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소하겸은 말없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흙빛 눈동자는 맑으면서도 깊었고 한 점의 파문 없이 대청을 가로질렀다. 차는 미지근했지만 납월의 찬 기운으로 싸늘해진 날씨 덕에 찻김은 서서히 피어올라 탁한 안개처럼 나정의 눈앞을 흐리게 감쌌다. 그녀는 조용히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미세한 긴장감이 떨림으로 번졌다.“여인에게 호적을 세우고 군주로 봉한다?”오랜 침묵 끝에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칼날처럼 예리했다. “나 아가씨는 짐에게 불경죄를 뒤집어 씌울 작정인 건가?”그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서려 있었다. 여인에게 군주를 책봉하고 별도로 호적을 세우는 것은 오직 전하만이 허락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나정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런 뜻은 없습니다.”그가 당장 거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녀는 오히려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대군자가는 전하의 친제시며 대비마마의 막내아들입니다. 대군자가의 공적과 위망은 온 조정이 다 알고 있지요. 그러니 대군자가께서 청하신다면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겁니다.”그녀는 신중히 단어들을 골라 말했고 의도적으로 점괘니 예언이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 능력은 때로는 축복이 아닌 불신이 되니까 말이다. 그녀는 이미 융복전 예언으로 대비마마의 신임을 얻었고 이제는 그 신임을 발판 삼아 생을 지탱할 자리를 쟁취해야 했다.소하겸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조정의 눈치를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마음에 품은 여인은 그가 국경을 지키는 사이 형의 비가 되어 중전 자리에 올랐다. 누구보다 화려하면서 외로운 자리. 그가 싫어하는 것은 단 하나. 복잡한 말과 간섭이었다. 그리고 나정은 정확히 그것을 짚어냈다.“대단하군. 네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짐은 분명 네가 원하는 것을 이뤄줄 수 있어.”나정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 어려웠다.“짐은 단정하고 지혜로운 비를 원한다. 조롱거리가 될 부인을 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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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백씨 마님은 정중하게 상을 차려놓고 잔남군을 저녁 식탁으로 청했다. 부부는 오랜만에 마주 앉아 식사를 나누며 자연스레 나정의 이야기를 꺼냈다.“대감님, 정이가 요즘 참 이상해졌습니다.”백씨 마님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진남군 역시 정이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 아이는 웃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순진하고 불안한 아이의 미소가 아니었다. 이제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사람의 미소, 되레 한 수 앞서 있는 자의 여유로움에 가까웠다. 그럴 때마다 진남군 마음속에는 불쾌함이 스며들었다. 마치 자신이 무능한 아버지라도 되는 듯, 그 아이 덕분에 진남군 자리에 오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딸의 공로도, 목숨도 결국 아버지 뜻 아래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백씨 마님은 눈치를 살피며 말을 덧붙였다.“정이는 너무 야위었어요. 차라리 소양으로 보내 쉬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차라리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멀리 내보내는 것. 나정이 돌아온 지 겨우 반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 장남은 벌을 받고 병이 들었고 백지현은 문기당에서 쫓겨났다. 정월 봄 연회가 다가오는데 정이를 제쳐두고 현이만 데리고 나갈 명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정은 이제 진남군 댁의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차라리 소양에 있는 먼 친족에게 약간의 금전을 주고 나정을 맡긴 후 지역 명문가에 시집보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진남군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집안의 주인이었고 세상 물정을 아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씨 마님처럼 성격이 급하지 않았다.“무리입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대비마마께서 나정이 돌아온 걸 아시는데 아무 이유 없이 다시 내보낼 수는 없어요.”“마마께서도 처음에는 의심을 품을 거지만 곧 잊으실 겁니다.”백씨 마님은 차분히 답했다.“생각해 보세요. 누가 자기 목숨을 구해줬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계속 보상을 요구하면 지겹지 않겠어요?”진남군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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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정원 안은 달빛에 젖어 은설처럼 빛났다. 