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나정은 대비를 위해 칼을 맞았다. 날카로운 칼날은 그녀의 폐부를 깊게 찔렀고 그로 인해 그녀의 몸은 병들어 버렸다. 동시에 그녀의 희생은 나씨 일가에 영광과 번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폐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고 그녀의 몸은 날이 갈수록 허약해졌다. 그렇게 그녀는 병을 떠안은 채 남쪽의 따스한 순천에서 무려 세 해 동안 요양하며 지내야 했다.시간이 흘러 다시 나씨 저택으로 돌아온 날, 그녀는 자신의 안채에 다른 여인이 앉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는 자신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나정이 쓰던 안채를 점령하고 그녀의 몸종들을 부리며 원래 자기 것인 양 태연하게 그 모든 것들을 누리고 있었다. 나정의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이제 그녀가 아닌 사촌 여동생을 더 아꼈다. 조모조차 그 아이를 ‘우리 집 복덩이’라 부르며 총애했고 그녀의 소꿉친구였던 사람마저 그녀가 나정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그해 겨울, 대비는 나정에게 현주(县主)의 작호를 내리려 했지만 그마저도 나정의 어머니가 가로막아 무산되었고 그 작호는 결국 사촌 여동생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분노를 토해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조소와 핀잔뿐이었다.“나정, 네가 드디어 미친 게로구나.”그들은 가시 박힌 말로 그녀의 마음을 도려냈고 하나 둘 그녀를 짓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바람대로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가 생을 마감한 후 집안사람들은 숨을 돌리며 안도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귀찮은 짐 하나를 덜어냈다고 말했다.하지만 그녀의 원혼이 깊었던 탓일까? 그녀는 끝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열여덟 해를 귀신으로 떠돌아다녔다. 그들 곁에서 맴돌며 자신을 배신한 이들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그들의 욕망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그들 가문이 어떻게 몰락되는지를 말이다. 아무 감정 없이 이 모든 것을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금 눈을 떴을 때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를 태운 마차는 궁궐
Read more

제2화

나정은 조모가 머무는 서정당(西正堂)에 임시로 거처하게 되었다. 조모는 서쪽 방을 쓰고 있었고 동쪽 방은 나정을 위해 빠르게 정리되었다.“네 새언니가 난산이었을 때 현이가 명의를 불러 모자의 목숨을 살렸단다. 그 아이는 이 저택의 은인이야.”조모는 나정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사촌 여동생인 백지현은 사람을 다루는데 익숙하고 집안 형편도 넉넉하여 이 저택에 발을 들이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웃어른들은 그녀를 총애했고 아랫사람들은 그녀를 우러렀다. 이 와중에 새언니를 구한 공덕까지 더해지니 그녀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씨 부인은 그녀의 거처를 문기당으로 옮겨주었다. 명분은 완벽했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곳은 명백히 나정의 자리였지만 그 당시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정아, 넌 본래 사리 분별을 잘하는 아이잖니. 혜화당도 머물기에 나쁘지 않단다.”조모는 부드럽게 타이르는 듯했으나 그 말은 곧 양보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정이 없었다면 이 진남군 댁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조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전생에도 조모는 그리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백지현의 언변에 현혹되었을 뿐. 모든 진실을 깨달은 후 도리어 자신을 감싸주었던 사람이었으니 나정이 그녀를 원망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조모는 예기치 못한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날 밤 그녀 곁에 있었던 사람은 나씨 부인과 백지현뿐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사라지자 나정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할머니, 저 여기에 머물 수 있게 주세요.”나정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저도 어느덧 열일곱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저의 혼처를 정해주시지 않으실 건가요?”그녀는 조모를 향해 불손한 말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화내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 유연한 웃음을 머금었다.“참 좋은 아이로 자랐구나. 더욱 대범하고 너그러워졌어.”조모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기쁘게 말했다.
Read more

