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말했다. 그래야만 내가 직접 썩어 문드러진 기억을 도려낼 수 있고, 그래야 상처 위에 새로운 살이 다시 돋아날 수 있다고 했다.나에게는 너무 가혹한 방법이었다.그럼에도 나는 치료에 적극적으로 임하기로 마음먹었다.‘이 실패한 결혼 때문에, 앞으로의 인생까지 망가뜨릴 수는 없어.’‘고통 속에서 미쳐 가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아.’물론 심리 치료는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단 한 번에 고시윤과의 모든 기억을 털어놓으라는 건 아니었다.첫 번째 상담을 마친 뒤, 의사는 불안과 우울을 완화하는 약을 나에게 처방해 주었다. 집에 돌아가 규칙적으로 복용하라고 했다.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더 권했다.고시윤과 함께 아이의 묘지를 마련하고, 유골함을 땅에 묻으라는 제안이었다.그건 아이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 나 자신에게도 마침표를 찍는 일이 될 거라고 했다.결혼은 실패했지만, 고시윤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사실 내게도 작은 욕심이 있었다.내 아이도 단 한 번쯤은, 고시윤이 루비에게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아버지의 사랑을 느껴 보길 바랐다.정말 단 한 번만이라도.병원에서 약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그런데 뜻밖에도, 대낮인데 고시윤이 집에 있었다.예전의 고시윤은 불당에서 수행할 때를 제외하면 늘 회사에 있었다. 나와 말을 섞는 시간도 아침 식사 때가 전부였다.그런데 소아인과 루비가 이 집에 들어온 뒤로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눈에 띄게 늘었다.‘결국, 집에 못 올 만큼 바빴던 건 아니었네.’거실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고 있던 고시윤은 내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나는 반사적으로 병원 이름이 적힌 약 봉투를 등 뒤로 숨겼다.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곧 깨달았다.고시윤의 마음속에서 내가 차지하는 부분을, 내가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걸.고시윤은 내 손에 들린 약을 봤지만, 내가 왜 약을 받았는지 무슨 약인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사실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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