차갑고 고운 은빛이 마당을 덮었고 그 속에 백씨 마님, 나신, 백지현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인, 끔찍하리만큼 아름다운 불길을 말이다. 나정은 어스름한 시야 속에서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눈물은 마치 무언가를 애도하듯 조용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횃불을 창 너머로 던졌다. 그녀를 태워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나정의 가슴에 솟구친 원한은 타오르는 불꽃보다 더 뜨거웠다. 그 감정은 그녀가 죽은 뒤에서도 사라지지 않았고 그렇게 영혼이 되어 한양 안을 떠돌며 오랫동안 머물렀다.진남군 관저가 몰락하고 그 집안사람들이 하나하나 죽어간 뒤에야 나정의 혼은 비로소 조용해졌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뒤 그녀는 모든 원망을 서서히 내려놓았다. 전생의 기억은 뿌옇게 희미해졌고 꿈에서조차 찾아오지 않았다. 오늘 밤 이 악몽이 아니었다면 영영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울면서 왜 저를 죽인 겁니까, 어머니. 울지 않았다면 차라리 더 편했을 텐데. 그녀는 혼이 되어 방황하던 첫해 줄곧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 그저 대답을 듣고 싶어서, 이유를 알고 싶어서. 백씨 마님의 눈물은 죽어서도 그녀를 묶어두는 족쇄가 되어버렸다.그 눈물 한 방울이 그녀를 집착하게 만들었고 이승에 머무르게 했다. 다시 태어난 그녀는 지금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백씨 마님이 자신을 끔찍하게 증오했다는 사실도, 불길 속에서 눈물로 자신의 숨통을 끊어버렸다는 사실도. 부정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나정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키더니 조용히 야경을 서던 추란을 불렀다. 그녀는 난로 위 물을 덜어내어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그녀의 땀을 닦아주었다. 속옷을 갈아입으려는 순간, 나정이 문득 입을 열었다.“모레가 제사일 이지?”“예, 아씨. 작은 제사 날입니다.”추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바로 그 작은 제사 날에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고 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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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소한(小寒), 모처럼 맑게 갠 하늘이 펼쳐졌지만 기온은 오히려 더 내려가 있었다. 나뭇가지 끝에는 옅은 안개가 내려앉았고 그 위에는 얼음이 얼어붙어 멀리서 보면 마치 하얀 눈꽃이 핀 듯했다. 나정은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조모가 머무는 서정당으로 향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언니, 둘째와 셋째 숙모 그리고 사촌 여동생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조모는 아직 안방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새언니는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며칠 전 나신이 벌을 받고 추위에 떨었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이다.나정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있다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 조모가 머리 손질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씨 마님과 백지현도 모습을 드러냈다.“다들 앉으세요.”백씨 마님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점심 전까지는 특별한 일이 없으니 모두 조모님의 불당에 들러 경문이나 한 장씩 옮겨 적으세요. 온 한 해 고생했으니 오늘만큼은 조모님께 마음을 담아 효를 올립시다.”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응했다.그때 나정이 조모를 부축하며 안방에서 나왔다. 조모는 진한 보라색 장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금과 청보석이 박힌 화려한 장식을 꽂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값비싼 장신구조차도 그녀의 온화한 인상 앞에서는 귀티를 더하지 못해 빛을 잃은 듯했고 그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부각시켜 주었다. 반대로 나정의 어머니는 불과 3년 전부터 일품의 작위를 받은 몸이지만 그 몸에 밴 품격과 화려함은 이미 뼛속까지 깊게 새겨진 듯했다. “조모님, 이 비녀 참 예쁘네요.”나정의 이복 여동생 나연이 다가와 말했다. 그러자 조모는 웃으며 답했다.“지난해 내 생일에 지현이가 선물해 준 것이다.”“이런 청보석 비녀는 조모님처럼 귀하고 덕망 깊으신 분이 아니라면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테지요.”백씨 마님이 웃으며 덧붙이자 사람들은 일제히 맞장구를 치며 아첨을 보탰다. 조모는 곁에서 조용히 서 있는 백지현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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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하인이 막 설명하려던 찰나, 백씨 마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백옥 파편 같은데?”백지현도 목소리를 살짝 높이며 말했다.“백옥 파편이요? 혹시 관음상에서 떨어진 건 아닐까요?”