제3화

섣달 초엿새 한양에 첫눈이 내렸다. 눈발은 하루가 다르게 굵어졌고 초여드레가 되자 길은 이미 얼어붙어 있었다. 마차가 미끄러지고 사람들 입김이 하늘로 피어올라도 납팔절은 큰 절기였기에 조모는 해마다 법화사에 향을 올리는 것을 빠드린 적이 없었고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이 길,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을까요?”“날도 이리 추운데...”낮은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불평들이 곳곳에서 들려왔지만 나정은 조용히 조모를 따라나섰다. 법화사로 오르는 길은 눈에 덮여 있었다. 그러나 산 아래에는 사미승들과 인근 마을의 시주자들이 계속해서 눈을 쓸고 있었기에 길이 미끄럽긴 해도 올라갈 수는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법화사는 예상보다 더 북적였다. 서로의 어깨를 맞댄 채 걸어야 할 정도로 인파가 몰렸고 법회가 열리는 대웅보전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곳에서 법문을 들으려면 자리를 따로 예약해야 했으나 조모는 이미 두 달 전부터 자리를 잡아두었기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여기저기서 조모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리 가운데 혜능수좌의 시선이 조모의 손목에 머무르더니 조용히 불경을 외웠다.“아미타불… 나씨 큰 마님께서는 참으로 복도 많으시군요.”그 말을 들은 사중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조모의 손으로 쏠렸다. 그녀의 손목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자단목 염주 한 줄이 채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단 번에 그 물건을 알아보았다. 생전 현무스님께서 칠십 해 동안 몸에 지녔던 성물이자 입적 하루 전 대비마마께 하사했던 귀물이었다.그 해 대비는 태자비가 되었고 그 이듬해 중전으로 봉해졌으며 네 명의 왕자와 한 명의 공주를 낳아 높은 권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런 염주가 지금 나씨 조모의 손목에 걸려 있었다. 예불이 끝난 후 한양에서 가장 세력이 깊은 최씨 가문의 부인이 정중히 다가와 조용히 청했다.“큰 마님, 혹여 오늘 소찬을 따로 마련하지 않으셨다면 저희 집에서 함께 드시지요.”하지만 조모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날이
Read more

제4화

나정은 마침내 문기당으로 돌아왔다. 전생에는 이 작은 승리조차 온 집안을 떠들썩하게 뒤흔들며 얻어낸 것이었다. 본래 그녀 것이었지만 되찾을 때에는 오히려 백지현이 넓은 아량을 베풀었다는 식이 되어버렸고 그녀의 ‘예쁜’ 마음을 부각시켜주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그런 각인 덕분에 매사에 나정만 불리하게 궁지로 몰렸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조모 쪽에서 먼저 일용품을 보내왔고 물품을 들고 온 관사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그녀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그날 밤, 나씨 부인이 문기당을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입가에는 웃음을 머금었지만 마음속에는 날카로운 칼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예전에 네가 쓰던 이급(二等) 몸종들을 다시 쓸 생각이 있느냐?”나정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저에게는 추화와 추란이 있습니다. 너무 잘 해주는 아이들이라 이급 몸종으로 올리려 합니다. 다른 몸종들은 지현이 익숙하게 부리고 있으니 빼앗을 수는 없지요.”나씨 부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얼굴에는 얕은 놀람이 스쳤지만 이내 다시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정을 덧입었다.“정아, 네가 그리 선을 그어버리면 발 디딜 곳이 없어질 수도 있다. 세상일이 어찌 네 뜻대로만 되겠느냐?”그러나 나정은 아무 말도 없었다. 흐트러짐 없는 표정을 하고 반쯤 덮인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조용히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조롱도, 기쁨도 없었다. 그저 무관심만 존재할 뿐이었다. 나씨 부인의 말은 이제 그녀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굳이 반박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넌 참 고집스럽구나. 그 은덕이 어디까지 갈 줄 알고 이러는 것이냐? 네가 무너질 때가 오면 누가 널 지켜줄 줄 알고...”나씨 부인의 말에 나정은 잔잔히 입을 열었다.“어머니, 진남군 댁이 존재하는 이상 제 은덕도 바닥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나씨 부인은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소리 없이 소매를 휘둘며 나가버렸다. 그날 밤, 조모 쪽에서 나정이 부탁했던 사람을 보내왔다. 눈앞에 있는
Read more

