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os capítulos de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apítulo 981 - Capítulo 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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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1화

문을 나서려던 고이한의 발걸음이 문턱에서 멈춰 섰다.등 뒤로 향한 그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그러나 그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그 짧은 침묵을 깨듯 윤하준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말해줘.”조금 전보다 더 눌린 목소리였다.“지금... 예지 씨 다시 쫓고 있는 거야?”그의 숨이 눈에 띄게 거칠어지고 있었다.잠시의 정적이 흐른 뒤, 고이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그리고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윤하준을 마주했다.“그게 중요해?”담담한 말투였지만 그 질문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윤하준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받아냈고 잠시 후 입가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쓴웃음이었다.“나한테는 중요해.”짧게 숨을 고른 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이한, 만약 네가 정말로 소예지랑 다시 시작할 생각이면... 그땐 제대로 해.”말끝이 점점 힘을 얻어갔다.“다시는 상처 주지 말고.”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리고 한 번 더 숨을 들이켠 뒤, 낮아진 목소리로 이어갔다.“그럴 생각이 아니라면.”잠깐 망설였다.그 망설임 속에는 분명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다른 사람한테... 기회 좀 주면 안 되냐.”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고이한은 소파에 앉아 있는 윤하준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술이 덜 깬 얼굴 위로 숨기지 못한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고이한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천천히 들어 올렸다.“하준아.”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오히려 더 단호하게 들렸다.“소예지, 좋아하는 사람 있어.”그 순간 윤하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지만 고이한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그대로 말을 이었다.“그 사람... 너 아니야.”짧고도 분명한 말이었다.윤하준의 충혈된 눈이 더 깊게 흔들렸다.“혹시 임 대위라는 그 사람이야?”고이한의 눈빛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잠시 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설날 밤... 임 대위가 소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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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2화

다음 날 아침, 고이한은 평소와 다름없이 정시에 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고하슬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고 소예지는 문 앞에 서서 딸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내 돌아섰다.조용히 숨을 고른 그녀는 곧 실험실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옷을 갈아입고 필요한 물건을 챙긴 뒤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가 있는 곳에 가까워졌을 때, 차량 옆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자 그 사람이 윤하준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소예지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가 곧 아무렇지 않은 듯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괜찮아요?”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 걱정이 담겨 있었다.윤하준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어젯밤, 술기운을 빌려 그녀를 붙잡고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꺼냈던 순간이 불쑥 떠올랐다. 그 기억이 스치는 순간 얼굴에는 어색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번졌다.“좋은 아침이에요.”목소리는 여전히 조금 갈라져 있었고 눈에는 아직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일부러 예지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제 일 사과할게요. 어제 제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괜한 말까지 했던 것 같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소예지는 그의 상태를 가만히 살폈다. 사과의 내용보다도 지금 그의 컨디션이 더 걱정스러웠다.“괜찮아요. 그런데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 다음부터는 술 좀 줄이세요. 몸 상해요.”담담하면서도 부드러운 말투였다.“네. 그럴게요.”윤하준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잠시 더 말을 꺼내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바쁘죠? 저는 이만 갈게요.”그는 그렇게 말을 끝내자 더 머물지 않고 곧장 돌아섰고 자신의 차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소예지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문득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윤하준이 일부러 한 발 물러서며 거리를 두려는 듯한 기색이 스쳐 갔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감각을 오래 붙잡지 않았고 이내 차 문을 열어 운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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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3화

그동안 고수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예지에게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어 두고 있었다. 결혼 이후 집에서 전업주부로 지내는 모습만을 보며 그녀를 그저 편하게 살며 누리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버렸다.그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굳어졌고 결국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녀를 업신여기게 만들었다.특히 심유빈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수경의 눈에 비친 소예지는 그저 먹고 놀기만 하면서 ‘고씨 집안 며느리’라는 이름만 내세우고 매년 손을 벌려 쓰는 평범한 주부에 불과했다.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소예지는 결혼 이후 단순히 아이를 키우며 집에만 머물러 있던 것이 아니었다. 딸을 돌보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성장시키고 있었고 예전에 자신이 비웃었던 ‘집에서 소설이나 읽는다’는 시간조차 사실은 의학 공부에 몰두하고 있던 순간들이었다는 것을.과거를 하나하나 떠올릴수록 고수경은 점점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졌다.자신이 얼마나 깊은 편견과 오만 속에서 살아왔는지 이제야 또렷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그녀는 단순히 소예지를 오해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얼마나 모질고 무례한 태도로 그녀를 대해 왔는지까지 함께 떠올랐다.특히 그날 수영장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그날 밤, 심유빈의 전화를 받고 식사 자리에 나갔던 고수경은 장난삼아 소예지를 불러내면 망신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속여 그 자리에 나오게 했고, 그저 오빠의 친구들 앞에서 ‘쓸모없는 아내’라는 모습을 드러내게 하려 했던 것이 전부였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상황은 꼬여 버렸고 결국 자신과 심유빈이 함께 물에 빠지는 일까지 벌어졌을 때, 고수경 역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그 기억이 떠오르자 고수경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소예지 언니가 결혼 생활 동안 그렇게까지 노력하며 성장해 왔다는 사실을, 오빠는 정말 몰랐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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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4화