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입을 모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모의 작은 불당에는 여러 불상이 모셔져 있었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희귀한 백옥으로 조각된 관음상이었다. 그 조각상은 백지현의 아버지, 즉 백씨 마님의 친 오라버니가 세해 전 상경하여 진남군의 작위 승격을 축하하며 특별히 선물한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값비싼 물건일 뿐만 아니라 남해 관음사에서 이십 년 동안 봉안되었던 법보였다. 이후 유실되어 타국으로 흘러들었고 백가가 우연히 손에 넣은 뒤 조모께 드린 귀한 물건이었다. 조모께서는 그 조각상을 보물처럼 아꼈다.한양에서는 대갓집 마님들이 일부러 이 조각상을 보기 위해 나가를 찾을 만큼 그 관음상은 유서 깊은 물건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닌 나가 여인들의 자부심 그 자체였는데 그런 관음상이 손상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설마요... 작은 불당은 언제나 사람을 붙여 지키지 않습니까? 관음상에 무슨 일이 있었을 리 없어요.”백지현은 침착하게 백씨 마님을 안심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이 역력했다.“맞아요. 요즘 우리 집은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흘러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 귀한 불상이 부서질 리 없지요.”셋째 마님도 이에 질세라 덧붙였다. 사람들은 조모를 따라 조심스럽게 불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 중앙에는 백옥 관음상이 여전히 제 자리에 앉아있었다. 하얗고 은은한 윤기를 띤 옥빛, 반쯤 내린 눈매에 고요한 미소를 머금고 세상을 굽어보는 그 모습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자비로웠다. 긴장했던 나가 여인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백씨 마님과 백지현은 얼굴빛이 잠시 일그러지더니 황급히 표정을 풀었다.“할머니, 걱정 마세요. 관음상은 아무 일 없습니다.”나정이 차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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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나정은 포단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고요히 두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녀의 의식은 어느덧 지난 생으로 흘러들었다. 그해 작은 제삿날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조모의 작은 불당에 모셔져 있던 가장 값비싼 백옥 관음상이 산산이 부서진 것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떨어뜨린 것인지 아니면 바람에 의해 넘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조모는 깜짝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리며 맥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한참 동안이나 일어서지 못했다. 그 무렵 나정은 물에 빠진 뒤 고열에 시달리다 조모의 서정당으로 옮겨져 요양 중이었다. 그녀는 병세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애써 몸을 일으켜 기도를 드리러 불당으로 향했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 모든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산산이 부서진 백옥 관음상, 그리고 사람들의 침통한 침묵. 모두의 얼굴에는 공포와 당혹이 번져갔다.“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조모의 울먹이는 음성이 불당 안에 아득하게 퍼졌다. 바로 그때 나정의 어머니가 기회를 틈타 나섰다.“아무래도 정이는 이 집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비범한 아이 같습니다. 어머님, 제 생각에는 정이를 밖으로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입으로는 비범하다는 말로 예쁘게 포장했지만 그 말속에 숨은 뜻은 분명했다. 나정은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이며 집안에 화를 끌어들인다는 은근한 비난이 섞여있었다. 조모는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인지 결국 앓아눕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나정은 더 이상 누구의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병이 채 낫기도 전에 문기당으로 돌아가야 했고 몸종들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얕보며 업신여기기 시작했다. 모두가 수군거리며 교묘하게 그녀를 괴롭혔다.“큰 아가씨가 돌아오자마자 이런 일이 생겼다더군.”“진짜 재수 없는 존재인가 봐.”“대체 언제쯤 보내려나? 대감님과 마님께서 얼른 결단을 내려야 할 텐데.”조모의 병환으로 인해 정월의 모든 사교 행사는 나씨 부인인 백씨 마님의 손에 맡겨졌다. 그녀는 이 기회를 빌어 백지현을 본격적으로 떠받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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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백씨 마님은 두 번이나 조용히 나정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끝내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점심상이 차려질 무렵, 집안의 남정네들도 속속 자리에 들었다. 