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권세를 품은 용대비: Chapter 91 - Chapter 100

100 Chapters

제91화

“하지만 그들이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아진이 조심스레 묻자 대왕대비는 비웃으며 말했다.“감히 못 할 리가 있느냐. 내가 뒤를 봐주는데 뭘 두려워하겠느냐? 용우천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처음 용지안이 어떻게 궁에 들어왔는지, 그 집안 식구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마음속에 켕기는 것이 많아, 혹여 용지안이 죄를 물어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지. 만약 먼저 손을 써야 할 상황이 오면 그자들이 무얼 주저하겠느냐.”아진은 입가에 조심스레 미소를 머금었다.“역시 마마께서는 모든 일을 환히 꿰뚫어 보십니다.”이윽고 대왕대비의 어명이 먼저 여란궁으로 곧이어 용씨 관저로도 전해졌다.용우천은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마당으로 나와 어명을 맞았다.선포 내관이 그를 일으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잠시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용우천은 무언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즉시 허리를 굽혔다.“내관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그는 선포 내관을 서재로 안내한 뒷사람을 시켜 차를 내오게 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대왕대비마마께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선포 내관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역시 대왕대비마마께서 어찌하여 용장군을 신임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참으로 영민하신 분이십니다.”“과분한 말씀입니다, 내관. 저는 그저 우둔한 사람일 뿐입니다. 혹여 뜻이 있으시면 꼭 일러주시지요.”이 선포 내관은 대왕대비 곁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온 인물로,이미 육십이 넘었으나 그 공을 인정받아 아직까지 곁을 지키고 있었다.그는 책상 위를 손끝으로 똑똑 두드리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마마께서 친정에 다녀오신 뒤에는 대왕대비마마께서 다시는 마마가 궁으로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용우천은 순간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가 곧 선포 내관을 바라보았다.선포 내관은 다시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용장군께서는 세상의 형세를 누구보다 잘 아실 터입니다.”용우천은 머릿속이 복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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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이튿날 아침, 예조에서 내려온 하사품이 궁문을 들어섰다.커다란 마차 두 대가 가득 찼고 모두 대왕대비가 용지안에게 하사해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물품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금의환향이었다.화려한 봉황 마차가 여란궁 골목에 멈춰 서자 궁녀와 내관들이 좌우로 황실 의장대를 따라 길게 늘어섰고 그 행렬은 무려 한 리에 달했다.진여와 곽옥현이 용지안을 부축해 나왔다. 이날 용지안은 연분홍색 비단에 큰 모란꽃이 수 놓인 궁중 예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 장식도 소박했다.흘러내린 쪽머리에는 금빛 유수 장식이 달린 봉황 비녀 하나만 꽂고 비취 비녀를 곁들여 청아한 기운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용지안이 봉황 마차에 오르자 의장대가 앞장서 길을 열었다.1년 전, 한밤중 어둠 속에서 이 의장대에 둘러싸여 궁에 들어갔던 기억이 스쳤다.눈 깜짝할 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싶었다. 용지안은 발아래로 드리운 장막을 살짝 걷고 거리의 북적임을 바라보며 세월이란 흐르는 물과 같다고 다시 한번 실감했다.용씨 집안은 일찍부터 대문 앞에서 봉황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장대의 악기 소리가 울리자 용우천이 황급히 사람을 시켜 맞이하게 했다.진홍색 융단이 대문에서 골목 끝까지 곧게 깔렸고 의장대가 먼저 융단을 밟고 양옆으로 갈라섰다. 곧이어 마부가 봉황 마차를 이끌고 들어섰고 그 앞에는 수십 명의 호위병이 행렬을 인도했다.“마마께 문안 올립니다!”마차가 멈추자, 용우천이 집안의 가장으로서 맨 앞에 나섰다.진여가 한걸음 나서 공손히 말했다.“마마께서 하신 말씀이 있으니 모두 예는 생략하십시오.”용우천은 가족들과 함께 절을 올리고 몸을 바로 세워 용지안이 내리길 기다렸다.대비마마가 궁을 나와 친정에 왔으니 이는 용씨 집안에는 더 없는 경사였다. 용우천과 가까운 조정 대신들도 모두 찾아와 자리를 빛냈다.용지안이 연에서 내리자 신하들과 일가친척이 앞다투어 문안 인사를 올렸다. 