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서로 다른 길에 오른 너와 나: Chapter 181 - Chapter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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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1화 운이 조금 좋은 편인가 봐

시아가 강국의 메시지를 받은 건 한밤중이었다.차 사고로 목숨은 건졌지만, 최근 계속된 사건들과 충격이 시아의 잠을 앗아갔다.[시간 될 때 얼굴 좀 봐요.]강국이 보낸 건 단 한 마디였고 시아는 곧장 답했다.[언제든지. 어디서?][???][나 병원에 있어.][지금 새벽 두 시예요.]강국의 말이 틀리진 않았는데 지금은 새벽 두 시였다.하지만 온 세상이 고요해지는 시각, 설령 누군가가 미행하거나 엿본다 해도 이 시간만큼은 경계심이 느슨해지는 시각이었다.[기다릴게.][알았어요.]휴대폰을 내려놓은 시아는 곁눈질로 지호를 바라봤다. 지호는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고통 탓에 찡그린 이마는 펴지지 않았다.사실 시아도 아팠자만 여자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슴 속에 있었다.반 시간 뒤, 시아는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강국은 차 안에 앉아 있었는데 모자를 눌러쓴 그는 예전의 호기로운 모습은 사라지고, 어딘가 지쳐 보였다.그날 이후로 연락을 끊고 지냈는데, 강국의 몰골은 사는 게 순탄치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요즘도 문제 있어?” 시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강국은 웃어 보였다.“아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누나랑도, 지난 일과도 무관해. 내가 스스로 감당하는 일이거든.”‘정말 그럴까?’“누나, 난 한 번 얻어맞았다고 주저앉을 사람 아니야. 그건 누나가 잘 알잖아.” 강국의 입가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스쳤다.그래, 강국이 여기까지 버틴 것도 그냥 흘려온 세월이 아니었다.“그래도 몸은 지켜야 해.”“우릴 건드리는 놈을 쓰러뜨리는 게 최고의 보호야.” 강국은 시아를 바라봤다.“누나도 목숨이 질긴 편이네.”그 사고를 모를 리 없었기에 시아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이번엔 운이 좋았을 뿐이야. 하지만 다음번까지 운에 기대고 싶진 않아.” 시아의 눈빛이 진지해졌다.“오늘 널 부른 이유, 네가 짐작하겠지. 억지로는 안 시킬 거지만 그래도 부탁하고 싶어.”강국이 시아를 똑바로 보았다.“누나 생각엔 내가 겁먹고 물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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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화 고작 42초짜리

“제발 녹음하지 마, 녹음 안하면 안 될까?”“원하는 건 다 할게. 그러니까 제발 녹음만은 하지 마. 부탁이...”시아는 아직 화면을 보지도 않았는데, 7년 전부터 멀어진 익숙한 목소리가 먼저 귀에 들어왔다.이미아였다. 울먹이며 애원하는, 지독히도 낮아진 목소리였다.시아는 순간 얼어붙었고 온몸이 빙하에 갇힌 듯 숨조차 멎었다. 몇 초가 지나서야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화면은 칠흑처럼 새까맸다.휴대폰이 고장 난 건가 싶어 다시 흔들어 봤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아니야. 화면이 검은 게 아니라, 이 영상 자체가 화면 없이 소리만 담겨 있었던 것이야.’미아의 흐느끼는 울음소리, 거기에 더해 거친 남자의 숨소리와 차마 입 밖으로 설명할 수 없는 소리까지 함께 섞여 있었다.시아의 온몸은 얼음처럼 차가워졌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들어버렸다.고작 42초짜리 짧은소리였지만 시아는 피가 멎어버린 듯 숨이 턱 막혔다.‘음성 속의 남자는 누구였을까? 왜 미아를 강제로...’‘그리고 그때 미아와 늘 붙어 다녔는데, 어쩌다 눈치채지 못했을까?’‘어째서 그 고통을 알아채지 못했을까?’수많은 질문이 한꺼번에 머리를 치자 정신이 아득해졌다.밖에서 지호가 문을 돌리는 소리가 나기 전까지, 시아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당신 괜찮아?”대답이 없자 지호의 목소리는 불안과 초조로 떨렸다.시아는 흔들리는 문을 바라보며, 손에 쥔 휴대폰을 점점 더 세게 움켜쥐었다.강국을 혼자 처리하지 말고 지호에게 전하라는 말이 순간 떠올랐다.‘하지만 이걸 지호 씨에게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지호는 지금 자신에게 진심을 다하고 있었으나 미아는 남자의 과거, 청춘을 걸고 쫓던 여자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게다가 지금 부상 중인데.’시아는 눈을 감고, 문이 부서지기 전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문을 열었다.지호의 눈이 시아의 창백한 얼굴에 닿자, 동공이 움찔하며 흔들렸다.“무슨 일 있어?”시아는 목이 거칠게 조여 온 듯,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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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화 정말 그게 아니라고?