조모의 서정당에는 세 개의 원형 식탁이 마련되었고 나정은 두 번째 상의 윗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정의 아래 자리에 앉은 사람은 사촌 여동생이었는데 그녀는 나정의 이복 여동생과 친가 집 사촌 여동생들보다 훨씬 좋은 자리에 위치하여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복 여동생인 나연은 백지현을 우러러보며 따랐고 일곱 살 난 쌍둥이 이복 여동생들은 아직 세상의 이치를 헤아리거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나이가 아니었다. 다만 나미만은 묵묵히 음식을 씹으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때 장남인 나신이 문득 입을 열었다.“할머니, 작은 불당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신지요?”그 한마디에 윗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밥 먹던 손이 멈추었다. 진남군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 말입니까?”백씨 마님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조용히 선을 그었다.“별일 아닙니다.”그러자 조모는 손을 맞잡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불당에서 물건 하나가 깨졌단다.”“뭐가 깨졌다는 겁니까?”진남군이 묻자 이어 나신이 되물었다.“혹시 귀한 물건이었습니까?”그러자 백씨 마님이 서둘러 끼어들었다.“정이가 공양용으로 가져온 옥여의를 실수로 떨어뜨렸답니다. 그런 사소한 일 하나까지 소문이 날 줄 몰랐습니다. 몸종들의 입단속이 시급해 보이는군요.”진남군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밥상머리에서 별것도 아닌 일을 굳이 꺼내야 하는 것이냐?”그러고는 장남을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분명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나신은 목덜미까지 기어오르는 불쾌함을 억지로 삼켜냈다. 꾸중을 들으니 겁이 나긴 했지만 어릴 적부터 눌러온 울분이 잔등을 타고 다시 솟구쳤다.‘내 언젠가 진남군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면 조상의 무덤부터 갈아엎을 것이다.’하지만 관음상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나신은 조용히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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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방으로 달려온 몸종은 송 서모의 안채에서 올라온 아이였다.“대감님, 서모님께서 큰일 났습니다.”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다급한 숨결로 말을 쏟아냈다. 송 서모는 진남군이 아끼는 부장 중 한 명의 누이였다. 그녀의 용모는 말할 것도 없고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도 정취가 깃들어 있었다. 남심을 잘 헤아릴 뿐만 아니라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투정 부릴 줄 아는 여인이었다. 진남군은 대체로 여색에 담담한 인물이었으나 송 서모만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그는 평생 아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으로는 백씨 마님 하나만을 두었고 그 외의 첩은 오직 두 명뿐이었다. 한 명은 허 서모였는데 그녀는 백씨 마님이 나정을 낳은 후 몸이 쇠약해지며 그와의 동침을 꺼려하자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들인 조신한 양가 규수였다.또 다른 사람은 묘 서모였다. 그녀는 허 서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백씨 마님이 집안에 빈 방이 있다면 체통이 깎인다며 스스로 나서서 들여온 인물이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그녀가 질투심이 많다는 말을 불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들여온 것이라고 한동안 수군거렸다.그러나 그 두 여인은 모두 얌전하기는 했으나 진남군의 눈에 들지 못했다. 오직 송 서모만이 그가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여인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뱃속에 생명을 품고 있었다. 진남군은 즉시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무슨 일이냐?”몸종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서모 님께서 문기당 앞을 지나다가 문 앞에 깔린 얼음에 미끄러지셨습니다. 누가 물을 쏟았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얇은 얼음을 만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큰 아가씨와 몸종들이 서모님을 부축해 문기당 안으로 데리고 갔어요. 저는 손난로를 전하러 가는 길에 그 장면을 보고는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얼른 뛰어온 겁니다.”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이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남군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다급히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허둥지둥 문기당 앞에 당도했을 때 거기서 뜻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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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넘어졌다 하지 않았느냐?”