용지안이 일일이 예를 면하라 하자 그제야 모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용지안이 데려온 궁녀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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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진씨 마님이 막 나가자 홍화가 불룩 나온 배를 안고 들어왔고 이제 임신한 지 칠팔 개월은 된 듯 보였다.홍화는 문을 열자마자 투덜댔다.“마님, 이번 달 월례 돈이 어찌 이리 적습니까? 아시다시피 지금 아이를 배고 있어 쓸 데가 많은데 이 정도로는 보름도 못 버팁니다.”최유신은 힐끗 쳐다보며 담담히 말했다.“요즘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처소마다 월례를 줄였다. 아마 백이가 네게 미리 전하지 않았느냐?”홍화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다른 사람들 건 줄이는 건 이해하지만 저는 아이를 배고 있잖습니까. 의원께서도 이번에 아들이라고 꼭 잘 돌보라고 하셨고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장군께서 저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요.”그 말투에는 은근한 위협이 담겨 있었다. 최유신은 내심 짜증이 났지만 억지로 눌러 담아 말했다.“알겠다. 이따가 내 몫에서라도 반을 떼어 보내주마. 사람 시켜서 네게 보낼 테니 그 정도면 되겠지?”홍화가 그제야 방긋 웃으며 공손히 말했다.“그럼 고맙습니다, 마님.”잠시 뜸을 들이더니 또 말을 이었다.“이번에 용지안이 친정으로 왔다던데 이렇게 큰 손님 모시느라 돈도 많이 들었겠네요? 궁에서 가져온 하사품이 두 수레나 됐다던데 그중에는 값비싼 물건도 참 많겠지요?”최유신은 홍화의 눈빛에서 탐욕을 읽고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겉으론 아무 내색 없이 말했다.“그 아이가 나눠줄 일이 있으면 오늘 밤 연회 때 할 테니 넌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돼.”홍화가 알겠다는 듯 교태를 부리며 웃었다.“물론이죠, 저도 이제는 그 아이의 이모 아니겠습니까. 연회 자리는 반드시 함께할 겁니다.”홍화는 임신하고 나서야 비로소 첩실로 책봉되어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안주인 대접을 받고 있었다.최유신은 더 이상 상대하기 싫어 대충 핑계를 대고 홍화를 내보냈다.‘요런 것들은 언젠가는 손 좀 봐야지.’한편, 용씨 집안은 오늘 밤 연회를 준비하느라 몹시 분주했다.용재혁도 많은 벗을 불러 모아 저녁에 있을 연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대비마마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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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저녁 연회가 시작되기 전, 용지안이 돌연 사당에 들러 자신의 어머니 양동매의 위패 앞에 절을 올리겠다고 했다.최유신은 미리 준비해 둔 위패를 꺼내 용씨 집안 조상 위패 옆에 올리고 향로까지 정갈하게 차렸다.용지안은 꼭 최유신이 곁을 지켜 들어와 달라 했다. 최유신은 내키지 않았으나 얼굴에 아무 표정도 없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따라 들어갔고 이제는 대비마마의 신분이니 무릎을 꿇을 필요도 없었다.진여가 조심스레 향을 피워 올리고 조용히 물러났다. 사당 안에는 오직 용지안과 최유신만 남고 하인들은 문밖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용지안은 양동매의 위패를 바라보다 그 위패가 새로 올려진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전혀 향불을 받은 흔적이 없는 말끔한 새 위패였기 때문이다.“마님, 체면치레는 참 잘하셨네요.”용지안이 차갑게 입을 열었고 최유신은 냉랭하게 받아쳤다.“이젠 대비마마까지 되셨으니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싫으십니까?”“어머니라...”용지안은 비웃음 섞인 웃음을 지었다.“내가 불러 드린들 그걸 감당하실 수나 있으시겠어요?”“천륜이란 게 있는데 내가 어미인데 네가 어머니라 부른다고 해서 못 받아들일 일이라도 있겠느냐? 대비마마는 천하 여인들의 귀감이니 설마 이런 도리조차 모른단 말이냐?”최유신은 꾹 눌러 참고 있었던 감정을 이 대목에서 끝내 숨기지 못했다.그러나 용지안의 입에서는 차갑고도 한 맺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세상에 이렇게 잔인한 어머니가 또 있을까요? 비록 제 친어머니는 아니어도 어릴 때부터 한 번도 거스른 적 없고 늘 얻어맞고 욕을 들어도 꾹 참고 살았습니다. 당신은 왜 그리도 저를 죽이려 하셨습니까?”용지안은 마치 원혼을 대신해 그동안의 억울함과 한을 모두 토로하는 듯했다.최유신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대비마마께서 참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런 일은 애초에 없었답니다.”“없는지 있는지, 하늘도 알고 땅도 압니다. 당신도 알고 저도 알지요.”용지안의 시선에는 냉기와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분명히 말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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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용지안은 냉소를 흘렸다.“역시나 용우천의 옹졸하고 인정 없는 성정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것인가 보군요.”백발의 노인은 크게 노하며 소리쳤다.“이런! 감히 우리 용씨 집안 사당에서 그따위 말을 하다니!”