‘하지호를 속일 수 있다고? 그럴 리 없잖아.’시아는 휴대폰을 쥔 손이 떨렸다.“지호 씨, 지금은 묻지 말아 줄래요?”지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에 녹음을 들려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미아의 원한을 갚으려면 결국 지호의 힘이 필요했다.다만 지금 부상 중이라 이때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웠다.청춘을 바쳐 지켜낸 사람, 심지어 복수를 위해 결혼까지 강행한 존재였다. 그런 의미가 미아에게 있었다는 걸 시아는 잘 알았다.지금은 자신에게 마음을 주었다 해도, 미아는 지호에게 있어 대체 불가일 거라 생각했다.“그 일이 나랑 관련 있어?” 지호가 끝내 묻자 시아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에 지호가 시아의 턱을 들어 올렸고 손가락 끝이 여자의 턱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요즘 계속 사건이 이어지는 건, 그만큼 상대가 조급하다는 뜻이야. 빨리 끝내고 싶어 한다는 거지. 이번에 무사했다고 해서 다음번도 그럴 거라 생각하지 마. 알겠어?”미아의 일을 파헤치려는 사람은 모두 위험에 빠졌다. 그만큼 상대는 치부가 드러나는 걸 두려워했기에 보통 신분의 사람이 아닐 터였다.그제야 시아는 강국이 왜 자신에게 하지호를 의지하라 했는지를 깨달았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시아가 말했다.“먼저,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물어봐.” 지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미아는, 당신 마음속에서 어떤 사람이었어요?”시아가 묻는 건 감정이 아니라 그저 미아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묻는 것이었다.시아의 머릿속은 뒤엉켜 있었다. ‘왜 미아는 그토록 침묵했을까?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겁이 났던 걸까? 아니면 본래 그런 성격이었던 걸까?’‘만약 나라면 그렇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그리고 시아는 이제야 깨달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누구나 남에게 밝히지 못할 비밀이 있다는걸.“당신이 미아를 좋아했던 감정을 제외하고, 그냥 사람으로서 말해줘요.” 시아가 다시 다짐하듯 말했다.“몰라.” 지호의 대답은 단 두 글자였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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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4화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야

서현아가 퇴원했지만 몸이 회복된 건 아니었다.“근육과 뼈가 회복되려면 백 일이 걸려. 차라리 집에서 요양하는 게 낫지, 병원은 답답해.”서현아가 직접 한 말이었다.이에 시아는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저 차를 준비해 서현아를 집까지 보내고, 간병인도 함께 붙여주었다.“고마워.” 서현아가 짧게 인사를 건네자 시아는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코치님, 저도 차마 인사 못 드릴 뻔했어요.”그리고 자신이 당한 교통사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이에 서현아는 매우 놀라며, 시아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단번에 이해했다.“네가 알고 싶은 건, 그 사람이 누구냐는 거지?”시아는 이미 강국에게 물어본 적 있었다. 카드 안의 파일은 원래 영상이었지만, 누군가 고의로 화면을 지워버렸다. 그랬기에 강국이 간신히 복구한 건 소리뿐이었다. 결국 남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서현아일 터였다.시아는 강국이 준 음성을 들려주자 서현아의 얼굴빛이 순간 잿빛으로 굳더니, 이를 악물고 욕설이 튀어나왔다.“개자식...”시아가 낮게 말했다.