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과 속이 다른 비서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0 챕터

제11화

정다름은 운전기사인 이진석의 딸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인자한 미소로 다정하게 그녀를 대했다.“정 비서님이 빨리 오셔서 별로 오래 안 기다렸어요. 얼른 한숨 돌리세요. 얼마나 빨리 오셨으면 숨을 이렇게...”“출발해.”유준서가 갑자기 그의 말을 끊었다.깜짝 놀란 운전기사는 얼른 입을 다물고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차 안은 조용했고 네 사람의 분위기는 이상했다.회사에 도착하자 정다름과 김태진은 유준서와 반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180cm의 큰 키를 가진 김태진은 유준서의 발걸음 속도를 따라갈 수 있었지만 정다름은 아니었다. 스커트가 그녀의 움직임을 방해한 탓에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가는 수밖에 없었다.유준서는 약간 어수선한 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짜증이 났다.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탄 세 사람은 각자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두 사람 사이에 서 있던 유준서는 거울 같은 엘리베이터 문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앞으로 뛰지 마. 보기 불편하니까.”그의 말에 멍해진 정다름은 엘리베이터 문으로 그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그녀는 덤덤하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유준서는 계속해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더는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한쪽에 서 있던 김태진은 함부로 그 둘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했다. 차마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 수 없었기에 최대한 존재감을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 중 누구의 편을 들어도 결국 상처받는 건 본인일 것만 같았다.꼭대기 층에 도착한 유준서가 어두운 낯빛으로 사무실로 들어가자 두 비서도 자리에 앉았다.김태진은 자리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종잡을 수 없는 대표의 기분 때문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정다름은 서류 가방에서 파일과 서류들을 꺼내더니 김태진에게 가서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이번에 H시 부지와 관련된 모든 서류와 자료들입니다. 비서실장님께서 확인하시고 대표님께 제출해 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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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정다름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네, 비서실장님이 힘들게 찾아주셨는데요. 연고를 바르면 상처도 빨리 아물 테고 업무에도 방해가 안 갈 테니까요.”칼날처럼 날카로운 유준서의 눈빛이 정다름의 모습을 잘라냈다. 유준서는 몸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가며 무거운 나무문을 쾅 닫았다.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김태진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또 뭐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신 걸까요?”정다름은 눈을 내리깔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겼다.“모르겠어요.”대표 사무실, 유준서는 바지 주머니에서 너무 오래 쥐고 있어서 따뜻해진 연고를 꺼내더니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옷깃을 거칠게 잡아당기자,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통유리 창가에 서 있던 그의 눈앞에는 김태진이 주는 연고를 받아 들던 정다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귓속에는 방금 그녀의 대답이 맴돌았다.그는 누군가에 한 방 맞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김태진이 주는 연고는 왜 그렇게 쉽게 받는 거야?어젯밤 그가 그녀에게 연고를 발라주려고 했을 때 그녀는 어떻게든 거절하려 했었다.똑똑똑.노크 소리가 그의 생각을 끊어버렸다.마침내 정신을 차린 유준서는 멍하니 창문에 비친 그의 어두운 낯빛을 바라봤다.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김태진과 정다름의 사이가 가까운 게 나와 상관이지?그 여자가 다른 사람이 준 연고를 쓰든 말든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난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걸까?그 여자가 그에게 헛된 욕심을 갖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는 기뻐해야 했다.똑똑똑.조금 다급한 노크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유준서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 채 창문으로 그 문을 쳐다봤다.뭐가 그리 조급해서 바로 쫓아온 거야?변명이라도 하려고? 아니면 사과하려고?여유로움을 되찾은 그는 손을 들어 옷깃을 정리했다.