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서로 다른 길에 오른 너와 나: Chapter 171 - Chapter 180

290 Chapters

제171화 확실한 건 없어

“내 팬이라고요?”시아의 심장이 순간 싸늘해졌다.‘그때의 일이 팬들과 관련이 있다는 건가?’시아는 사진을 다시 훑어봤지만, 여전히 기억나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당시 팬들이 많았지만, 여자는 훈련에 온 마음을 쏟느라 팬들과 교류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해도 이렇게 오래 지난 지금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시아는 휴대폰을 지호에게 돌려주며 물었다.“대체 뭘 알아낸 거야?”“미아가 당시 심각한 스토킹을 당했어. 심지어는...”지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낮게 이어갔다.“직접적인 피해까지 입은 것 같아.”시아는 얼어붙었다.둘은 늘 붙어 지냈는데 먹고 자고 훈련하는 모든 시간을 함께했다. 심지어 화장실조차 함께 가곤 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자신이 모를 리 없었다.“아직은 단서일 뿐이야. 확실한 건 없어.”지호의 목소리도 무겁게 가라앉았다.시아는 오래전 미아가 사고를 당했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럼 그때의 일,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의도한 걸 수도 있다는 거야?”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시아 역시 말을 잇지 못한 채 조금 전 봤던 사진들이 떠올랐다.“이 사람들이 전부 의심 대상인 거야? 더 있어?”“조사 중이야.”“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내가 확인해 줄게.”시아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지호가 쫓는 건 결국 시아의 팬들이었기에 이 일은 자신과도 무관하지 않았다.그렇지 않아도 이미아의 사고는 비록 자신이 직접 저지른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자신이 끌어들인 불행일 수도 있었다.시아는 미아의 지금 상태를 떠올렸고 예전에 노수한이 했던 말도 생각났다.“만약 미아 상태가 끝내 나아지지 않는다면 정말로 치료를 중단할 거예요?”지호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시아는 알았다. 희망 없는 치료를 이어가기보다 차라리 놓아버리겠다는 뜻임을.먼지가 흙으로 돌아가듯 모든 걸 끝내려 한다는 걸.시아는 낮게 속삭였다.“그래도 이제 단서가 잡혔으니까 만약 중단한다 해도 최소한 미아한테는 답을 줘야죠. 안 그래요?”그건 미
Read more

제172화 모르나 보네

은산이 전화를 끊고 주소 하나를 툭 보내왔다.다른 곳이었다면 시아는 가지 않았을 것이나 뜻밖으로 절집이었다. 게다가 이미 해가 진 저녁이었다.‘절이라니, 그것도 나를 초대하다니.’별 기대 없던 마음에 묘하게 관심이 동했다.호기심이 화를 부른다 해도 사람 마음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절이라면 예경의 마음이 먼저였기에 시아는 차를 몰아 그곳으로 향했다.절에 닿았을 때 경내는 고요했다. 길가의 오래된 등불은 누런빛을 토하며 장중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은산에게 따로 연락하지는 않았는데 이미 시아의 차가 보였기 때문이다.시아는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향내가 숨결에 스며들었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마음을 맑히는 기운이 저절로 일었다. 하루 내내 조여 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노하숙은 평생을 불심으로 살았다. 어릴 적부터 시아를 데리고 절에 다니며 기도했고, 아프기라도 하면 반드시 무당 할머니를 찾아보게 했다.그런데 신기하게도 대개는 그 뒤로 금세 나아졌다.그래서 미신은 믿지 않더라도 늘 경외심은 품고 살았다. 세상에는 말로 다 못 하는 이치가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만불사에서 소원을 빌었고,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마음은 놓을 수 있었다.밤의 절은 특히 고요했고 시아는 금세 은산을 발견했다.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도 옅었으며 입술도 늘 보이던 진한 붉은기가 아니었다.평소와 다름없는 건 단정한 쇼트커트뿐이었다. 장삼자락 앞에서 두 손 모은 표정은 한없이 경건해서 그 모습은 은산이면서도 은산 같지 않았다.시아는 은산을 잘 알지 못하고 마주친 횟수도 많지 않았지만 매번 다른 느낌을 남기는 사람이다.발소리를 들었는지 은산이 고개를 돌렸다.“왔으니 먼저 절부터 하죠.”시아가 다가가 머리를 조아렸고 두 사람은 예를 마치고 법당을 나섰다.“이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뭐 해요?”시아가 묻자 은산은 옅게 웃었다.“모르나 보네.”금세 고개를 저었다.“도련님도 참, 나 같은 형님을 제대
Read more

