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폭주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정화자: Chapter 21 - Chapter 30

77 Chapters

021 - 성심 길드(2)

021신입 훈련장의 공기는 비명과 기계음으로 뒤섞여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병원에서 채 가시지 않은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으나, 곧이어 밀려오는 건 타버린 고무 냄새와 비릿한 혈향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입구는 나가는 자와 들어가려는 자들로 뒤엉켰다. 하지만 그 무질서 속에서도 대피 행렬은 기묘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잘 짜인 기계 부품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준우는 그 광경을 보며 입 안이 씁쓸해졌다.'성심'이라는 이름 아래, 이들은 재난조차 매뉴얼의 일부로 박제해버린 모양이었다.0팀이 훈련장 내부로 들어섰을 때, 시야에 먼저 들어온 것은 바닥을 구르는 조교들이었다. 그 중심에는 인간이라 부르기 민망한 형체가 서 있었다."저게... 신체 강화형이라고?"채은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보통의 강화형 능력자가 영장류의 한계치 안에서 근육을 부풀린다면, 저것은 이미 종(種)의 경계를 넘어선 괴물이었다. 비정상적으로 돌출된 골격이 피부를 뚫고 나와 갑옷처럼 덧대어졌고, 비대해진 근육은 곰의 그것보다 거대했다.조교들이 던진 전격 네트가 괴물의 몸을 옥죄며 불꽃을 튀겼다. 하지만 괴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제 몸을 태우는 전류를 무시한 채 네트를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크어어어!"짐승의 포효와 함께 휘둘러진 팔 한 번에 건장한 사내들이 벽으로 날아가 박혔다. 둔탁한 파열음이 들리고, 실신한 조교들이 바닥으로 맥없이 추락했다. 상황은 이미 통제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혜진 씨, 위치 잡아요."준우의 지시에 혜진이 상층 난간으로 몸을 날렸다. 채은과 재범도 무기를 고쳐 쥐며 아래를 응시했다. 그때, 현장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보다는 짜증에 가까운 기색이 역력했다."저건 이제 우리 길드원이 아닙니다. 즉시 사살해 주십시오."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나치게 매몰찼다. 재범의 방패가 움찔거렸고, 채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준우는 제 귀를 의심하며 남자를 쳐다봤다."방금 뭐라고 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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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 - 성심 길드(3)

022“회복제 말입니까?”혜진의 되물음에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준우가 고개를 들었다. 보건실의 깔끔한 블라인드 사이로 비쳐드는 오후의 햇살이 너덜너덜해진 그의 손등 위를 무심하게 훑고 지나갔다. 준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방금 전까지 제 손바닥 아래에서 맥동하던 그 기괴한 생명력. 그리고 일전에 마주했던 이진성. 두 사건 사이의 연결고리는 안개 속처럼 흐릿했지만, 손끝에 남은 불쾌한 감각만큼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완전히 같지는 않아. 하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기류는 분명 한 줄기야.’확신은 있었다. 문제는 그 확신을 증명할 방법이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일개 정화 능력자의 직관은 거대 길드라는 견고한 성벽 앞에서 한낱 헛소리에 불과할 터였다.그때, 얇은 보건실 칸막이 너머로 복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현수와 지점장이 대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그 신입이 약물을 투약했다는 물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과학수사대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함부로 결론 내지 마시죠.”현수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상대인 지점장은 코웃음을 치며 응수했다.“그 꼴을 보고도 증거 타령입니까? 상식적으로 그런 변이가 자연적으로 일어날 리 없잖습니까. 길드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경찰 쪽에서 약물 남용으로 신속히 종결 짓는 게 맞습니다.”“그게 만약 길드 내부에서 개발 중인 시제품의 부작용이라면요? 그때도 그렇게 말씀하실 겁니까?”복도에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준우는 혜진과 눈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가 아물지 않아 걸음이 휘청였지만, 이 기막힌 대화를 그냥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현수 옆으로 혜진과 준우가 나란히 섰다.지점장은 넥타이를 고쳐 매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능력자란 존재는 태생적으로 과부하를 안고 삽니다. 우리는 그 한계를 극복할 기술을 만드는 중이고요. 만약 이번 일이 우리 측 약물과 연관된 거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진통일 뿐입니다. 물론 해당 인원을 내치지는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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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 - 성심 길드(4)

