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카운트다운, 너를 버릴 시간: Chapter 61 - Chapter 70

790 Chapters

제61화

지금 차주헌은 예전에 임서율에게 잘해주던 그 방식을 고스란히 다른 여자에게 쏟고 있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임서율은 별다른 내색 없이 자리에 앉아 남은 기획안을 묵묵히 수정하고 있었다.“오아시스 프로젝트는 내가 계약한 것도 아니고 내 담당도 아니야. 내가 빠지는 게 당연해.”양지우는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드러냈다.“그래도 그렇지. 아예 처음부터 넣지 말든가, 다 끝나갈 무렵에 쫓아내듯 빼버리면 그게 뭐야. 밖에 소문나면 얼마나 꼴사나운데.”“지우야,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임서율은 남 탓하거나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해결책부터 찾는 스타일이었다.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였고 남은 기획만 다 끝내면 깔끔하게 정리하고 떠날 수 있었다.양지우는 임서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말만 해. 네 부탁이라면 뭐든 할게. 솔직히 나도 네 덕에 다시 회사 들어온 거잖아.”“지금 회의실 들어가서 차주헌한테 하 대표랑 직접 통화해서 양사 공동 워크숍을 제안해 보라고 해 줘. 프로젝트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고 밖에서 도는 말들도 그걸로 잠재울 수 있을 거야. 그래야 오아시스 프로젝트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어.”양지우는 말문이 막혀 잠시 멈칫했다.“어... 나 같은 일반 직원이 가서 그런 말 꺼내라고? 그거 완전 나 불구덩이에 떠미는 거 아니야, 서율아? 차 대표랑 하 대표 그 둘 사이 관계가 어떤지 너도 잘 알잖아. 말 그대로 물과 기름이잖아.”“걱정하지 마. 차주헌은 그렇게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 아니야. 네가 그 말 그대로 전하면 분명 받아들일 거야. 양쪽이 계속 싸우기만 하면 회사에도 손해라는 거, 그 사람도 잘 알 테니까.”임서율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사고도 또렷했다. 양지우는 그녀의 침착함이 부럽기까지 했다.다른 여자라면 벌써 난리를 쳐도 모자랄 판인데 임서율은 이 상황에서도 대안을 찾고 있었다.역시 친구 하나는 잘 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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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임서율은 양지우에게 물을 따라주고 그녀를 부축하여 옆에 앉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양지우의 숨결도 서서히 가라앉았다.“다행히 차 대표님이 내 의견을 받아들였어. 주주들한테도 이미 동의받았어.”그 말을 들은 임서율은 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지금 차주헌 역시 벼랑 끝에 몰려 있다는 걸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도원과 얼굴만 마주쳐도 으르렁대던 그가 이렇게 쉽게 물러설 리가 없었다.하지만 하도원은 시간을 끌 여유가 있지만, 자신은 아니라는 걸 그도 뻔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상반기 수익이 큰 프로젝트는 대부분 하도원이 가져갔다. 성운 그룹 몫은 고작 몇 개의 소규모 프로젝트뿐이었고 그나마도 회사 유지비 정도가 고작이었다.거기에 그녀가 따낸 두 건의 프로젝트가 더해졌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조차도 원래 하도원 쪽이 노리던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저 그녀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그럼 됐어. 나 내일 하루 휴가 낼 거야. 집에 좀 다녀오려고.”그 말을 들은 양지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너 진짜 본가에 가려는 거야? 왜? 너 거기 안 간 지도 몇 년 됐잖아. 그 무서운 계모에다, 할아버지는 또 동생만 예뻐하잖아.”양지우는 임서율의 집안 사정을 그나마 좀 알고 있는 편이었다. 그 집에서 임서율을 아꼈던 건 친엄마뿐이었다.아버지조차 계모 눈치를 보느라 딸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고 할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그 사건도 다 지난 일인데, 이제는 좀 풀어도 될 법도 했다. 게다가 그 잘못은 임서율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땐 아직 어린아이였던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다.하지만 임서율은 양지우에게 자신이 회사를 떠날 생각이라는 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양지우의 어깨를 토닥이며 웃었다.“괜찮아. 그냥 하루 다녀오는 거야. 내일 아빠 생일이거든.”“대표님이랑 같이 갈래?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너희 가족도 함부로 못 하겠지.”“아니야. 오아시스 프로젝트 때문에 요즘 바쁘잖아. 괜히 방해하고 싶진 않아.”요즘 차주헌의 관심은 아마 강수진 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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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차주헌은 방금까지 회의실에서 그 늙은 여우 같은 주주들과 머리를 맞대고 신경전을 벌이고 온 터였다.