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By:  최은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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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은 대비를 대신해 칼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 대가로 그녀의 가문은 높은 작위를 얻게 되었고 그녀는 남쪽으로 내려가 세 해를 요양하며 지냈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나정의 안채는 사촌 여동생이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손끝 하나 까딱이지 않고 나정이 피 흘려 얻어낸 모든 것을 제 것인 양 안온히 누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그 아이만 아꼈고 할머니 또한 그녀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워했다. 심지어 그녀의 소꿉친구마저 과거의 약속은 잊은 채 나정보다 그 아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며 은근한 동정을 담아 말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나정이 크게 소란을 피우자 그들은 하나가 되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허무한 끝을 맞이한 나정은 무려 열여덟 해 동안 이승에 붙들린 채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다. 소리 없이 그들 주위를 맴돌며 끝을 지켜보던 어느 날, 그녀는 번쩍 눈을 떴다. 그렇다. 그녀는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하늘이 다시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에는 결코 억눌려 살지 않을 것이고 내 뜻에 귀를 기울이고 내 감정에만 충실할 것이다. 그녀는 완벽한 복수를 위해 권세 높은 인물인 화종왕과 손을 잡았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화종왕의 비로 불릴 것이나 실상은 짐의 노예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네가 거짓으로 죽음을 꾸밀 작정이라면 짐이 기꺼이 그 연극을 도와주겠다. 그 후에 너에게 이름과 신분도 새로 내어 줄 것이고 군왕처럼 군주의 칭호와 봉지를 내려주도록 할 것이다.” 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책략으로 빈을 짓밟고 야망 가득한 명문가세들과도 맞서며 대비의 신임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 화종왕은 드디어 이 나라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그 젊고 오만하며 잔혹했던 군왕이 어느 날 나정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짐이 군주의 인장을 중전의 금인으로 바꾸어주겠다. 원하느냐?” 언제나 충성스럽고 순종적이었던 나정은 그날 처음으로 그를 외면했다. “원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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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나정은 대비를 위해 칼을 맞았다. 날카로운 칼날은 그녀의 폐부를 깊게 찔렀고 그로 인해 그녀의 몸은 병들어 버렸다. 동시에 그녀의 희생은 나씨 일가에 영광과 번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폐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고 그녀의 몸은 날이 갈수록 허약해졌다. 그렇게 그녀는 병을 떠안은 채 남쪽의 따스한 순천에서 무려 세 해 동안 요양하며 지내야 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나씨 저택으로 돌아온 날, 그녀는 자신의 안채에 다른 여인이 앉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는 자신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나정이 쓰던 안채를 점령하고 그녀의 몸종들을 부리며 원래 자기 것인 양 태연하게 그 모든 것들을 누리고 있었다.

나정의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이제 그녀가 아닌 사촌 여동생을 더 아꼈다. 조모조차 그 아이를 ‘우리 집 복덩이’라 부르며 총애했고 그녀의 소꿉친구였던 사람마저 그녀가 나정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해 겨울, 대비는 나정에게 현주(县主)의 작호를 내리려 했지만 그마저도 나정의 어머니가 가로막아 무산되었고 그 작호는 결국 사촌 여동생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분노를 토해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조소와 핀잔뿐이었다.

“나정, 네가 드디어 미친 게로구나.”

그들은 가시 박힌 말로 그녀의 마음을 도려냈고 하나 둘 그녀를 짓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바람대로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가 생을 마감한 후 집안사람들은 숨을 돌리며 안도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귀찮은 짐 하나를 덜어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원혼이 깊었던 탓일까? 그녀는 끝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열여덟 해를 귀신으로 떠돌아다녔다. 그들 곁에서 맴돌며 자신을 배신한 이들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그들의 욕망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그들 가문이 어떻게 몰락되는지를 말이다. 아무 감정 없이 이 모든 것을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금 눈을 떴을 때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를 태운 마차는 궁궐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수채화처럼 흐려지는 풍경 속에서 마부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아가씨, 앞에 포주의 찻집이 있습니다. 잠시 쉬어가시겠습니까?”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짧게 대답했다.

“아니. 바로 궐로 향하거라.”

그러더니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택으로 가지 말고 안흥방으로 가자꾸나.”

옆에 있던 몸종 추화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안흥방은 뭐 하는 곳입니까?”