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들어와.”문이 열리고 김태진이 걸어들어왔다.옷깃을 정리하던 유준서는 멈칫했다. 희미하게 웃음기가 감돌던 눈동자가 다시 차가워졌다.김태진은 유준서의 뒤로 걸어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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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쯧, 누구랑 통화를 하며 웃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10시, 개인 비서의 내선 전화가 울렸다.전화기를 들자마자 유준서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마실 거 가져와.”“네.”김태진이 대답했다.전화를 끊으려던 유준서는 그의 목소리에 멈칫했다.“왜 네가 전화를 받아? 정다름은?”“비용 청구 때문에 재무팀에서 영수증 제출을 요구해서요.”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가 뚝 끊겼다.유준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 시간만 되면 그가 먼저 말할 필요도 없이 정확한 시간에 찻물을 가져오던 그녀였다.그렇다고 지금 이 일을 정다름의 직무 이탈로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때 김태진이 찻물을 들고 들어왔다. 유준서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반 시간 후, 정다름이 돌아오자 김태진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드디어 돌아왔군요. 방금 찻물을 가져다드렸는데 표정이 좋지 않으셨어요. 오늘 대체 왜 저러시는 거죠? 아직 열 때문에 몸이 좋지 않으신 거예요?”정다름은 보고서를 내려놓다 말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찻물을 가져다드리신 거예요?”그녀의 말에 김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은 차밖에 안 드시잖아요... 어? 정 비서, 갑자기 어디 가요?”정다름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휴게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을 한 잔 받아 들고는 자리에 있는 가방에서 약과 체온계를 챙겨 대표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문을 열고 들어간 정다름은 곧장 그에게로 향했다.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든 유준서의 살짝 찌푸린 미간이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그는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팔걸이에 두 손을 얹은 채 무심히 그녀를 바라봤다.물을 그의 앞에 내려놓던 정다름은 그 옆에 마신 흔적이 없는 찻물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체온계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대표님, 체온 한번 확인해 볼게요.”“싫어.”유준서는 바로 거절했다.정다름은 고개를 들어 평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해열제를 더 먹어야 할지 체온을 확인해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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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정다름의 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책상을 돌아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체온계를 보기 좋은 그의 이마에 갖다 댔다.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상대의 숨결과 향기가 그대로 느껴졌다.정다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체온을 잰 뒤 두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체온을 확인했다.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던 유준서는 살짝 찌푸려진 그녀의 미간을 놓치지 않았다.그는 참지 못하고 함부로 말을 내뱉었다.“왜? 죽을 정도야?”정다름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녀는 책상을 돌아 앞으로 가서 해열제를 뜯었다.“아직 열이 조금 있습니다. 우선 해열제를 드세요. 한동안 계속 약을 드셔야 하니 찻물은 마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그녀는 말하며 김태진이 가지고 왔던 찻물을 들어 올렸다.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럼 뭘 마시라는 거야? 정 비서 설마 날 목말라 죽일 속셈이야?”정다름은 미지근한 물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미지근한 물입니다. 제시간에 가져다드리겠습니다.”“한낱 직원 주제에 대표에게 이래라저래라 해?”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정다름은 순간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대표님의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편하신 대로 하세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그녀의 말에 약을 가지던 유준서는 멈칫했다. 빠르게 떠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눈동자 속의 웃음기가 다시 사라졌다.“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말 한마디 못 하겠네.”차갑게 몇 마디 내뱉던 그는 입에 해열제를 털어 넣었다. 이번에는 감기약이랑 같이 먹지 않았다.