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241 - 챕터 250

464 챕터

제241화

“연우야...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나 좀 다녀올게.”남진은 짧게 말하곤 곧장 발걸음을 옮겨 유하가 나간 방향을 따라갔다.연우는 순간 의아했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시선을 그쪽으로 던져 보았으나 별다른 것이 없었던 지라 이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렸다. 대신 곁을 지키고 있는 태건을 흘깃 바라보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지난번 ‘유산’과의 협력이 결국 무산됐잖아요. 전 승현이랑 임청산 대표님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는 줄 알았어요.”“이번 연회에서 좀 분위기를 풀어 보려 했는데... 임 대표님이 이렇게나 말을 닫아 버리실 줄은 몰랐네요.”연우는 걱정을 가득 담은 얼굴을 보였다.“FK테크와 ‘유산’은 같은 업계 회사잖아요. 앞으로 부딪힐 일 많을 텐데, 괜한 오해는 빨리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말을 잇던 연우는 조심스럽게 옆을 바라봤다. 여전히 무표정한 태건. 살짝 낮은 목소리로 떠보듯 물었다.“나 비서님은 오래전부터 승현이 곁을 지켜왔잖아요. 임 대표님과 승현이 사이에... 사실 뭔가 아시는 거 있죠?”그러나 태건은 차갑게 끊었다.“대표님께 직접 여쭤보시죠.”짧고 단단한 한마디에, 연우의 미소가 잠시 흔들렸다.승현은 7년 전의 일을 철저히 감추려 했다. 승현에게 그 일을 다시 묻는 건 그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연우도 그것은 잘 알고 있었다.‘나태건은 고등학교 때부터 따라다닌 충성스러운 사람인데... 단단히 입을 닫고 있네.’그녀는 며칠 동안 병원에 찾아가며 은근히 떠봤지만, 태건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차단했다.연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연우는 어느새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인맥을 쌓으려는 이들, 연우와 승현의 관계를 직접 묻는 이들, 그리고 승현이 왜 보이지 않느냐는 궁금증을 가진 이들까지.승현이 입원했다는 사실은 철저히 가려졌다. 최근 승현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모든 비즈니스 협상 자리에 태건만 모습을 드러내자, 업계 사람들의 답답함과 여러 의심은 더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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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2화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냐는 말.그 한마디에 청산의 얼굴빛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언제나 부드럽던 표정에서, 처음으로 뚜렷한 불쾌감이 드러났다.“네가 예전에 말한 그따위 환심 사는 방법들, 돈 써서 선물하고, 데리고 놀러 다니는 거. 하나도 통하지 않더라. 네가 뭐 잘난 연애 고수라고?”“허.”준혁은 비웃듯 짧게 웃었다.다른 얘기였으면 흘려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애 문제로 지적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청산의 팔을 잡아끌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야, 그건 네가 제대로 못 써먹어서 그런 거지! 내가 알려준 게 틀릴 리가 없어. 넌 맨날 머릿속에 코드만 굴리니까 안 되는 거야. 가자, 차근차근 어떻게 했는지 다 말해 봐.”...한편, 연회장.태준범이 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을 훑는 눈길이 곧장 멈췄다. 시선이 머문 곳은 사람들의 중심에 선 하연우였다. 눈빛이 즉시 밝아졌다.“연우야!”준범은 반가움에 들뜬 목소리로 불렀다.사람들과 활발히 대화하던 연우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시 놀란 듯 멈칫했으나, 곧 환하게 웃었다.“준범이 왔구나. 너희 형은?”준범이 왔다면, 형 준혁 역시 이 자리에 와있을 터였다. 연우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보이지 않았다.“형은 청산 형 찾으러 갔어.”준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 다가왔다. 그 눈길에는 간절하고 뜨거운 기색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준범은 최근 준혁과 관련된 사건 때문에 시달리며 마음고생이 심했다. 연우와도 겨우 전화로만 연락했을 뿐, 직접 얼굴을 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청산이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형을 졸라서 함께 온 것도 사실은 연우를 보기 위해서였다.‘다행이다. 역시 와 보길 잘했어.’준범은 눈길을 떼지 못했다.연우는 은근히 준범의 시선을 즐겼다. 그러나 겉으로는 살짝 피하는 듯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지나치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의 위치는 오승현의 연인이었다.주위 사람들은 이미 준범이 누구인지 알아봤다. TR그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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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3화

