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全部章節:第 991 章 - 第 1000 章

1154 章節

제991화

고이한은 밝은 조명 아래 서 있는 소예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맑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곧장 자신을 향하고 있었고 그 시선을 마주한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피할 생각이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소예지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곧장 물었다.“왜 한 번도 말 안 했어?”목소리는 차분했다. 비난이나 감정의 파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이유를 알고 싶다는 집요한 의문만이 또렷하게 담겨 있었다.고이한은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고른 뒤, 낮게 입을 열었다.“우리 집으로 가자. 알고 싶은 건 전부 말해 줄게.”이 이야기를 복도에서 이어갈 생각은 없다는 뜻이 분명했다.그러나 소예지는 고개를 돌렸다. 표정에는 노골적인 거부감이 스쳤다.그녀의 반응을 놓치지 않은 고이한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덧붙였다.“그 집에는... 수경이랑 나 말고는 아무도 들어온 적 없어.”그 말에는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심유빈이 단 한 번도 그 공간에 들어온 적 없다는 사실을, 굳이 말로 확인시키고 싶다는 듯한 의지였다.그는 이어 말을 꺼내려 했다.“그리고 오늘도 말했지만 나랑 그 심유빈은...”그 순간 소예지가 고개를 들며 그의 말을 끊었다.“그건 관심 없어.”차갑고 단호한 목소리였다.“당신이 누구랑 어떤 관계인지 그건 내가 알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야. 난 그냥, 내 아버지랑 당신 사이에 있었던 일만 알고 싶어.”고이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를 깊이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집으로 가자. 네가 알고 싶은 건 다 말해 줄게.”그 말을 남긴 그는 먼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소예지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지만 결국 발걸음을 옮겨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문이 열리자 고이한의 집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위치를 켜는 순간 공간 전체가 단번에 밝아졌고 실내에는 극도로 절제된 분위기가 감돌았다.흑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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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2화

고이한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기억을 더듬었다. 한참을 말없이 머무르던 그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날은 유난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머릿속은 뒤엉켜 있었고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에 쫓기듯 소예지의 아버지를 찾아갔다고 했다.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고 그의 시선은 잠시 멀어졌다가 이내 다시 돌아왔다.“당신이 책상 위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어.”그는 짧게 웃었다.“문을 너무 세게 열었던 모양이야. 당신이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는데... 그때 나는 아마 상태가 말이 아니었을 거야. 얼굴도 굳어 있었고 눈빛도 거칠었겠지. 놀랄 만도 했어.”소예지는 얼굴을 살짝 돌렸다.그날의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아버지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러 갔던 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책을 펼쳐 읽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얼어붙은 듯한 얼굴과 차갑게 식은 눈빛,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곧 시선을 되돌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끊었다.“그 얘기 들으려고 온 거 아니야. 핵심만 말해. 당신이랑 우리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만.”목소리는 단호했다. 과거의 감정이 끼어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이 분명하게 그어져 있었다.고이한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그게 핵심이야.”짧았지만 흔들림 없는 말이었다.“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건, 당신을 만난 뒤부터 시작된 거니까. 당신은 그 시기 내 인생에서... 숨을 쉴 수 있게 해 준 사람이었고 당신 아버지랑 내가 그렇게 깊게 얽히게 된 이유이기도 해.”소예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그녀가 이 대화를 시작한 이유는 그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런 얘기 계속할 거면 여기서 끝내.”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 순간 고이한이 곧바로 말을 바꿨다.“알겠어. 당신이 듣고 싶은 얘기 할게.”그의 목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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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3화

