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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지독한 열병: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문은 이내 열렸다. 최민찬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 피곤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파자마를 입고 있는데도 키가 커서 그런지 분위기가 남달랐다.최민찬은 문을 가로막고 서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 엄마는?”최아진은 틈새로 안쪽을 바라봤다. 권지율은 아직 자고 있었고 마치 낙지처럼 옆자리를 안고 있었다. 그 자리는 최민찬의 자리인 듯했다.최아진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아빠, 고모 아직도 안 일어났어요?”최민찬이 말했다.“고모가 아니라 언니라고 불러야지.”최아진은 입을 비죽였다.“싫어요. 고모가 언니보다 더 친한 사이라면서요? 저는 고모라고 부를래요.”최민찬은 최아진이 자기 말을 듣지 않자 마음대로 하게 놔두었다.“그래. 고모 자는 중이니까 엄마랑 놀아.”최아진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엄마 나가서 집에 없어요. 저는 고모랑 같이 아침 먹을래요.”최민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움찔했다.“나갔다고?”최민찬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안유주는 없었다.예전에 안유주는 늘 가장 먼저 일어나 최민찬과 최아진이 깨어나기 전 아침을 준비해 식탁에 차려놓았었다.요즘 안유주는 평소와 달랐다.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처럼 그저 웃기만 했다.최민찬은 마음속의 무언가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이때 최아진이 최민찬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아빠, 무슨 생각 해요? 엄마 집에 없으니까 아진이랑 같이 밖에 나가서 먹어요. 엄마는 제가 싫어하는 것만 해주고 먹기 싫은 것도 억지로 먹여서 싫어요. 전 엄마가 집에 없는 게 좋아요.”최민찬은 생각을 멈췄다. 그는 돌아가서 옷을 챙겨입은 뒤 아직 자고 있는 권지율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짓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권지율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며 팔을 뻗어 최민찬의 목을 끌어안았다.“벌써 일어났어요? 뭐 하려고요?”최민찬이 다정하게 말했다.“그냥. 넌 계속 자도록 해. 아침에는 뭐 먹고 싶어? 사다 줄게.”권지율은 씩 웃었다.“작은아빠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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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안유주가 자리에 앉았다. 전여훈은 이미 그녀를 대신해 커피를 주문한 상태였다.“예전이랑 똑같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시럽 두 번 추가했어.”안유주는 싱긋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익숙한 맛이었다.“중요한 일 때문에 나 부른 거 맞지?”안유주의 손이 멈칫했다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화제에 안유주는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네. 혹시 선생님과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나요? 선생님을 한번 뵙고 싶어서요.”전여훈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니었다.“알잖아. 그때 너 일 그만두겠다고 했다가 선생님이 화병으로 병원에 실려 가서 보름 동안 입원하신 거.”안유주는 두 손으로 옷자락을 쥐었다.“네.”한때 안유주는 사랑에 눈이 멀었었다. 그때 그녀는 이미 최민찬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살려고 했다.당시 선생님은 안유주를 부드럽게 타일렀다.“유주야, 잘 생각해 봐. 사랑이 전부는 아니야. 네가 손에 쥘 수 있는 거, 그게 네가 가진 전부야. 네 커리어, 네 돈. 사람은 그게 있어야 살아갈 수 있어.”안유주는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최민찬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선생님에게 증명하고 싶었다.그러나 서하민은 엄숙한 표정으로 안유주를 바라보며 말했다.“강은규와의 일은 완전히 잊은 거야? 강은규랑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그래?”안유주는 흠칫했다. 그녀는 서하민이 강은규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당시 안유주는 강은규와 안 좋게 헤어졌었다.안유주는 안채원 때문에 최민찬과 결혼하게 되었다. 원래 안유주는 사랑을 믿지 않았는데 최민찬의 다정한 모습 때문에 서서히 감화되어 다른 남자들도 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강은규 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안유주는 화가 났다.그녀는 서하민에게 최민찬은 그 사람들과 다르다고 했고 결국 둘은 안 좋게 헤어졌다.서하민은 그동안 안유주를 자신의 친딸처럼 여겼었기에 그날 일로 화병이 생겨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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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전여훈이 대답하려고 하는데 안유주가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그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깨어난 뒤 그녀를 제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꽤 난감해질 테니 말이다.