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481 - Chapter 490

517 Chapters

제481화

진하빈은 편지를 다 읽자마자 바로 촛대 위로 가져갔다. 불길이 천천히 종이를 집어삼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호위가 몰래 쥐여 준 작은 병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손안에서 굴리듯 바라보다가 조용히 품에 넣고 침전으로 돌아갔다.요 며칠 태후의 기면 증세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장 가가 죄를 입은 일로 마음고생이 깊어져 기력이 쇠한 것이라 여겼지만, 어느덧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도 태후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에 빠져 있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질 뿐이었다.태의가 다녀가도 뚜렷한 병증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저 궁녀들에게 태후를 자주 뜰로 모시고 나가 바람을 쐬게 하라는 말만 남겼지만, 태후는 몇 걸음 걷지도 못한 채 금세 피로에 지쳐 버리곤 했다.진하빈은 오늘에서야 알았다. 태후는 병든 것이 아니라 독에 중독된 것이었다. 당장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지만, 사람의 정신과 기력을 조금씩 갉아먹고 시간이 흐를수록 몸을 쇠약하게 만들어 결국 돌이킬 수 없게 무너뜨리는 독이었다.그것이 이도현의 수단이라는 생각에, 진하빈은 온몸이 서늘해졌다. 태후는 한때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신수빈과 얽힌 일 속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버려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남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박정하고 변덕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신 씨는 자신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웠으며, 남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도 능숙했다. 게다가 수완까지 뛰어났다. 반면 자신은 측비라는 신분을 얻었지만, 결국 깊은 궁 안에 갇혀 점점 버려져 가는 태후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앞날은 캄캄하기만 했다.진하빈은 그 사람이 해 두었던 안배를 떠올리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제는 그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살아날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그때 황 상궁이 다시 약을 들고 와 태후에게 올리려 했다. 진하빈은 곧장 다가가 약그릇을 빼앗아 들었다.“황 상궁, 이 약은 더 이상 태후 마마께 드리면 안 되네.”황 상궁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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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2화

그녀는 궁 안에 갇혀 지낸 지 오래되어, 바깥 사정은 거의 알지 못했다.신수빈이 무사히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는 왕부에 들어가 섭정왕의 장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아마 머지않아 신수빈 역시 왕부로 시집가게 될 터였다.장안성을 지켜 낸 그 전투 이후, 누구도 섭정왕의 마음속에서 신수빈의 자리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신수빈이 왕부에 들어가고 나면, 이름만 남은 측비에 불과한 자신을, 그것도 친여동생인 자신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그 사람이 말했듯,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느니 차라리 먼저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신수빈은 호국사로 향하기 전, 먼저 입궁해 봉작을 받아야 했다. 하늘의 이름으로 나라의 복을 비는 의식이었다.금관을 쓰고 현조복을 입은 채 단봉문을 나서자, 조정 대신들이 예를 올리며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원래도 눈부실 만큼 화려한 미인이었지만, 더욱 기품과 위엄까지 더해져 온몸에 봉황 같은 위의가 감돌았다. 찬란한 광채가 사람의 시선을 압도해, 감히 오래 바라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이도현은 긴 계단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그녀가 한 걸음씩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이번 길을 다녀오고 나면, 그녀는 백성과 대신들의 마음속에 절대적인 자리를 얻게 될 터였다. 천자를 대신해 나라의 복을 비는 존재가 되는 이상, 더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마침내 자신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신분이 주어질 것이고, 다시는 그녀가 재가한 여자라는 이유로 입에 올리는 자도 없게 될 터였다.이도현은 저도 모르게 머지않은 미래를 그려 보았다.봉관을 쓰고 혼례복을 입은 신수빈이 천천히 자신에게 걸어오는 모습.그와 나란히 서서 천하의 풍운이 이는 광경을 바라보고, 다시 강산의 아름다움을 함께 바라보는 모습.그녀는 그런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지고한 영광 속에서 모든 이의 우러름을 받으며, 더는 누구에게도 억지로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는 삶을.그렇다면 자신은 그녀에게 가장 높은 영광을 안겨 줄 것이었다.그리고 기꺼이 그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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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3화