준범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승현이는 왜 안 왔어?”“승현이는 일이 좀 있어서.”연우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흘리며 준범의 손을 잡아끌었다. 소파 쪽으로 가서 손바닥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았다. 한동안은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다, 연우가 슬며시 본론으로 들어갔다.“준범아, 너희 형... 임 대표님하고 협력 확정된 거 맞지?”이미 기분이 풀린 준범은 연우가 묻는 건 뭐든 성심껏 대답했다.“응, 맞아.”연우는 눈을 반짝이며 또 물었다.“그럼 임 대표님이 개발한 요즘 가장 핫한 그거, 너희 형도 사용 권한 받은 거야?”“‘CN 대형 언어 모델’ 말하는 거지?”준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듯 말했다.“권한은 당연히 있지. 지난주에 청산 형이 직접 시연해 줬는데, 나도 옆에서 같이 봤어. 근데 난 뭔지 잘 모르겠더라.”“그냥 우리 형 말로는 ‘CN 대형 언어 모델’이 진짜 대단하다고 했어. 국가정보원에서도 이 시스템을 도입해서 보안이랑 빅데이터 정보 수집·분석에 쓰고 싶어 한다더라. 구체적인 건 나도 잘 몰라.”연우의 눈빛이 순간 뜨겁게 흔들렸다.‘역시 아버지가 말씀하신 게 맞아. 국가에서도 이미 노리고 있어.’‘각계에서 협력하려고 안달인데... 이건 잠재력이 무궁무진해.’승현은 청산과 협력할 뜻이 없다고 잘라 말했지만, 하지철은 달랐다.물론 하지철도 승현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싶진 않았다. 승현과 척지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다른 길을 찾았다. 협력을 얻어낼 수 없다면, HK그룹은 직접 ‘CN 대형 언어 모델’을 손에 넣어야 했다.충분히 기회는 있었다.연우는 아버지의 당부를 떠올리며, 의도적으로 눈을 떨구고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모습은 곧바로 준범의 시선을 끌었다.“연우야, 왜 그래?”준범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와 물었다.연우는 몇 번이나 재촉하는 준범을 보고서야,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승현과 청산의 사이가 틀어진 일, 그리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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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4화

유하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단어 하나하나는 분명히 알아들었는데, 합쳐 놓으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이솔이... 태준혁이랑 잤다고?’작은 정원 안, 바람조차 멎은 듯 고요했다.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던 유하는 겨우 입술을 떼며 말문을 열었다.“너...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태준혁이 어떤 인물인데?그는 늘 총을 지니고 다니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함부로 엮였다간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위험한 인물.유하는 상황이 특별하지 않았다면 절대 상종하지 않았을 사람이다.그런데, 절친 이솔이 태준혁과 잠자리를 가졌다니?유하는 늘 친구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이솔은 늘 자극적인 걸 좋아했고, 사격을 배우거나 위험한 스포츠에 빠져 있긴 했어도, 남자에겐 전혀 관심이 없던 애였다.‘결혼 안 하겠다더니, 대체 왜...?’유하는 제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서 빙빙 돌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이솔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떨리며 흘러나왔다.[나 요즘 태씨 가문 건으로 태준혁이랑 같이 일했잖아. 원래 골치 아픈 일이라 중간에 태준혁이 경호원처럼 날 따라다니면서 도와줬거든.][며칠 전에 일이 끝나고 술 한잔했는데... 내가 취해서... 태준혁 복근이 또 너무... 맘에 들어서... 그만...]유하는 숨을 깊게 몰아쉬며 할 말을 잃었다.아직 아무 말도 못 했는데, 이솔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뭐, 여기까진 괜찮아. 성인끼리 그냥 하룻밤 같이 잔 거잖아. 나도 젊고 예쁘고 몸매 좋고, 태준혁도 젊고 잘생기고 몸 좋고, 서로 손해 볼 게 뭐 있어?][난 오히려 미안해서 600만 원 송금했거든. 근데, 문제는 그다음이야. 태준혁이 나보고 책임지래! 그게 말이 돼?]“돈으로 600만 원을 줬다고?”유하는 잠시 얼어붙었다가, 황당해 말이 막혔다.“야, 넌 그걸 원나잇 알바라도 한 것처럼 돈을 줬어? 하필 태준혁한테?”‘TR그룹의 주인에게... 겨우 600만 원?’유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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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5화