“그 사람 지금은 더 광적이에요. 진실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 사람을 아는 건 지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에요.”서현아는 말이 없었다. 잠시 뒤, 떨리는 손가락 끝을 본 강시아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코치님...”“서랍에 담배 좀 줘.” 서현아가 힘없이 가리켰다.시아는 이제 웬만한 술과 담배 정도는 놀랍지도 않았기에 담배를 꺼내 불까지 붙여 건넸다.서현아는 연달아 세 모금이나 빨아들이지 긴장이 서서히 풀린 듯 어깨가 내려앉았다.“내가 그 사람 이름을 말하면 뭐가 달라지겠니? 우린 입으로만 하는 말이지, 증거는 없어. 미아는 이제 입을 열 수도 없잖아.”시아의 눈빛이 단단히 굳어졌다.“정체만 알면 증거는 찾을 수 있어요. 게다가 그 사람이 저지른 죄는 미아 하나만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서현아가 눈을 들어 시아를 똑바로 바라봤다.“넌 정말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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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화 깨어나고 있어요

시아는 미아의 병상 앞에 꼬박 한 시간을 앉아 있었다.하지만 오늘 시아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동안 미아를 깨우기 위해 자극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맸다. 이제야 그것을 손에 넣었지만, 막상 말은 나오지 않았다.노수한이 말했듯, 미아가 깨어나지 않는 건 의식적인 저항과도 관련이 있다는 말을 시아는 이제야 알았다.미아를 짓누르는 건 그 치욕의 기억들이었고, 그래서 세상과 단절된 긴 잠 속을 택한 것이다.하지만 미아가 계속 이렇게 잠들어 있으면, 그 짐승 같은 인간은 영원히 죗값을 치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더 당당해지고 더 교활해질 것이다.서현아가 말해준 이름이 떠오르자, 시아의 온몸이 얼어붙었다.남자가 아니라고는 차마 믿을 수 없었지만, 진실을 알게 된 뒤 곱씹어 보니 흔적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그 시절, 어린 마음은 그 가식적인 껍데기에 속아 넘어갔을 뿐이었다. “그 사람에게 속아 함정에 빠진 거니?”시아는 간신히 입술을 떼며 물었다.귀에 아직도 맴도는 이미아의 애원, 울부짖는 목소리.그건 원치 않은 강제로 당한 일이었다.이에 시아는 미아의 손을 꼭 잡았다.“다 알았어. 어쩌다 그렇게 어리석게 당하고도, 왜 말 한마디 못 했니?”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아니, 네 잘못이 아니야. 넌 무서웠던 거야. 잘못은 전부 그 짐승한테 있지.”“미아야 미안해. 내가 왜 몰랐을까? 네가 그렇게 아픈데,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내가 조금만 더 살폈다면...”시아의 눈에는 깊은 자책이 어려왔다.사실 그 짐승 같은 자는 미아뿐만 아니라, 시아에게도 종종 상식을 넘는 행동을 보였었다.하지만 운동 종목 특성상 옷차림이 가볍고, 신체 접촉이 잦았으니 그저 우연이라 여겨 넘겼었다.지금 돌이켜보니 등골이 서늘했다.‘나 역시 그 사람의 목표였을지도 몰라.’ ‘다만 미아가 앞을 막아섰기에 화살이 나에게 닿지 않은 건 아닐까?’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그 자식 지금은 세상 잘나가는 체하고 살아. 게다가 그때 일을 덮으려는 게 두려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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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화 경이롭네

