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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두 남자의 틈에서: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성지원은 한참 동안 진심으로 우연을 달래 주다가, 과에 일이 생기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우연은 중환자실에서 나오는 길에 간호사가 건네준 우혁의 옷들을 전부 손으로 빨아 널어 두고, 병원 의자에 앉아 면회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우혁 님 보호자분, 들어오셔도 됩니다.”“네!”우연은 서둘러 의사를 따라가 소독을 마치고 동생이 있는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갔다.오늘은 운이 좋게도 면회 시간에 우혁이 깨어 있었다.우연은 침대 앞으로 다가가 동생의 손을 확 잡았다. 목소리는 일부러 크게, 밝게 만들어 그가 치료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도록 북돋웠다.“사촌 오빠는 벌써 동원제를 맞기 시작했대. 곧 조혈모세포 채집하러 들어간대. 너도 누워만 있기 심심하면, 나중에 완전히 나으면 어디 가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지금부터 생각해 둬. 누나가 다 같이 가 줄게.”병원이라는 곳은 누구라도 오래 누워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중환자실은 하늘도 햇빛도 보이지 않는 밀폐된 곳이었다.우연은 우혁의 마음이 꺾일까 봐 새로운 소식이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와 챙겨 주고 있었다.“누나... 호, 혹시 돈 줘서... 이모가 허락한 거야?”우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렇게 많은 돈을... 누나는 어디서 구했어...”“아니야! 누나는 그 사람들한테 돈 안 줬어. 걱정하지 마. 이모부가 네 상태 보고 마음 약해져서 이모를 설득한 거야.”하지만 우혁은 그 말을 선뜻 믿지 못했다.“누나... 제발,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나... 나 이식 안 받을게. 누나가 다치면 어떡해...”“지금 그게 더 바보 같은 소리야! 이식 안 받으면 네 병을 어떻게 고쳐? 혁아, 네가 떠나 버리면... 누나는 어떻게 살아.”우연은 그런 결말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사람들이 자신을 뭐라 욕하든, 하물며 선이 없다고 욕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딱 하나, 우혁이 살아 있기만 하면 됐다.“나...”“아무 말도 하지 마. 네가 해야 할 건 하나야. 의사 말 잘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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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다음 배란일쯤이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우연은 창문을 내려 밖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후덥지근하고 축축한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가슴 깊은 곳에서 자꾸만 밀려 올라오는 도덕심을 애써 눌렀다. 두 남자 사이를 오가는 삶 따위는 정말 원하지 않았다.오직 서로만 바라보는 사랑을, 예전에는 분명 꿈꾼 적도 있었다.하지만 평범한 사람에게 20억은 천문학적인 액수였고, 40억 위약금은 말 그대로 사람을 잡는 숫자였다.동생을 위해서라면 우연은 이제 다른 것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심지어 차씨 가문과 인연을 맺기도 전에는 정말 바닥까지 내려가 몸을 던지는 일까지도 생각했었다....차시헌의 개인 별장에 서 있으면, 마치 그의 사무실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단정한 블랙, 화이트, 그레이 톤. 한눈에 봐도 이 집 주인이 혼자 사는 남자라는 사실이 느껴졌다.우연은 감히 여기저기 손을 대지도 못하고, 그냥 거실 소파에만 얌전히 앉았다. 노트북을 열고 회사 업무부터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진동과 함께 한번 울렸다.차현율에게서 온 카톡이었다.[우 비서님, 오늘 회사 안 왔어요?][네, 근데 팀장님은 어떻게 알았어요?][삼촌한테 수정한 프로젝트 자료 드리러 갔는데, 우 비서님이 안 보이길래 한 번 여쭤봤죠.]그 순간, 우연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차시헌이 차현율에게 뭐라고 설명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혹시라도...‘우 비서 오늘은 짐 싸서 내 집으로 이사 오느라 쉰다.’이런 식으로 말이라도 해 버렸다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우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떠보는 문자를 보냈다.[아, 그럼 차 대표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제가 쉬어서 기분 나빠하시거나 그러지는 않았죠?][아니요! 그냥 우 비서님 오늘 쉰다고만 하셨어요. 우 비서님이 삼촌 비서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아직도 몰라요? 