“대비마마를 모시는 위 내관의 사가(私宅)이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나정과는 달리 추화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내관을 찾아가시겠다고요? 저택에 들르시지 않으실 겁니까? 먼저 대감님과 마님께 인사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운 우려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생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그녀는 그때 곧장 집으로 향했다가 한 사건으로 인해 삶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가장 아끼던 몸종인 추화와 추란이 차례대로 살해당하며 홀로 그들과 맞서 싸우던 그녀는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나정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평온했다. 안흥방에 도착하자 그녀는 손수 문을 두드렸다. 위 내관은 그날 마침 휴일이라 마당에서 열심히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나정을 본 그는 깜짝 놀라 당황한 얼굴을 한 채 그녀에게로 달려 나왔다. 그도 대비 곁을 지키는 사람이라 나정이 칼에 맞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기에 악몽 같았던 그날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아가씨! 들었습니다. 병환이 깊으시다던데…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그의 얼굴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오늘 막 궁궐로 돌아온 참이라 대비마마를 뵙고자 했는데 길이 어찌나 복잡한지...”

나정의 말에 위 내관은 흔쾌히 답했다.

“제가 지금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녀가 무사히 수성궁에 발을 들이자 대비가 직접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으며 오랜만의 재회를 만끽했다.

“살이 붙었구나. 고운 얼굴도 여전하고… 잘 다녀왔느냐?”

대비의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전생에 나정은 대비를 찾아가겠다고 수차례 말했으나 그녀의 어머니가 막아섰다.

“은공을 내세워 대비에게 보답을 바란다면 우리 모두가 죽는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대비가 보낸 사람들을 모조리 쳐냈었다. 하지만 나정이 세상을 떠난 뒤 대비는 법화사에 가 그녀를 위해 무려 열다섯 해 동안 등불을 밝히며 그녀의 환생을 빌어주었다. 그 모든 걸 기억하는 나정은 대비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마마,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대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보거라.”

“마마의 손목에 있는 그 염주 말입니다. 저에게 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염주의 힘과 마마의 은혜를 빌어 제 앞날의 평안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대비는 더없이 기뻐했다. 그녀는 기꺼이 자신의 팔목에 걸린 염주를 풀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잘 간직하거라.”

나정은 남쪽 순천에서의 소소한 일화를 대비에게 들려주었다. 그녀의 말투는 밝고 유쾌했으며 밉지 않은 농담까지 섞어하며 대비를 여러 번 웃게 만들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던 터라 대비는 나정을 붙잡아 기어코 같이 점심까지 먹은 후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제 막 궁궐에 들어섰던 터라 아직 조모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대비는 위 내관을 시켜 그녀를 마차까지 배웅하게 했다. 나정은 그토록 원했던 염주를 품에 안고 진남군 댁으로 향했다. 붉은 대문에 금장 문고리, 금빛 사자상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고 밝게 빛나는 ‘진남군 댁’ 현판은 그녀가 피 흘리며 지킨 공로의 상징이었다. 이 댁의 주인이 세 해 전까지만 해도 정 3품의 무장이었다는 사실을 과연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녀가 문 앞에 다가서자 하인이 그녀를 막아서며 물었다.

“누구십니까?”

“크게 아뢰거라. 진남군 댁의 나 아가씨가 귀환하셨다고 말이다.”

추화는 당당하게 말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시 후 안에서 겸인이 나오더니 거만한 태도로 그녀에게 말했다.

“정문은 아무 때나 열리는 게 아닙니다. 서쪽에 있는 측문으로 들어가시지요.”

그 말에 추화는 벌컥 화를 냈다.

“아가씨가 돌아오신 날입니다. 측문이라니 말이 됩니까?”

“부디 양해 바랍니다. 지금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천천히 규율을 익히셔야 할 것입니다.”

위 내관은 점차 얼굴이 굳어지더니 마차에서 내려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진남군을 불러오거라. 대비마마의 전갈이 있다.”

