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우울증과 불멸에 가까운 재생을 지닌 정화 능력자 최준우는, 폭주를 유발하는 의문의 약물 ‘마나’ 사건에 휘말린다. 약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그는 형사와 동료 능력자들과 함께, 관리청의 은폐와 약물의 진실에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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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의뢰를 마친 최준우를 맞이한 건 헬멧 스피커를 뚫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기계음이었다. 교차로 신호등 앞에서 기어를 중립으로 놓은 준우가 장갑 낀 손으로 헬멧 옆면을 툭툭 쳤다.
"여보세요."
"지금 OO사거리 근처지? 위치 찍어줄 테니까 바로 가. 폭주자다."
불쾌할 정도로 익숙한 팀장의 목소리였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끊길 것을 알기에, 준우는 짧게 대꾸했다.
"네, 신호 대기 중입니다."
이 일의 장점은 출근 카드를 찍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지만, 단점은 퇴근이라는 개념도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끊긴 화면 위로 빨간색 경고 좌표가 떴다. 준우는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핸들을 꺾었다. 집에 돌아가면 씻지도 않고 침대에 다이빙하려던 계획은 이제 아스팔트 위의 매연처럼 흩어졌다.
"또 뭔 놈의 폭주자야, 이 시간에."
준우가 오토바이의 사이렌을 올렸다. 푸른 불빛이 회색 도심을 갈랐다.
***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풍경은 이미 일상의 궤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인도는 물론이고 2차선 도로 전체가 끈적한 검보라색 액체로 뒤덮여 있었다. 중앙 분리대였던 쇠울타리는 독기에 녹아내려 마치 엿가락처럼 흐물거리며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폭주자는 더 이상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3미터 높이의 거대한 '독성 언덕'이었다. 맥동할 때마다 검보라색 진물이 울컥거리며 쏟아졌고, 아스팔트가 타들어 가는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준우는 헬멧을 벗어 시트에 걸쳤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검회색 곱슬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자, 피로가 섞인 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170cm 남짓한 준우의 체구에 비해, 눈앞의 괴물은 압도적인 질량감을 뽐내고 있었다.
'일반인은... 다 대피했나 보네.'
반파된 차량 서너 대가 독기에 녹아 연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다행히 내부에서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구경꾼들도 이미 저 멀리 달아난 뒤였다. 적막한 사거리에는 괴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자신의 심장 소리뿐이었다. 결국 이 지독한 오물을 치울 사람은 자신 하나라는 뜻이다.
준우는 습관처럼 헛웃음을 삼켰다. 지원형 능력자랍시고 자신을 먼저 보낸 본부의 의도는 뻔했다. '네가 가서 미리 좀 정리해놔라.'
"예, 예. 까라면 까야죠."
준우는 오토바이를 안전거리에 세운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빈손이었던 그의 오른손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더니, S&W M66 리볼버 한 자루가 형상화되었다. 실린더 안에는 금속 탄환 대신 그의 생체 에너지를 응축한 유백색 정화탄이 장전되어 있었다.
[탕! 탕!]
반동과 함께 발사된 두 발의 탄환이 괴물의 양팔—혹은 그렇게 보이는 돌기—에 정확히 박혔다.
"크아아아악!"
인간의 구조를 초월해 2미터 가까이 찢어진 아가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소리라기보다는 고막을 긁어내는 소음에 가까웠다. 준우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저건 이제 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사살 대상 확정.'
[탕! 탕! 탕!]
남은 세 발이 괴물의 상단부를 관통했다. 구멍 뚫린 상처 사이로 흰 연기가 솟구쳤지만, 괴물은 이내 상처를 수복하며 거대한 독성 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쿠웅—!]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아스팔트가 움푹 파였다. 괴물은 목표물이 짓눌렸는지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팔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곳에 준우는 없었다.
"어딜 봐."
괴물의 정면, 찰나의 거리였다. 앞점멸로 거리를 좁힌 준우가 괴물의 본체라고 짐작되는 머리 부분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기이이잉—]
준우의 손바닥에서 눈부신 백색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폭주자의 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꽤애액!"