제173화 참 독하네요

불상의 발은 땅 위에 우뚝 서 있었다.시아가 반쯤 무릎을 굽혀 올려다보았지만 여전히 고개를 숙여야 가까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은산이 가리킨 자리에는 칼로 긁어낸 듯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시간도 꽤 지난 듯 금이 흐릿하게 바래 있었지만 글자는 또렷했다.이에 시아는 단번에 알아봤다.[강시아, 죽어라!]짧은 글자였지만 그 악의는 오히려 뼛속 깊이 파고들어 시아의 심장을 덜컥 떨리게 했다.“오늘 불상을 닦을 때 우연히 발견했어요. 세상에 같은 이름은 많으니 꼭 동서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아는 강시아는 동서 하나라서요.”은산이 설명했다.세상에 동명이인은 많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하지만 이름을 새기고 그것도 불상의 발밑에 저주의 문장을 새길 만큼 증오한다면, 그 대상이 누구든 간에 원한이 보통은 아니었다.“이거 말고 또 다른 건 없어요?”시아가 물었다.“없어요. 내 눈은 동서 것만 못하잖아요. 그러니 직접 더 찾아봐요.”은산의 말에 시아는 시선을 옮겨 다시 살폈고 다른 발의 같은 위치에서 또 다른 새김을 발견했다.숫자였는데 시아의 생일이었다.이번에는 확신할 수 있었다.‘죽어라’라 새겨진 이름 속의 강시아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누구길래,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까지 나를 미워하는 걸까?’은산은 시아의 얼굴에 드리운 빛깔을 보며 눈치를 챘다.“뭔가 또 발견했네요?”시아는 낮게 말했다.“네. 다른 발에는 제 생일이 새겨져 있어요.”시아의 얼굴빛이 조금 창백해졌는데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름이 돋을 만큼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그러자 은산도 놀란 눈빛이었다.“참 독하네요.”‘그러게요.’.이름과 생일을 불상의 발아래 새겨 넣었다는 건, 매일 신불의 발에 밟히고 짓눌리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다.“이런 독한 짓을 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저주에 잡아먹히죠. 예로부터 남을 저주하면 그 저주는 곧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이라 하잖아요.”은산이 시아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이에 시아의 마음은 요동쳤다.요즘 일
Read more

제174화 둘 다 참 순수하네요

지호가 자주 간다는 곳이 어떤 곳인지, 시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그럼 더더욱 안 가요!”시아는 단호히 거절했다.애초에 시아와 지호는 그저 보여주기식 부부일 뿐이었다. 진짜 부부라 해도 몰래 쫓아가서 바람이라도 잡는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이에 은산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는데 맑고 청아한 웃음은 은방울이 구르는 듯했다. 아름다운 얼굴, 넉넉한 재력, 심지어 목소리마저 하늘이 내린 듯 곱다.시아는 묵묵히 은산의 웃음을 들었다. 이는 어색하지도 않았고, 왜 웃는지 캐묻지도 않았다.“동서, 지호 안 좋아하죠?”은산이 웃음을 멈춘 뒤 질문하자 시아는 옅은 미소로 입꼬리를 올렸다.“그게 그렇게 우스워요?”“네. 제가 지호랑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잖아요. 알몸으로 뛰어놀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를 안 좋아한 여자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동서는 유일하네요.”은산은 눈문을 훔쳤는데 웃다가 눈물이 맺힌 것이다.예쁜 여자가 눈물 흘리는 모습마저 아름다웠다.시아는 그런 은산을 바라보다가 만약 자신이 남자였다면 아마도 반했을 거라고 생각했다.물론 연정이 아닌 순수한 감탄의 의미에서였다.은산은 매력이 있었다.문득 귀에 맴돈 건 하민아가 했던 말이었다. 지호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는데 미아가 아니라는 것.‘그렇다면 이 여자가 바로 그 사람일까?’‘함께 알몸으로 뛰놀던 소꿉친구라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또한 지호가 자기 형을 대하는 태도를 떠올리자 시아의 머릿속에 하나의 답이 그려졌다.“형님, 혹시 지호 씨를 좋아했어요?”“좋아했죠.”은산은 숨김없이 인정했다.“좋아하지 않았다면 어릴 적부터 죽이 잘 맞을 수 있었겠어요?”그러나 이내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보탰다.“근데 동서가 생각하는 그런 ‘좋아함’은 아니고요.”‘믿을 수 있는 말일까?’“이렇게 말해볼게요. 사춘기 시절, 방황할 때 잠깐 지호를 내 남자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알게 됐죠.”은산은 차에 몸을 기대며 여유로운 자세를 취했는데 그 태도가
Read more