우리 삼촌은 원래 말수 적고, 한 글자로 대답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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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지금 우연은 그 물건을 손에 꽉 쥔 채, 내려놓기도 애매하고 주머니에 넣기도 애매해서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다행히 차시헌이 긴 다리를 내디뎌 다가와 작은 상자를 그녀의 손에서 가져갔다.“저녁은 먹었어?”우연은 고개를 저었다.“아직이요.”저녁만 굶은 게 아니었다. 병원에 있던 점심시간에도 아무것도 못 먹었다.잠깐 멍한 사이 우연은 문득 깨달았다.대표님이 이런 걸 물어봤다는 건, 지금 자기 입장에서는 다음 대사가 ‘제가 지금 바로 주방 가서 차려 드릴게요.’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하지만 문제는...그녀가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달걀 하나 풀어 넣은 라면뿐이라는 거였다.“차 대표님, 저...”“가서 옷 갈아입어. 다 되면 부를게.”그 말만 남기고, 차시헌은 안방으로 들어가 홈웨어로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그러고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우연은 그제야 싱크대 쪽에서 쌀 씻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설마 지금 대표님이 직접 밥을 지어서 나까지 같이 먹을 생각인 거야?’황급히 따라가면서 우연이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대표님, 하루 종일 일하시느라 이미 충분히 피곤하잖아요. 저는 뭐 먹어도 상관없어요. 안 먹어도 되고요.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진짜예요, 대표님. 굳이 이렇게...”밥솥 버튼을 꾹 누른 뒤에야 차시헌이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한 번 봤다.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일단 삼킨 것 같았다.그는 냉장고를 열어 채소를 꺼내고 다시 문을 닫았다. 뒤에서 우연이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결국 입을 열었다.“회사에서는 네가 내 비서고, 사적으로는 우리 사귀는 사이야. 네가 걱정하는 대로 내가 그냥 너랑 자고 말 것 같다면, 대놓고 우리 관계 공개해도 돼.”장난치는 말투가 아니었다.그는 진지했고, 사람들이 알아도 상관없다는 눈빛이었다.우연은 그 말을 듣고 눈을 두세 번 깜빡였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얼굴에 존경심 풀세팅을 켜고 말했다.“차 대표님, 저를 책임지려고 일부러 사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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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우연이 뭐라고 해명하려고 입을 떼기 전에 차시헌이 먼저 말을 잘랐다.“죄책감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 그렇게 오래 나한테 들러붙어 놓고, 네가 죄책감을 느낄 타입은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제대로 말해.”차시헌은 그렇게 쉽게 속을 사람이 아니었다.지난 반년 동안, 우연은 정말 지독할 정도로 포기라는 걸 몰랐고, 거절당해도 도리어 더 뻔뻔하게 들이밀었다.여자애가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달려들었는데 거기에 양심이 껴 있을 리가 있나.이런 연기는 통하겠다는 느낌이 들지 않자, 우연은 표정을 거두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차 대표님, 진짜로... 사실을 듣고 싶으세요?”“말해.”“사실은요, 제가 대표님을 짝사랑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 사이에 차이가 얼마나 큰지 이미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애초에 목표를 그렇게 잡았어요. 대표님을 좋아하는 거, 한 번만 자고 끝내자. 딱 거기까지.”“...”“저는 애초에 대표님 여자친구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차시헌이 살짝 눈썹을 올렸다. 차갑고 매끈한 이목구비 라인이 더 도드라졌다.“왜?”“지금 저는 비록 대표님 비서지만, 제 능력이 여기에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더 열심히 일하고, 더 공부하면, 하얀 그룹 안에서 나름대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런데 제가 대표님 여자친구가 되어 버리면, 제가 뭘 하든 사람들은 다 똑같이 말하겠죠. 남자 잘 만난 낙하산이라고.”그의 얇은 입술이 잠시 멈췄다.이번 말은 꽤 그럴듯했다.실제로 차시헌도 인정하고 있었다. 우연이 그저 얼굴만 예쁜 장식물이 아니라는 걸.금융 쪽 일에서도 머리가 빠르고, 한 번 가르쳐 주면 여러 방향으로 응용할 줄 아는 편이었다.그래서 반년 동안 몇 번이고 잘라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것이다.“저는 대표님이랑 달라요. 대표님은 태어날 때부터 선택받은 사람이에요. 무슨 성과를 내든, 크든 작든 다 인정받고 칭찬받죠. 근데 저는 아니에요. 