벌써부터 피로가 몰려오는 와중에 임서율이 대뜸 거절을 해오자 당황스러움과 짜증이 뒤섞여 올라왔다.예전 같았으면 일과 관련된 일이든 자신이 부탁하는 일이든, 임서율은 절대 거절하지 않았다.그랬던 사람이 오늘은 그의 말에 대놓고 선을 그었다.차주헌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목소리를 낮췄다. 손짓까지 곁들이며 애써 진정된 말투를 유지했다.“서율아, 아까 일은 그냥 주주들 앞에서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어.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너도 알잖아,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말 많은지. 내가 그렇게 안 하면 또 무슨 소리를 해댔을지 몰라.”하지만 임서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주헌은 몸을 숙여 그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네가 거절하면 주주들이 경고 조치 내리겠다고 난리야. 그럼 공식 홈페이지에도 올라가게 되고 강수진 입장에선 그게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이 될 수 있어.”그러자 임서율은 눈길만 살짝 주며 차주헌을 싸늘하게 흘겨봤다.“그 사람 앞날이야, 나랑 무슨 상관인데?”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단박에 얼어붙었다.차주헌의 표정이 굳었고 강수진의 얼굴에도 굴욕감이 스쳤다.그녀는 눈이 크고 인형처럼 생긴 예쁜 얼굴에, 억울할 땐 꼭 겁먹은 사슴처럼 보여서 누가 봐도 연민을 자아내는 스타일이었다.“서율 씨, 제가 아까 말 실수해서 오해를 불렀던 거, 정말 죄송해요. 아마 그래서 지금 저한테 화가 나신 거겠죠...”하지만 임서율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강 팀장님, 너무 깊이 생각 마세요. 제가 거절한 건 프로젝트 책임자가 따로 있는데 굳이 제가 나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예요. 그리고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서 병원 진료도 받아야 하거든요. 괜히 일에 지장을 줄까 봐요.”그 말을 들은 차주헌은 놀란 듯 손짓으로 다급하게 물었다.“어디 아픈 거야? 병원은 다녀왔어? 내가 데려다줄까?”임서율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폐에 문제가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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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강수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금세 굳었다. 그녀는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마치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임서율을 바라보며 말했다.“저, 저 서율 씨가 하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시잖아요. 이런 건 서율 씨가 전화 한 통만 연락하시면 되잖아요. 제가 어떻게 그분 일정 잡아요...”그 말을 마친 강수진은 또다시 애처로운 모습으로 차주헌의 양복 소매를 살며시 잡아당겼다.“주헌아, 너 서율 씨 착하다고 했잖아. 한 번만 말 좀 해줘, 응?”차주헌은 눈가가 벌게진 강수진을 바라보다가 다정한 눈빛으로 달래듯 말했다.“걱정하지 마. 서율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길 가다 노숙자 봐도 지갑 열 사람인데, 널 그냥 두겠어?”강수진은 안심한 듯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말했다.“그렇지, 나도 알아. 서율 씨 그렇게 냉정한 사람 아니잖아.”임서율의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눈가엔 싸늘한 기색이 떠올랐다.차주헌이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말했다.“서율아, 너 하 대표랑 아는 사이잖아. 저번에도 그 사람이 너 도와줬었고. 그냥 밥 한 번 사겠다고 핑계 대고 연락하면 돼. 그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그건 제안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임서율의 눈빛에 점점 냉기가 어렸다.차주헌은 잊은 걸까?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도원이 어떤 사람인지 조심하라며 본인이 먼저 경고했었다. 성격도 예측불허고 괜히 가까이했다가는 감당 못 할 거라면서.그랬던 그가 이제 와서는 강수진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하도원을 만나라고 했다.이 사람이 바로 자신이 7년이나 사랑했던 남자라니 정말이지 헛웃음만 나왔다.그의 진심을 몰랐던 때에는 아이를 낳는 일까지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었다.임서율은 속내를 억눌렀다. 감정 하나 내비치지 않은 채,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제가 한 번 연락해 볼게요.”강수진은 기쁜 얼굴로 임서율의 손을 덥석 잡았다.오늘따라 메이크업도 연하게 했고 볼에는 은은하게 블러셔까지 얹어져 있어 더 사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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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갑자기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 할지 임서율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도원과 친한 사이도 아닌데, 대뜸 ‘지금 뭐 하세요?’