제175화 진 사람은 야식 쏘는 걸로

“네?”시아가 은산을 바라보자 은산도 곧장 시선을 마주했다.“동서 정말 못 느껴요? 아니면 지호가 아직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거예요?”시아의 머릿속에 잠깐 어떤 장면이 스쳐 갔다.“나랑 지호는 어릴 때부터 속속들이 다 아는 사이예요. 걔가 장염에 걸려도, 변이 묽은지 된지까지 알아요. 남은 몰라도 나는 절대 속을 안 속죠.” 은산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지호는 어려서부터 늘 이성적이었어요. 누구한테든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한 번 마음이 가면 평생 변하지 않거든요.” 이번만큼은 웃음기를 지우고, 은산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동서, 지호는 좋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 만약 내가 걔랑 저렇게 친하지 않았다면, 결코 다른 여자가 기회를 잡게 두지 않았을 거야.” 말끝에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은산은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고 아마 그게 여자가 운이 좋은 이유일지도 몰랐다.세상은 늘 웃는 여자를 편애했으니까.“혹시 이미아라고 알아요?” 시아가 묻자 은산이 멈칫했다. “누구요?”시아는 오히려 의아했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라면서 미아를 모른다고?’“지호의 스캔들 상대?” 은산은 진짜 모르는 듯했다.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다 소문일 뿐이에요.”그러고는 차 문을 열었다. “그럼 먼저 가요. 난 잠깐 마장에서 들렀다 올게요.”차에 오르기 전, 다시 고개를 돌려 시아를 보았다. “정말 안 갈 거예요?”오늘의 은산은 혼자 있고 싶지 않은 모양이자 시아가 입술을 내밀었다.“지호 씨랑 알몸으로 크던 청춘의 정분 덕분이라고 하죠. 그러니 부탁이라면 가 줄게요.”“허!” 은산이 크게 웃었다. “우리 귀한 동서님, 마음 써주셔서 고마워요.”밤의 마장은 고요했고 두 사람은 승마복으로 갈아입었다.“두 바퀴 달려볼래요?”“좋아요.” 시아도 물러서지 않았다.“진 사람은 야식 쏘는 걸로 해요!” 은산이 말을 덧붙였다.이미 나선 길, 끝까지 함께하자고 마음먹은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둠 속,
Read more

제176화 비켜요

현빈도 그 시각 고화질 영상과 사진을 받고는 잽싸게 눈치를 보며 내밀었다.“지호 형, 여기 고화질이에요.”진오가 지호보다 한발 먼저 고개를 돌렸다. 화면 속에서 무언가 스쳐 지나갔지만, 남자의 예리한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주시우네 사람들이 거기까지 간 거야?”정말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원래 시아와 은산 두 사람이 독차지하던 마장에, 낯선 남자의 모습이 추가된 것이다.어둠도 가릴 수 없는 윤기 도는 갈색 말, 그 위에 검은 기마복과 흰색 승마 바지를 갖춰 입은 남자가 허리를 낮춘 채 달리고 있었다. 두 다리가 말의 배를 힘껏 조이며 질주하는 모습은 마장 레이스라기보다 끝없는 초원을 달리는 듯했다.한창 경쟁하던 시아와 은산도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곤, 다시 다리를 움켜쥐며 더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지호와 진오가 도착했을 때, 말 세 마리가 이미 마장 위를 질주하고 있었는데, 마치 세상이 그들의 발밑에 있는 듯한 기세였다.“남자가 여자랑 겨룰 일이냐? 저 사람은 왜 두 여자랑 말 대결을 하고 있는 거야?” 진오가 투덜거렸다.그러나 지호의 시선은 밤빛을 머금은 채 시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몸에 꼭 맞는 승마복이 여자의 허리선을 도드라지게 만들고, 말을 더 잘 다루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인 자세가 매끄러운 곡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순간 지호는 처음으로 승마복을 만든 사람의 속내가 의심스러웠다.시우가 탄 말은 최고의 말이었기에 금세 시아의 뒤를 따라잡았다. 이에 지호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지호는 손에 들고 있던 외투를 진오에게 던지더니, 곧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야, 지호야, 뭐 하는 거야. 지금 달리고 있잖아. 그렇게 들어가면 위험해.” 진오가 급히 따라붙으며 붙잡으려 했지만, 그때 은산이 말을 몰아 달려왔다.그 속도가 워낙 빨라 진오는 황급히 몸을 돌려 멀리 피하며 소리쳤다.“은산아! 살살 좀!”하지만 괜히 말한 건지 은산은 채찍을 휘두르며 외쳤다.“이얏!
Read more