용지안은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정작 당신은 내 정체도 모르고 함부로 소리부터 치더군요. 그쪽도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까?”그 말이 끝나자, 용지안은 하얀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순간, 머리 위에서 황금빛 어망이 내려와 용씨 집안 조상들의 혼령을 모조리 그물 안에 가두었다.그녀는 어망을 단단히 거머쥔 채 손목을 탁 돌리자 그물은 조그만 뭉치로 오그라들어 그 손안에 꽉 쥐어졌다.양동매는 그 광경에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며 다가가 변명이라도 하려 했지만 용지안은 차갑게 그녀를 제지했다.“그저 조용히 계세요. 괜히 끼어들지 말고.”양동매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레 물러섰다.“이제 위패에 올라가십시오. 제가 직접 올려드릴 테니 이제 아무도 당신을 끌어내릴 수 없습니다.”용지안은 손바닥에 강한 기운을 일으켜 곧장 양동매의 혼을 위패 쪽으로 이끌었다.양동매의 영혼은 한 송이 연꽃으로 변하여 서서히 위패에 깃들었다.그 순간, 용지안은 음기가 섞인 내공으로 용씨 집안 조상들의 혼령을 봉인했다.그녀로선 대수롭지 않게 여긴 행동이었으나 이 일은 마침 도성에 막 도착한 한 도사의 눈길을 끌었다.만약 정기로 혼령을 제압했더라면 도사도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겠지만 음기로 남의 조상을 억누른다는 것은 남에게 결코 좋은 소리를 들을 일이 아니었다.그리하여 용지안이 사당을 나설 때 이미 누군가가 그녀의 뒤를 주시하기 시작했다.저녁 연회가 시작될 무렵, 판조대군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무용현이 즉위하던 해 대군에 책봉되었다.판조대군 무용한천은 무용경천의 열여섯째 아우이자, 고조의 막내아들이고 현 황제의 작은 숙부이기도 했다.1년 전, 바로 그가 용지안을 궁에 맞아들이는 일을 직접 주관했으나 이후로는 한 번도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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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용우천이 한바탕 장황한 말을 끝내자 곧이어 용지안이 하사품을 내리기 시작했다.이 순간을 용씨 집안 식구들은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예조에서 전하기로 이번 하사품은 대왕대비께서 직접 엄선한 궁중 귀물들이라 하였으니 모두가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상 위에는 수십 개의 예단 상자가 가지런히 놓였다. 각각 곱게 포장되어 있었으나 하사할 때조차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밝히지 않아 모인 이들 모두 의아해했다.평소라면 이름을 크게 불러주며 하사하는 법인데 이렇게 비밀스럽게 나눠주니 누구도 쉽게 손을 대보지 못했다.용지안이 말이 없으니 그 누구도 먼저 상자를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각자 하인에게 명해 상자부터 방으로 들여보내고 열어보는 건 나중으로 미뤘다.홍화 역시 궁금했으나 아무도 상자를 열지 않으니 감히 먼저 나서지 못했다.게다가 자신은 임신한 몸인데 고작 한 상자만 받았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나도 용씨 집안 핏줄을 품고 있는데 애가 태어나기도 전에 한 상자밖에 안 주다니...’홍화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슬며시 최유신의 소매를 당겼다.“마님, 저도 아이를 가졌으니 하사품을 하나 더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됐든 제가 마마의 동생을 뱃속에 품고 있잖아요.”최유신은 그 어리석음에 진저리가 났으나 잔치 중이라 차마 얼굴을 굳히지 못하고 목소리만 낮춰 타일렀다.“잔치가 끝나면 네가 직접 찾아가 말해 보거라.”홍화는 슬쩍 용지안을 바라보고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저 여자가 지금은 저렇게 높이 올라서 있지만 예전에는 저 같은 하녀도 시켜 먹지 못했던 처지 아니었어요? 다들 저 여자 무서워서 벌벌 떨지만 저는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최유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누가 겉으론 무서워해도 이 집안에 진심으로 저 여자 겁내는 사람 있겠니? 장군도 말했지, 이번에 돌아오면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이야. 그래야 저 아이가 아직도 용씨 집안 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테니.”홍화의 눈이 번쩍 빛났다.“정말 장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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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즉, 이 혼사는 판조대군 본인의 뜻이 아니었던 셈이다.용지안은 잠시 당황했다. 그는 흔쾌히 이 혼사를 받아들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우리 동생이 총명하고 활발하며 예쁘고 씩씩한 아이라 참 괜찮은 아가씨지요.”용지안이 다소 형식적으로 덧붙였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남의 손톱에 바늘을 꽂고 큰소리로 사람을 꾸짖는 버릇만 빼면 아직은 큰 흠이 드러난 적 없는 동생이었다.판조대군은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그러십니까?”