사람들이 자세히 알아보니, 그 서원은 신 가에서 세운 곳이고, 청운서원의 현판마저 섭정왕이 직접 써 내린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래는 권세를 앞세워 한 번 눌러 보려던 세가들조차 그때부터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신 가는 본래 상인 집안이었다. 처음에는 섭정왕을 도와 남방의 혼란을 평정했고, 이후 셋째 도련님 신도연은 강회 일대의 하도와 관료 사회를 정비했다. 넷째 도련님 신태안은 포위전에서 누구보다 용맹하게 활약하며 돌파전 속에서 눈부신 공을 세웠다.게다가 신 가의 여식인 신수빈은 성이 포위되었을 당시, 여자의 몸으로도 생사를 돌보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섰고, 그 공으로 결국 호국부인에 봉해졌다.그러니 지금 조정에서는 감히 누구도 대놓고 신 가를 건드리지 못했다.물론 마음속으로는, 이제 막 생겨난 서원 하나가 얼마나 대단한 기세를 이루겠느냐며 비웃고 있었다. 결국 신 가가 명성을 얻기 위해 꾸민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겉으로 억누를 수 없다면 뒤에서 은근히 짓누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게다가 신수빈은 애초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기도 했다.서원을 세운다는 건 곧 세가 문벌과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도현의 이름을 내세운 것이었다.다만 그녀는 이도현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청운서원이 하루빨리 자리를 잡아, 세가 문벌의 손에 싹도 틔우기 전에 짓밟히는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올해 춘시는 예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삼 년에 한 번 열리는 춘시이자, 남북 통일 이후 처음으로 열린 특별 은과였다. 그러니 주고관을 정하는 일 역시 어느 때보다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 일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매번 주고관과 해당 기수 급제자들 사이에는 관직 생활 내내 이어질 사제의 연이 생기고, 함께 급제한 유생들끼리는 동년의 인연이 맺어진다는 사실을.결국 주고관을 정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에게 조정 안의 인맥을 쌓아 주는 일이기도 했다.각 세력이 서로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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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4화

이도현이 예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일단 맡아 보거라. 본왕이 몇 사람을 붙여 너를 보좌하게 하면 된다. 지금 조정에서는 이 주고관 자리를 두고 서로 차지하려고 머리가 깨질 지경이니 말이다.”그러나 예왕은 여전히 침묵한 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는 듯했다.“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이도현이 묻자, 예왕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왕숙, 제가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감히 할 수가 없어 그렇습니다. 저는 형님들이나 아우들처럼 처가나 외가의 뒷받침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의지할 곳이 없다는 걸 알고 살아왔기에, 늘 말과 행동을 조심해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고관이 된다면, 앞으로 저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겁니다. 자칫 말 한마디라도 왜곡된다면, 저는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 없게 되겠지요.”그는 다시 깊이 예를 올렸다.“제가 어리석긴 하나, 나무가 숲에서 홀로 높이 자라면 반드시 먼저 바람을 맞는다는 도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청운서원이 세가들에게 온갖 말에 오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이익을 건드리게 되면, 반드시 표적이 될 것입니다.”이도현은 눈앞의 신중한 예왕을 바라보며,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아차렸다.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훗날 조정 신료들의 의심과 공격을 받게 되더라도, 이도현만큼은 자신을 믿어 달라는 것.이도현은 손을 뻗어 예왕을 일으켜 세우며 담담히 말했다.“진심으로 사직을 위한다면, 네가 기댈 곳은 바로 이 사직이다. 남들이 무슨 상관이냐.”예왕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이도현은 쉽게 약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켰다. 그가 이렇게 말해 준 이상, 자신이 한결같이 백성과 조정을 위해 일하는 한, 그는 절대 남의 참언에 휘둘리지 않을 터였다.“그렇다면 왕숙께서 맡겨 주신 중책에 감사드리겠습니다.”이도현은 문득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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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5화