제177화 남의 것만 탐하는 버릇까지

“이 말은 별로야. 다음에 좋은 놈으로 한 마리 보내줄게.”지호는 시아를 태운 채 달리면서도 투덜거렸다.‘이게 무슨 아이러니한 상황이지?’지금 이 상황은 고기를 먹고선 그릇을 탓하는 꼴이었다.시아의 두근거리던 심장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화가 났다. 방금은 정말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었다.“지호 씨, 당신은 목숨이 아쉬운 게 아니겠지만, 나는 아직 살고 싶어요.”“나는 절대 당신에게 무슨 일 생기게 두지 않아.” 지호는 자신이 방금 무모했다는 건 인정하면서도, 시아의 기승 실력이라면 말이 아무리 더 날뛰어도 떨어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무엇보다, 지호는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니 그렇게 들어온 것이었다.“그러면 당신은요? 당신 본인은?” 시아가 다그치자 지호는 여자의 허리를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숨결을 목덜미에 불어넣었다.“아, 나를 걱정한 거였어?”이에 시아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눈을 흘겼다.두 바퀴를 더 달린 뒤 시아가 멈추자고 했다. 시아와 은산은 옷을 갈아입으러 갔고, 지호는 말 위에서 느긋하게 시우 쪽으로 다가갔다.“주 대표님, 요즘 한가한가 보네요.”시우가 말없이 눈만 돌리자 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자꾸 제 아내 앞에서 존재감 드러내려 하셔서요.”“하 대표님, 지금 자신이 없어서 이러시는 건가요?” 시우의 말은 많지 않았지만 늘 정곡을 찔렀다.지호의 셔츠가 바람에 펄럭였다.“대표님네는 참 대물림인가 봐요. 남의 것만 탐하는 버릇까지.”그 말에 시우가 고개를 들어 바라봤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뭐 제가 틀린 말 했나요?” 지호가 낮게 덧붙였다.시우 집안에서 예전에 터진 추문은 비록 덮였지만 세상에 드러난 적 있는 일이었다.숨 막히는 기류가 얽혔고 말들조차 기운을 느끼고는 얌전히 멈춰 섰다.“오늘은 뜻밖이었네요. 당신 아내가 여기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결국 시우가 날 선 기운을 거두며 설명했다.“게다가 여긴 원래 우리 집안 땅이거든요.”지호가 눈썹을 비틀며 피식
Read more

제178화 제발 가라고요

“하하!”은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면 동서가 생각하기에 내가 무슨 목적이 있다는 건가요?”그 즐거움과 달리 시아의 표정은 싸늘했다.“형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든, 감정은 제삼자가 끼어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맞네요, 내가 선을 넘었네요. 미안해요.” 은산이 담담히 사과했다.“오늘 밤 야식은 못 먹겠네요. 이번 건 내가 빚졌으니 다음에 갚을게요. 잘 있어요.”은산이 떠나자 시아는 멀리 두 남자를 흘깃 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시아 씨, 지호랑 같이 안 가요?” 따라붙던 유진오가 다급히 물었다.“왜 같이 가야 하는데요?” 시아의 차갑고 단호한 태도에, 진오는 무심코 코끝을 긁었다.“부부잖아요.” 진오는 그렇게 말하다가 며칠 전 엿들은 소리를 떠올리고는 얄밉게 웃었다.“이제는 말 그대로 부부가 다 됐으니까요.”시아가 눈썹을 찌푸리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뭐라고요?”진오는 서둘러 기침했다.“아, 그게 제가 지호 불러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요.”진오가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시아의 마음속에는 ‘명실상부’라는 단어가 오래 맴돌았다.그러다 보니 이미 늦었다. 시아의 차는 좌우에서 여러 대의 차량에 의해 포위되고 있었다. 지난번은 주영식이었는데 이번엔 누군지 알 수 없었다.최근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는 시점이었기에 시아는 오늘의 상황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러나 당황하지 않았고 차갑게 대응하며 동시에 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호 씨...”“저, 차 여러 대에 포위됐어요.”[나 바로 뒤에 있어. 두려워하지 마.] 지호의 목소리와 함께, 전화기 너머로 엔진을 세차게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시아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순간, 차가 갑작스레 크게 흔들리며 뒤엉켰고 곧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모든 것이 고요해졌을 때, 시아의 코끝에 스민 건 매캐한 휘발유 냄새와 불길에 탄 냄새였다.차는 옆으로 뒤집혔고, 불길까지 번졌다. 어디가 다쳤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첫 반응은 탈출이었다.
Read more