아마도 그때 소예지의 아버지가 마음을 바꾼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고이한이 자신의 아버지 시신을 기증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것 역시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터였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더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 시절 소예지가 고이한을 바라보던 시선과 숨기려 해도 끝내 감출 수 없었던 감정,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소예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흩어졌던 생각을 간신히 수습한 뒤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깊고 묵직한 눈빛이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숨이 잠깐 막힌 듯한 느낌이 스쳤고 소예지는 무의식적으로 표정을 더 차갑게 굳혔다.“그게 다야?”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우리 아버지가 당신한테 또 뭐라고 했어? 그리고 우리 엄마 샘플은 왜 당신한테 넘어간 거야?”고이한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우리 아버지 시신이랑 바꿨으니까.”짧고 직설적인 말이었다. 소예지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이한은 이미 그녀 어머니의 샘플이 자신의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 시신을 내놓는 조건으로 그 샘플을 얻어낸 것이었다.그의 방식답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고 왜 그 샘플의 사용권이 그의 손에 있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났다.그렇게까지 해서 얻어낸 것이라면 자신이 그것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도 동시에 이해되었다.소예지는 다시 그를 바라봤다.“그럼 왜 지난번에 내가 우리 엄마 샘플 쓰겠다고 했을 때 반대한 거야?”질문은 흔들림이 없었다.고이한은 되묻듯 말했다.“살아 있는 샘플이 있는데, 굳이 돌아가신 분 샘플을 쓸 이유가 있어?”그 말에 소예지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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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4화

그날 밤, 소예지는 마음속에 얽혀 있던 감정들을 억지로 눌러 담은 채 조용히 딸 곁에 누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었다.잔잔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우는 사이, 아이는 이야기를 듣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고요하게 이어졌다.옆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이 손끝에 닿았지만 그 온기와는 달리 소예지의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눈을 감아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고이한이 아버지의 시신을 기증하고 그 대가로 어머니의 샘플을 얻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 선택이 정말로 최현숙의 말처럼 단순히 자신을 배려한 결과였는지, 아니면 그 이면에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는지 쉽게 단정할 수 없었다.애초에 어머니의 샘플을 검사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강준석에게 의뢰해 매칭을 진행하게 한 것도 결국 자신의 판단이었다.‘그렇다면 고이한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미 그 샘플이 사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만약 알고 있었다면, 왜 처음부터 스미스에게 넘겨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던 걸까.’그날 자신이 직접 그 사실을 알렸을 때 그의 반응은 분명 놀람에 가까웠다. 그 순간 스쳐 지나간 표정과 눈빛은 연기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그렇다면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걸까...’소예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더 생각해 보아도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는 그에게 더 이상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그 시각 아래층에서는 불이 꺼진 채 적막에 잠긴 공간 한쪽 발코니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멀리서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그의 몸을 비추고 있었고 커다란 체구는 고요한 밤 속에서 오히려 더 외롭게 드러나고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그의 얼굴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냈다.그 눈빛 속에는 감추지 못한 복잡한 불안과 스스로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은 미세한 흔들림이 담겨 있었다.고이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밝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이었고 열정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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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5화

돌아가는 길 내내 차 안에는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고수경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흐릿하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다문 모습이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마치 마음속 결심을 겨우 끌어올린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소예지 언니... 저를 실험에 써도 돼요.”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엄마 병만 고칠 수 있다면... 피를 몇 통이든 뽑아도 괜찮아요.”소예지는 운전대를 잡은 채 잠시 옆을 바라봤다.하룻밤 사이에 고수경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젯밤의 응급 상황이 그녀를 얼마나 크게 흔들어 놓았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느껴졌다.“의학 연구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소예지는 감정을 억누른 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피 몇 통 뽑는다고 바로 치료법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면, 이미 진작 끝났을 일이에요.”그 말이 떨어지자, 고수경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그래도... 엄마는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끝까지 말을 잇기도 전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감정을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는 듯 고개가 숙여졌다.소예지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섣부른 위로나 희망을 건네는 일은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졌고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냉정한 판단이었다. 차 안은 다시 깊은 정적에 잠겼다. 실험실에 도착하자 소예지는 곧장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진가영의 병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이미 머릿속에는 몇 가지 가설이 세워져 있었지만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태였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실험이 필요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은 단 하나라도 가능성을 붙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소예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한편 병원에서는 응급처치를 마친 진가영이 간신히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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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6화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김경환이 급히 다가왔다.“대표님...”조심스럽게 부르는 목소리였지만 고이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되어버렸다. 진실은 이미 한계까지 쇠약해진 어머니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고 그 충격은 거의 치명적일 만큼 그녀의 몸을 무너뜨리고 있었다.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서 있는 동안, 시간은 무겁게 흘러갔다.한 시간이 지난 뒤,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밖으로 나온 의사의 표정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고 대표님, 어머님께서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셔서 심폐 기능에 무리가 왔습니다. 약물로 일단 안정은 시켰지만 더 이상 자극을 받으면 위험합니다.”고이한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의사가 자리를 떠난 뒤에도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가 이내 말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유리창 너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경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대표가 짊어진 짐은 지나치게 무거웠고 이미 한계에 가까워 보였다. 자신이었다면 진작에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한편, 실험실로 돌아간 스미스는 곧바로 회의를 소집했다.그는 소예지와 마주 앉자마자 그녀가 제안했던 이론을 다시 꺼냈다.“소 박사,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소예지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박사님, 체외 실험을 한 차례 더 진행했는데 예상보다 결과가 훨씬 좋았습니다. 충분히 시도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고이한의 동의가 필요합니다.”스미스는 깊게 숨을 내쉬며 모니터를 바라봤다.“지금 상황이라면 선택지는 하나뿐입니다. 이대로라면 진 여사도 버티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그 말에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현실이 담겨 있었다.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다시 실험실 안으로 들어갔고 스미스도 뒤따라 들어가 마지막 단계의 안전성 평가를 시작했다.그동안 축적된 스미스의 10년 치 데이터는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참고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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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7화