소멸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인지, 괴물은 준우의 몸을 사정없이 타격했다. 방독 기능이 있는 특수 수트가 아니었다면 준우의 피부는 이미 진물에 녹아내렸을 것이다. 준우는 쏟아지는 충격을 이 악물고 버텨냈다.
점차 작아지던 괴물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만큼 수축하더니, 이내 한 줌의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바닥에는 정화되지 못한 미량의 검보라색 웅덩이만이 남았다.
'끝났나... 이제 나머지를...'
긴장이 풀리는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편두통과 함께 고막을 찢는 이명이 밀려왔다. 무릎에 힘이 풀리며 준우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지만, 시야는 이미 점묘화처럼 흐릿해졌다.
"괜찮으세요? 정신 차리세요!"
방호복을 입은 경찰관이 다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연이 보고 싶어서 누웠겠냐'는 냉소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밖으로 나온 것은 가느다란 신음뿐이었다. 준우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좀... 울려서 그렇습니다. 금방 치울게요."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은 준우가 마지막 남은 독성 웅덩이에 손을 뻗었다.
[구우웅—]
공명음과 함께 주변의 오염물질이 소멸했다. 사거리는 순식간에 기괴한 잔해만 남은 채 깨끗해졌다. 경찰들이 감탄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준우는 그 시선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투둑,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뜨거운 핏방울이 떨어졌다. 코피가 턱 끝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 준우의 몸이 인형처럼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
병원 천장은 어디나 똑같다. 지나치게 하얗고,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감았던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수액 팩에서 일정하게 떨어지는 투명한 방울이었다.
“지원형이셔서 우선 생체에너지 수액만 놔드리고 있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세요.”
지나가던 간호사가 무심하게 던진 말에 준우는 짧게 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오른팔을 들어 올리려다 이내 포기하고 천장의 무늬를 셌다. 이 풍경은 언제나 묘하게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도착하는 곳은 늘 고등학교 양호실이다. 차라리 아무 능력도, 생각도 없던 그때가 나았을까.
5년. 혹은 7급 공무원 6호봉.
준우를 설명하는 가장 건조한 수치들이다. 2020년 대파동 이후, 손끝에서 피어오른 그 가냘픈 빛줄기에 홀려 정부 전단지를 집어 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지 가끔 궁금해진다. 최소한 매달 도장 깨기 하듯 응급실 침대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문제는 이 빌어먹을 ‘정화’ 능력이 약조차 거부한다는 점이다. 몸 안에 들어온 화학 성분을 불순물로 인식해 밀어내 버리니, 진통제도 항생제도 듣지 않는다. 병원이 준우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텅 빈 에너지를 채워주는 비싼 수액뿐이었다. 기초수급비보다 많이 번다고 좋아해야 할지, 그 돈을 병원비와 맞바꾸는 손해를 한탄해야 할지 계산이 서질 않았다.
수액이 다 비워지자 준우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잠을 적게 자도 신체가 유지되는 초월적인 회복력은 현대 직장인에겐 축복이 아니라 재앙에 가까웠다. 직장 상사들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마 오늘 또 부르겠어.”
밤 10시. 병원 문을 나서는 준우의 어깨 위로 눅눅한 밤공기가 내려앉았다. 사고 현장에 버려두고 온 오토바이가 생각나 뒷머리를 긁적였다. 택시 앱을 켜 좌표를 찍는 손가락이 무거웠다. 그저 집에 가서 눕고 싶다. 침대 시트의 감촉을 느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치를 누리고 싶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칠판을 긁는 손톱 소리처럼 날카로운 벨 소리가 택시 안을 가른 것이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역시나 팀장이다.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최대한 피곤한 기색을 담아 딱딱하게 대꾸했다. ‘나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이다’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하지만 돌아온 명령은 그보다 훨씬 차갑고 견고했다.
— “OO공원으로 즉시 이동해. 2급 비밀이다. 폭주자는 반드시 생포해.”
“...네.”
