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정화자

폭주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정화자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5-08
بواسطة:  최코리타تم تحديثه الآ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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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과 불멸에 가까운 재생을 지닌 정화 능력자 최준우는, 폭주를 유발하는 의문의 약물 ‘마나’ 사건에 휘말린다. 약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그는 형사와 동료 능력자들과 함께, 관리청의 은폐와 약물의 진실에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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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فصل الأول

001 - 조금 이상한 일

001

첫 번째 의뢰를 마친 최준우를 맞이한 건 헬멧 스피커를 뚫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기계음이었다. 교차로 신호등 앞에서 기어를 중립으로 놓은 준우가 장갑 낀 손으로 헬멧 옆면을 툭툭 쳤다.

"여보세요."

"지금 OO사거리 근처지? 위치 찍어줄 테니까 바로 가. 폭주자다."

불쾌할 정도로 익숙한 팀장의 목소리였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끊길 것을 알기에, 준우는 짧게 대꾸했다.

"네, 신호 대기 중입니다."

이 일의 장점은 출근 카드를 찍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지만, 단점은 퇴근이라는 개념도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끊긴 화면 위로 빨간색 경고 좌표가 떴다. 준우는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핸들을 꺾었다. 집에 돌아가면 씻지도 않고 침대에 다이빙하려던 계획은 이제 아스팔트 위의 매연처럼 흩어졌다.

"또 뭔 놈의 폭주자야, 이 시간에."

준우가 오토바이의 사이렌을 올렸다. 푸른 불빛이 회색 도심을 갈랐다.

***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풍경은 이미 일상의 궤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인도는 물론이고 2차선 도로 전체가 끈적한 검보라색 액체로 뒤덮여 있었다. 중앙 분리대였던 쇠울타리는 독기에 녹아내려 마치 엿가락처럼 흐물거리며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폭주자는 더 이상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3미터 높이의 거대한 '독성 언덕'이었다. 맥동할 때마다 검보라색 진물이 울컥거리며 쏟아졌고, 아스팔트가 타들어 가는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준우는 헬멧을 벗어 시트에 걸쳤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검회색 곱슬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자, 피로가 섞인 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170cm 남짓한 준우의 체구에 비해, 눈앞의 괴물은 압도적인 질량감을 뽐내고 있었다.

'일반인은... 다 대피했나 보네.'

반파된 차량 서너 대가 독기에 녹아 연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다행히 내부에서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구경꾼들도 이미 저 멀리 달아난 뒤였다. 적막한 사거리에는 괴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자신의 심장 소리뿐이었다. 결국 이 지독한 오물을 치울 사람은 자신 하나라는 뜻이다.

준우는 습관처럼 헛웃음을 삼켰다. 지원형 능력자랍시고 자신을 먼저 보낸 본부의 의도는 뻔했다. '네가 가서 미리 좀 정리해놔라.'

"예, 예. 까라면 까야죠."

준우는 오토바이를 안전거리에 세운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빈손이었던 그의 오른손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더니, S&W M66 리볼버 한 자루가 형상화되었다. 실린더 안에는 금속 탄환 대신 그의 생체 에너지를 응축한 유백색 정화탄이 장전되어 있었다.

[탕! 탕!]

반동과 함께 발사된 두 발의 탄환이 괴물의 양팔—혹은 그렇게 보이는 돌기—에 정확히 박혔다.

"크아아아악!"

인간의 구조를 초월해 2미터 가까이 찢어진 아가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소리라기보다는 고막을 긁어내는 소음에 가까웠다. 준우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저건 이제 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사살 대상 확정.'

[탕! 탕! 탕!]

남은 세 발이 괴물의 상단부를 관통했다. 구멍 뚫린 상처 사이로 흰 연기가 솟구쳤지만, 괴물은 이내 상처를 수복하며 거대한 독성 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쿠웅—!]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아스팔트가 움푹 파였다. 괴물은 목표물이 짓눌렸는지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팔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곳에 준우는 없었다.

"어딜 봐."

괴물의 정면, 찰나의 거리였다. 앞점멸로 거리를 좁힌 준우가 괴물의 본체라고 짐작되는 머리 부분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기이이잉—]

준우의 손바닥에서 눈부신 백색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폭주자의 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꽤애액!"