그래서 전여훈은 말을 돌렸다.“선생님 친구분 따님이셔.”그들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안유주를 바라보았다.“안녕하세요!”한 여자가 다가갔다.“전 남혜린이라고 해요.”안유주가 손을 내밀었다.“안유주라고 합니다.”남혜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깐 고민했다.“익숙한 이름인데... 선생님께서 예전에 언급한 적 있는 이름인 것 같아요.”안유주는 당황했다.“저희 부모님 얘기를 하시면서 제 얘기가 나왔나 보네요.”남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랬던 것 같아요.”잠시 뒤 서하민이 실려 나왔다. 그녀의 몸에는 각종 기계가 연결되어 있었고 혼수상태인 데다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안유주는 그 광경을 보자 몸을 움찔 떨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한때 법정에서 당당한 기세를 내뿜던 변호사 서하민이 지금은 생기 없는 얼굴로 병상 위에 누워있었다.안유주는 감정이 격해져 속으로 그녀를 불렀다.‘선생님...’엄마가 돌아가신 뒤 안유주의 아빠는 안채원을 집으로 데려왔고, 안채원은 거짓말로 안유주를 모함했다. 그리고 다들 안유주를 믿어주지 않았다. 한때 그녀가 사랑했던 전 약혼자 강은규조차도 그녀를 믿지 않았다.그렇게 안유주는 하룻밤 사이에 악인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설명했다.“전 안채원을 상처입힌 적 없어요. 정말이에요.”돌아온 건 따가운 눈초리뿐이었다.안유주는 자신을 방 안에 가두고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그런데 아빠는 안유주에게서 완전히 관심을 끄고 안채원과 안채원의 엄마를 데리고 휴가를 떠났다.당시 가까운 사람들의 배신으로 인해 안유주는 살아갈 희망을 잃었었다.그런데 서하민이 갑자기 그녀를 찾아와 그 끝없던 지옥 속에서 그녀를 꺼내주었다.서하민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때 안유주는 방구석에서 두 다리를 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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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서하민의 모습에 안유주는 괴로웠다. 그녀는 끼니도 거른 채 밤이 될 때까지 서하민의 곁을 지켰다. 한참 뒤 전여훈이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뭐라도 좀 먹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선생님께서 네 모습을 보면 걱정할 거야.”안유주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전여훈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안유주가 고집스러운 성격이라 옆 사람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다.“조금이라도 먹어둬.”안유주는 덤덤히 대답했다.“알겠어요.”바로 이때 서하민이 깨어날 기미를 보였다. 서하민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순간, 안유주는 눈에 초점이 돌아오더니 황급히 짐을 챙겨 밖으로 달려 나갔다.전여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그러는 거야?”안유주는 문 뒤에 숨은 채 눈썹을 찌푸렸다.“선생님 곧 깨어나실 것 같은데 지금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또 괜히 감정이 격해지면 안 되잖아요. 선생님 깨어나시고 저를 보겠다고 하면 그때 볼게요.”안유주는 마치 겁먹은 것처럼 도망쳤다. 그녀는 선생님을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당시 그렇게 안 좋게 헤어졌던 걸 생각하면 아마 그녀를 보자마자 욱할지도 몰랐다. 혹시라도 또 그것 때문에 쓰러지시면 큰일이었다.안유주는 그런 걱정 때문에 먼저 돌아가려고 했다.전여훈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일단은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서하민이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 멍했다.전여훈은 곧바로 서하민에게 다가갔다.“선생님, 깨어나셨어요?”서하민이 서서히 시선을 돌렸다. 병실 안에 전여훈 혼자 있는 걸 보았을 때 그녀의 눈빛에 실망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서하민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꿈을 꿨는데... 유주가 날 보러 왔었어.”전여훈은 본능적으로 문가를 바라보았다.안유주는 뒤에 숨어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미안한 감정이 안유주의 마음을 꽉 채웠다. 그녀는 서하민이 자신을 이렇게 그리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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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대표님, 뒤에 계시는 분 안유주 씨 같습니다.”강은규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이내 자연스럽게 안유주에게로 향했다.그는 뒤를 바라봤고 차는 속도를 늦추었다.운전기사의 말대로 안유주가 얇은 옷차림으로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차를 세울까요?”운전기사는 강은규의 심중을 알 수가 없어 질문했다.