저는 사람들이 온갖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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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우연은 그룹 대표인 차시헌이 요리를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그것도 정통 경안 요리를 호텔 못지않게 만들어 내고 있었다.“대표님 집에 요리사들이 줄줄이 있는 거 아니에요?”굳이 대표님이 직접 나설 필요가 있는가 싶은 의문이었다.차시헌은 젓가락을 들고 있던 손을 잠깐 멈추더니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부모님 돌아가시고 한동안 해외로 떠났었거든.”“아... 그렇군요.”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차시헌과 차현율은 겨우 세 살 차이다. 그렇다면 부모님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얻은 아이였을 거고, 나이도 좀 있었을 것이다.우연은 몰래 그를 훔쳐보았다.차시헌은 밥을 먹을 때조차도 품이 있었다. 동작이 조용하고, 꼭꼭 오래 씹어 넘겼다.그럴 때마다 또렷하게 드러나는 목젖이 씹는 리듬에 맞춰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한 끼 식사.우연은 젓가락을 내려놓기가 아까울 정도였다.하지만 저녁 시간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었다.“너는 씻고 와. 내가 정리할게.”그 한마디를 남기고, 차시헌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우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들고 온 가방에서 잠옷과 수건을 꺼내 안방 욕실로 들어갔다.이곳은 진짜... 너무 넓었다.샤워 부스에서 욕조까지 제대로 걸으면 열 걸음은 족히 나와야 했다.그런데 한 가지를 깨달았다.차시헌은 혼자 사는 집인데도 도우미 같은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런데도 집 안 구석구석이 아주 깔끔했다.장 안에 정리된 수건이며, 세면대 위에 놓인 세안과 샤워 제품들... 심지어 욕실 바닥 모서리 틈새까지 깨끗했다.어디에서도 먼지나 더러운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우연이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멍하니 서 있던 그때, 바깥에서 안방 문이 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아마 차시헌도 방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우연은 깜짝 놀라 허둥지둥 샤워기를 틀었다. 그리고 물줄기 안으로 들어섰다가 그제야 깨달았다.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상태로 욕실에서 한 시간은 거뜬히 버텼다.숨이 막혀 쓰러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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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오늘은 안 할 거야. 자.”...우연은 집이 바뀌면 분명 뒤척이다가 밤새 못 잘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차시헌의 침대가 너무 잘못됐다. 그녀 원룸의 조그만 침대는 여기랑은 아예 비교 자체가 안 됐다.누워서 얼마 되지도 않아, 우연은 그대로 잠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꿈을 꿨다.초반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꿈 장면이 휙 하고 바뀌더니 어느새 성지원이랑 같이 운전면허를 따러 간 화면이었다.곧 기능 시험을 봐야 해서 우연은 마음이 급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사가 영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했다.우연이 기어 변속 레버를 잡으려고 손을 뻗기만 하면 강사가 그녀의 손을 탁 치워 버렸다.다시 잡으면, 또 떼어 내고. 또 잡으면, 또 떼어 내고...우연이 답답해서 거의 차 안에서 발까지 동동 구를 지경이 되었을 때, 그제야 와락 꿈에서 눈을 떴다.눈을 뜨자마자 낯선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잠깐 멍하니 있다가 여기가 차시헌의 별장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떠올랐다.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그의 흠 잡을 데 없는 얼굴이 들어왔다.가까이에서 보니 우연은 그가 이목구비만 뚜렷한 게 아니라, 피부도 엄청 좋다는 걸 깨달았다.다만 진한 눈썹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그 잘생긴 얼굴은 먹물이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새까맣게 굳어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한결 더 눈이 즐거웠을 텐데.‘가만 생각해 보니, 이 사람 아침부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걸까? 나는 방금 눈을 떴을 뿐인데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대표님, 저...”우연이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차시헌은 한마디도 없이 벌떡 몸을 뒤집어 침대에서 내려가더니 고개 한 번 안 돌리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쳇, 뭐야. 