소예지는 아무 말 없이 스미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겉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었다.스미스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조용히 말을 이었다.“고 대표가 모든 결과를 책임지겠다고 한 건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늘 그렇게 해왔어요. 가장 큰 희망을 당신에게 맡긴 겁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충동이 아니라, 충분히 저울질한 끝에 내린 결정일 겁니다. 결국 당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한 거죠.”소예지는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이런 위험을 스스로 짊어지고 싶어 할 사람은 없었다.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이 병이 언젠가 자신의 딸에게 현실이 되는 일, 그 가능성이 조용히 미래를 잠식해 오는 상황이었다.그래서 진가영과 고수경을 살리는 일은 단순히 누군가를 돕는 선택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알겠습니다, 박사님.”소예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또렷하게 말했다.“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그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마침 복도에서 고이한과 마주쳤다.서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이었다.소예지는 반사적으로 반걸음 물러섰고 고이한 역시 순간 몸이 굳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짧은 정적이 흘렀다.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소예지였다.“나는 준비하러 갈게. 수경 씨한테는 충분히 설명해 줘.”“알겠어.”고이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이야기할게.”소예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 가지를 더 덧붙였다.“혈액 샘플이 부족해. 심유빈 씨를 다시 오게 해 줘.”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고이한의 표정이 아주 잠깐 가라앉았다.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내가 연락할게. 내일 아침에 오도록 할 거야.”그렇게 대화를 마친 뒤, 소예지는 다시 실험실로 향했고 스미스와 함께 시약 조제 작업에 들어갔다.실험실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누구도 불필요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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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8화

새벽의 첫 빛이 창문을 통해 조용히 스며들며 실험실 안을 희미하게 밝히기 시작했다.소예지는 충혈된 눈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모니터에 떠 있는 최신 데이터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밤새 이어진 긴 시간 동안 고수경의 수치는 큰 변동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고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에야 겨우 숨을 조금 돌릴 수 있었다.스미스가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넸다.“소 박사, 잠깐이라도 쉬세요. 이 상태라면 몇 시간은 문제없습니다.”소예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준비되어 있던 작은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대자마자 밀려오던 피로에 저항할 틈도 없이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아침 여덟 시 무렵, 스미스는 고이한에게 현재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대표님, 1단계는 안정적으로 지나갔습니다.”전화기 너머로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여덟 시에 도착하겠습니다. 소예지는요?”“휴게실에서 자고 있습니다.”잠시 짧은 정적이 흐른 뒤, 고이한이 말했다.“수고 많았습니다.”스미스의 목소리에는 피로보다도 오히려 기대감이 더 짙게 묻어 있었다.“이 순간을 위해 10년을 기다렸습니다. 다만, 심유빈 씨는 언제 도착합니까?”“아홉 시 전에는 도착합니다.”“좋습니다. 오늘은 그녀에게 조금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준비되어 있을 겁니다.”고이한의 목소리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8시 50분, 심유빈의 전용 차량이 실험실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매니저 유미나가 함께 내리려 하자 심유빈은 고개를 저으며 짧게 말했다.“돌아가.”유미나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같이 안 가도 돼?”“고 대표가 있으니까 괜찮아.”차가 멀어지고 난 뒤, 심유빈은 실험실 로비를 올려다봤다.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심유빈 씨, 이쪽으로 오세요.”전담 간호사가 다가와 안내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채혈실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놓인 도구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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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9화