“다음 달 5일쯤, 아마 그때가 될 것 같아.”이솔은 달력을 대충 계산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얼마 안 남았네. 이번 달도 거의 끝났잖아. 근데 임청산 쪽은 어떻게 할 건지 물어봤어? 태준혁 건도 이제 거의 마무리됐을 텐데.]유하는 짧게 대답했다.“오늘 밤 집에 가면 물어볼게.”[응응, 꼭 좀 빨리 물어봐.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일 건지 알아야 우리도 준비하지!]이솔의 목소리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유하야, 이제 우리 진짜 서둘러야 해. 나 태준혁이 본격적으로 들이닥치기 전에 해외로 나가야 해.][절대로 우리 부모님께는 들키면 안 되고! 겨우겨우 비혼주의 받아들이게 했는데, 내가 밖에서 이런 사고쳤다는 거 알면 난 끝장이야!]유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그러게, 왜 그런 짓을 해.”남자랑 놀아난 건 그렇다 쳐도, 하필 태준혁이라니.이솔은 대꾸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엔 그날 밤 술에 취해 태준혁의 단단한 복근에 손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랐다.‘하필 그때 왜... 못 참았을까.’자책이 밀려와 이를 꾹 깨물었다.유하는 뭔가 더 말하려다,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정원 쪽 길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나 끊을게. 저녁에 청산 선배한테 물어보고 다시 연락할게.”전화를 끊고 돌아서자,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이 뚜렷해졌다.“당신... 어떻게 여기...?”배남진이었다.남진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몇 걸음 다가왔다.“아까 안에서 소유하 씨가 전화를 받는데, 너무 급해 보였어요. 혹시 무슨 일 있나 걱정돼서 따라 나왔어요.”유하는 순간 눈빛이 복잡해졌다.‘나랑 배남진이... 서로 이렇게 신경 쓸 사이는 아닌데.’남진도 그걸 느꼈는지, 얼른 핸드폰을 꺼내 유하 쪽으로 내밀었다.“아, 그리고 이거. 지난번에 루비 찾아봐 달라고 했잖아요. 하나 찾았는데, 소유하 씨가 원하는 게 맞는지 한 번 봐요.”유하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일반인에겐 공개되지 않는 고급 경매 카탈로그였다.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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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6화

연회장 옆에 딸린 휴게실.준범과 대화를 끝내고 원하는 걸 얻은 연우가 기분 좋게 홀로 돌아가려던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태건이었다.[오늘은 제가 먼저 들어가야 해서요. 연회 끝나면 따로 기사 보내드리겠습니다.]짧은 설명만 남기고 태건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뚝-통화가 끊기자, 연우의 눈빛이 잠시 싸늘해졌다.‘나태건... 늘 이 모양이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쩜 이렇게 무례하기 그지없어.’연우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좋아, 지금은 참아 주지.’‘하지만 내가 승현의 아내가 되는 순간, 반드시 나태건부터 길들여 줄 거야.’‘그때는 꼼짝 못 하고 무릎 꿇게 해 주지.’...그린힐.어둠을 가르며 달려온 검은 차량이 별장 앞에 멈춰 섰다.차에서 내린 건 키 크고 건장한 사내, 태건이었다.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을 서성이던 윤해월이 다급히 다가왔다. 그러나 태건은 잠시 눈길만 주고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은 뒤, 곧장 2층 서재로 향했다.철컥-문이 열리자, 방 안은 커다란 조명 대신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책상 뒤에 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은 반쯤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곧게 뻗은 콧날, 날카롭게 가라앉은 눈빛. 뚜렷한 형체는 보이지 않아도, 태건은 본능적으로 그 시선이 화살처럼 자신을 꿰뚫는 걸 느꼈다.숨 막히는 정적.태건은 문고리에 올린 손을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문이 닫히자, 방 안은 한층 더 눅눅한 어둠에 잠겼다.잠시의 정적 끝에, 태건이 입을 열었다.“대표님... 아직 상처가 덜 아물었습니다. 지금 병원에서 나오시는 건 회복에 좋지 않습니다.”“병원에만 누워 있으면... 집에서 개가 주인 말 안 듣는 걸 어떻게 알겠어?”승현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냉기가 묻어 있었다.태건은 곧장 고개를 숙였다.“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벌을 내리셔도...”“벌?”스탠드 불빛이 어슴푸레 드리운 얼굴 위로, 승현의 여우 같은 눈매가 가볍게 치켜 올라갔다.깊고 어두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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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7화