023그녀의 장담은 정확히 일주일 뒤 현실이 되었다.떠들썩하던 상황실의 호출음이 잦아들었다. 현장 대기 명령이 떨어지던 횟수는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 기묘한 평화의 원인은 현수가 가져온 짤막한 정보로 설명되었다. 관리청과 성심 길드가 ‘폭주자 생포 및 정화 시스템 구축’에 관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는 소식이었다.‘김진서가 확신에 차있던 게 이거였나.’준우는 유리잔 벽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카페 안은 달콤한 연유라떼의 향기로 가득했지만, 혀끝에 닿는 단맛은 어딘지 모르게 서걱거렸다. 예전 같으면 '드디어 좀 쉬겠네' 하며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을 테지만, 가슴 한구석에 달라붙은 찝찝한 예감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정화 능력은 귀하다. 공급은 한정되어 있는데 수요가 줄었다는 건, 이론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준우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켜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을 훑었다.[성심 길드, 폭주자 생포 성공… 사상자 제로에 도전][관리청 대비 25% 빠른 기동력, 비결은 무엇?][김진서식 '통제 모델', 헌터 업계의 새로운 패러다임]화면을 가득 채운 찬양 일색의 헤드라인들이 눈을 찔렀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매끄러운 일처리. 준우는 테이블 맞은편에서 태블릿을 넘기던 재범과 시선을 맞췄다.“재범 씨, 혹시 성심 쪽 현장을 참관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결과가 좋은데, 비결을 배우러 오겠다는 우호적인 요청을 거절하진 않을 것 같아서요.”재범은 대답 대신 가볍게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카페 밖으로 나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예상보다 길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재범의 표정은 묘하게 딱딱했다.“승인 났어요. 다음 폭주 상황 발생 시 0팀에 참관 협조 보내주기로 했습니다.”옆에 있던 채은이 미간을 좁히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휘저었다.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솔직히 그 사람들 방식, 별로 보고 싶진 않은데.”“배울 게 있으면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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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 - 성심 길드(6)

025부천 관리청 소속 병원 1인실.공기는 소독약 냄새와 냉각기 돌아가는 소리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0팀원들의 시선이 고정된 태블릿 화면 위로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보이고 있었다.[성심 길드 병원 폭주 재발, 외부 정화 능력자의 개입 때문인가?]기사 아래로 실시간 소통창의 숫자가 가파르게 올라갔다. 채은은 내용을 훑어내릴수록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녀가 입술을 짓씹으며 화면을 혜진 쪽으로 돌렸다.“정화자가 폭주를 유도했다는 식으로 여론이 흐르고 있어요. 이게 말이 돼요? 살리려고 뛰어든 사람한테….”현수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억울함보다도, 현장에서 목숨을 걸었던 기억이 오염되는 것에 대한 생리적인 거부감이 그녀를 덮쳤다. 혜진은 대꾸하는 대신 무릎 위에 노트북을 펼쳤다. 기계적인 타이핑 소리가 정막한 병실을 메우기 시작했다.“연속된 사고라 대중들은 자극적인 먹잇감이 필요한 거겠죠. 하지만 논리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혜진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채은이 고개를 내밀어 화면을 보았지만, 그녀의 동체 시력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만큼 수많은 창이 열리고 닫혔다.“언니, 지금 뭐 하는 거야?”“나중에 딴소리 못 하게 반박용 전문 자료 모으는 중이야. 협회 공식 논문이랑 해외 사례까지 싹 다 긁어모아서 정면으로 들이받아야지.”채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휴대폰을 꽉 쥐었다. 키보드 배틀이라도 붙어줄 기세로 화면을 노려보던 그때, 침대 쪽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두면 지나가지 않을까요.”준우였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그가 멍한 눈으로 팀원들을 보고 있었다. 초점 없는 시선은 마치 타인의 일기를 읽어주는 사람처럼 무미건조했다.“전에도 이런 적 있었거든요. 능력자 기본법에 면책 조항 없었으면 아마 벌써 파산했을 거예요. 민사 소송 들어오고… 익숙해요.”재범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준우의 담담함은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팀원들의 가슴 속에 불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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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 회복제