진짜 이해 불가네.”우연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휴대폰을 집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시선이 자기 오른손에 걸렸다.꿈속에서 느껴졌던 자동차 기어의 그 이상할 만큼 생생했던 촉감...그렇다면 그녀는 대체 뭘 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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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그 순간 우연은 차현율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하지만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그녀의 20억짜리 목표가 그에게 달려 있는데 입부터 막았다가 일이 어그러지면 끝장이니까.결국 상황은 차시헌이 차갑게 한 마디만 떨어뜨리는 걸로 마무리되었다.“네가 마셔. 난 싫어.”“우리 삼촌 오늘 아침부터 왜 이래요? 일이라도 꼬였나?”차현율은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눈빛에 그 어떤 숨김도 없이 우연의 솜씨를 칭찬했다.“맛있다. 삼촌은 싫다는데, 저는 좋아요.”“...”우연은 억지웃음을 얼굴에 고정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맞다, 우 비서님. 오늘 퇴근하고 시간 있어요? 제가 프로젝트 기획안들 때문에 질문이 있는데, 식당 가서 앉아서 천천히 얘기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원래라면, 이렇게 목표 대상과 단둘이 만날 수 있는 기회라면 우연은 무조건 잡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덥석 허락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하죠, 오후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괜찮죠?”“좋아요. 기다릴게요.”...차시헌은 원래 말수가 적어서, 그가 화가 났는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무척 어려웠다.준비가 끝나자마자 우연은 바로 그의 뒤를 따라가 업무 보고를 시작했다.“지난달 에너지 개발 프로젝트는 이미 입금 처리됐고, 현재 가동 중입니다. 재무팀에서 오늘 아침 새 분기 실적 보고서를 올렸는데요, 1차로 제가 검토한 바로는 문제없어 보이고, 대표님 책상 위에 올려놨습니다. 그리고... 차 대표님. 조원 그룹의 진 대표님이 며칠째 뵙고 싶다고 하세요. 오늘 퇴근 후에라도 시간 내 보실래요?”그러면 차시헌이 외부 미팅에 가 있는 동안 자기는 차현율과 만남을 잡을 수 있다.잠시 멈추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좋아요. 그럼 바로 연락드리고, 식당 예약되면 다시 말씀드릴게요!”말을 끝낸 뒤, 우연은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폈다.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차시헌이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우연은 곧바로 차현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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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소리가 나자, 우연은 표준 비서용 미소를 얼굴에 올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대표님 커피예요. 방금 만든 거예요.”차시헌은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우연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에 든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우연은 슬슬 머쓱해지기 시작했지만 이미 들어온 이상,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결국 정면 돌파를 택했다.“커피 일은 대표님이 정말 오해하신 거예요! 그때 제가 대표님 커피 타러 갔을 때, 마침 팀장님도 계셔서 향기를 맡으시더니 한 번 마셔 보고 싶다고 하신 거예요. 그럼 저야... 그냥 대표님 비서일 뿐인데, 커피 한 잔 가지고 대표님 친조카를 거절할 수도 없잖아요.”한바탕 다 말해 놓고, 이제 또 무시당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차시헌은 꽤 달래기 쉬운 편에 속했다.“그게 다야?”“정말 그게 전부예요! 오늘 아침 그 한 잔은 팀장님이 따로 부탁하신 거고요. 그냥 커피 한 잔 타는 거고,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라서 해 드린 거예요.”우연은 말을 마치며 고개를 숙였다.“대표님이 이 일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앞으로 팀장님이 커피 부탁해도 제가 바로 거절할게요. 그렇게 하면 대표님이 싫어하신다고 말씀드릴게요.”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차시헌의 미간이 바로 깊게 찌푸려졌다.“내가 화났다고는 안 했는데.”“그럼 이 일 신경 안 쓰신다는 거죠?”우연이 고개를 들어 활짝 웃어 보였다.“역시 대표님은 마음이 넓으세요. 질투 같은 건 안 하는 타입이시잖아요! 그럼 저는 더 방해 안 할게요. 필요하신 일 있으면 또 불러 주세요, 대표님!”우연은 후다닥 들어왔다가 그에게 다시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빠져나갔다.