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적의 심연: 0과 1의 연옥심장 소리가 멎었다. 아니, 멎었다는 감각조차 소멸했다.한 대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곳은 비릿한 양수와 비명이 뒤엉켰던 지하의 ‘자궁’이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은색의 평면. 하늘과 땅의 구분이 사라진 그곳은 질량도, 중력도,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기하학적 순수 공간이었다.한 대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거친 피부 대신, 반투명한 은색 광섬유가 투명한 표피 아래를 흐르며 미세한 이진법의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다. 폐는 더 이상 산소를 갈구하지 않았고, 목구멍은 마르지 않았다. 육체의 욕구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거대한 ‘정보의 파도’만이 존재했다.머리 위로 펼쳐진 거대한 데이터 은하계. 서울 전체의 CCTV, 개인의 비밀스러운 통화 기록, 지금 이 순간 도심을 흐르는 모든 전류의 세기까지— 그 수십억 개의 데이터 조각들이 한 대위의 뇌와 직접 연결되어 폭포처럼 쏟아졌다.(보고: 서울특별시 전산망 동기화율 98.7%... 99.2%... 루트 권한 최종 승인 대기 중.)그것은 전능함이라기보다 거대한 기계 장치의 부속품이 되어가는 과정에 가까웠다. 한 대위라는 ‘개인’은 희석되고, ‘서울’이라는 거대 시스템의 OS(운영체제)로 재정의되고 있었다.[2] 환영의 심판: 부정당하는 이름들그 기괴한 정적을 깨고, 은색 지평선 너머에서 잊고 싶었던 인영들이 하나둘 걸어 나왔다. 그것은 한 대위의 잠재의식이 시스템의 데이터와 충돌하며 빚어낸 ‘잔혹한 아바타’들이었다.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피 칠갑이 된 군복을 입은 과거의 자신이었다. 그는 감정 없는 서늘한 눈으로 총구를 한 대위의 미간에 겨누었다.“보고해라. 너는 국가의 정밀 병기인가, 혹은 자아라는 오류에 오염된 폐기물인가.”이어 나타난 것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찢어버린 수아였다. 그녀의 얼굴은 정교한 복제품답게 기괴한 디지털 노이즈로 일렁이며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오빠, 나를 죽이고 얻은 게 고작 이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