“오빠, 그냥 솔직하게 말해 봐. 도대체 어떻게 소예지 언니를 좋아하게 된 거야?”고수경의 물음에 생각에 잠겨 있던 고이한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이 이야기를 더 이어가고 싶지 않은 듯 다시 서류를 집어 들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걸 왜 묻는 거야.”하지만 고수경은 물러서지 않았다.그녀는 갑자기 그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오빠, 소예지 언니 다시 데려올 수 없어? 다시 내 언니로, 그러니까 우리 집 며느리로 돌아오게 하면 안 돼?”그 순간, 고이한의 손이 멈췄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동생을 바라봤다.“지금은 그런 얘기 할 때 아니야.”짧고 단호한 말이었다.하지만 고수경은 고개를 저으며 물러서지 않았다.“아니야, 나 다 보여. 오빠 아직도 언니 신경 쓰고 있잖아. 소예지 언니만 나타나면 오빠 눈이 계속 그쪽으로 가는 거 나 다 봤어. 오빠 아직도 언니 사랑하는 거 맞지?”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이를 꽉 깨문 채, 스스로를 탓하듯 말을 이어갔다.“예전엔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진짜 눈이 멀었던 것 같아. 예지 언니가 오빠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겠어. 나 정말 예지 언니한테 미안해.”고수경의 눈빛이 흔들렸다.“오빠는 늘 내가 철없다고 했잖아. 근데 이번엔 내가 제대로 본 것 같아. 오빠, 예지 언니랑 이혼했어도 아직 마음 남아 있지? 맞지?”고이한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피로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말했잖아. 지금은 이런 얘기 할 때 아니라고. 그리고 이런 말, 소예지 앞에서는 하지 마.”그러나 고수경은 쉽게 물러날 성격이 아니었다.“오빠, 뭐가 그렇게 풀 수 없는 문제야? 아니면 혹시 심유빈 언니 때문이야?”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고이한의 표정이 굳었다.“그만해.”짧지만 단호한 한마디였다.“지금 제일 중요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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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5화

고수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끝도 없이 쌓여 있었고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기억 속에서 오빠가 심유빈에게 보여주었던 태도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이었다.심유빈은 그동안 오빠에게 받은 선물들을 여러 번 자랑하듯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고수경조차 속으로 부러움을 느낄 만큼 그것들은 하나같이 쉽게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한정판 명품 가방부터 페라리 스포츠카와 고급 저택까지, 무엇보다 오빠가 심유빈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고 밀어주는 모습은 누가 봐도 특별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사랑이야...’고수경은 답답한 마음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시선 끝에 소예지의 모습이 들어왔다.소예지는 간호사에게 무언가를 차분히 설명하고 있었고 고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에게 다가갔다.“예지 언니.”그녀의 부름에 소예지가 고개를 돌렸다.“무슨 일이에요?”짧고 담담한 말투였다.고수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예전에 제가 언니한테 했던 일들... 다 잘못했다는 거 알아요. 특히 그때 수영장 모임에서 제가 언니를 속여서 부른 것도 그렇고 그 일 때문에 언니가 물에 빠진 것도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말을 이어가던 순간, 소예지가 조용히 말을 끊었다.“그때 나, 실수로 빠진 거 아니에요.”차갑게 내려앉은 말이었다.고수경은 순간 멍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날 언니가 발을 헛디뎌서...”그녀는 그날의 상황을 제대로 되짚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이후에 심유빈에게서 들은 이야기만을 그대로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심유빈은 그날 소예지가 미끄러지면서 자신을 밀었고 그 여파로 함께 물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했다.하지만 소예지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고수경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심유빈이 일부러 저를 끌고 들어간 거예요.”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고수경의 몸이 굳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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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6화