업무에 몰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귀찮은 듯 대답했다.“들어와.”유준서는 정다름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녀는 항온 전기포트를 가져와 책상 옆의 거슬리지 않는 곳에 올려놓았다. 전기를 꼽자,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물이 다 끓으면 조용해지고 온도도 그대로 유지되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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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복귀했으니 정 비서 신분 상승은 물론이고 승진과 연봉 인상도 멀지 않았겠어. 몇 년 동안 일한 우리 같은 고참 사원들보다 능력이 좋아?”약간 날카롭고 나긋한 고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정다름의 분노가 치솟기 시작했다.주위 사람들은 진즉에 정다름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들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고수진의 말에 질투와 괴로움이 섞인 표정을 드러냈다.정다름은 천천히 음식 뚜껑을 닫은 뒤에야 몸을 돌려 고수진을 쳐다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고 상무님, 과찬입니다. 다 회사를 위해서 한 일인데요. 누가 열심히 일을 하고, 누가 불화를 일으키고, 누구에게 승진과 연봉 인상이 필요한지는 대표님이 알아서 판단하실 일입니다.”침착한 그녀의 목소리에 주변이 조용해졌다.사람들은 나이가 어린 정다름이 악의적인 고수진에게 숙이지 않고 또박또박 반박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수진 역시 그러했다.그녀는 분노를 억누르고 웃으며 말했다.“정 비서가 원래 이렇게 배짱이 좋았나? 설마 회사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해서 벌써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건 아니지?”정다름은 그녀의 말에 말리지 않고 바로 되물었다.“직원이 완수해야 할 본업을 왜 큰 공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저는 그저 이 업무를 처리하지 못하면 일자리를 잃을 거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고 상무님처럼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은 아마 말단 사원의 고생 같은 건 이해하지 못하실 테죠.”그녀의 말에 바로 고수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이 망할 x, 감히 반박해?사람들 앞에서 정다름에게 망신을 줄 속셈이었던 고수진은 뒤바뀐 상황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고수진은 거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정 비서, 어린 나이에 말하는 데 예의가 없네. 나도 나 스스로 노력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게 아니겠어? 나라고 왜 말단 사원의 고생을 몰라?”정다름은 그저 담담하게 되받아쳤다.“아, 그래요?”주위 사람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애를 썼다.고수진이 내연녀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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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궁지에 몰린 고수진은 그래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괴이한 말을 내뱉었다.“정 비서, 정말 성격이 안 좋네.”정다름은 피식 웃음이 났다.“고 상무님도 만만치 않으신 것 같은데요?”그녀는 유준서를 제외한 그 어떤 사람의 응석받이가 돼줄 생각이 없었다.더는 고수진의 시답잖은 말을 상대해 주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고수진을 내려둔 채 음식을 갖고 자리를 떴다.꼭대기 층, 김태진이 자리에 없는 것을 본 정다름은 본인과 그의 식사를 자리에 올려놓았다. 유준서의 점심 식사를 챙겨 든 그녀는 대표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대표 사무실에 있는 김태진을 본 정다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차려놓고 마지막으로 국을 그릇에 담았다.그녀의 행동에 유준서는 볼펜을 책상 한쪽에 던져두며 말했다.“나가서 점심 식사해.”김태진은 멈칫했다. 업무 얘기 중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업무에만 집중하던 대표였다.오늘은 배가 많이 고픈가?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김태진은 서류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면서 잘 차려놓은 음식들을 힐끔 쳐다봤다.음식들이 너무 담백한데?이따가 화내시는 거 아니야?김태진은 내심 걱정되었다.역시나 소파에 앉아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본 유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초식 동물이야?”그의 입맛을 잘 알고 있는 정다름은 물론 그가 채소를 좋아하지 않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화가 난 그가 밥을 먹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던 정다름은 천천히 타일렀다.“자극적인 음식은 약효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피하셔야 합니다. 닭곰탕이 있으니 한번 드셔보세요. 갈비찜도 챙겨왔습니다.”때문에 채식 메뉴들로만 준비된 건 아니었다.