진남군의 물음에 송 서모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저는 넘어진 적이 없습니다.”그러고는 이내 되물었다.“누구한테서 들으신 겁니까? 대감님께서는 외서재에 계셨던 거 아닙니까?”진남군과 함께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송 서모의 몸종 이권이었다. 그녀는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듯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진남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손난로를 전해드리러 가다가 서모님께서 넘어지는 걸 보고는....”하지만 송 서모는 더욱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내 네게 손난로를 부탁한 적이 있었던가?”그 질문에 이권의 당황해 목소리까지 떨렸다.“그게… 서모님께서 추우실까 염려되어…”송 서모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오늘 아이 신발에 쓸 무늬를 받으러 문기당에 간다고 공 아주머니에게 부탁해두었다. 옷도 든든히 입고 나섰는데 너는 무슨 이유로 날 따라왔단 말이냐?”그제야 진남군은 조금씩 이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는 송 서모와 이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낮고 눌린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어찌 된 일이냐?”송 서모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제가 문기당 쪽으로 가던 길에 큰 아가씨의 몸종인 추화를 마주쳤습니다. 온몸이 흙투성이더군요. 그래도 명색에 큰 아가씨의 몸종인데 그런 모습으로 마당을 돌아다니다간 아가씨의 체면이 깎일까 싶어 제가 입던 외투를 벗어 입혀주었습니다. 헌데 그 애가 커다란 외투에 익숙지 않아 걸음걸이가 어색해지더니 문기당 문 앞에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지 뭡니까.”이어 그녀는 부드럽게 덧붙였다.“꽤 크게 넘어졌는지 무릎이 까졌고 온몸이 아프다며 의원을 부르겠다고 하기에 큰 아가씨와 상의 중이었습니다.”진남군의 얼굴에 잠시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갔다. 한편 그 옆에 선 백씨 마님은 마치 얼음 물을 뒤집어쓴 듯한 낯빛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와 허탈함이 뒤섞인 침묵이 고스란히 나정에게도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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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백씨 마님은 곧바로 송 서모의 몸종인 이권을 처분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간단하고 명확했다. 송 서모를 부추겨 문기당으로 향하게 하고 그곳에서 꽃무늬 본을 청하는 구실로 데리고 나가 미리 얼음이 깔린 지점에서 일부러 넘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문기당 사람들에게 그녀를 넘기고 자신은 곧장 외서재로 달려가 진남군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 것. 그저 이것뿐이었다.계획이 성공한다면 이권은 정원(正院) 소속의 일급 몸종으로 승급할 수 있었다. 만약 실패하게 된다면 미련 없이 팔려나가게 된다.진남군은 백씨 마님에게 사전 통보도 없이 송 서모를 집에 들였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고 그렇다고 해서 첩 하나로 남편과 다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이 저택에 묵는 첩은 하나밖에 없으니 크게 흠이 될 건 없을 거라며 스스로를 납득시켰다.결국 그녀는 송 서모의 시중을 들게 할 명목으로 자신의 측근인 이권을 그녀 곁에 불여놓았다. 송 서모는 소가 출신답게 대갓집의 내실과 법도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몸종들의 출신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몸종들의 몸값 문서를 청구해야만 진정으로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지금 이권의 몸값 문서는 당연히 백씨 마님의 손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무지는 곧 허점이 되었다. 백씨 마님에게 있어 송 서모를 장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만약 백씨 마님의 눈 밖에 난 사람이라면 진남군의 아이를 배었다 하더라도 순조롭게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송 서모의 달거리가 늦어졌다는 걸 알아챈 건 송 서모의 몸종이었고 그녀는 이 사실을 곧바로 백씨 마님에게 알렸다. 원래는 조용히 처리할 계획이었지만 나정을 집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재앙의 그림자를 뒤집어씌워야만 했다.이런 상황에서 송 서모의 회임 사실은 백씨 마님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녀의 회임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이권에게 명하여 일부러 그녀를 넘어지게 한 후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다.만약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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