겸인은 그제야 나정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과거의 소녀가 아니었다. 이제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낮춰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한품 승색을 입은 태감 앞에 그는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안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그 덕에 나정은 굴욕적인 측문이 아닌 당당히 정문으로 저택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모든 식솔들이 마당으로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전생에는 그녀가 이 측문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모든 위엄을 잃었고 그로 인해 누구도 그녀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생은 다르다. 수많은 시선을 뒤로하고 나정은 조용히 정문을 지나 그녀가 마땅히 있어야 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잃었던 것들을 하나씩 되찾기 위한 싸움이 시작될 테니 기쁘다고 해야 할까?

위 내관은 몇 마디 덤덤히 인사를 나눈 뒤 궁궐로 돌아갔다. 잠시 후 진남군 댁, 조모가 머무는 정당에는 온 가족이 모여 있었다. 부모와 새언니, 두 명의 숙모, 사촌 형제들과 아랫사람들까지. 방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 나정이 대문 앞에서 하인 하나에게 무례하게 막혀 서 있던 일이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이들조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고 떠들었다. 그때 조모가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정이가 쓰던 안채는 잘 정리되었느냐?”

그러자 나씨 부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혜화당은 벌써 오래전에 단정히 손봐 두었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문득 조용해졌다. 웃음소리는 멎었고 서로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흩어졌다. 나정이 집을 떠나기 전 전하께서 직접 진남군이라는 작호와 함께 저택을 하사하였고 그 저택의 문기당을 나정이 머무는 곳으로 지정했던 것이다. 문기원은 저택 내에서도 정원의 중앙에 가까운 명당으로 채광이 좋고 구조가 아늑하여 조모와 부모가 머무는 동서 정당을 제외하면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어머니, 제 문기당은 지금 어떤가요?”

나씨 부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얼굴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문기당은 지금 다른 사람이 쓰고 있단다. 혜화당도 그에 못지않으니 너는 그곳에서 지내도록 하거라. 동쪽 정원 뒤편이라 나의 안채와도 가깝고... 너와 함께 지내고 싶어 일부러 그렇게 정해 두었단다.”

그녀의 말투는 다정했고 태도는 당당했다. 딸의 거처를 타인에게 내어준 일이 마치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정은 예전처럼 성을 내며 따지고 들지 않았다. 전생에 그녀는 분에 겨워 울분을 토했다가 나씨 부인은 이를 빌미 삼아 조모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딸의 불효를 주장했었다. 이번 생에 그녀는 나씨 부인과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잔잔하고 유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저는 문기당에 머물고 싶습니다. 예전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곳에 머물며 서서히 기력을 회복했지요. 그곳은 저에게 복을 가져다준 땅입니다. 이미 다른 분이 살고 있다면 저는 우선 조모의 온돌방에 묵겠습니다. 정리가 끝나면 그때 옮겨도 늦지 않겠지요.”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말없이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그 좋은 곳에는 누가 계십니까? 혹시 큰 오라버니와 새언니께서 쓰고 계시나요?”

나정은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넸다.

“새언니, 저도 친정에 머무는 날이 몇 해 되지 않을 텐데 잠깐만이라도 저를 헤아려주 실 수 없을까요? 제가 집을 나가면 이 집의 주인은 곧 새언니가 되실 텐데 굳이 지금부터 서두르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방 안은 또다시 조용해졌다. 그때 그 틈을 가르듯 나긋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니, 문기당은 제가 쓰고 있습니다.”