그의 표정에는 영 미묘한 뉘앙스가 감돌았고 용지안도 그가 내심 달갑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곧 눈치챘다.용지안은 괜히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대군께서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정 안 되면 그냥 아름다운 꽃병 하나 곁에 둔다 생각하고 사셔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예쁜 얼굴을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 마음이 한결 흐뭇해지는 법이니까요.”판조대군은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마.”“이미 정해진 혼사이니 더 생각해도 소용이 없지요.”용지안은 스스로도 그리 달가운 대화가 아니란 걸 느끼며 힘겹게 말을 맺었다.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마음에 온기도 잘 드러내지 않는 듯해 용지안은 왠지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문득 생각해 보니 오늘 밤 연회 자리에 동생 용지현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용우천은 아들 둘을 지방에 보내 관직을 맡겼고 딸은 용지안과 용지현, 두 사람뿐이다. 반면 용재혁은 첩인 유씨에게서 네 아이를 두었고 정실인 진씨 마님에게도 아들딸이 있다.용씨 집안은 참 자손 복도 많다 싶었다. 용우천 역시 조정에서 명망이 높고 대왕대비와 황제 모두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됨됨이가 바르지 못하면 가문에 아무리 복이 많아도 오래가긴 어려운 법이다.용지안은 얼마 전 사당에서 만났던 용씨 집안 조상들의 영혼을 떠올렸다. 이마에 눈이 달린 혼령들이 가득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권세를 앞세워 남을 누르고 인정머리 없는 권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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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현관 돌계단 위, 수많은 사람이 둘러선 가운데 서종대군 무용경천이 모습을 드러냈다.어둑한 등불 아래, 용지안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는 달빛에 가까운 은백색 비단 도포를 입고 허리에는 금옥으로 장식된 띠를 둘렀다. 특히 띠 한가운데 박힌 푸른 비취는 메추리알만큼이나 커서 은은한 빛을 품고 있었다.이제 겨우 세 번째로 마주하는 무용경천이었지만 볼 때마다 늘 새로운 기운과 위압감이 느껴졌다. 얼굴 윤곽은 판조대군 무용한천과 닮은 점이 많았으나 그 품새와 기운은 사뭇 달랐다.판조대군이 온화하고 고요한 옥돌 같은 사람이라면 무용경천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연스러운 위엄과 강인함이 흐르는 사내였다. 그 힘은 억지로 내뿜는 것이 아니라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아도 주변에 자연스레 압도감을 주는 그런 천성에서 우러나는 카리스마였다.그러면서도 묘하게 사람 마음을 흔드는 치명적인 매력이 스며 있었다. 소설에서 흔히 쓰는 '사악하지만 매혹적인 영웅'이라는 말, 바로 그에게 딱 어울렸다.그저 존재만으로도 주위에 긴장감이 감돌게 하는 사내.멀리서부터 용지안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마치 어둠 속에 깜빡이는 푸른 불빛 같았다. 눈을 살짝 가늘게 뜨는 순간 그 빛이 날카롭고 뜨거운 불꽃처럼 변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감히 그 눈빛을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무용경천이 다가와 용지안 앞에 서서 키 큰 그림자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늦었습니다. 마마께서 불쾌해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이렇게 당당하고 담담한 인사에도 용지안은 미소로 받아넘기며 답했다.“대군께서 이렇게 저희 집까지 왕림하신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기 그지없으니 무슨 불쾌할 일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대군 덕에 용씨 집안이 빛이 납니다.”겉으론 모두 용지안이 서종대군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정작 용지안 본인은 서종대군과 진심 어린 인연을 맺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서로 나눈 말도 손가락으로 셀 만큼밖에 되지 않는다.용우천이 재빨리 무용경천을 용지안 옆에 앉게 했고 그 옆에는 곧바로 판조대군이 자리를 잡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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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용지안은 어느새 무용경천이 심장 박동조차 느껴지지 않는 존재임을 새삼 실감하며 마음속으로 궁금증이 일었다.‘어떻게 사람이 심장이 뛰지 않으면서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을까?’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세 가지였다.