제5화

나정은 내심 옹성대군과 중전 사이 관계가 궁금했으나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자리임을 알기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중전은 고개를 숙인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이끌며 함께 자리에 앉혔다.“이 개... 제법 위협적이네요.”중전은 대전 한편에 엎드려 있는 검은 개를 곁눈질하며 말했지만 옹성대군은 그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검은 개는 중전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가 주인의 매서운 눈빛에 금세 움찔하며 머리를 떨구더니 불편한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털썩 엎드렸다. 그러자 중전은 검은 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나정을 향해 웃어 보였다.“대비마마를 위해 몸을 던졌다고 들었다. 그 얘기를 듣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더구나”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떨렸고 눈가에는 약간의 물기가 어려 있었다. 대비는 미소를 띠며 그녀의 손을 쓸어내렸다. 옹성대군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옆에서 차를 들이키고 있었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중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비마마, 낭자의 혼처는 정해졌습니까?”대비는 바로 고개를 돌려 나정에게 물었다.“정아, 약조된 혼처가 있느냐?”나정은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없습니다.”그러자 중전이 곱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내가 좋은 인연을 찾아줘도 되겠구나.”그 말에 대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봐둔 사람이 있느냐?”중전은 한껏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아 있는 옹성대군을 슬쩍 바라보았다.“사람은 많지요.”대비 또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나정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깊은 감색의 의복 속에 짙은 기운을 내뿜는 그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 그의 냉랭한 모습에 나정은 옹성대군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대비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혼사 얘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나정이가 부끄러워할 수도 있잖니.”그제야 중전도 입꼬리를 내리고는 화제를 바꾸었다.“그러고 보니 진남군 댁에 유명한 낭자가 있다던데. 재주도 빼어나고 용모도 뛰어나다고 들었다. 그게 사실이냐
Read more

제6화

나정이 진남군 관저로 돌아온 것은 해가 서쪽 기슭에 기울 무렵이었다. 먼저 조모께 문안인사를 드린 뒤 본가의 안채로 향했다. 그곳에는 나정의 어머니인 백씨 마님이 있었다. 나씨 부인은 머리에 청록빛 비취 장식을 단 비녀를 꽂고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도 그녀의 풍채는 여전했고 손끝 하나 흐트러짐 없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항상 기품 있는 웃음이 머물러 있었으나 그 미소 뒤에는 늘 그렇듯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었다.“정아, 자꾸 궁궐에 들어가 대비마마를 귀찮게 해선 아니 된다. 한두 번이야 그렇다 쳐도 너무 잦으면 마마의 미움을 사게 될 수도 있어.”나정은 눈을 내리깔며 잔잔하게 웃었다.“대비마마께서는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오늘은 중전마마도 뵈었는데 자주 들러 대비마마를 즐겁게 해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백씨 마님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그 속에는 놀라움과 얕은 부러움, 그리고 감춰지지 않는 질투가 어른거렸다. 그러나 기뻐하는 기색은 단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전생의 나정은 어머니의 이런 반응을 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십여 해를 귀신으로 떠돈 끝에야 부모도 자기 자식을 싫어할 수 있다는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때로는 그 미움이 원수보다 더 깊어 가슴속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정아, 너는 평범하고 말재주도 없는 아이다. 그래서 무심코 말실수라도 할까 걱정되는구나. 다음에는 이 어미도 함께 궁궐로 찾아가야겠어.”나정은 잔잔히 웃었다. 그녀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열여덟 해를 혼자 정처없이 떠돌아다녀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다음에요, 어머니.”그러자 백씨 마님은 곧 화제를 돌렸다.“문기당은 어떠냐?”가볍게 내던진 말이었지만 불순한 의도는 분명했다. 전생에 나정은 문기당을 되찾기 위해 한바탕 소란을 벌였고 그 대가로 온갖 비난을 견뎌야 했다. 사람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수식어를 그녀에게 갖다 붙이며 손가락질 해댔었다. “아주 좋습니다.”나정은 부드럽게 대꾸했다.“문기당은 진
Read more