이미 닫힌 문을 잠깐 바라보던 차시헌은 문득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가는 걸 스스로 느꼈다.딱 그때 휴대폰으로 진원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시헌아! 오늘 저녁 내가 한턱 쏜다. 퇴근하고 나와.”“시간 없어.”“너무 성급하게 거절하지 말고! 우리 예전에 유학할 때 알던 임나정 기억나지? 너 고열에 정신까지 흐려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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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퇴근 시간이 드디어 찾아왔고, 우연은 일부러 한 가지 장치를 해뒀다.차현율을 만나는 시간을 딱 한 시간 뒤로 잡아 둔 것이다.먼저 확인해야 했다. 차시헌이 정말 외부 미팅을 가는지. 그걸 보고 나서 움직여야 했으니까.“대표님, 언제쯤 끝날 것 같아요?”“너는 할 일 있어?”차시헌은 답을 주지 않고 반대로 물었다.우연은 고개를 저었다.“큰 일은 아니고요, 대표님이 오래 걸리면... 저도 친구랑 저녁 먹으려고요.”차시헌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 그녀를 보다가는 천천히 말했다.“우리가 사귀고 있어도, 너는 자유야. 내가 제한 안 해.”친구 만나는 정도로 간섭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그가 응대하는 방식답게 담담하지만 묘하게 배려가 깃든 말투였다.“알겠어요. 고마워요, 대표... 아니, 그... 큼.”우연이 돌아서 나가려는 순간.“잠깐.”그녀가 다시 돌아보자 차시헌이 말한다.“퇴근하고 나면 나는 네 남자친구야. 대표님 같은 호칭들, 다 치워.”그 말투가 새삼 더 어색해 보였다.늘 회사에서 듣던 말투 그대로 연애를 하는 기분이었다. 차시헌도 그게 아주 거슬렸던 모양이다.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이러다 침대 위에서도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거 아니야...’우연은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활짝 웃고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했다.“제가 경험이 없어서 그래요. 뭔가 마음에 안 드시면 언제든지 말해요, 대... 그, 시헌 씨.”“...됐어.”고치는 것도 하루아침엔 안 될 테니, 서로 천천히 맞춰 가야 할 터였다.“나 오늘 육 대표 만나고, 그다음에는 한 사람 더 봐야 해. 돌아갈 때쯤 연락할게. 너도 그때 끝나 있으면 데리러 갈게.”우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에서는 아주 작은 감정이 올라왔다.‘차시헌의 여자친구라는 게, 의외로 꽤 괜찮은 경험일지도?’반년 동안 그를 마음속으로 욕했던 날들이 떠올랐다.‘누가 이 얼음장 같은 인간이랑 연애를 해? 집에서 제빙기랑 사는 거나 다를 게 없겠네!’이런 생각을 수백 번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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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당연하죠! 그건 당연한 사실이에요.”차현율은 웃음기까지 걷어내고 잘생긴 얼굴에 진지함만 가득 띄웠다.솔직히 말해서, 차현율이 이렇게까지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우연은 더 궁금해졌다. 도대체 이런 사람이 왜 확고한 비혼주의자일까?하지만 이건 그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대놓고 물을 수도 없는 문제였다.애초에 이런 건 차씨 가문 내부 사람들만 아는 내용일 텐데, 그룹의 비서 따위가 어디서 알겠는가.둘은 먼저 커피 얘기를 조금 나누고, 간단히 몇 가지를 주문한 다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금융이나 투자은행 관련 일이면 우연은 그래도 꽤 능숙하다. 차시헌만큼은 아니더라도 차현율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차 팀장님, 이 프로젝트는요. 실사는 시작 단계부터 문제가 있었어요. 실사할 때는 반드시 등기국에서 상대 회사의 정보를 꼼꼼하게 확인해야 해요. 예를 들면 주주 변경, 출자 방식, 그리고 그 회사가 피고로 걸린 소송이 어떤 게 있는지까지요.”차현율이 해외에서 오래 일한 게 단점으로 작용했다. 해외는 이런 정보들이 대부분 전부 공개되어서, 컴퓨터만 켜도 바로 조회가 되지만 국내는 다르다.여기서는 심지어 허위 신고도 가능하니 하나하나 파야 했다.“이 부분은 담당자와도 얘기했어요. 등기국에서 협조를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상대 회사의 사생활이라서, 그쪽에서 권한을 준 사람만 전체 자료를 받을 수 있다면서요.”“거기서 포인트가 있어요!”우연은 서류봉투에서 협력사 대표의 ‘조회 권한 위임장’을 꺼내 보였다.“이걸 들고 가면 돼요.”차현율이 멍해졌다.“근데 이 위임장에 적힌 사람 이름... 저 아니잖아요.”심지어 몇몇 프로젝트는 남녀 성별조차 안 맞았다.“등기국 직원들은 서류만 맞으면 돼요. 다른 건 확인 안 해요.”“그러다가... 들키면요?”우연은 그의 순진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들킬 일은 단 하나뿐이에요. 무조건 상대 회사가 허위 신고를 했을 때만! 그렇지 않으면요, 조회된 자료와 그 회사가 우리에게 제출한 자료가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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