이번이 그 꼬마 녀석의 첫 마차 나들이는 아니었다.전에도 이도현이 자신의 큰 외투 안에 꽁꽁 싸 안고 다녔지만, 이제는 날이 제법 풀린 터라 두툼한 작은 이불에 감싸인 채, 신수빈이 손수 만들어 준 호랑이 머리 모양 모자를 썼다. 게다가 유모가 찬바람이 들지 않도록 솜수건으로 아이의 입과 코까지 단단히 가려 두었다.이도현은 아이를 안은 채 마차 휘장을 걷어 올렸다. 아직 해가 좋을 때 장안 거리 풍경을 보여 주려는 생각이었다.이 꼬마 녀석은 하루 종일 후원 안에서만 지냈다. 눈을 뜨면 보이는 사람이라곤 유모와 청하, 그리고 어멈들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밤마다 유독 이도현 곁에서 자는 걸 좋아했다.아이는 지금 장안 거리의 북적이는 인파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상인들의 고함 소리를 들어도 까르르 웃었고, 사람들이 서로 밀치며 지나가는 모습을 봐도 웃었다.그러다 길가의 아이 몇 명이 엿과자를 나눠 먹는 모습을 보자, 조그만 혀를 살짝 내밀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본 이도현은 몹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신수빈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마차를 세워라. 엿과자 하나 사 오너라.”장풍은 금세 엿과자를 사 왔다. 왕야가 창문 너머로 그것을 받아 드는 모습을 보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쯤 되면 친자식이랑 다를 게 대체 뭐란 말인가.마차 안에 앉아 있던 유모는 왕야가 엿과자를 아이 입가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왕야, 도련님께서는 아직 이런 걸 드시면 안 됩니다.”하지만 이도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굳이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전부 먹이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 번 맛만 보게 하려는 것뿐인데 못 할 게 뭐 있단 말인가.이도현은 작은 녀석이 입을 벌리고 엿과자 겉에 입혀진 엿을 열심히 빨아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을 먹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채 계속 쪽쪽 빨아댔다.한참 그렇게 빨다 보니 단맛이 옅어졌는지, 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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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6화

“제 일까지 그쪽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비단옷 차림의 공자는 이미 윤수혁의 이런 태도에 익숙한 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지금은 이도현도 저 꼬마가 자기 자식인 줄 모르니까 저렇게 보물처럼 끼고 도는 거지. 그런데 만약 그 꼬마가 죽은 뒤에야 자기 친자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쯧쯧, 그때 표정이 얼마나 볼만하겠어.”윤수혁은 순간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비단옷 공자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치 서리가 내려앉은 듯 싸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그놈은 내 부족 사람들과 부모, 형제들을 모조리 죽였다. 지금 당장은 내가 그를 죽일 수 없으니, 우선 그 새끼라도 죽여 분풀이 좀 해야겠어. 나중에 그 아이가 자기 친자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속이 다 시원하군.”그 말에 윤수혁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또 제멋대로 굴면, 당장 당신을 장안 밖으로 내쫓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겁니다.”하지만 비단옷 공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비웃듯 말했다.“그 꼬마만 없어지면, 그것도 이도현 손안에서 죽은 거라면, 네 그 사랑스러운 제수씨께서도 아마 그를 뼛속까지 증오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 아이가 멀쩡히 살아 있는 이상, 넌 신수빈이 왕부로 시집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어. 이번 생에는 너와 아무 인연도 없게 되는 거지.”윤수혁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그를 노려보았다.“평소엔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두고 넘어갔지만, 이번 일만큼은 감히 멋대로 굴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선을 넘으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비단옷 공자는 코웃음을 치며 잔 속 술을 단숨에 비워 냈다.“어디 끝까지 그렇게 태연한 척해 보시지.”*이도현이 호국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저문 뒤였다.호국사는 황실 사찰인 데다, 모두 속세와 거리를 둔 승려들이 머무는 곳이었다.그때 눈치 빠른 어린 사미승 하나가 직접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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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7화