은실이 섞인 붉은 비단 망토를 곱게 걸친 채 한쪽에 앉아 있던 사촌 여동생 백지현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는 은근한 자태로 앉아 있었고 그 눈빛에는 자신감과 승리감이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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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나정은 대비를 위해 칼을 맞았다. 날카로운 칼날은 그녀의 폐부를 깊게 찔렀고 그로 인해 그녀의 몸은 병들어 버렸다. 동시에 그녀의 희생은 나씨 일가에 영광과 번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폐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고 그녀의 몸은 날이 갈수록 허약해졌다. 그렇게 그녀는 병을 떠안은 채 남쪽의 따스한 순천에서 무려 세 해 동안 요양하며 지내야 했다.시간이 흘러 다시 나씨 저택으로 돌아온 날, 그녀는 자신의 안채에 다른 여인이 앉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는 자신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나정이 쓰던 안채를 점령하고 그녀의 몸종들을 부리며 원래 자기 것인 양 태연하게 그 모든 것들을 누리고 있었다. 나정의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이제 그녀가 아닌 사촌 여동생을 더 아꼈다. 조모조차 그 아이를 ‘우리 집 복덩이’라 부르며 총애했고 그녀의 소꿉친구였던 사람마저 그녀가 나정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그해 겨울, 대비는 나정에게 현주(县主)의 작호를 내리려 했지만 그마저도 나정의 어머니가 가로막아 무산되었고 그 작호는 결국 사촌 여동생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분노를 토해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조소와 핀잔뿐이었다.“나정, 네가 드디어 미친 게로구나.”그들은 가시 박힌 말로 그녀의 마음을 도려냈고 하나 둘 그녀를 짓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바람대로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가 생을 마감한 후 집안사람들은 숨을 돌리며 안도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귀찮은 짐 하나를 덜어냈다고 말했다.하지만 그녀의 원혼이 깊었던 탓일까? 그녀는 끝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열여덟 해를 귀신으로 떠돌아다녔다. 그들 곁에서 맴돌며 자신을 배신한 이들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그들의 욕망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그들 가문이 어떻게 몰락되는지를 말이다. 아무 감정 없이 이 모든 것을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금 눈을 떴을 때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를 태운 마차는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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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나정은 조모가 머무는 서정당(西正堂)에 임시로 거처하게 되었다. 조모는 서쪽 방을 쓰고 있었고 동쪽 방은 나정을 위해 빠르게 정리되었다.“네 새언니가 난산이었을 때 현이가 명의를 불러 모자의 목숨을 살렸단다. 그 아이는 이 저택의 은인이야.”조모는 나정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사촌 여동생인 백지현은 사람을 다루는데 익숙하고 집안 형편도 넉넉하여 이 저택에 발을 들이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웃어른들은 그녀를 총애했고 아랫사람들은 그녀를 우러렀다. 이 와중에 새언니를 구한 공덕까지 더해지니 그녀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씨 부인은 그녀의 거처를 문기당으로 옮겨주었다. 명분은 완벽했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곳은 명백히 나정의 자리였지만 그 당시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정아, 넌 본래 사리 분별을 잘하는 아이잖니. 혜화당도 머물기에 나쁘지 않단다.”조모는 부드럽게 타이르는 듯했으나 그 말은 곧 양보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정이 없었다면 이 진남군 댁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조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전생에도 조모는 그리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백지현의 언변에 현혹되었을 뿐. 모든 진실을 깨달은 후 도리어 자신을 감싸주었던 사람이었으니 나정이 그녀를 원망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조모는 예기치 못한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날 밤 그녀 곁에 있었던 사람은 나씨 부인과 백지현뿐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사라지자 나정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할머니, 저 여기에 머물 수 있게 주세요.”나정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저도 어느덧 열일곱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저의 혼처를 정해주시지 않으실 건가요?”그녀는 조모를 향해 불손한 말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화내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 유연한 웃음을 머금었다.“참 좋은 아이로 자랐구나. 더욱 대범하고 너그러워졌어.”조모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기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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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섣달 초엿새 한양에 첫눈이 내렸다. 눈발은 하루가 다르게 굵어졌고 초여드레가 되자 길은 이미 얼어붙어 있었다. 마차가 미끄러지고 사람들 입김이 하늘로 피어올라도 납팔절은 큰 절기였기에 조모는 해마다 법화사에 향을 올리는 것을 빠드린 적이 없었고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이 길,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을까요?”