그러나 유준서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고기 없이는 밥을 먹지 않았고, 양념이 강한 음식들만 좋아했었다.그런데 이 풀때기들을 먹으라고?“아픈 것보다 굶어 죽겠네.”그는 젓가락조차 들 생각이 없었다.자리를 뜨지 않는 한, 타이를 자신이 있었던 정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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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유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자채볶음을 쳐다봤다.정다름은 깨끗이 바른 갈빗살을 감자채볶음 위에 올려놓고는 계속해서 갈빗살을 발랐다.유준서는 그녀를 흘겨보며 한마디 했다.“유치하긴.”그러더니 젓가락으로 갈빗살과 함께 감자채볶음을 집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다름은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유준서의 곁을 지킨 지난 반년 동안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이 바로 음식을 먹는 유준서를 보는 것이었다.식사 시간만 되면 왠지 모르게 유준서가 재밌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으면 까칠한 그라도 맛있는 것을 더 먹기 위해 제멋대로 성질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는 다시 잘 바른 갈빗살을 채소볶음 위에 올려놓았다.그러자 경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정다름, 적당히 해.”정다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바른 갈빗살을 어디에 올려놓든 채소를 먹는 것은 그의 자유였다. 그가 채소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이를 악물고 거칠게 갈빗살을 잡아챈 유준서는 갈빗살과 함께 집힌 채소들을 입에 넣었다.갈빗살을 다 바르고 보니 테이블 위의 채소들도 꽤 많이 줄어있었다. 그녀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정다름은 유준서의 식사가 끝났든 말든 일어나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천천히 드세요.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밥을 먹던 유준서는 멈칫했다. 그는 입안에 밥과 반찬을 그대로 머금은 채로 밖으로 나가는 정다름을 쳐다봤다.“콜록콜록, 씨X!”잠깐 사이에 사레가 들린 그는 국을 벌컥벌컥 마셨다.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느낌은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이상한 상실감은 그대로였다.“정말 X 같네.”방금까지 맛있었던 음식들에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밥을 먹고 있던 김태진은 대표 사무실에서 나오는 정다름을 보고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한 소리 들었어요?”정다름은 그저 어리둥절했다.“왜요?”“대표님의 점심을 보니 거의 채소들이던데 대표님이 아무 말도 없었어요?”김태진은 이상했다. 전에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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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유준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난 그저 감기에 걸렸을 뿐이라고.전염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나를 피해?그의 눈빛은 어두워졌다. 약을 먹던 그의 눈빛은 그녀를 집어삼킬 것처럼 노려봤다.계속 눈을 내리깔고 있던 그녀는 유준서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했다.유준서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마음에 품은 채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수많은 사람에게 에워싸인 그는 주인공 자리에 앉았다.그의 양쪽으로 비어 있는 자리는 김태진과 정다름의 자리가 분명했다.유준서가 자리에 앉자, 김태진도 따라서 그의 왼쪽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정다름의 자리는 어떤 여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깜짝 놀란 정다름은 바로 유준서를 쳐다봤다. 가만히 있는 그의 모습에 그녀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졌다.여성 공포증이 있는 유준서라면 절대로 고수진이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이 파티는 결코 단순히 나를 위해 준비한 축하 파티가 아니야!정다름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아찔한 매혹적인 몸매로 유준서의 오른쪽 자리를 가로챈 고수진은 그에게 술을 따르며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본인 때문에 한쪽으로 밀려난 정다름을 못 본 것처럼 말이다.이런 기가 찬 행동에 화기애애했던 술자리가 조용해졌다.수많은 눈동자가 유준서의 반응을 기다리듯 그들을 지켜봤다.오늘 축하 파티의 주인공이 정다름이었다고 해도 한낱 비서 따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정다름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건 유준서 한 사람뿐이었다.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파티는 함정 파티였다. 정다름의 배후에 있는 사람의 꼬리를 잡으려고 그가 만든 함정이었다.입꼬리에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의 모습은 거만하고도 매혹적이었다.