유하는 드레스를 벗고 샤워를 마친 뒤, 편안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재윤을 먼저 재운 후에야 책상 불빛이 새어 나오는 서재 앞에 섰다.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자, 안에서 차분하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던 청산이 놀란 듯 시선을 들었다.“아직도 안 쉬는 거야?”“조금 물어볼 게 있어서요.”유하는 소파에 앉았다. 청산도 잠시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 소파 옆에 앉았다. 서로 반 뼘 남짓 떨어져, 자연스레 거리를 유지한 채였다.“무슨 일인데?”유하는 잠시 망설였다. 연회가 끝난 뒤, 떠나기 전에 태준혁을 마주쳤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가 이솔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가긴 했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불안과 의문이 남아 있었다.잠시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선배... 태준혁 대표님 잘 알아요?”뜻밖의 질문에 청산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오래된 친구라 어느 정도는 알지. 왜?”유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결국 궁금증을 내뱉었다.“태준혁 대표님... 여자 문제 복잡한 사람이에요?”청산의 눈빛에 잠깐 의아함이 스쳤다. 그러나 유하의 표정이 진지한 걸 보고는 곰곰이 생각한 뒤, 신중히 대답했다.“내가 아는 건 외국에서 몇 번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정도야. 다 깨끗하게 정리한 걸로 알고 있고. 사생활까지 깊이 아는 사이는 아니라서. 근데... 왜 갑자기 준혁이 얘길 하는 거야?”“그냥... 궁금해서요.”친구의 사적인 이야기를 함부로 꺼낼 순 없어, 유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그보다, 사실 제가 묻고 싶었던 건 다른 거예요. 출국 준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오늘 이솔이가 전화해서 그러는데, 태씨 가문 문제도 거의 정리됐다고 하고, 선배 회사도 상장 마쳤으니 사업도 안정된 궤도에 올라선 거 아닌가 해서요.”청산은 안경을 가볍게 밀어 올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맞아, 큰 틀은 정리됐지. 하지만 아직 신경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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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8화

‘출국하고 나서 다시 돌아올 거냐...’그 질문은 굳이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유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너무 단정적인 것 같아 곧 다시 작게 끄덕였다.지난번 일을 겪은 뒤로, 유하의 마음속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일단 국내를 벗어나기만 하면 돼.’‘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변호사팀이나 진주연이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한다면...’‘최악의 경우라도 2년 분리 거주 후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어. 방법은 있어.’유하의 속내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청산은 그녀의 눈빛만으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잔잔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자주 해외로 널 찾아갈게.”유하는 입술을 살짝 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지금껏 청산이 보여준 성의와 배려를 떠올리니, 차마 거절의 말을 뱉을 수 없었다.‘그저 고마운 마음만 가지면 돼. 괜히 선을 넘는 말을 하지 말자.’휴식을 핑계로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 유하의 시선이 스쳤다. 청산의 다리에 느슨히 놓인 손. 길고 곧은 손가락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득 오늘 연우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죄송합니다. 오래 쳐 본 적이 없어서 손이 굳었습니다.’그 순간부터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유하는 결국 입을 열었다.“선배는... 지금은 피아노 안 쳐요?”청산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손끝마저 아주 작게 떨린 듯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안경 너머 시선을 피했다. 눈동자의 속내는 가려졌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오래됐어. 피아노 손에 안 댄지...”유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더 묻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가 말하기 불편하다는 걸 눈치챘다.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맞았다. 그녀는 자리를 뜨려는 순간, 손목이 불쑥 잡혔다.그리고 놀라 눈을 돌리니, 청산의 시선이 정면에서 유하를 붙잡았다. 남자의 차분한 얼굴에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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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9화