“날도 이리 추운데...”낮은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불평들이 곳곳에서 들려왔지만 나정은 조용히 조모를 따라나섰다. 법화사로 오르는 길은 눈에 덮여 있었다. 그러나 산 아래에는 사미승들과 인근 마을의 시주자들이 계속해서 눈을 쓸고 있었기에 길이 미끄럽긴 해도 올라갈 수는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법화사는 예상보다 더 북적였다. 서로의 어깨를 맞댄 채 걸어야 할 정도로 인파가 몰렸고 법회가 열리는 대웅보전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곳에서 법문을 들으려면 자리를 따로 예약해야 했으나 조모는 이미 두 달 전부터 자리를 잡아두었기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여기저기서 조모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리 가운데 혜능수좌의 시선이 조모의 손목에 머무르더니 조용히 불경을 외웠다.“아미타불… 나씨 큰 마님께서는 참으로 복도 많으시군요.”그 말을 들은 사중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조모의 손으로 쏠렸다. 그녀의 손목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자단목 염주 한 줄이 채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단 번에 그 물건을 알아보았다. 생전 현무스님께서 칠십 해 동안 몸에 지녔던 성물이자 입적 하루 전 대비마마께 하사했던 귀물이었다.그 해 대비는 태자비가 되었고 그 이듬해 중전으로 봉해졌으며 네 명의 왕자와 한 명의 공주를 낳아 높은 권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런 염주가 지금 나씨 조모의 손목에 걸려 있었다. 예불이 끝난 후 한양에서 가장 세력이 깊은 최씨 가문의 부인이 정중히 다가와 조용히 청했다.“큰 마님, 혹여 오늘 소찬을 따로 마련하지 않으셨다면 저희 집에서 함께 드시지요.”하지만 조모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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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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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나정은 내심 옹성대군과 중전 사이 관계가 궁금했으나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자리임을 알기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중전은 고개를 숙인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이끌며 함께 자리에 앉혔다.“이 개... 제법 위협적이네요.”중전은 대전 한편에 엎드려 있는 검은 개를 곁눈질하며 말했지만 옹성대군은 그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검은 개는 중전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가 주인의 매서운 눈빛에 금세 움찔하며 머리를 떨구더니 불편한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털썩 엎드렸다. 그러자 중전은 검은 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나정을 향해 웃어 보였다.“대비마마를 위해 몸을 던졌다고 들었다. 그 얘기를 듣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더구나”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떨렸고 눈가에는 약간의 물기가 어려 있었다. 대비는 미소를 띠며 그녀의 손을 쓸어내렸다. 옹성대군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옆에서 차를 들이키고 있었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중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비마마, 낭자의 혼처는 정해졌습니까?”대비는 바로 고개를 돌려 나정에게 물었다.“정아, 약조된 혼처가 있느냐?”나정은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없습니다.”그러자 중전이 곱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내가 좋은 인연을 찾아줘도 되겠구나.”그 말에 대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봐둔 사람이 있느냐?”중전은 한껏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아 있는 옹성대군을 슬쩍 바라보았다.“사람은 많지요.”대비 또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나정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깊은 감색의 의복 속에 짙은 기운을 내뿜는 그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 그의 냉랭한 모습에 나정은 옹성대군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대비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혼사 얘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나정이가 부끄러워할 수도 있잖니.”그제야 중전도 입꼬리를 내리고는 화제를 바꾸었다.“그러고 보니 진남군 댁에 유명한 낭자가 있다던데. 재주도 빼어나고 용모도 뛰어나다고 들었다. 그게 사실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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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나정이 진남군 관저로 돌아온 것은 해가 서쪽 기슭에 기울 무렵이었다. 먼저 조모께 문안인사를 드린 뒤 본가의 안채로 향했다. 그곳에는 나정의 어머니인 백씨 마님이 있었다. 나씨 부인은 머리에 청록빛 비취 장식을 단 비녀를 꽂고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도 그녀의 풍채는 여전했고 손끝 하나 흐트러짐 없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항상 기품 있는 웃음이 머물러 있었으나 그 미소 뒤에는 늘 그렇듯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었다.“정아, 자꾸 궁궐에 들어가 대비마마를 귀찮게 해선 아니 된다. 한두 번이야 그렇다 쳐도 너무 잦으면 마마의 미움을 사게 될 수도 있어.”나정은 눈을 내리깔며 잔잔하게 웃었다.