지호를 본 순간, 진오의 머릿속에 떠오른 4글자가 떠올랐다. ‘경이롭네.’똑같이 남자지만, 자신이 옆에 서는 순간 진오는 마치 마트에서 팔리는 유통기한 임박 세일품이 되어버렸다.팔은 다쳤는데도 지호의 아우라는 전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입어야 할 외투를 걸치지 못하고 어깨에 툭 얹어둔 모습은, 영화의 조직 보스를 연상케 했다.한마디로 요약하면, 절대적이었다.절대적으로 잘생겼고, 절대적으로 매혹적이며, 절대적으로 압도적이었다.“왜 병원에서 얌전히 있질 않고, 여기까지 나온 거야?”경이로움은 경이로움이고 진오는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지호가 병원에 가만히 있는 건 시아의 부탁 때문이었고, 아내가 보지 않는 순간에는 마음대로 움직였다.“뭐야? 그렇게도 내가 눈앞에 있는 게 싫어?” 지호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긴 다리를 여유롭게 꼬아 올리고는 제멋대로이면서도 당당한, 불량스러운 멋을 풍겼다.“아니, 난 오히려 네 얼굴을 하루 24시간 보고 싶을 지경이지.” 진오도 맞은편에 앉았다.“상처 입은 채로 움직였단 건 분명 큰일이지? 말해 봐.”속을 들여다보진 못해도, 이제는 그 정도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마왕 쪽, 아직도 움직임 없어?” 지호가 물었다.“없어. 그 개자식, 당한 뒤에 우리 쪽으로 기어올 줄 알았는데, 아직도 꼬리 내리고 그 사람 밑에 붙어 있네. 개노릇 하겠다고.” 진오가 이를 갈았다.“진작에 얼굴에 붙은 가면을 벗겨줘야 했어.”그러나 지호는 막지 않았다. 어떤 인간은 작은 호의 하나에도 자신이 진짜로 그만한 가치를 지녔다고 착각한다. “네 아버지는 요즘 뭐에 바쁘셔?” 지호가 불쑥 화제를 틀자 진오는 머리카락까지 곤두서는 기분이었다.“뜬금없이 우리 아버진 왜 찾는데?”“심심해서. 장기 두고 차나 한잔하면서 얘기 좀 하려고. 아, 그리고 네가 불만 땜에 다리 풀려버린 사연, 그 뿌리도 물어봐야지. 이번엔 내가 불길에 휩쓸려 죽을 뻔했는데도 넌 못 들어왔잖아. 혹시 나중에 네가 당할 땐 어떡하려고.”진오는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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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화 크루즈 파티

시아는 미아가 곧 눈을 뜰 줄 알았으나, 그들의 기대가 너무 낙관적이었던 듯했다.지호의 팔 부상은 다 나았지만 미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다만 심장 박동과 다른 수치는 모두 호전되고 있었다.“미아 씨는 아직 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거부하고 있어요. 시간을 더 줘야 해요.”노수한이 시아를 달랬다.억지로는 누구도 깨울 수 없었고 미아 역시 그럴 터였다. 이에 시아도 조급함을 억눌렀다.“미아야, 네가 두려워서 마주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이제 혼자가 아니야. 내가 곁에 있을 거야.”시아는 조용히 속삭였고 분명 들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그렇게 격려했음에도 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아는 억지로 매달리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다.게다가 시아가 기대하는 건 미아의 각성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범상치 않았고 미아의 일 하나만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었다. 완전히 무너뜨리려면 더 치명적인 증거가 필요했다.그 일은 지호가 추적하고 있었고, 시아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어쩐 일이죠? 동서의‘잉꼬부부’는 안 챙기시고?”은산을 만나자마자 여자는 농담을 던졌다.지호가 시아를 위해 또다시 부상까지 입은 덕분에, 온 집안의 칭찬이 쏟아졌다.안영은 공개적으로 지호에게 ‘잉꼬부부상’을 줘야 한다고까지 했다.이에 시아는 가볍게 받아치지 않고 곧장 말했다.“오늘 밤 크루즈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가고 싶어요. 형님, 괜찮아요?”그 크루즈 파티는 아무나 갈 수 없는 자리였지만, 은산이 재벌가 장녀라는 신분을 가진 이상 충분히 입장할 수 있었다.“동서가 가겠다고요? 왜 본인 남편은 안 데리고?”