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열병

결혼 7주년 기념일, 최민찬이 사라졌다. 안유주는 교진시를 샅샅이 뒤져봤으나 끝내 최민찬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보름 뒤 안유주는 우연히 인터넷 기사를 통해 그들의 결혼기념일 날 최민찬이 권지율과 함께 열기구를 타러 갔다가 사고를 당했고, 당시 권지율을 지키려다가 심하게 다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무런 소식이 없던 보름 동안 최민찬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안유주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깊은 밤이었고 입원 병동의 복도는 한없이 적막했다.

안유주는 빠르게 우산을 접었다. 그녀가 신은 하이힐이 바닥과 부딪치며 또각또각 소리를 냈고 그 소리로 인해 복도의 센서 등이 밝아졌다.

병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런데 안유주가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 안에서 남자의 억눌린 신음이 들려왔다. 안유주는 잠깐 움찔했다. 그리고 곧이어 충격적인 장면이 아무런 징조도 없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달빛이 최민찬의 얼굴을 비추었다. 남자는 상반신을 드러낸 채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고 이어 권지율의 사진이 보였다. 사진 속 권지율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민찬은 손에 휴대폰을 꽉 쥔 채로 침을 꿀꺽 삼키면서 오랫동안 참아왔던 것처럼 신음을 냈다.

최민찬은 두 눈을 감았고 이내 낮고도 허스키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또렷이 들려왔다.

“지율아...”

땀 한 방울이 입체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최민찬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며 보일 듯 말 듯한 복근을 따라 허리 아래로 떨어졌다.

안유주는 주먹을 힘껏 쥐었다가 손바닥에서 통증이 느껴지자 그제야 손에 힘을 풀었다.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이 안유주를 서서히 집어삼켰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의 눈동자에서 보이던 감정은 차차 평온해졌다.

솔직히 말해 그 광경을 보았을 때 안유주는 상상만큼 감정이 격해지지는 않았다.

석 달 전, 안유주는 최민찬의 주머니 안에서 여성 속옷을 구매한 영수증을 발견했고 비서를 통해 그동안 최민찬이 권지율의 속옷을 직접 골라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혼한 지 7년, 최민찬은 안유주의 옷 사이즈조차 모르면서 권지율의 속옷 사이즈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안유주는 그 일로 최민찬에게 따져 물었었다.

그러나 최민찬은 권지율이 권효영의 딸이라고 하면서 권지율은 어렸을 때 어머님을 여의고 아버지는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 자신의 곁에서 지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을 작은아빠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러나 권지율을 향한 최민찬의 배려와 다정은 지난 7년 동안 아내인 안유주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 안유주는 권지율이 아직 어리고 챙김을 받아야 하는 나이라 최민찬에게 많이 의지하는 것이고, 최민찬도 그저 권지율을 자기 아이처럼 여기는 거라고 생각해 그저 못 본 척 그냥 넘어갔었다.

그러다 보름 전 최민찬이 권지율을 데리고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안유주는 딸의 유치원 일 때문에 뒤늦게 결혼식에 참석했었고 때마침 권지율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부케를 들고 최민찬의 앞으로 걸어가서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작은아빠, 저도 결혼하는 기분이 어떤 건지 한번 느껴보고 싶어요.”

안유주는 최민찬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최민찬은 일을 처리할 때면 늘 차분하고 냉정하며 단호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황당한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가혹한 현실은 안유주의 예상을 벗어났다.

최민찬은 사람들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더니 친구의 반지를 빌려 진지한 얼굴로 권지율을 향해 프러포즈했다.

그의 얼굴에서 보이는 애정 가득한 미소와 함께 사람들의 호들갑 떠는 소리가 그 프러포즈를 완성했다.

안유주는 당시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안유주는 그런 모습의 최민찬을 본 적이 없었다.

늘 신중하고 점잖던 그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장난을 치며 환하게 웃는 걸 보니 권지율을 남다르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비를 무릅쓰고 별장으로 돌아간 안유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었는데 몸보다도 마음이 더욱 차갑게 식었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안유주와 최민찬은 지난 7년간 서로를 존중하며 화목하게 지냈었다.

우월한 외모와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인 최민찬은 진중하고 근엄한 편이었지만 안유주는 일상에서 그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고 천천히 그에게 호감이 생겨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혼 후 매일 같이 정신없이 바빴던 변호사라는 직업을 관두고 최민찬의 내조를 하며 훌륭한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안유주는 몸이 허약하지만 최민찬을 위해 딸을 낳았고 그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아들을 갖고 싶다는 최민찬의 말에 딸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다시금 임신했고 안유주는 기뻐했다.

그녀는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부디 최민찬을 닮은 재능 있는 아들이기를 바랐다.

그렇게 안유주는 자신을 끝없이 속였고 돌아간 뒤에는 아주 오랫동안 병을 앓았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최민찬이 성욕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님을,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욕망하는 것뿐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안유주가 아무리 노력해도 최민찬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안유주도 더는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안이 잠잠해질 때쯤, 안유주는 붉어진 눈시울을 한 채 고개를 든 뒤 마음속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을 삼키며 그곳을 떠났다.

안유주는 이틀 뒤 중절 수술을 받기로 했다.

이틀 뒤,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운 안유주는 멍한 눈빛으로 조명을 바라보았다.

의사가 마스크를 쓰고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안유주 씨. 임신한 지 꽤 되셔서 보호자 동의가 없으면 수술을 진행할 수가 없어요.”

그 말에 초점 없는 눈빛을 하고 있던 안유주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의사를 바라보며 파문 하나 일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직접 사인할게요.”

의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규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남편분은요? 남편분은 산모님께서 중절 수술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이미 임신 5개월 차라 형태를 갖추고 있어 아주 신중하게 결정하셔야 해요.”

안유주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무언가 마음을 꽉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에 안유주는 손가락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질 정도로 옷자락을 힘껏 움켜쥐었다.

안유주는 자신의 상황을 자조하며 눈물을 흘렸다. 입술을 꽉 깨문 그녀는 피비린내를 느끼며 씁쓸한 감정을 억지로 삼켰다.

수술실 안에서는 고요한 적막만이 흘렀다.

눈을 감은 안유주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결과가 어떻든 제가 다 책임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