“대비마마께서는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오늘은 중전마마도 뵈었는데 자주 들러 대비마마를 즐겁게 해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백씨 마님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그 속에는 놀라움과 얕은 부러움, 그리고 감춰지지 않는 질투가 어른거렸다. 그러나 기뻐하는 기색은 단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전생의 나정은 어머니의 이런 반응을 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십여 해를 귀신으로 떠돈 끝에야 부모도 자기 자식을 싫어할 수 있다는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때로는 그 미움이 원수보다 더 깊어 가슴속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정아, 너는 평범하고 말재주도 없는 아이다. 그래서 무심코 말실수라도 할까 걱정되는구나. 다음에는 이 어미도 함께 궁궐로 찾아가야겠어.”나정은 잔잔히 웃었다. 그녀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열여덟 해를 혼자 정처없이 떠돌아다녀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다음에요, 어머니.”그러자 백씨 마님은 곧 화제를 돌렸다.“문기당은 어떠냐?”가볍게 내던진 말이었지만 불순한 의도는 분명했다. 전생에 나정은 문기당을 되찾기 위해 한바탕 소란을 벌였고 그 대가로 온갖 비난을 견뎌야 했다. 사람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수식어를 그녀에게 갖다 붙이며 손가락질 해댔었다. “아주 좋습니다.”나정은 부드럽게 대꾸했다.“문기당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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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문기당 안은 모처럼 화기애애했다. 대비마마의 하사품이 내려졌기에 다들 신이 난 모양이었다. 은전 삼천 냥과 금 백 냥, 이 금액은 진남군 전체가 두 해 넘게 살아갈 만큼 넉넉했다. 그 덕에 나정의 궁색함도 단번에 해소되었다.“아가씨, 큰 마님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으십니다. 마님은 아가씨의 친 어머니잖아요. 아가씨께 해가 되는 일을 할 리 있겠습니까? 말씀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공 아주머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은 분명 선의였고 또 애틋한 충고였다. 하지만 나정은 자신의 어머니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친딸을 다치게 할 뿐만 아니라 기회가 된다면 죽이기까지 할 사람이었다.“어머니 곁에는 저의 사촌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아이를 더 편애하시지요.”공 아주머니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아가씨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큰 마님은 날마다 아가씨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움이 깊어 백 아가씨를 곁에 두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마님께서 가장 아끼는 사람은 아가씨일 거잖아요.”“그렇습니까? 아주머니께서 직접 보신 건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서 전해 들은 얘기인가요?”공 아주머니는 잠시 얼어붙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부엌일하는 분들께 들은 이야기입니다.”“그 사람들은 전부 제 어머니 수하들이지요.”나정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런 말들은 전부 일부러 들으라고 퍼뜨린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백 낭자가 무슨 명분으로 진남군 관저에 머물겠습니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당연할 텐데.”공 아주머니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나정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정 그리우셨다면 왜 남쪽 순천까지 절 찾아오지 않으셨을까요? 그게 어려우셨다면 편지나 선물이라도 하나 보내셨겠죠. 그게 어머니로서 해야 할 도리 아닌가요?”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저는 아무것도 받은 게 없습니다. 그리웠다는 말, 참 허망한 말이지요.”그녀는 한동안 스스로를 속이며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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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장남 나신은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채 추위에 덜덜 떨며 연못에서 기어 나왔다. 그러나 진남군의 징벌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신은 아버지의 핍박에 못 이겨 그 상태로 무릎을 꿇은 채 흘러드는 겨울 아침의 냉기를 오롯이 견뎌야 했다. 그는 뼛속까지 얼어붙는 추위에 이를 맞부딪히며 소리를 냈고 형수는 그의 옆에서 끊임없이 애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씨 마님과 사촌 여동생인 백지현도 허둥지둥 달려왔다.“대감님, 이러다 나신이 얼어 죽겠습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힌 뒤 벌을 내리셔도 늦지 않습니다.”그녀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백씨 마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도 간절함을 품은 목소리에는 절제된 품위가 깃들어 있었다. 길고 고운 목덜미에는 하얀 여우털 목도리가 둘려 있었고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단정하고 아름다웠다.진남군은 장남을 아끼고 부인을 사랑했다. 나신은 용모가 수려하고 박식하며 예의를 갖춘 인물이었고 그의 아내는 미모와 품격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이 둘은 진남군의 자랑이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 패륜아 같은 자식! 대낮부터 누이에게 손을 들다니...”“징도 두드려야 소리가 나기 마련입니다. 신이만 잘못한 게 아닐 수도 있어요. 그래도 날이 몹시 추운 건 사실이니 먼저 옷을 갈아입히시고 다시 훈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백씨 마님은 부드럽게 말하며 사태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녀의 말속에는 책임을 비껴가는 교묘한 논리가 숨겨져 있었다. 