은산이 의아해 묻자 시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 침묵만으로도 여자는 바로 이해했다.“알았어요. 오늘 내가 널 제대로 데리고 놀아줄게요.”다만 은산은 영리했다.“하지만 경계해 둬요. 오늘 오는 건 다 거물들이라 괜히 문제 만들면 내가 동서를 못 지켜요. 그러면 지호가 날 가만두지 않을걸요.”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문제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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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화 내 말만 믿어요

“흥, 재밌네요. 우리가 범을 잡으러 왔다가 도리어 사냥감이 된 꼴이죠.”은산은 시아의 말을 들은 뒤 놀라지도 않고,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세상 물정을 많이 겪은 여자는 달랐고 사소한 일에 흥분하지 않았다.시아 역시 담담했다.“잠시 뒤에 조심해요.”“나더러 조심하라고요? 동서는 뭐, 방탄조끼라도 두른 거예요?”은산의 눈길이 시아의 굴곡진 몸 선을 스쳤다. 말끝은 독하되 어쩐지 오래 묵은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지호와 함께 자란 탓인지 입버릇마저 남자와 닮아 있었다.“내 옆에 방패처럼 단단한 형님이 있잖아요.”시아가 능청스레 말을 얹자, 은산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솔직히 말해요. 동서는 뭘 하려는 거예요?”은산은 머리가 비상했다. 그랬기에 시아는 은산과 얘기할 때 묘하게 마음이 통하는 듯했고,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듯한 불안감도 없었다.“이 배 안에 형님이 아는 사람이 있죠?”시아가 낮게 물었다. 지금은 두렵지 않았지만, 위험을 아는 이상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그러자 은산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없어요. 설령 있다 해도 돈 받고 일하는 졸개들일 뿐이죠. 감히 누구를 건드리진 못하니까요.”이에 은산은 시선을 돌려 시아를 보았다.“겁난 거예요?”“겁났으면 오지도 않았죠.”시아는 홀 안을 두리번거리며 생각에 잠겼고, 은채가 불쑥 말했다.“그러면 동서 남편을 부르는 게 낫지 않아요?”“아니요. 필요 없어요.”그 제안을 시아가 단호하게 잘라내는 모습에 은채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난 이해가 안 돼요. 남편이란 게 원래 이런 데서 쓰라고 있는 거 아닌가요? 침대 위에서도 안 쓰고, 위기에도 안 쓰고,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옆에 둬요? 구명줄 하나만 보고 있는 거예요?”시아의 눈빛이 차갑게 번졌다. 은산의 잔에 담긴 게 술인지 독약인지 모를 만큼 입담이 매서웠는데 마치 지호의 말투가 그대로인 듯했다.“남자한테 기대지 않고 살면 안 돼요?”시아도 강하게 받아쳤다.은산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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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화 활판 속 비너스

은산이 시아의 손을 잡고 춤추며 웃음을 터뜨렸다.“꽤 잘 추네요. 근데 어디서 모르는 척을 해요.”시아도 박자를 맞추며 몸을 흔들었다.“형님의 리드가 좋아서 그렇죠.”은산은 화려한 라틴 댄스를 이끌었고, 동작 하나하나가 과장되면서도 요염했다. 등에 깊게 파인 드레스가 휘날릴 때마다 금방이라도 어깨끈이 흘러내릴 듯 아슬아슬했다.남자들의 시선이 빠져드는 것은 물론, 여인들조차 감탄을 내뱉었다.“저 정은산은 너무 과감해. 저런 여자를 감당할 남자가 있긴 할까?”“그러니까 하지호 형이 그냥 데려다 놓은 거지. 둘이 부부인데도 침대도 같이 안 쓴다는 소문이야.”“아마 형은 얼굴만 봐도 질렸을 거야. 근데 동생은 좀 다른 맛이 있잖아.”...시아와 은산이 춤으로 분위기를 달구자, 현장은 점점 뜨거워졌고 남자 모델들의 무대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시선이 쏠렸다이윽고 2층 대기실.