강은규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강은규는 시선을 들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긴 손가락이 턱을 스치듯 지나갔다. 턱을 살짝 든 그의 눈빛이 싸늘했다.그래서 운전기사는 멈추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멈추는 걸 원치 않는 듯했기 때문이다.운전기사는 더 이상 강은규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1km쯤 달렸을 때, 남자의 허스키한 보이스가 뒤에서 들려왔다.“다시 돌아가.”운전기사는 당황해하면서 진땀을 흘렸다.‘아까 얘기하시지.’그러나 감히 그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강은규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기 때문이다.“네.”안유주가 정처 없이 걷고 있을 때 검은색 차가 천천히 후진했다.그걸 알아챈 안유주는 화들짝 놀라며 백화점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인신매매범일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런데 그녀가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창문이 내려가며 강은규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였다.그는 창문 위에 손을 올려두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빠르게 달리는 안유주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그러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안유주, 나한테 돈이라도 빚졌어?”익숙한 목소리에 안유주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강은규가 차 문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예쁜 눈은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고 눈빛에서는 장난스러움이 보였다.안유주는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강은규는 그녀를 보았을 때 바로 그녀를 불러세울 수 있었는데 하필 그녀가 달리고 나서야 그녀를 불렀다.안유주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강은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평온해졌다.안유주는 강은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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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차 세우세요.”안유주가 앞에 있는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운전기사는 안유주를 말없이 힐끗 보았다. 강은규가 명령한 게 아니라면 차를 세울 수가 없었기에 그저 차 문 잠금을 해제했다.안유주도 안씨 가문 자제였기에 운전기사를 난처하게 하지는 않았다.강은규는 조용히 턱을 괸 채로 안유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안유주에게 차에서 뛰어내릴 용기는 없을 테니 말이다.그러나 강은규의 판단은 틀렸다. 안유주는 더는 차 안의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어 차가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을 때 문을 확 열어젖히고 차에서 뛰어내렸다.“멈춰!”차 안에서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끼익!고요한 어둠 속, 타이어와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강은규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고, 안유주는 고통을 참으며 바닥에서 일어난 뒤 하이힐을 벗고 버스 정거장 쪽으로 걸어갔다.“안유주, 거기 서!”안유주는 강은규의 목소리를 무시했다.그녀는 그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다친 안유주가 강은규를 떨쳐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강은규는 빠르게 안유주를 따라잡은 뒤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안유주, 간이 커졌네.”안유주는 고개를 들어 파문 하나 일지 않는 눈빛으로 강은규를 바라보며 덤덤히 말했다.“네. 그리고 대표님이 모르시는 건 아주 많이 남아있어요.”안유주가 선을 긋듯 말하자 강은규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안유주와 쓸데없이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다짜고짜 그녀를 안아 들었다.안유주는 안색이 확 바뀌면서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감싸게 되었다.“강은규 씨, 이거 놔요!”강은규는 안유주의 엉덩이를 툭 치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짓궂게 말했다.“강은규 씨가 아니라 강 대표님이라고 불러야지.”안유주는 얼굴이 빨개진 채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그녀는 강은규에게 안겨서 다시 차에 타게 됐다.강은규는 짧게 말했다.“얘 데려다줘.”그러나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전화가 울렸다.안채원에게서 걸려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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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최아진은 이미 잠이 들었다.안유주는 마음을 놓은 뒤 가방을 챙겨 떠났다.늦은 시간이라 안유주는 세심하게 겉옷을 챙겨서 나갔다.그녀의 눈동자에 약간의 웃음기가 감돌았다.