그 옆에 있던 공 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이 서늘해졌다. 징도 두드려야 소리가 난다고? 그 말은 나정도 잘못이 있다는 뜻이었다. 겉으로는 공정한 척하면서 사실은 아들의 잘못을 덮고 책망의 화살을 나정에게 겨눈 것이었다. 공 아주머니는 예전에 나정이 백씨 마님은 자기만 차별한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예민해서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녀가 다른 자식들에게 향한 편애는 너무도 명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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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문안을 마친 뒤 나정은 서정원에 남아 조모 곁에서 잠두를 골랐고 그녀는 나정에게 이른 아침 벌어진 일을 다시금 들려달라 하였다. 그녀는 직접 나정의 입으로 듣고 싶어 물어본 것이었고 나정은 꾸밈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조모는 말없이 나정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반쯤 눈을 내리감은 채 말씀하셨다.“굳이 그 아이와 맞서 다툴 필요는 없다. 나신은 언젠가 가문을 이어 작위를 받게 될 것이고 너는 결국 시집가게 될 몸이지 않느냐? 딸자식은 친정이 든든해야 의지할 곳이 있는 법이란다.”그 말은 나름의 애정이 담긴 충고였지만 나정의 마음 어딘가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가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선의란 늘 이처럼 얇고 희미했다. 그럼에도 나정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차라리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할머니 말씀 새겨들을게요. 감사합니다.”조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튿날, 나신이 병을 앓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찬바람에 몸을 식혔던 터라 몸살에 고열까지 났다고 했다. 하지만 이십 대의 건장한 남성이었던 터라 하룻밤 열을 앓고 나니 곧 회복되었다. 하지만 나정은 그렇지 않았다. 몸이 약한 그녀는 고열로 인해 죽을 고비까지 넘겼다.문기당 사람들은 며칠 동안 불안에 떨어야 했다. 나신이 다시 회복한 지금, 혹여 나정에게 복수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모두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납월 이십일. 예상보다 이른 시일에 돌궐 사신이 입조하였다. 전하는 융복전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음악과 춤을 준비하게 하였다. 그보다 앞서, 대비는 전하의 침전으로 찾아가 조용히 몇 마디 말을 전했다.“이번 사절 접견 말이다. 신중히 대비해야 한다. 융복전은 불기운이 도는 곳이니 물과 모래를 안쪽에 비치하도록 하거라. 바로 불을 끌 수 있게 말이다.”대비의 목소리는 무겁게 내려앉았으나 전하는 그저 웃음을 지어 보였다.“걱정이 지나치십니다. 돌궐은 일곱 째 아우가 쳐들어간 이후 제대로 된 전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감히 자객을 보내올 수도 없을거고요.”대비는 아무 대답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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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융복전에서 벌어진 일은 이내 조정 안팎으로 퍼져나갔다. 진남군 관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비와 전하는 나정이 예언했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런 특수한 능력은 곧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예언이라는 것은 공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원한의 불씨가 될 수도 있었다.대비는 조용히 나정을 궁궐로 불렀다. 백씨 마님은 그녀를 따라 궁궐에 들어가고 싶어 했으나 단장을 마치고 문기당에 도착했을 때 나정은 이미 말을 타고 길을 나선 뒤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백씨 마님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녀는 곁에 서 있던 공 아주머니를 향해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살짝 저으며 돌아섰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한 실망이 서려 있었다. 궁궐에 도착한 나정에게 대비는 붉은 칠을 입힌 궤짝을 가리켰다.“이건 전하께서 너에게 내리신 상이다. 금엽 백 냥이 들어있어.”나정은 정중히 절을 올리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대비마마와 주상전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대비는 그녀를 일으키며 말을 건넸다.“이번에 네가 예측한 일이 딱 맞더구나. 그 덕에 큰 화를 면했다.”나정은 대비의 칭찬에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제 능력은 대단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저 같은 사람이 하늘의 기운을 함부로 엿보아서는 안 되지요. 앞으로 다시는 경솔히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대비는 그 말에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낮추고 말을 삼갈 줄 아는 아이였다. 세간에는 경국지색이라 칭하는 이가 넘쳐났으나 진짜 미인은 화장으로 치장된 것이 아니라 기품에 있었다. 소박한 옷차림에 살며시 웃는 얼굴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런 자태 말이다. 나정은 그 정도로 곱고 단정한 여인이었으며 옹성대군과 짝이 되어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비는 이내 모두를 물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아,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나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대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전하에게 부탁해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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