거울 앞에 선 진오가 상체 근육을 드러내고는 자신을 비추며 흡족해했다.“지호야, 이 몸매면 억 단위 보험 하나 들어야 하지 않겠냐?”지호는 느릿하게 비웃었다.“보험은 무슨 보험.”진오는 거울 속 지호를 흘겨보며 입꼬리를 올렸다.“혹시 다칠지 모르잖아.”진오는 직접적으로 상대를 해치지는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결코 물러설 성격은 아니었다.이에 지호는 손끝으로 은빛 여우 가면을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좋지. 보장 금액은 더 높게 해. 그러면 네가 정말로 죽어도 너희 집안이 몇 세대는 먹고살겠네.”“흥.” 진오는 지호의 조롱을 무시했다. 어차피 지호 눈에는 자신 말고는 누구도 눈에 차지 않았다.“이 가면은 나랑 더 어울리는데.”진오가 손을 뻗었지만 지호는 가면을 빼앗기지 않았다.“너는 쓸 일도 없잖아.”“아니, 잠깐...”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빛 여우 가면은 지호의 얼굴 위에 덮였고 진오가 눈을 크게 떴다.“설마 너도 무대에 오를 생각이야?”지호가 낮게 웃으며 대꾸했다.“왜, 내가 하면 안 돼?”그리고 무대 옆에 걸린 남자 모델 의상을 턱짓으로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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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화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저 사람 우리 둘 중에 누굴 고를까요? 아니면 둘 다 고를까요?”은산이 시아에게 물었다.“형님이요.”시아는 단호하게 대답하고는 바로 몸을 돌려버렸고 은산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물었다.“어디 가요?”“화장실이요.”시아는 현실적이면서도 딱 잘라 대답했다.그러나 은산이 곧이곧대로 믿을 리 없었다.“흥, 동서 눈에도 안 들어왔어요? 아니면 더럽다고 생각해요?”“둘 다죠.”시아는 멀어져 가며 짧게 잘라 말했다.무대 위 은빛 여우 가면 아래에서 시선이 시아의 등을 따라갔다.그 눈매가 얇게 휘며 웃음기를 띄었고,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사회자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건넸다.“축하드려요. 방금 몸을 돌린 흰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선택되었네요.”사회자의 말에 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시아를 향했지만, 당사자는 아예 무시한 채 복도를 꺾어 빠져나갔다. 그러나 앞에서 다가오던 사람을 보지 못해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죄송...”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시아의 호흡이 막혔는데, 코와 입이 순식간에 막혀버린 것이다.시아는 곧장 숨을 멈추고 이상한 기체를 들이마시지 않으려 몸을 버텼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다가, 곧장 무릎을 들어 차올렸다.공간을 울린 비명이 이어졌다.“시아 씨, 저희 집안 대를 끊으시려는 거예요?”은빛 여우 가면을 쓴 지호가 나타났을 때, 시아는 이미 난간에 서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그 눈매에 스친 차가운 기운에 지호의 목젖이 두어 번은 크게 움직였다.“화났어?”지호가 다가오며 낮게 묻자 시아는 말이 없었다. 이에 지호는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서더니,“오늘은 그 사람 못 만나.”조금 전 진오가 보여준 영상에 따르면, 분명 나타났으나 배에는 오르지 않고 곧바로 떠나버린 상태였다.“당신이 안 나타났으면 이미 봤을 거예요.”시아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분노가 선명히 담겨 있었다.남자는 모델로 위장했지만, 시아는 단번에 알아봤다. 더구나 경계해야 할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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