지금 안유주는 남편과 내연녀를 데리러 가고 있었다. 이 세상에 그녀만큼 마음이 넓은 아내는 없을 것이다.안유주는 입꼬리를 올렸다. 잠시 뒤 최민찬이 말한 곳에 도착한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음악 소리가 시끄러운 곳이었다. 안유주는 그런 곳을 싫어했고 최민찬도 싫어했다.그러나 권지율은 이런 곳을 좋아했다. 권지율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이런 곳에 와서 최민찬과 숨박꼭질하며 자신을 걱정하는 최민찬의 모습을 즐겼다.예전에 안유주가 몇 번 잔소리했었는데 권지율은 불쾌해하면서 더더욱 대놓고 최민찬을 빼앗아 가려고 애를 썼다.그리고 최민찬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권지율이 무슨 짓을 하든 그저 내버려두었다.안유주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최민찬은 사실 그동안 권지율에게 추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뽀뽀해! 뽀뽀해!”먼 곳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와 그곳을 바라보니 낯익은 두 사람이 보였다.사람들 틈 사이에서 최민찬은 권지율을 품에 안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당황한 안유주는 그 자리에서 주먹을 말아쥐었다.구경하던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다.안유주는 시선을 거둔 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사진을 대충 찍고는 바텐더에게 말했다.“주스 한 잔 주세요.”바텐더는 안유주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자 웃으며 말했다.“바에 오셔서 주스를 마시다니 독특하신 분이네요. 손님처럼 특이한 사람은 처음이에요.”안유주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신 뒤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그래요?”바텐더는 은근히 안유주를 훑어보았고 안유주는 그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이내 소란스럽던 뒤쪽이 조용해졌다.잠시 뒤 최민찬은 권지율을 안고 나오다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낯익은 사람을 보게 되었다.최민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갔다.“안유주?”고개를 살짝 돌린 안유주는 최민찬을 보았다.그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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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집에 도착하자마자 최민찬은 권지율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고, 안유주도 방으로 돌아가 쉴 생각이었다. 그녀는 옆 방의 인기척을 들었다. 안유주는 오늘 밤 최민찬이 권지율의 방에서 밤을 보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안유주는 잠이 오지 않아 천장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그녀는 엄마가 남겨준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만져보다가 문득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안유주의 머릿속에 늘 그녀를 향해 웃어주던 여자의 모습이,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화를 낸 적이 없는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유주의 엄마는 아주 고통스럽게 떠났을 뿐만 아니라 죽기 직전 딸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그것은 안유주를 괴롭게 했다.당시 안유주는 타지에 있었다. 엄마에게서 마지막으로 전화가 걸려 왔을 때는 새벽 두 시 반이었다. 잠을 자던 안유주는 벨 소리에 잠이 깨서 짜증 어린 말투로 말했다.“엄마, 무슨 일이에요?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하셨어요?”안유주의 엄마는 잠깐 멈칫했다가 늘 그랬듯이 다정하게 말했다.“별일 아니야. 그냥 너 보고 싶어서. 네 목소리 좀 듣고 싶었어.”당시 안유주는 자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탓하듯 말했다.“엄마, 저 금방 돌아갈 거예요. 내일 비행기 타고 갈 거니까 어서 쉬세요. 늦었잖아요.”전화 너머에서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응. 잘 자, 우리 딸.”안유주는 그것이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다음 날 그녀가 돌아갔을 때 엄마는 흰 천을 덮은 채 조용히 거실에 누워있었다.당시 안유주는 겨우 열여덟이었기에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가득 받고만 자라서 제멋대로인 면도 있었다.안유주는 어제 들은 엄마의 목소리가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제야 안유주는 늘 일찍 자던 엄마가 왜 새벽에 자신에게 전화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그때 엄마는 아마 죽음을 예감했을 것이다.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안유주는 엄마에게 다가가 흰 천이 푹 젖을 때까지 울었다.누군가 안유주를 떼어냈고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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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이 세상에 안유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안유주는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칼로 심장을 쑤신 것처럼 아파 안유주는 숨도 천천히 쉬었다.