유하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괜히 피아노 얘기를 꺼냈어...’다행히 청산이 더 묻지 않고 넘어가 주었지만, 만약 그 자리에서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유하는 감히 상상도 하기 싫었다.몇 번이고 깊게 숨을 고른 뒤에야 간신히 잠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그날 밤, 유하는 편히 잠들지 못했다.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붙였는데, 새벽녘 알람 소리에 또다시 깨고 말았다.유하는 재윤을 흔들어 깨웠다. 의사에게 들은 조언이 있었다.아이의 몽유병이 일정한 시간대에 반복된다면, 그 시간 전에 일부러 깨워 다시 잠들게 하면 차츰 나아질 수 있다고 했다.‘나도 힘들지만, 재윤이를 위해선 해야지.’피곤한 눈꺼풀을 억지로 버티며 아이와 보드게임도 하고 그림책도 읽어 주었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가자 그제야 함께 다시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항상 일찍 일어나 아침을 식사하던 청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집에 들어온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대표님은요?”유하가 묻자, 차동석이 차분히 대답했다.“급한 일 때문에 새벽에 출근하셨습니다.”회사 일이라면 청산의 부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유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은 뒤 재윤과 함께 화실로 향했다. 매일 디자인 작업을 이어 가며, 중간중간 아이에게 그림을 가르쳤다.오후, 차동석이 다과를 가져오며 망설이듯 말을 꺼냈다.“유하 씨, 제가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임 대표님과 관련된 일입니다.”유하는 별생각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집사님 말씀인데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해야죠.”차동석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사실 대단한 건 아니고요... 요즘도 느끼셨을 겁니다. 대표님은 일에 너무 몰두하시는 분입니다.”“몇 년째 제대로 쉰 적도 없으시고요. 제가 뭐라 해도 잘 듣지 않으시니... 유하 씨가 대신, 가끔은 대표님을 일에서 끌어내 쉬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잠깐이라도 산책하시든, 식사하시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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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0화

경매가 열리는 날.햇살은 따뜻했고, 봄바람이 겨울의 마지막 흔적을 밀어내듯 불어왔다. 초봄의 기운이 완연했다.‘대나무숲’ 주택단지, 임청산의 별장 앞.유하는 베이지 톤의 니트 원피스에 수묵화 패턴의 숄을 걸쳤다. 검고 긴 머리는 진주 핀으로 단정하게 올려 고정했고, 가녀린 목에는 은은한 광택을 뿜는 굵은 알의 진주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차분하고도 우아한 분위기가 온몸에서 자연스레 흘렀다.그 옆에 선 재윤 역시 꼬마 신사 같은 차림새였다. 세련되고 점잖은 아동복에 하늘색 니트가 더해져, 희고 말랑한 얼굴을 더 돋보이게 했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엄마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엄마, 아저씨는 같이 안 가?”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윤의 태도도 달라졌다. 이제는 그 ‘아저씨’의 요리가 맛있고, 아저씨가 자신에게 다정하다는 것도 알게 되어 이제는 처음처럼 낯설어하지 않았다.유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아저씨가 급한 일이 생겨서 경매에는 같이 못 가셔. 대신 끝나면 바로 우리 만나러 오시면, 같이 산책할 거야.”재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기쁜 듯 말했다.“아직 나들이 같은 거 한 번도 안 해 봤는데.”그동안의 생활이 떠올랐다. 심리적인 문제 때문에 아이는 집 밖에 잘 나가지 못했고, 아이의 보호자였던 배남진은 회사 일에 매달리느라 아이를 거의 집 안에만 두었다. 늘 곁에 붙어 있던 돌봄이 외에는 누구와도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엄마가 곁에 있다는 게, 재윤에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든든했다.작은 손이 유하의 손을 꼭 움켜쥐며 반짝이는 눈으로 속삭였다.“나들이, 엄마랑 같이.”그 모습에 유하의 마음은 녹아내리듯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아이의 하얗고 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바로 그때, 고급 외제차 한 대가 조용히 별장 앞에 멈췄다. 차동석이 직접 문을 열며 유하와 재윤 두 사람을 안내했다.차가 출발하자, 검은색 승합차 두 대가 뒤따랐다. 안에는 경호원들이 앉아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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