만약 신수빈 곁에 서 있는 또 다른 부인을 보지 못했다면, 그는 아마 그 자리에서 곧장 그녀를 끌어안아 버렸을 것이다.상대가 신수빈의 큰 형수인 정 씨라는 걸 확인하고서야, 이도현은 가까스로 치밀어 오르던 마음을 눌렀다.“신첩, 왕야를 뵙습니다.”정 씨는 눈가가 붉어진 채 이도현에게 예를 올렸다.“예는 됐다.”이도현은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신수빈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째서 정 씨가 이곳에 있는지 묻는 눈빛이었다.하지만 그 눈짓은 눈먼 사람에게 던진 추파나 다름없었다. 신수빈은 이도현 품에 안긴 아이를 보자마자 곧장 아이부터 받아 안았다.“아이고, 우리 아가. 또 이 어미가 보고 싶었느냐?”물기 어린 목소리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했다.이도현은 속으로 조용히 눈을 굴렸다.신수빈은 아이가 두툼하게 싸여 있는 걸 보고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문 앞에 아직 한 사람이 더 서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황급히 돌아보며 말했다.“왕야도 어서 들어오세요.”그래도 아직 본왕을 완전히 잊지는 않은 모양이군.정 씨도 그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섭정왕이 날이 어두워진 뒤 일부러 아이까지 데리고 찾아온 것을 보니, 마음속으로는 이미 모든 사정을 짐작한 듯했다. 그녀는 눈치 있게 먼저 입을 열었다.“이야기는 내일 다시 나누자꾸나. 나는 다른 객방으로 가 보마. 오늘은 너와 연우가 오랜만에 만났으니 방해하지 않으마.”그 말을 남기고 정 씨가 몸을 돌리려 하자, 신수빈이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형수님, 괜찮아요. 오늘 밤은 저랑 형수님이 같이 연우를 데리고 자면 되잖아요.”정 씨는 곁에 서 있는 섭정왕의 안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그제야 신수빈도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듯했다. 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이도현 곁으로 다가가,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왕야, 형수님께서 큰오라버니 일로 마음고생이 심하세요. 친정도 멀리 항주에 있어 장안에는 의지할 사람 하나 없고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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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8화

커다란 산허리 아래에는 산을 받치는 쇠기둥 같은 것이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신수빈이 얼굴이 화끈해져 고개를 들려던 순간, 어깨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뒤에 있는 그 못된 남자가 옷 너머로 그녀를 물어버린 것이었다.“왕야…”신수빈은 아픈 기색으로 살짝 애원했다. 일부러 힘을 뺀 듯 흐물흐물한 목소리였다.이도현은 그제야 입을 떼었지만, 마음속 울분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또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본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가 모를 리 없지 않으냐. 그런데도 네 형수를 붙잡아 같이 자겠다니, 본왕이 보기엔 네가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다.”신수빈은 온몸에 불만이 밴 그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속으로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산처럼 무거운 몸에 눌려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결국 좋은 말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왕야께서 절 억울하게 만드시네요. 서란소축에서 헤어진 뒤로 저도 왕야를 무척 그리워했습니다. 그런데 형수님께 정말 일이 생긴 걸 어떡합니까. 저희 큰오라버니께서 어리석은 일을 벌이셨어요. 밖에서 정체 모를 여인과 얽히셨고, 그 일로 형수님 마음이 크게 상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형수님을 혼자 두겠어요.”이도현은 신 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녀 역시 자신을 그리워했다는 말만으로 충분했다.그래서 곧장 조건을 내걸었다.“그럼 네 형수가 잠들면 본왕 방으로 오거라.”“왕야…”신수빈은 다시 부드럽게 애원했다.방 두 개가 바로 붙어 있는데, 만약 이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저 사람이 내는 소리를 형수님이 어찌 듣지 못하겠는가.“형수님은 저를 친동생처럼, 친딸처럼 아껴 주세요. 지금 형수님께서 이렇게 상심해 계신데, 제가 왕야와 옆방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으면 제 마음이 너무 괴로울 것 같아요. 왕야, 이번만은 저를 좀 봐주세요. 다음에는 꼭 왕야 뜻대로 할게요. 왕야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이든…”이도현은 그녀가 “원하시는 게 무엇이든”이라고 말하는 순간, 문득 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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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9화