그의 준수한 매력에 푹 빠진 고수진은 순간 결벽증이 있는 대표가 다른 사람과의 스킨십을 싫어한다는 것을 잊은 채 술잔을 들고 유준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애교가 가득했다.“대표님께서 모처럼 이런 파티를 준비하셨는데 대표님과 술을 마시는 건 오늘이 처음이네요. 오늘은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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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한낱 비서의 축하 파티에 초대한 것부터 불만이었던 그들은 이 뚱뚱한 X의 콧대를 꺾어서 유준서의 체면을 구길 심산이었다.하지만 그녀의 반격에 그들은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정다름이 직장의 룰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유준서의 뒷받침이 있는 건지 그들은 판단이 서질 않았다.사람들의 눈빛이 한순간에 60살이 넘는 남자, 회사의 네 번째 최대 주주인 송한석에게 쏠렸다.고수진은 송한석의 내연녀였다.송한석은 입을 열자마자 꼰대의 향기를 풍겼다.“정 비서가 역시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답게 겁이 없군.”몸을 돌려 송한석을 바라보던 정다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회 초년생인 저희도 상대의 소질에 따라 행동합니다.”순간 낯빛이 어두워진 송한석은 책상을 내려치며 욕설을 퍼부었다.“네 주제에 소질을 논해? 상사에게 따박따박 말대답이나 하는 교양 머리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제게 상사는 대표님 한 사람뿐인데 언제부터 제 상사였던 거죠?”“이 빌어먹을 X!”송한석은 더욱 세게 책상을 내려치며 분노했다.정다름은 그 자리에 서서 또박또박 말했다.“저도 인권이 있는 직장인입니다. 그런데 빌어먹을 X이라뇨,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이사회 멤버라고 왕이라도 된 줄 아나?난 네 내연녀와는 달라!직장인 행세를 하며 짝사랑하기도 바쁜 그녀에게 그런 인간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의무 같은 건 없었다.까칠쟁이인 유준서의 비위를 맞추기도 바빴기 때문이다.“너! 준서야, 대체 네 사람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버릇도 없이 저렇게 나대는데 똑바로 관리 못해?”궁지에 몰린 송한석은 바로 유준서에게 따졌다.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유준서에게로 쏠렸다. 그는 그저 담배를 입에 문 채 웃는 것 같기도, 웃지 않는 것 같기도 한 얼굴로 송한석을 쳐다봤다.“아저씨, 제가 뭘 어떻게 관리를 해요? 인권이 있다는데 입이라도 틀어막을까요? 아직 어리고 젊어서 급할 때는 저한테도 대들어요.”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목소리가 연기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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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정다름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앉았던 의자는 앉지 않는 게 좋아요. 위생적이지 않잖아요.”“너!”분노를 참지 못하던 고수진은 송한석의 곁으로 돌아오자마자 몰래 남자의 다리를 꼬집었다. 그녀의 기를 세워달라는 뜻이었다.그러자 송한석은 위로하듯 고수진의 손을 잡았다.정다름의 차갑고 포동포동한 얼굴에 유준서는 코웃음을 쳤다.확실히 화가 난 정다름의 얼굴이 좋았지만, 그녀가 무언가를 속이는 것은 싫었다.그때 송한석이 비아냥거리며 입을 열었다.“그동안 여비서는 뽑지 않았던 준서가 갑자기 여비서를 뽑았길래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한 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제대로 확인했군.”“정 비서의 특출한 점이 바로 안하무인격으로 상대가 누구든 제멋대로 입을 놀리고 행동하는 거구먼 그래.”유준서는 입꼬리에 담배를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며 음식을 집었다. 정다름을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정다름은 유준서의 접시에 한가득 쌓인 갈비를 바라봤다. 먹지도 않고 그저 탑으로 쌓으며 갖고 노는 것을 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네, 저는 상대가 누구든 제게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저는 배로 돌려줍니다!”그녀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분위기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송한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이 망할 X, 대체 뭘 믿고 까부는 거야? 배후의 힘으로 준서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뭐라도 된 것 같아? 이사회 멤버들이 너 하나 해고하는 건 일도 아니야!”“그럼 그렇게 하세요.”정다름이 모처럼 차가운 웃음을 내비쳤다.그녀의 말에 멈칫한 유준서의 어두운 눈빛은 속내를 알 수 없이 흐릿했다.그가 이 판을 만든 건 정다름이 누구의 사람인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가장 의심이 가는 사람이 송한석이었는데...“너 이 망할 X 내가 너...”송한석은 사람을 때릴 것 같은 눈으로 달려들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준서가 살짝 눈꺼풀을 쓸어 올리자 바로 젊은 남자가 일어나 송한석을 막아섰다.“송 이사님, 진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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