간호사 중 한 명이 막 답하려던 순간이었다.문 쪽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두 간호사는 동시에 시선을 돌렸고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자마자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급히 표정을 정리했다.“소 박사님.”짧게 인사를 건넨 뒤, 두 사람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수경은 문득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방금 간호사들이 이야기하던 ‘유빈’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소예지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스쳤다.고수경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소예지 언니, 아까 간호사들이 말하던 그 ‘유빈’이 누구예요?”소예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수도를 틀고 손을 씻기 시작했다.흐르는 물 아래에서 천천히 손을 문지르며 특별한 감정 없이 담담하게 답했다.“심유빈 아니에요. 그냥 여기 와서 채혈 검사 받는 환자예요.”고수경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래요? 여기 병원은 외부 환자도 받나 보네요.”소예지는 손을 헹구며 자연스럽게 덧붙였다.“의료 지원 차원이에요.”그 말을 듣는 순간, 고수경의 마음에 얹혀 있던 긴장이 서서히 가라앉았다.그 사람이 심유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어깨에 힘이 빠졌고 방금 전까지는 혹시 정말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며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고 있었다.소예지가 먼저 화장실을 나가자 고수경도 잠시 뒤 어머니의 병실로 돌아갔다.한편, 소예지는 사무실로 돌아와 잠시 자리에 앉아 있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고이한이 일하고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문 앞에 선 그녀는 가볍게 노크를 하고는 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어 들어갔다.고이한은 창가에 서서 전화를 하고 있었고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자 수화기 너머 상대에게 짧게 몇 마디를 건넨 뒤 곧바로 통화를 마무리했다.“무슨 일이야.”천천히 돌아선 그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은 채 그대로 소예지를 향했다.소예지는 별다른 서두 없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심유빈, 내일 검사 받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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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7화

고이한은 채혈실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두 손을 정장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곧게 선 자세를 유지했고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채혈 과정에 고정돼 있었다. 누군가를 지켜보는 보호자라기보다 모든 과정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확인하려는 감독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약 십여 분이 흐른 뒤 채혈실 문이 열렸다.얼굴이 창백해진 심유빈이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고 그녀의 몸에서는 어딘가 연약하고 위태로운 분위기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 뒤를 따라 고이한도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느린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이한 오빠, 잠깐 쉬었다 가면 안 될까?”심유빈은 곧바로 떠날 생각이 없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차 준비돼 있어. 집에 가서 쉬어.”그 말을 남긴 고이한은 그녀를 지나쳐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남겨진 간호사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심유빈 씨, 저희가 모셔다드릴게요.”그 순간까지 연약해 보이던 심유빈의 몸이 아주 미묘하게 곧아졌다.그녀는 간호사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혼자 갈게요.”정중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 선을 긋는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간호사 둘은 그 미묘한 기류를 감지한 듯 더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물러섰다.심유빈은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길게 늘어진 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고 채혈 직후라 얼굴빛은 창백했지만 그럼에도 흐트러짐 없는 우아함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로비를 빠져나오자 김경환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심유빈 씨,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그는 자연스럽게 차 문을 열어 주었다.심유빈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차에 오르는 순간 스치는 표정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김경환은 아무 말 없이 운전석에 올라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한편, 실험실 안에서는 소예지가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 문이 닫히려는 그 찰나, 길고 단정한 팔 하나가 문을 막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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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8화