3급도 아닌 2급. 거부하기에는 높디 높은 등급에 준우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기사님에게 목적지 변경을 요청하는 목소리에 패배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도착한 공원은 기괴할 정도로 밝았다. 어둠이 내려앉아야 할 시간임에도 공원 중앙은 푸른 도깨비불 수십 개가 일렁이는 듯한 섬뜩한 광채로 가득했다. 택시는 위험을 감지했는지 준우가 내리자마자 비명을 지르듯 액셀을 밟아 사라졌다.
“다른 능력자는요? 물이나 소화 능력자 없습니까?”
준우가 다가간 소방대원들은 방화천과 소화기를 동원해 불길을 가두느라 정신이 없었다. 땀과 재로 뒤범벅된 소방관 하나가 헬멧을 젖히며 준우를 확인했다.
“정화 능력자십니까?”
“네, 방금 도착했습니다.”
“제발 좀 막아주세요. 능력자들이 붙었는데도 저 불이 꺼지질 않아요. 이미 안쪽 사람들은….”
말끝을 흐린 소방관이 다급하게 일반용 방화복을 내밀었다. 준우는 눈을 감았다. 최악의 컨디션, 2급 기밀, 그리고 이미 발생한 사상자. 이 모든 악조건이 한데 어우러진 현장으로 등떠밀려 들어가는 기분은 참으로 엿 같았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푸른 불꽃 사이사이에 검푸른 선들이 섞여 맥동하고 있었다. 단순한 화재가 아니었다. 길목마다 타버린 생명체의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무들은 이미 숯조차 되지 못한 채 전소되었고, 지지하던 쇠 받침대만이 용암처럼 녹아 흐르고 있었다.
소화기 두 대를 전부 비우고 방화복 하나에 의지해 불길의 진원지에 도달했을 때, 준우는 제 눈을 의심했다.
‘가수 이현승? 저 사람이 능력자였다고?’
화면 속에서 미소 짓던 발라드 가수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황홀경에 빠진 듯, 혹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듯한 일그러진 표정으로 사방에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준우를 발견한 현승이 본능적으로 화염 줄기를 날렸다. 준우는 간발의 차로 피했지만, 뒤쪽의 고목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빨리 끝내야 한다.’
준우는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집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손끝에서 피어올라야 할 정화의 에너지가 방화복 안쪽에서 맴돌며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아, 이런….”
능력자용 특수 복장이 아닌 일반 방화복이었다. 외부 열기는 막아주지만 내부의 에너지를 밖으로 투과시키지 못하는 절연체나 다름없었다. 물 능력자가 일반 잠수복을 입고 잠수했다가 제 능력으로 만든 물에 갇혀 익사했다는 웃지 못할 뉴스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사이 현승은 폭주 주기가 짧아졌는지 화염 미사일을 사방으로 난사하기 시작했다. 불길의 방향은 이미 공원 너머 아파트 단지를 향하고 있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불나방은 타 죽기라도 하지, 나는 죽지도 못하고 구워지겠네.’
준우는 거칠게 방화복 지퍼를 내리고 옷을 내던졌다. 수트를 벗자마자 폐부를 찌르는 열기가 온몸의 수분을 앗아갔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통이 피부를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
“씨발!”
준우는 비명과 같은 욕설을 내뱉으며 지면을 박찼다. 한계를 넘어서는 출력으로 신체 기능을 가속했다. 찰나의 순간, 현승의 눈앞에 나타난 준우가 타오르는 그의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달궈진 불판 위에 맨손을 올린 것 같은 감각이 전해졌다.
“비명은 감옥 가서 질러.”
준우는 자신의 모든 생체 에너지를 현승의 머릿속으로 구겨 넣었다. 현승 역시 비명을 지르며 남은 불꽃을 전부 준우의 가슴팍에 쏟아부었다.
“으아아아악!”
누구의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공원의 불길을 압도했다. 시각도, 청각도 사라졌다. 오직 타 들어가는 통증만이 준우가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준우는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뼈가 드러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정화 에너지가 현승의 폭주한 핵을 잠재울 때까지, 그 고통의 시간을 온전히 견뎌냈다.