026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적인 빛이 준우의 파리한 안색을 비췄다. 0팀 사무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무거웠다. 오랜만에 복귀한 자리였지만, 쌓인 메일함의 숫자는 환영 인사 대신 해소되지 못한 원망들을 쏟아내고 있었다.단순한 행정 민원이 아니었다. 마우스를 내리는 준우의 손끝등 위로 기묘한 긴장감이 서렸다. 성심 길드에 발을 들였다가 소식이 끊긴 아들의 행방을 묻는 노모의 호소, 길드에서 지급한 정체불명의 ‘회복제’를 맞은 뒤 몸이 뒤틀려버린 각성자의 일그러진 사진. 심지어 구금 시설에 갇혀 외부와의 소통이 차단된 이가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처절한 SOS까지 섞여 있었다.화면 속의 글자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준우의 눈을 찔러왔다.‘내가 이걸 다 감당하길 바라는 건가.’준우가 마른세수를 하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삐걱거리는 의자 소리가 정막을 깼다.“낯빛이 왜 그래. 아직 몸 덜 나았어?”혜진이 탕비실에서 컵을 씻다 말고 물었다. 병원 일을 겪으며 어느덧 스스럼없어진 말투가 공기 중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아니, 병 때문은 아니고. 나를 무슨 해결사나 슈퍼맨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좀 많네.”준우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 말에 호기심이 동한 혜진이 다가와 모니터를 훑었다. 뒤이어 입에 사탕을 물고 빈둥거리던 채은과 무거운 발걸음의 재범, 현수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준우의 등 뒤로 모여들었다.“와, 이건 거의 신문고 수준인데?”채은이 모니터로 고개를 들이밀며 혀를 찼다. 혜진은 팔짱을 낀 채 특정 메일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그나마 손을 써볼 만한 건 이 성심 길드원 건 정도겠네. 나머지는 우리 권한 밖이야.”준우는 뒷머리를 거칠게 긁적였다.“성심 길드라…. 공식적인 수사 협조 요청도 없는데 우리가 함부로 끼어들었다가 역풍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저쪽은 법무팀부터가 괴물들이잖아요.”“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어? 지난번 폭주자 때도 그냥 사람 비명 들리니까 뛰어간 거지.”채은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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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 - 휴가 아닌 휴가

027고소는 며칠 뒤 소리소문없이 취하되었다. 성심 길드 측에서 먼저 손을 뗐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나, 그것이 결코 '용서'나 '화해'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금세 드러났다. 법적인 굴레가 벗겨진 자리에 들어앉은 것은 국가기관이라는 이름의 더 거대하고 촘촘한 압박이었다.가장 먼저 날아온 것은 관리청의 공식 경고장이었다.“성심 길드는 국가 재난 대응 협력기관입니다. 소모적인 갈등으로 공적 업무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십시오.”말이 좋아 유의지, 사실상 ‘죽은 듯이 지내라’는 선고였다. 이어지는 후속 조치는 더 노골적이었다. “최준우, 오늘부로 지정된 공무 외 외부 지원 업무를 금한다. 이해했나?”“……네, 알겠습니다.”대답하는 준우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깔렸다. 전화를 끊은 그를 맞이한 것은 정적이 흐르는 팀실이었다.“결국, 그렇게 됐네.”준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범이 말없이 휴대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연결된 듯, 재범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실내를 울렸다.“네, 접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팀 전원, 최준우 씨와 일정을 같이하기로 했습니다. 네, 같은 팀이니까요. 책임도 분량도 똑같이 나누겠습니다.”상대방의 당황한 기색이 수화기 너머로 느껴졌으나 재범은 짧은 인사와 함께 통화를 종료했다. 거창한 선언도, 뜨거운 격려도 없었지만 그 담백함이 오히려 준우의 가슴을 찔렀다.“나 때문에 다들…….”준우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혜진이 몸을 날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준우의 시선이 강제로 끌어올려졌다. 혜진 특유의 십자 동공이 정밀 기계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그의 눈동자를 훑었다. 미세한 떨림까지 잡아낼 듯한 서늘한 시선이 준우의 안색을 살피다 이내 멈췄다.“야, 최준우. 네가 우리 목에 칼 들이밀면서 같이 가자고 협박했어? 아니잖아. 우리가 좋아서 판 짠 거야. 결과도 같이 짊어지는 게 도리지.”혜진이 손을 떼며 툭 내뱉었다.“그러니까 비 맞은 강아지마냥 구석에서 처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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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 - 참관(1)

