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도 고시윤은 여전히 나를 어느 정도 신뢰하는 듯했다.그는 계약서를 한 장 한 장 꼼꼼히 넘기지 않았다.각 페이지의 모서리만 살짝 들춰 보고, 서명이 필요한 곳에만 이름을 적었다.계약 내용은 아예 읽지도 않았다.그 마지막 장... ‘이혼합의서’ 위에 고시윤이 서명하는 걸 확인한 뒤에야 내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았다.‘들키면 안 돼.’그가 이상함을 느끼기 전에 나는 계약서를 재빨리 챙겼다.안방으로 돌아와 고시윤의 친필 서명이 남아 있는 그 이혼합의서를 따로 꺼내 책 속 깊은 곳에 숨겨 두었다.이혼숙려기간은 한 달이다....그날 밤, 나는 안방에서 나갈 준비를 했다.고시윤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절뚝거리면서 짐을 정리하는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그의 여자와 아이를 위해 자리를 비워주는 모습인 것이다.“이런 건 자영 이모님이나 다른 도우미 이모님한테 시키면 되잖아.”그는 비교적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요 시기만 좀 지나가면 돼. 사람들 시선이 잠잠해지면 아인하고 루비는 나갈 거니까, 그때 다시 들어와.”“오래 있을 생각은 없어.”나는 비웃듯 웃으며, 그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그럼 내가 감읍해야 할까?”그 말에 고시윤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짐이라고 해봐야 많지 않았다.손님방으로 옮기는 것뿐이었으니까.옷 몇 벌과 화장품,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침실 옷장 위에 올려 두었던, 작은 유골함.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의자 위에 올라가서 그 유골함을 조심스럽게 내렸다.사진 속 그 아이는 고시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그리고 이 유골함 안에 들어 있는 것도, 나에게 가장 소중한 아이였다.다만, 내 아이는 다른 아이들처럼 세상 밖으로 나와 살아갈 수 없었다.영원히, 햇빛 한 줄기 닿지 않는 이 유골함 안에만 머물러야 했다.그 유골함을 꺼낼 때, 고시윤은 발코니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비서에게 어떤 길로 소아인 모녀를 데려오는 게 더 안전한지, 하나하나 지시하고 있었다.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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