불길이 잦아들고 현승이 힘없이 늘어지자, 준우는 재생력이 돌아오기 시작한 앙상한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갈겼다. 확실한 제압이었다.
잠시 후, 불길이 잡힌 공원 중앙으로 소방관들과 다른 능력자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들은 그곳에 서 있는 무언가를 보고 경악하며 멈춰 섰다.
전신이 새까맣게 타버려 뼈와 살이 겨우 붙어 있는, 마치 해부학 표본 같은 형체가 현승 앞에 서 있었다. 그 괴기스러운 형체 위로 새살이 돋아나고 원래의 피부가 덮이기 시작했다.
준우는 피 냄새 진동하는 가래를 뱉어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다음엔... 능력자용 방화복 좀... 제때 챙겨주세요.”
말을 마친 준우의 몸이 힘없이바닥으로 꺾였다. 다시 시작된, 지긋지긋한 응급실행이었다.
***
7일.
준우에게 허락된 휴식의 유효기간이었다.
그중 사흘은 병원 침대 위에서 수액 줄을 단 채 의식 너머를 헤맸고, 나머지 사흘은 집 안의 커튼을 모조리 친 채 시체처럼 뻗어 있었다. 인간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씹어 넘긴 삼각김밥 몇 개를 제외하면, 기억에 남는 건 천장의 무늬뿐이었다.
마지막 하루. 준우는 구태여 집 밖으로 나와 카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연유를 과하게 추가한 차가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당분이 뇌에 닿자 비로소 세상의 색채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준우는 소매를 걷어 제 팔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묘했다. 화염에 휩싸여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녹아내렸던 피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재생된 살결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매끄러웠다. 하지만 그 매끄러운 피부 위로, 능력을 얻기 전 스스로 그어대며 남겼던 낡은 자해 흉터들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준우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삼켰다. 전신의 피부가 통째로 갈렸는데도, 영혼에 새겨진 것 같은 이 비루한 상처들은 정화조차 거부한 채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긴, 타버린 머리카락이 하루 만에 제 길이로 자라나는 마당에 논리를 따져서 뭐 하나.'
이 몸이 된 이후로 미용실 비용은 굳었지만,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꾸미는 즐거움 따위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재생의 기준점은 늘 '그날'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주일 전의 지옥도와는 상반된,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유모차를 밀며 담소를 나누는 부부, 햇볕을 쬐며 느릿하게 걷는 노인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뛰어가는 아이들까지.
순간, 귓가에 이현승의 찢어지는 비명과 살이 타들어 가는 비릿한 냄새가 스쳤다. 준우는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래도 이번엔 크게 한 건 했으니 당분간은 뒤치다꺼리나 시키겠지. 고인 물 웅덩이 정화나 공원 청소 같은 거나 하면서.'
그런 실없는 기대를 하며 멍하니 커피를 들이켜던 그때였다. 감각이 마비된 탓이었을까, 바로 옆자리에 누군가 다가와 앉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최준우 씨?"
[철컥]
사고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준우의 오른손에 실체화된 소형 리볼버가 옆 사람의 옆구리를 정확히 겨냥했다. 해머가 당겨지는 서늘한 금속음이 카페의 소음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상대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짙은 감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여자였다. 뒤로 바짝 묶은 머리와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그녀는, 당혹감을 억누르며 품 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대능력자 특수팀, 김현수 경위 입니다."
준우는 잠시 그녀의 눈을 응시하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리볼버를 흩뿌려 소환 해제했다. 그리고는 다시 특유의 의욕 없는 표정으로 돌아와 미지근해진 커피를 빨았다.
"경찰이 그때 현장에서 수거해 갈 건 다 가져갔을 텐데요. 전 폭주자를 패느라 바빠서 아는 거 없습니다."
적당히 둘러대면 형식적인 질문 몇 가지나 던지고 가겠지 싶었다. 준우는 벌써 그녀를 보낼 궁리부터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준우의 나태한 예상을 정면으로 깨부숐다.