첫째, 사람의 몸에 아주 특별한 신물이나 신비로운 영물 같은 것이 깃들어 있어서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전설에 나오는 불로초를 먹은 사람이나 도술로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 같은 것들을 말이다.둘째, 소위 ‘살아 있는 시체’ 즉, 좀비와 같은 존재인데 이런 경우는 온몸에서 시체 특유의 음산한 기운이 풍기고 햇빛을 보면 안 되고 얼굴도 종이처럼 창백해서 도저히 정상인처럼 살 수가 없다. 그러나 무용경천은 이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있다면 인간 세상의 법칙이나 윤회를 벗어나 버린 ‘진짜’ 시체귀, 즉 ‘강시’일 수 있지만 무용경천은 그런 괴물도 아니다. 결국 무용경천의 경우는 첫 번째—몸에 신물이 깃든 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무용경천은 용우천의 덕담에도 그저 담담하게 웃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용지안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바로 그때, 갑자기 대청에 지나치게 꾸민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지현이가 판조대군께 문안 올립니다.”용지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바라보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용지안의 여동생, 용지현이 큼직한 금실 국화가 수 놓인 환한 주홍색 비단 치마를 입고 그 위에 붉은색 얇은 겉옷을 걸친 채 당당하게 나타난 것이다. 목에는 붉은 마노로 된 큼직한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그 진주 장식이 하필이면 은근한 쇄골선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용지안은 자신이 다시 21세기로 돌아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황당했다.아무리 주나라가 지금만큼 개방적이라 해도 이 정도로 대담한 차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녀만 놀란 게 아니었다. 관직에 있는 관리며 하인들까지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슬쩍 피했다.최유신은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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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용지현은 용지안의 칭찬이 무척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들어 자랑스럽게 쳐다보며 웃었다.“예전에 귀한 손님들께서 댁에 오실 때마다 우리 자매 이야기가 오르내리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모두들, 제가 언니보다 낫다 하셨지요. 생각해 보면 그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듯합니다.”용지안은 피식 웃었다. 사실 손님들이 집에 온다고 해도 자신이 얼굴을 내밀 자리가 아니었던 시절이 떠올랐다.그렇게, 원래라면 엄숙해야 할 궁중 만찬은 용지현이 등장한 순간부터 뭔가 기이한 분위기로 바뀌었다.이 어색함 속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서종대군 무용경천뿐이었다.그는 조용히 술잔을 들고 앉아 있었고 몇 잔을 비워도 얼굴빛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술기운이 주위까지 감돌아, 바로 옆에 앉은 용지안도 은은한 취기에 휘감기는 듯했다.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는 어김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애를 쓴다.이번에는 홍화였다. 홍화는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은근히 체면을 차리는 척하며 용지현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지현아, 너도 엄연히 대장군 집안의 규수인데 어찌 저리 저속한 차림을 하느냐? 아무리 젊다 해도, 이렇게 손님들 많은 자리에 그런 옷은 곤란하지 않겠니. 어서 들어가 옷부터 갈아입거라. 손님들 앞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홍화는 이제 스스로 첩실이 된 이후, 점점 자신이 이 집의 안주인이나 되는 듯한 태도를 드러냈다. 그래서 이날도, 누구보다 윗사람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용지현에게 엄하게 충고한 것이었다.하지만 용지현 역시 예전부터 홍화를 탐탁지 않게 여겨왔다. 겉으론 티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홍화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옛날부터 하인보다 못하게 여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이날 촉망받는 서종대군과 판조대군, 또 온갖 대신들이 함께 자리한 가운데 홍화는 이 틈을 타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려 했다.과거 억눌렸던 울분을 이참에 한껏 풀어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용지현이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첩인 자신에게 크게 소리를 지르진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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