이도현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그 여자의 신분은?”신수빈은 순간 멈칫했다. 형수에게 자세한 내막을 묻지 않았던 것이다. 형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라, 다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상대가 자신의 친오라버니라 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묻지 않았어요.”이도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툭 쳤다. 그리고 웃음기 섞인 낮은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평소의 영리함은 다 어디 갔느냐? 청운서원에 여자가 있었다 해도 혼자였을 리는 없지. 그런데도 어떤 신분인지 물어볼 생각조차 안 했단 말이냐? 게다가 한낮의 청운서원이 무슨 텅 빈 폐가도 아니고, 정말 억지로 당했다면 그 자리에서 왜 소리치지 않았겠느냐. 어째서 네 오라버니가 정신을 차린 뒤에야 울고불고 난리를 쳤겠어?”신수빈은 이마를 문질렀다. 이도현이 이렇게 말하자, 그녀도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오늘 형수가 목놓아 우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어지러워, 그녀 역시 아무것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었다.신수빈은 살며시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아양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소녀가 어찌 왕야의 영민함과 견줄 수 있겠어요. 왕야께서는 단번에 일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잖아요. 이 세상에 왕야처럼 눈빛 하나로 모든 걸 꿰뚫는 분이 몇이나 되겠어요.”이도현은 능청스럽게 아첨하는 그녀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고, 이를 갈며 낮게 속삭였다.“본왕을 받아 줄 것도 아니면서 괜히 사람 마음만 흔들지 말거라.”신수빈은 그의 옷 아래에서 전해지는 위협적인 열기를 느꼈다. 단단한 것이 그녀의 아랫배를 꾹 누르고 있었다.그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몰래 웃었다.“칭찬도 못 하게 하시다니, 왕야는 정말 모시기 어려운 분이시네요.”이도현은 결국 그녀를 놓아주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정 씨를 불러오너라. 본왕이 몇 가지 물어보겠다.”신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이도현은 자리에 앉은 뒤 옷자락을 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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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0화

“그 여자는 입만 열면 평처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어요.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소란을 피우겠다고도 했고요. 서원은 세우는 것부터 쉽지 않았는데, 이 일로 명성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건 전부 제 죄가 되겠지요…”정 씨가 말을 마치자, 신수빈과 이도현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눈빛 속에서 이 일 뒤에 숨은 더 깊은 의도를 읽어낸 듯했다.신수빈은 정 씨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부드럽게 물었다.“형수님, 큰오라버니께서는 뭐라고 하셨어요?”정 씨는 눈을 내리깔았다.“네 오라버니는… 만약 유언비어가 계속된다면 가주 자리를 내려놓고 나와 함께 항주로 돌아가겠다고 하더구나.”그 말은 곧, 그 여자를 들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신수빈은 아까 미처 자세히 묻지 못했지만, 지금 형수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다행히 큰오라버니가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건 아니었다.그러나 곧 정 씨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헌데 경성의 일들을 두고 그이가 어떻게 떠나겠느냐. 둘째 도련님은 늘 바다를 떠돌아다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집안의 이 많은 일을 마냥 둘째 도련님만 기다릴 수도 없잖니. 셋째 도련님은 원래 가업 경영에 뜻이 없고 지금은 관직에 몸담고 있으니 더더욱 맡을 수 없고. 넷째, 다섯째 도련님은 말할 것도 없지. 만약 네 오라버니까지 떠나 버리면 아버님께서 다시 집안일을 맡으셔야 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그 늙은 진 씨부터 또 달라붙을 게 뻔하잖니. 어머님 속도 다 썩이고,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 될 거야.”“형수님, 울지 마세요. 이제 이건 단순히 신 가가 평처를 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설령 그 여자를 들인다고 해도, 그건 결국 신 가 안에 눈 하나를 심어 두는 것과 다를 게 없어요. 게다가 들인다고 해서 유언비어가 멈출까요?”신수빈은 이제야 사건의 전말을 완전히 이해한 듯했다. 흐트러졌던 생각도 점차 또렷해졌다.“밖에서는 여전히 큰오라버니께서 한문 출신 유생들이 권세도 없고 기댈 곳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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