"최준우 씨. 일주일 전 그 현장, 단순 폭주가 아니었습니다."
커피를 빨아들이던 준우의 볼 근육이 미세하게 멈췄다.
"이현승의 체내에서 발견된 건 과부하 된 마력만이 아니었어요. 정교하게 설계된 '촉매'가 나왔습니다."
김 경위의 낮은 목소리가 준우의 평화롭던 휴가 마지막 날을 잔혹하게 찢어발기고 있었다.
018소독차 냄새가 밴 공기는 이제 폐 깊숙한 곳까지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준우는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무심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정도면 집을 병실로 옮기는 게 아니라, 병실을 집으로 등기 이전해야 할 수준이었다. 창밖으로 저무는 노을이 병실 안쪽까지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병상 한편에는 재범과 채은, 혜진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앉아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맞은편, 현수만이 유일하게 노트북 화면의 푸르스름한 빛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인 박자로 정적을 깼다.“이름 하나로... 정말 좁혀질까요?”준우의 물음에 현수가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안 돼도 밑져야 본전이죠. 전에는 그 이름 석 자조차 몰랐던 거니까.”준우는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눈을 감았다. 기억의 실타래를 역으로 감아올렸다. 분명 복도에서 스치듯 본 명찰 위에는 세 글자가 선명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름 위에 얹혀 있어야 할 얼굴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수채화 물감을 뿌려 뭉개버린 것처럼, 이목구비가 있어야 할 자리
017서울의 외곽, 간판조차 없는 건물의 지하 연구소. 낮은 웅성거림이 가득한 공기 속으로 날 선 대화가 섞여 들었다. 모니터 속에서는 준우가 움직이는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결국, 저놈을 확보해야 한단 소리군.”연구원 한 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화면 속 준우의 몸짓 하나하나를 뜯어보던 다른 연구원이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저 친구의 정화 능력만 있으면 약의 결함을 억제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소거할 수 있어. 이론상으론 완벽해지겠지.”“협력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 난감하군.”“그럼 협력하게 만들어야지. 우리가 늘 하던 방식대로.”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면 속 준우의 얼굴 위로 붉은 타깃 마크가 덧씌워졌다.***정오의 태양이
016집을 나선 준우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번에 쓰러지면 다시는 관리청의 의료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지금 제 발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영원히 괜찮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그를 움직였다.현수는 입구에서 서성이는 준우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좁혔다.“나와준 건 고마운데… 그 몸으로 정말 감당하겠어요?”준우는 굳은 얼굴로 대답 대신 짧은 숨을 내뱉었다.“집에 누워 있으면 속만 터질 것 같아서요. 가시죠.”팀원들은 더는 묻지 않았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의 눈빛에는 준우의 고집을 이해한다는 묘한 동질감이 서려 있었다. 준우를 선두로 움직이기 시작한 팀이 도착한 곳은 시내의 대형마트였다. 평일 낮인데도 장을 보러 나온 시민들로 북적이는 장소였다.“미쳤어. 여기서 터지면 답도 없는데.”채은이 혜진에게 바
015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감도는 병실 안, 공기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는 생각보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손에 들어왔다. 누군가 치밀하게 숨겨놓은 기밀이라기엔, 사본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뿌려질 만큼 관리가 허술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이 조항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듯했다.준우와 채은은 가까스로 초점을 되찾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 얼굴색은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독기를 품고 있었다. 현수는 종이 더미를 넘기며 한 글자씩 곱씹듯 읽어 내려갔다. 시선이 멈춘 곳은 마지막 장 하단,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특약 사항이었다.현수가 말없이 사본을 건네자 재범과 혜진의 미간이 동시에 좁아졌다.“교묘하네요.”재범이 낮게 읊조렸다. 가래가 끓는 듯 묵직한 목소리가 적막한 병실에 울렸다.“얼핏 보면 부작용에 대한 사후 관리 조항 같지만, 여길 보십시오. 독소 조항입니다.”혜진이 손가락으로 특정 문구를 짚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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