소예지는 그의 눈빛을 바라보다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 안에 담긴 집요할 만큼의 진지함이 순간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던 탓이었다.그러나 곧 정신을 다잡은 그녀의 입가에 옅은 냉소가 스쳤다.“할 말 다 했어? 끝났으면 비켜.”더 이상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다.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다.고이한의 큰 체구가 순간 옆으로 밀려났지만 그것은 그녀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힘을 빼고 비켜준 탓이었다.그는 그녀가 지나갈 수 있도록 조용히 몸을 틀었다.“미안해. 시간 뺏었네.”낮게 갈라진 목소리였다.하지만 소예지는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무심히 눈길만 건넨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험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카드키를 찍어 문을 열었고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방음문이 천천히 닫히며 두 사람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다.고이한은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듯 숨을 한 번 고른 뒤, 그것을 다시 깊은 눈동자 속으로 눌러 담았다. 겉으로 남은 것은 철저하게 절제된 평정뿐이었다. 지금의 그는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었고 흔들릴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엘리베이터로 돌아온 그는 피로한 듯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다시 눈을 들어 올렸을 때, 그 깊은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감정의 흔적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오후가 되자 소예지는 시간을 내어 직접 고하슬을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향했다.어린이집 운동장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타며 뛰어놀고 있었고 그 근처에서 윤하준의 어머니가 먼저 소예지를 발견하고 말을 건넸다.“요즘 일은 어때요? 많이 바쁘죠?”소예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조금 바쁘네요.”주경화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봤다.아이를 키우는 엄마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단정하고 밝은 모습이었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한 인상을 주는 분위기였다.“시간 나면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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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9화

고씨 저택은 사람의 기척이 적어 다소 적막하게 느껴졌지만 내부는 여전히 화려하고 웅장했다.곳곳은 가정부들의 손길로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그 안을 채운 고요함은 오히려 더 깊은 공허함을 드러내고 있었다.고하슬은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조용히 놀고 있었고 거실 한쪽에서는 최현숙이 소예지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내가 가영이 좀 보러 가겠다고 했더니 이한이가 괜히 번거롭다고 하지 말라더구나. 대체 무슨 병이길래 이렇게 오래 집에도 못 오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할머니의 말에는 답답함과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여전히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한 채였다.소예지는 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요즘은 의료 기술이 많이 발전해서요. 아주머니도 분명 괜찮아지실 거예요.”최현숙은 그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여기 이렇게 뛰어난 의사가 앉아 있는데 내가 뭘 더 걱정하겠니, 걱정은 안 한다. 그냥 집이 좀 더 북적였으면 좋겠다는 거지.”그녀는 말을 마친 뒤 다시 물었다.“요즘은 뭐 하고 지내니. 아직도 그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어?”소예지는 잠시 망설였지만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대로 있어요.”일부러 더 자세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최현숙의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 상황을 모두 알리는 일은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최현숙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들 바쁘구나. 이한이도 저렇게 큰 회사를 맡아서 고생이 많지. 그 애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떠나지만 않았어도...”말끝이 흐려졌다.고이한의 아버지는 마흔다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한창 일할 나이에 맞이한 죽음이었다.그날의 기억이 소예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때 그녀는 병원에 있었다.소예지의 아버지는 고이한의 아버지를 맡고 있던 주치의였고 그 시기에는 거의 밤낮없이 병원에 매달려 있었다. 의료진들과 늦은 밤까지 회의를 이어가며 끝까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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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0화

“아, 맞다. 이한이가 일부러 나랑 가영이 그리고 너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어. 괜히 네가 마음에 부담 가질까 봐서 말이야.”최현숙의 말이 덧붙여지는 순간, 소예지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올라왔다.처음에는 놀람이 스쳤다. 이어 이해할 수 없는 당혹감이 뒤따랐고 그 끝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막막함이 조용히 가라앉았다.고이한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일을 지금까지 자신에게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어느 하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할머니...”소예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그 일... 제 아버지는 그게 고 대표가 혼자 내린 결정이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최현숙은 고개를 끄덕였다.“기증 절차는 전부 이한이가 직접 처리했어.”그 말을 듣는 순간, 소예지의 심장이 바늘에 찔린 듯 움찔했다.그 일에 대해 고이한은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예지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이야. 우리 집은 이미 다 내려놓은 일이고, 나는 그냥 얘기가 나와서 한 번 꺼내 본 것뿐이야.”최현숙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 눈빛에는 어딘가 복잡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손자가 늘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라도 소예지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담겨 있는 듯했다.“잠깐 앉아 있어라. 오늘 반찬 제대로 준비됐는지 좀 보고 올게.”그렇게 말한 최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향했다.소예지는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하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문득 오늘 낮, 복도에서 마주쳤던 고이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설명하려다 끝내 삼켜야 했던 그 눈빛이었고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소예지는 언젠가 한 번쯤은 그에게 그 시절 아버지가 그에게 무엇을 맡겼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많은 일들을 자신에게 숨겨왔는지에 대해 제대로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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