제179화 좀 잘 지켜줘요

“지호야! 몇 초만 늦었어도 네 목숨은 없었을 거야. 알아?”병실 안에서 울려 퍼진 진오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문밖까지 새어 나왔다.지호는 시아를 구하는 과정에서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깊게 베였다. 오른쪽 어깨에서 손아귀까지 이어지는 상처는 거의 두 뼘 가까운 깊이였다.정작 피해자인 시아는 팔에 가볍게 긁힌 상처만 남았다. 안영의 말대로라면, 의사가 처리하지 않아도 곧 저절로 아물 정도였다.“없어지면 없어지는 거지. 내 아내가 불길 속에 갇히는 걸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지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태연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진오가 뭔가 말하려 하자, 지호가 먼저 쏘아붙였다.“넌 참 대단하더라. 내가 불길 속에서 타죽을 뻔한 걸 두 눈으로 보면서, 그저 소리만 지르고는 도우러 오지도 않았잖아.”“아. 나, 그게...”진오는 해명하려 했지만 사실 그대로였다.그 순간 다리가 풀려 달려가지 못했다.“내가 또 네 목숨 하나를 빚졌네.” 진오는 손바닥으로 자기 뺨을 세차게 후려치자 지호는 남자를 흘끗 바라봤다.“그만해라. 넌 어릴 때부터 불만 보면 오줌 지리던 애였어. 내가 모를 줄 알아? 게다가, 나는 아내를 구하러 간 거야. 네가 끼어들면 오히려 내 존재감만 죽이지.”지호가 자신을 위로해 준다는 걸 알자, 진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지호야, 미안하다. 정말 내가...”“그만 떠들고 당장 꺼져.” 지호가 목소리를 낮추며 단호히 잘랐다.“내가 정말 널 원망했으면 이런 말도 안 했을 거야. 네가 미안하다면, 그 인간을 잡아서 끝장을 내.”진오가 코끝을 훌쩍였다.“땅을 파서라도 찾을 거야. 꼭.”“그러면 당장 움직여. 너 떠드는 소리에 머리까지 아프다.”그러고는 지호는 눈을 감아버렸다. 진오는 몇 초간 지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두 발짝 걸어 나가자, 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내 아내가 보거든, 그러니 입조심해.”경고였다.그런데 문을 나서자마자, 진오는 문가에 서 있던 시아와 마주쳤다.
Read more

제180화 이거 커플 흉터인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픈지 묻는 게 맞을까? 아니면 다른 말을 해야 할까?’시아는 몰랐다. 지호와 함께 지낸 지 오래됐지만,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낯설고, 불편하고, 어찌할 바 몰라서 지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가슴이 답답하고, 발걸음은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어디 다쳤어?”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순간, 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호의 상처 앞에서, 자신의 그 사소한 긁힘을 입에 올리는 게 부끄러웠다.“난 괜찮아요.”“이리 와. 내가 보게.” 지호가 손을 들어 올렸는데 올린 쪽은 하필 상처 난 팔이었다. 순간 지호의 잘생긴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시아가 놀라 급히 남자의 팔을 눌렀다.“움직이지 마요.”말이 끝나자마자, 시아의 손은 그대로 붙잡혔다.“내가 안 움직이면, 당신은 내 말 안 듣잖아. 예전엔 뭐든 대꾸하며 버티더니, 이젠 내 말은 죄다 흘려듣는 거야?”마치 삐친 남자아이 같은 억울함이 묻어 있었다.“정말 괜찮다니까요?” 시아는 고개를 들어 이마를 내밀었다.“봐요, 여긴 그냥 살짝 긁힌 정도예요.”지호는 눈을 좁혀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내 이마의 흉터랑 반대네. 난 왼쪽, 당신은 오른쪽. 이거 커플 흉터인가?”이 와중에 농담하는 지호에 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괜히 지호를 안심시키려 솔직히 말했다.“이건 흉터도 안 남을 거예요.”“흉터가 남아도 괜찮아. 난 네가 흉이 있든 없든 상관 안 해.” 지호의 시선이 시아의 몸으로 흘렀다.“다른 데는?”“없어요.” 시아는 지호가 믿지 않을까 싶어 소매를 걷어 올렸다.“봐요.”하얗고 여린 팔은 조금만 상처가 나도 남의 가슴을 조여오게 할 만큼 연약해 보였다.“예쁘네.” 지호가 내뱉은 세 글자는 전혀 답과 맞지 않았는데 시아는 그가 일부러 엉뚱한 말을 하는 걸 알았다.자신이 자책하지 않게 농담으로 돌려버리는 것이기에 시아도 굳이 ‘아프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물어봤자 당연한
Read more
PREV
1
...
1617181920
...
29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