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임서율은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중요한 일이 있어 뵙고 싶습니다.]보내기 전에 몇 번이고 문장을 살피며 어딘가 오해를 살 표현은 없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임서율은 메시지를 전송했다.하지만 그 뒤로는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임서율은 더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정말 바쁠 수도 있었고 거듭해서 연락하는 건 오히려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 뿐이었다.게다가 하도원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임서율은 할 수 없이 이 일은 일단 보류하고 사무실에 있던 짐들을 새 자리에 옮기기로 했다.강수진은 주주들한테 압박을 많이 받은 눈치였다. 자신이 큰 사고를 쳤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인지한 듯, 하루 종일 재호 그룹을 드나들며 바삐 움직였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쯤 임서율은 막 짐 정리를 마친 상태였다.강수진은 뺨이 붉게 상기된 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굳이 묻지 않아도 결과가 어땠는지 눈에 훤했다.임서율을 보자마자 강수진은 당장이라도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표정으로 다가와 손을 덥석 붙잡고는 어김없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서율 씨! 혹시 하 대표님이랑 연락해 보셨어요? 뭐라고 하시던가요?”“아직이요. 연락 없으셨어요.”그 말을 들은 강수진은 실망한 표정으로 손을 놓고 볼을 불룩하게 부풀렸다.“서율 씨... 진짜 나 도와줄 생각 없는 거죠?”임서율은 뜻밖의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주헌이가 총괄팀장 자리를 제게 준 거, 그거 아직도 마음에 걸리시는 거면 진짜 미안해요. 자리 문제도요. 예전 그 자리 서율 씨가 원하시면 전 양보할게요. 저는 원래 이렇게 돌려 말하는 성격도 아니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스타일이라 잘 몰랐어요. 혹시 제가 말로 기분 상하게 했으면 정말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었어요.”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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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임서율은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곧장 백화점으로 향했다.차주헌이 먼저 아버지 생신 선물 사러 같이 가자고 했던 터라 예의상 문자 하나를 남겼다.[지금 시간 괜찮아? 안 되면 나 혼자 다녀와도 돼.]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서율아, 나 아직 회의 중이야. 너 먼저 다녀와. 내 카드로 결제해. 우리 아버님 선물이니까, 내 마음도 같이 전하는 셈이지.]임서율은 휴대폰 화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런 말투일 땐 백이면 백 못 온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큰 기대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그녀를 불길한 존재로 여겼다.하지만 이제 다시는 그들을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선물 하나만 들고 가는 것도 어색했다. 그래서 그냥 가족 모두의 선물을 챙겼다.쇼핑을 마칠 때까지도 차주헌에게서 다른 연락은 없었다.시간이 조금 남아 그녀는 본인 옷도 몇 벌 샀다. 물론 결제는 차주헌의 카드로 했다.어쩔 수 없었다. 예전 옷들은 전부 강수진이 손대고 간 뒤였고 임서율은 그런 걸 다시 입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다른 사람이 한 번 입은 옷은 아무리 세탁해도 손이 가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고질적인 결벽증 같은 것이었다.그 시각, 차주헌은 바로 그 카드 결제 알림을 받았다. 그는 아직 강수진을 달래고 있었다.하도원과 연락이 닿지 않아 강수진은 초조함에 거의 눈물을 쏟을 지경이었다.“주헌아... 제발 나 좀 도와줘. 서율 씨는 아직도 하 대표님이랑 약속 못 잡은 거야? 하 대표님 A8 차에 탈 정도면 둘이 꽤 가까운 사이라는 말이잖아.”강수진은 불안과 조급함이 뒤섞인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차주헌의 팔을 감싸안고 아양을 부렸다.“주헌아...”차주헌은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화면을 확인하던 중, 결제 알림 내역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결제 금액이 무려 1억 원이었고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잠깐만. 나 문자 하나만 보낼게.”