제7화

문기당 안은 모처럼 화기애애했다. 대비마마의 하사품이 내려졌기에 다들 신이 난 모양이었다. 은전 삼천 냥과 금 백 냥, 이 금액은 진남군 전체가 두 해 넘게 살아갈 만큼 넉넉했다. 그 덕에 나정의 궁색함도 단번에 해소되었다.“아가씨, 큰 마님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으십니다. 마님은 아가씨의 친 어머니잖아요. 아가씨께 해가 되는 일을 할 리 있겠습니까? 말씀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공 아주머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은 분명 선의였고 또 애틋한 충고였다. 하지만 나정은 자신의 어머니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친딸을 다치게 할 뿐만 아니라 기회가 된다면 죽이기까지 할 사람이었다.“어머니 곁에는 저의 사촌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아이를 더 편애하시지요.”공 아주머니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아가씨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큰 마님은 날마다 아가씨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움이 깊어 백 아가씨를 곁에 두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마님께서 가장 아끼는 사람은 아가씨일 거잖아요.”“그렇습니까? 아주머니께서 직접 보신 건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서 전해 들은 얘기인가요?”공 아주머니는 잠시 얼어붙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부엌일하는 분들께 들은 이야기입니다.”“그 사람들은 전부 제 어머니 수하들이지요.”나정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런 말들은 전부 일부러 들으라고 퍼뜨린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백 낭자가 무슨 명분으로 진남군 관저에 머물겠습니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당연할 텐데.”공 아주머니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나정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정 그리우셨다면 왜 남쪽 순천까지 절 찾아오지 않으셨을까요? 그게 어려우셨다면 편지나 선물이라도 하나 보내셨겠죠. 그게 어머니로서 해야 할 도리 아닌가요?”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저는 아무것도 받은 게 없습니다. 그리웠다는 말, 참 허망한 말이지요.”그녀는 한동안 스스로를 속이며 어머니
Read more

제8화

장남 나신은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채 추위에 덜덜 떨며 연못에서 기어 나왔다. 그러나 진남군의 징벌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신은 아버지의 핍박에 못 이겨 그 상태로 무릎을 꿇은 채 흘러드는 겨울 아침의 냉기를 오롯이 견뎌야 했다. 그는 뼛속까지 얼어붙는 추위에 이를 맞부딪히며 소리를 냈고 형수는 그의 옆에서 끊임없이 애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씨 마님과 사촌 여동생인 백지현도 허둥지둥 달려왔다.“대감님, 이러다 나신이 얼어 죽겠습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힌 뒤 벌을 내리셔도 늦지 않습니다.”그녀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백씨 마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도 간절함을 품은 목소리에는 절제된 품위가 깃들어 있었다. 길고 고운 목덜미에는 하얀 여우털 목도리가 둘려 있었고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단정하고 아름다웠다.진남군은 장남을 아끼고 부인을 사랑했다. 나신은 용모가 수려하고 박식하며 예의를 갖춘 인물이었고 그의 아내는 미모와 품격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이 둘은 진남군의 자랑이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 패륜아 같은 자식! 대낮부터 누이에게 손을 들다니...”“징도 두드려야 소리가 나기 마련입니다. 신이만 잘못한 게 아닐 수도 있어요. 그래도 날이 몹시 추운 건 사실이니 먼저 옷을 갈아입히시고 다시 훈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백씨 마님은 부드럽게 말하며 사태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녀의 말속에는 책임을 비껴가는 교묘한 논리가 숨겨져 있었다. 그 옆에 있던 공 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이 서늘해졌다. 징도 두드려야 소리가 난다고? 그 말은 나정도 잘못이 있다는 뜻이었다. 겉으로는 공정한 척하면서 사실은 아들의 잘못을 덮고 책망의 화살을 나정에게 겨눈 것이었다. 공 아주머니는 예전에 나정이 백씨 마님은 자기만 차별한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예민해서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녀가 다른 자식들에게 향한 편애는 너무도 명백했다.
Read more