바로 이때 고요한 어둠 속에서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고 안유주는 본능적으로 눈을 가렸다.화면을 보니 최민찬이 보낸 문자가 보였다.[지율이 내일 숙취 때문에 힘들어할 테니까 해장국 좀 만들어줘.]안유주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뒤 공허한 눈빛을 한 채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다 한참 뒤 휴대폰을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한 후 문자를 못 본 척하고 잠을 잤다.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최민찬이 어두운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안유주는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민찬 씨, 좋은 아침. 어제 잘 잤어?”최민찬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그는 안유주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어젯밤에 지율이를 위해서 해장국을 끓이라고 했잖아. 내 문자 못 봤어? 어제 지율이 술 많이 마셔서 숙취가 심하다는 거 알잖아. 걔는 네가 해준 해장국을 먹어야만 좀 나아져.”안유주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최민찬은 그녀를 가사도우미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안유주가 대체 왜 권지율의 시중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최민찬은 아직 그들이 이혼했다는 사실, 그리고 안유주가 곧 해외로 떠날 거라는 사실을 몰랐고 그전까지 안유주는 문제가 생기는 걸 원치 않았다. 안유주는 이혼숙려기간이 끝난 뒤 바로 구청으로 가서 이혼 신고를 할 생각뿐이었다.안유주는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간 뒤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의 앞에 휴대폰을 내려두었다.“미안해. 어제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해 놓고 잤거든. 문자를 못 봤어. 이것 봐. 진짜야.”최민찬의 시선이 안유주의 휴대폰에 닿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둡던 안색이 그제야 조금 나아졌다.최민찬은 여전히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지만 불쾌한 기색은 조금 줄어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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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최민찬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권지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한테 맡겨.”한편, 안유주는 아침 일찍 외출했다. 전여훈의 말에 따르면 서하민이 정신을 차린 뒤 안유주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하민은 안유주가 왔다 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오늘 안유주는 선생님의 병문안을 가야 할 뿐만 아니라 해외연수 관련 계약을 체결해야 했다. 아직 계약 마지막 단계인 인장을 찍지 않아 인장을 찍으러 가야 했다.어제 강은규와 갈등이 생긴 뒤 강은규는 그녀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안유주는 신경 쓰지 않았고 다시 그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빨리 절차를 다 밟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해외연수를 갈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뿐인데 강은규는 그녀에게 그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직 인장을 찍지 않아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혹시 중간에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강은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흥정거리는 딱 하나였기 때문이다.그것은 최민찬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그런 생각이 들자 안유주의 눈빛이 더욱 결연해졌다.병원 1층에 도착하자마자 전여훈에게서 전화가 왔다.“유주야, 어디야?”전여훈의 목소리를 듣자 안유주는 조금 마음이 안정되었다.“금방 병원에 도착했는데 왜요?”곧 정신을 차린 선생님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안유주는 긴장했다.“선생님께서 병원 옆에 있는 죽 가게의 소고기죽이 드시고 싶대.”전여훈이 말을 마치자마자 안유주가 웃으며 말했다.“두 사람 다 아직 아침 안 먹었죠? 아침 챙겨서 올라갈게요. 선배, 선배는 뭐 먹고 싶어요?”전여훈은 서하민을 힐끗 보았다.“선생님이랑 똑같은 거면 돼.”전화를 끊은 뒤 서하민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빨갰다.전여훈이 그녀를 위로했다.“선생님, 잠시 뒤에 유주 오면 절대 우시면 안 돼요. 유주가 보면 유주도 울고 선생님도 우실 테니까요. 그건 선생님 건강에 좋지 않아요.”서하민은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전여훈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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