그는 곧장 임서율에게 메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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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강수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작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분명히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얽혀 있었다.차주헌은 가느다란 입술을 다물고 잠시 말이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이 문득 더 짙어졌다.그때 강수진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주헌아... 나 요즘 노트북이 계속 말썽이야. 혹시 네 노트북 좀 잠깐만 빌려줄 수 있어?”차주헌은 조금 난처한 얼굴을 했다.“내 노트북엔 자료가 너무 많아. 하루이틀 쓸 것도 아니잖아. 자꾸 멈추는 거면 그냥 새로 하나 사는 게 낫지 않아?”“그런데 나 아직 월급 안 들어왔잖아...”강수진은 긴장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시선을 내렸다.차주헌은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닫았다.“그럼 간단하네. 어떤 모델 사고 싶은지만 말해. 내가 사줄게. 일 열심히 해주는 데 대한 내 보상이야.”“진짜야? 근데 그거 좀 비싸... 몇백만은 할 텐데...”강수진은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가자. 지금 가서 한번 보자.”차주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쳐뒀던 재킷을 들고 강수진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임서율은 쇼핑백을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중 예상치 못한 익숙한 두 사람을 마주쳤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는 그대로 멈춰 섰다.회색 슈트를 입은 남자는 늘 그랬듯 단정한 실루엣을 유지한 채 여자 옆에 서 있었고, 여자는 흰색 플리츠 스커트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발랄한 웃음을 띤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분명한 키 차가 있었고 분위기만 봐도 꽤 가까워 보였다.누구나 활기찬 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차주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임서율은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노트북을 사러 같이 온 모양이었다.한가하게 쇼핑은 할 수 있으면서 아버지 선물 고르는 데는 함께할 여유가 없었단 말인가.아래층에서 노트북 색상을 고르던 강수진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고 곧 이층 엘리베이터 옆에 서 있는 임서율을 발견했다.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던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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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묘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퍼졌다. 잠시 침묵하던 임서율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차 대표님, 부하 직원 챙기는 정성이 대단하시네요. 직접 같이 와주시는 것도 모자라서 노트북까지 선물하시고.”차주헌은 피식 웃었다. 무심한 어조에 표정은 여느 때처럼 흐트러짐 없었다.“신입이잖아. 적당히 격려는 필요하지. 지금은 총괄팀장이고. 바깥에 나가서 계약 같은 거 따올 일도 많은데, 작업 도중에 노트북이 멈춰버리면 우리 성운그룹이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어. 팀장이 쓰는 장비조차 멀쩡하지 않다는 말 듣는 건, 회사 이미지에도 안 좋으니까.”임서율은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감정을 가리려는 듯 시선을 살짝 내렸다.“나도 노트북 오래 쓰긴 했어. 강 팀장님 사시는 김에 너도 하나 살까 하는데. 혹시 같이 사면 할인도 있지 않을까?”그녀는 옆에 서 있던 직원에게 고개를 돌렸다.“두 대 같이 사면 할인되나요?”점원은 조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이런 고가 노트북은 한 달에 한 대만 나가도 고마운 물건이었고 지금 두 대를 덜컥 사겠다고 나서고 있었다.“아, 네! 당연히 할인이 있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색상 있으실까요?”임서율은 강수진 앞에 놓인 연분홍 노트북을 힐끔 봤다. 딱 그녀 나이대가 선호할 만한 여리여리한 색감이었다.그녀는 가장 오른쪽 끝에 진열된 제품을 가리켰다.“저는 흰색이요. 포장해 주세요. 계산은 이분이 하실 거예요.”그 말에 점원은 반사적으로 차주헌 쪽을 바라봤다. 호기심과 의심이 뒤섞인 시선이었다.회사원이든 누구든, 사회생활 좀 해봤다면 이런 장면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세 사람의 관계가 단순해 보이지 않았다.그래도 점원은 환한 미소로 대응하며 노트북을 포장했다.계산대 앞, 차주헌이 카드를 내밀고 결제 중인 사이 임서율과 강수진은 그의 양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임서율은 무심한 듯 차주헌을 바라봤다.“주헌아, 너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어디 아픈 거 아니야?”