028그곳에서 서서히 솟아오른 것은, 이성이 휘발된 눈으로 짐승 같은 숨을 몰아쉬는 다섯 명의 폭주자들이었다. 서로의 마력이 간섭을 일으키며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방탄유리 너머까지 진동으로 전해졌다.서늘한 감각이 목덜미를 훑었다. 유리벽 너머, 다섯 명의 폭주자가 내뿜는 기운은 이미 통제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준우는 수갑 하나에 의지해 저 괴물들과 대치하고 있는 이 상황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차라리 굶주린 사자 우리에 던져지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그때였다. 고막을 찢는 듯한 불쾌한 파열음이 실내를 메웠다.[우지끈!]철제 수갑이 힘없이 비틀려 나갔다. 신체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강화형, 아가리가 찢어질 듯 벌어진 광선 방출형, 주변의 기물을 중력 무시하고 띄워 올리는 물체 조작형, 그리고 흉측한 염소 머리를 한 괴수 변이형과 병기를 신체 일부처럼 두른 소환형까지.객석은 순식간에 술렁였다. 하지만 공포보다는 기이한 기대감이 앞섰다.“이거, 대피해야 하는 거 아냐?”“설마. 김 대표가 저렇게 버티고 있는데 사고겠어? 다 시연회 구성이겠지.”사람들의 안일한 속삭임 사이로 준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시야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맺혀 있었다. 폭주자들의 가슴팍에서 뻗어 나와 허공을 가로지르는 기괴한 마나의 가닥들.‘저게 왜 연결되어 있는 거지?’불현듯 이진성의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 ‘최종판은 김진서에게 갔다’는 그 말. 준우는 고개를 돌려 상석에 앉은 김진서를 보았다. 그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마치 완벽하게 연출된 연극을 감상하는 관객처럼 여유로운 표정이었다.‘설마, 일부러 폭주시킨 건가?’쾅! 폭주자가 유리창을 들이받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간부급 능력자들이 무기를 꺼내 들며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을 때, 시연장 뒤편에서 요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동물 마취총을 닮은 특수 화기를 발사했다.두꺼운 외피를 뚫고 박힌 약물에 폭주자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김진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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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 - 호랑이굴

029서울 중심부, 성심 길드 본부의 집무실은 가라앉은 공기로 가득했다. 김진서는 책상 끝에 놓인 얼음 조각을 손에 쥐었다. 손바닥의 온기를 거부하듯 서늘한 냉기가 피부를 파고들었지만, 그녀의 미간은 풀릴 줄 몰랐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얼음이 힘없이 바스러지며 투명한 파편들이 카펫 위로 흩어졌다.‘폭주자가 연결선을 감지하고 끊어버리다니.’그녀는 젖은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번 실험체들에게 투여한 약물은 완벽에 가까웠다. 통제와 강화,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들인 자본이 얼마였던가.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의 변수로 얼룩졌다. 약물의 순도를 높이거나, 아니면 신경계와의 동기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했다.진서는 자리에 선 채로 책상 위 인터컴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렀다.“최종판에도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됐다. 폭주자가 외부 간섭 없이 스스로 연결선을 차단했어. 다음 공정에서 이 피드백 즉시 반영하도록.”“알겠습니다, 길드장님. 바로 수정 조치 들어가겠습니다.”스피커 너머의 목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버튼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지원형 능력자들의 시각 데이터를 전수 조사해. 그 선이 일반적인 감각으로 포착 가능한 영역인지 다시 확인해봐야겠어. 최준우가 그걸 봤다.”순간, 회선 너머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당혹감이 섞인 숨소리가 짧게 들려왔다.“……최준우가요? 그 F급 정화 능력자가 말씀입니까?”“그래.”“알겠습니다. 즉시 지원형 능력자군을 대상으로 가시성 테스트를 재설계하겠습니다.”통신을 끊은 진서가 가죽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오늘의 시연식은 화려한 박수갈채 속에 끝났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굴욕적인 패배였다. 다섯 명의 실험체를 완벽히 통제하며 힘의 우위를 증명했어야 할 무대였다.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최준우의 존재였다. 현장에서 마주쳤던 그의 눈빛.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면서도 어딘가 냉소적이었던 그 시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진서는 무의식적으로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자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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