그 순간, 뼈마디가 또렷하게 드러난 커다란 손이 앞으로 뻗어 나와 채혈 중이던 심유빈의 팔을 단단히 눌러 붙잡았다.힘이 거칠게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그 손길에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한 의지가 분명하게 실려 있었다.“움직이지 마.”고이한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듯 떨어졌다.심유빈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이미 얼굴에는 눈물이 번져 있었다.“이한 오빠... 그만해. 너무 아파. 더는 못 하겠어.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지?”목소리는 떨렸고 억울함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고이한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이게 장난인 줄 알아?”그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고 그 안에 담긴 단호함은 한층 더 선명해졌다.“가만히 있어.”“나 정말 무서워... 제발, 그만하자.”심유빈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연약함을 드러내면 그가 흔들릴 것이라 믿고 싶었다.그러나 고이한의 표정은 끝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그는 그녀를 내려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상태로 간호사에게 말했다.“계속하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짧은 말은 칼날처럼 심유빈의 마지막 기대를 단번에 잘라냈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굳은 턱선과 깊이 가라앉은 눈빛, 그 안에는 자신의 고통을 향한 어떤 연민도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 순간, 심유빈의 시야 한쪽에 채혈실의 커다란 유리창이 들어왔다.그리고 그의 시선 너머로 조용히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소예지였다.손에는 커피를 들고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엷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또렷하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그 눈은 유리창 너머의 모든 상황을 조용히 꿰뚫고 있는 듯했다. 소예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비웃지도 않았으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그러나 바로 그 침묵이야말로 어떤 말보다도 더 잔혹하게 느껴졌다.심유빈이 그동안 공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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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0화

심유빈은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가는 고이한의 뒷모습을 끝까지 노려보았다.그의 단호한 어깨 너머로, 그녀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는 억눌려 있던 증오와 억울함이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스미스는 조용히 간호사들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 신호에 맞춰 사람들은 하나둘 채혈실을 빠져나갔다.정성스럽게 손질해 두었던 머리카락은 이미 흐트러져 어깨 위에 어지럽게 내려앉아 있었고 눈물에 번진 화장은 곳곳이 얼룩져 있었다. 평소 완벽하게 유지하던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처참하게 무너진 몰골이었다.스미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티슈 한 장을 내밀었다.“심유빈 씨,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유감입니다. 하지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연구는 고 대표 가족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입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심유빈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눈빛에는 노골적인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저를 뭐로 보는 거죠? 움직이는 혈액 저장고인가요?”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10년 전에도 그랬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또 이러는 건가요?”스미스는 안경을 고쳐 쓰며 감정을 섞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10년 전 거래의 구체적인 내막까지는 제가 전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고 대표가 당신을 일방적으로 이용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는 당신을 결코 박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그 말은 위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의 상처를 더 깊게 파고들었다.“그래서 뭐가 달라지죠?”심유빈의 목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돈이면 다 되는 건가요? 제 10년 청춘을 살 수 있어요? 제가 10년 동안 품어온 감정도 계산해서 정리되는 건가요?”숨이 가빠졌다.“그는 제 마음을 몰랐던 게 아니에요. 제가 원하는 게 돈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그녀의 눈이 일그러졌다.“마지막 남은 피까지 다 뽑아가려 하잖아요.”감정이 한계를 넘어선 순간,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나 이미 과다 채혈로 인해 몸이 버티지 못하고 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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