차주헌은 잠시 멍한 듯 시선을 흘리다가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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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차주헌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는 듯 운전석으로 돌아갔다.강수진은 다시 한번 임서율을 힐끗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고는 조수석 문을 열어 앉았다.임서율은 그 자리에 선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팽팽히 당겨졌던 신경이 순간적으로 끊어지는 듯 풀려버렸다.정신을 겨우 붙잡고 나서야 임서율은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하며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그때 마침 강수진이 말했다.“주헌아, 혹시 나 공항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 엄마가 나 보러 오셨거든. 원래는 택시 타려 했는데, 네가 컴퓨터 사주러 같이 와줘서...”“그래,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차주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임서율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입술도 혈색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그는 자신에게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어디 가는지 이후 일정이 있는지조차.차 안에 앉은 자신은 그저 투명 인간일 뿐이었다.강수진은 고개를 뒤로 살짝 돌려 손짓을 섞어 말했다.“서율 씨, 정말 미안해요. 저희 엄마가 갑자기 운성에 오신다고 하는데 이 시간에 택시 잡기도 쉽지 않아서요... 혹시 불편하시면 먼저 돌아가셔도 괜찮아요.”굳이 말하지 않아도 임서율은 더는 이 공간 안에 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말했다.“그 앞 사거리에서 내려줘.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들렀다가 갈 거야. 짐은 차에 놔두고 갈게.”차주헌은 룸미러로 뒷좌석을 확인하며 물었다.“어디가 안 좋아? 일단 수진이 어머니 모셔다드리고 내가 다시 데리러 올게. 근처 카페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하지만 임서율은 기다릴 수 없다고, 지금 이 순간조차 숨이 턱턱 막히는데 더 버티다가는 정말 길바닥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그녀는 가슴을 누르며 힘겹게 말했다.“괜찮아. 그냥 택시 타고 바로 병원 갈 거야. 끝나고 연락해.”“그래, 그렇게 해.”순간 임서율의 가슴에 콱 막히는 고통이 몰려왔다.예전이라면 차주헌은 어떤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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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보통 여자였으면 하도원의 느슨한 말투나 낮고 감기는 목소리에 홀려 정신줄 놓기 십상이었겠지만 임서율은 달랐다.그런 일은 자기한텐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괜히 마음 약해졌다간 하도원은 분명 끝까지 비웃을 게 뻔했다.그는 독특한 악취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함부로 엮였다간 다치는 쪽은 자신이 될 것이다.임서율은 문득 아까 그가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추스르며 힘겹게 웃어 보였다.“바쁘다면서요. 요즘은 나올 시간도 없다고 했잖아요.”하도원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더니 태연하게 대꾸했다.“그래요. 일 때문에 나온 김에 딱 봐도 안쓰러운 사람 하나 마주친 거죠.”임서율은 숨 쉬는 것조차 벅찼다.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입술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손끝엔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아마 또 하 대표님한테 민폐 끼쳐야 할 것 같네요. 병원에 좀 데려다주시든지, 아니면 119라도 불러주세요. 제가 쓰러져도 신경 안 쓰셔도 되니까요.”그 말투는 묘하게 담담했다. 오히려 너무 고요해서 더 이상했다.하도원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나중에 나 인터넷에서 몰매 맞게 하려고?”“그럴 리가요.”임서율은 입술을 감쳐물었다.그가 얼마나 영리한 사람인데, 누가 누굴 함정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임서율은 그런 계략을 꾸밀 기력조차 없는 상태였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서율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하도원은 재빠르게 허리를 감싸 그녀를 부축했고 순식간에 중심을 잡아냈다.그녀는 흐려진 시야로 그를 바라봤다. 뚜렷한 이목구비, 검은색 점퍼를 입은 그는 오늘따라 더욱 차가워 보였다.그런 그가 입꼬리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또 한 끼 빚졌네요.”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조수석에 태우려는 순간, 임서율이 겨우 정신을 붙잡은 채 물었다.“하 대표님 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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