상은 모두 신책장군의 공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집 재산은 모두 허 부인이 단단히 손에 틀어쥐고 있었다. 일반적인 가문이라면, 딸이 열두 살쯤 되면 집안 살림을 배우는 것이 정상이었다. 허유진은 이미 자신의 이름으로 된 수많은 토지와 점포가 있었다. 하지만 허정안에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은 나날이 형편없어지고 있었으며, 오늘은 난방용 숯마저 줄었다. 최소 사흘 치는 돼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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