제9화

문안을 마친 뒤 나정은 서정원에 남아 조모 곁에서 잠두를 골랐고 그녀는 나정에게 이른 아침 벌어진 일을 다시금 들려달라 하였다. 그녀는 직접 나정의 입으로 듣고 싶어 물어본 것이었고 나정은 꾸밈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조모는 말없이 나정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반쯤 눈을 내리감은 채 말씀하셨다.“굳이 그 아이와 맞서 다툴 필요는 없다. 나신은 언젠가 가문을 이어 작위를 받게 될 것이고 너는 결국 시집가게 될 몸이지 않느냐? 딸자식은 친정이 든든해야 의지할 곳이 있는 법이란다.”그 말은 나름의 애정이 담긴 충고였지만 나정의 마음 어딘가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가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선의란 늘 이처럼 얇고 희미했다. 그럼에도 나정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차라리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할머니 말씀 새겨들을게요. 감사합니다.”조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튿날, 나신이 병을 앓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찬바람에 몸을 식혔던 터라 몸살에 고열까지 났다고 했다. 하지만 이십 대의 건장한 남성이었던 터라 하룻밤 열을 앓고 나니 곧 회복되었다. 하지만 나정은 그렇지 않았다. 몸이 약한 그녀는 고열로 인해 죽을 고비까지 넘겼다.문기당 사람들은 며칠 동안 불안에 떨어야 했다. 나신이 다시 회복한 지금, 혹여 나정에게 복수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모두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납월 이십일. 예상보다 이른 시일에 돌궐 사신이 입조하였다. 전하는 융복전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음악과 춤을 준비하게 하였다. 그보다 앞서, 대비는 전하의 침전으로 찾아가 조용히 몇 마디 말을 전했다.“이번 사절 접견 말이다. 신중히 대비해야 한다. 융복전은 불기운이 도는 곳이니 물과 모래를 안쪽에 비치하도록 하거라. 바로 불을 끌 수 있게 말이다.”대비의 목소리는 무겁게 내려앉았으나 전하는 그저 웃음을 지어 보였다.“걱정이 지나치십니다. 돌궐은 일곱 째 아우가 쳐들어간 이후 제대로 된 전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감히 자객을 보내올 수도 없을거고요.”대비는 아무 대답 없이
Read more

제10화

융복전에서 벌어진 일은 이내 조정 안팎으로 퍼져나갔다. 진남군 관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비와 전하는 나정이 예언했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런 특수한 능력은 곧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예언이라는 것은 공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원한의 불씨가 될 수도 있었다.대비는 조용히 나정을 궁궐로 불렀다. 백씨 마님은 그녀를 따라 궁궐에 들어가고 싶어 했으나 단장을 마치고 문기당에 도착했을 때 나정은 이미 말을 타고 길을 나선 뒤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백씨 마님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녀는 곁에 서 있던 공 아주머니를 향해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살짝 저으며 돌아섰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한 실망이 서려 있었다. 궁궐에 도착한 나정에게 대비는 붉은 칠을 입힌 궤짝을 가리켰다.“이건 전하께서 너에게 내리신 상이다. 금엽 백 냥이 들어있어.”나정은 정중히 절을 올리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대비마마와 주상전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대비는 그녀를 일으키며 말을 건넸다.“이번에 네가 예측한 일이 딱 맞더구나. 그 덕에 큰 화를 면했다.”나정은 대비의 칭찬에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제 능력은 대단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저 같은 사람이 하늘의 기운을 함부로 엿보아서는 안 되지요. 앞으로 다시는 경솔히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대비는 그 말에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낮추고 말을 삼갈 줄 아는 아이였다. 세간에는 경국지색이라 칭하는 이가 넘쳐났으나 진짜 미인은 화장으로 치장된 것이 아니라 기품에 있었다. 소박한 옷차림에 살며시 웃는 얼굴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런 자태 말이다. 나정은 그 정도로 곱고 단정한 여인이었으며 옹성대군과 짝이 되어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비는 이내 모두를 물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아,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나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대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전하에게 부탁해 너를
Read more
PREV
12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