소멸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인지, 괴물은 준우의 몸을 사정없이 타격했다. 방독 기능이 있는 특수 수트가 아니었다면 준우의 피부는 이미 진물에 녹아내렸을 것이다. 준우는 쏟아지는 충격을 이 악물고 버텨냈다.

점차 작아지던 괴물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만큼 수축하더니, 이내 한 줌의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바닥에는 정화되지 못한 미량의 검보라색 웅덩이만이 남았다.

'끝났나... 이제 나머지를...'

긴장이 풀리는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편두통과 함께 고막을 찢는 이명이 밀려왔다. 무릎에 힘이 풀리며 준우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지만, 시야는 이미 점묘화처럼 흐릿해졌다.

"괜찮으세요? 정신 차리세요!"

방호복을 입은 경찰관이 다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연이 보고 싶어서 누웠겠냐'는 냉소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밖으로 나온 것은 가느다란 신음뿐이었다. 준우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좀... 울려서 그렇습니다. 금방 치울게요."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은 준우가 마지막 남은 독성 웅덩이에 손을 뻗었다.

[구우웅—]

공명음과 함께 주변의 오염물질이 소멸했다. 사거리는 순식간에 기괴한 잔해만 남은 채 깨끗해졌다. 경찰들이 감탄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준우는 그 시선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투둑,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뜨거운 핏방울이 떨어졌다. 코피가 턱 끝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 준우의 몸이 인형처럼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

병원 천장은 어디나 똑같다. 지나치게 하얗고,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감았던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수액 팩에서 일정하게 떨어지는 투명한 방울이었다.

“지원형이셔서 우선 생체에너지 수액만 놔드리고 있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세요.”

지나가던 간호사가 무심하게 던진 말에 준우는 짧게 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오른팔을 들어 올리려다 이내 포기하고 천장의 무늬를 셌다. 이 풍경은 언제나 묘하게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도착하는 곳은 늘 고등학교 양호실이다. 차라리 아무 능력도, 생각도 없던 그때가 나았을까.

5년. 혹은 7급 공무원 6호봉.

준우를 설명하는 가장 건조한 수치들이다. 2020년 대파동 이후, 손끝에서 피어오른 그 가냘픈 빛줄기에 홀려 정부 전단지를 집어 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지 가끔 궁금해진다. 최소한 매달 도장 깨기 하듯 응급실 침대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문제는 이 빌어먹을 ‘정화’ 능력이 약조차 거부한다는 점이다. 몸 안에 들어온 화학 성분을 불순물로 인식해 밀어내 버리니, 진통제도 항생제도 듣지 않는다. 병원이 준우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텅 빈 에너지를 채워주는 비싼 수액뿐이었다. 기초수급비보다 많이 번다고 좋아해야 할지, 그 돈을 병원비와 맞바꾸는 손해를 한탄해야 할지 계산이 서질 않았다.

수액이 다 비워지자 준우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잠을 적게 자도 신체가 유지되는 초월적인 회복력은 현대 직장인에겐 축복이 아니라 재앙에 가까웠다. 직장 상사들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마 오늘 또 부르겠어.”

밤 10시. 병원 문을 나서는 준우의 어깨 위로 눅눅한 밤공기가 내려앉았다. 사고 현장에 버려두고 온 오토바이가 생각나 뒷머리를 긁적였다. 택시 앱을 켜 좌표를 찍는 손가락이 무거웠다. 그저 집에 가서 눕고 싶다. 침대 시트의 감촉을 느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치를 누리고 싶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칠판을 긁는 손톱 소리처럼 날카로운 벨 소리가 택시 안을 가른 것이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역시나 팀장이다.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최대한 피곤한 기색을 담아 딱딱하게 대꾸했다. ‘나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이다’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하지만 돌아온 명령은 그보다 훨씬 차갑고 견고했다.

— “OO공원으로 즉시 이동해. 2급 비밀이다. 폭주자는 반드시 생포해.”

“...네.”

3급도 아닌 2급. 거부하기에는 높디 높은 등급에 준우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기사님에게 목적지 변경을 요청하는 목소리에 패배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도착한 공원은 기괴할 정도로 밝았다. 어둠이 내려앉아야 할 시간임에도 공원 중앙은 푸른 도깨비불 수십 개가 일렁이는 듯한 섬뜩한 광채로 가득했다. 택시는 위험을 감지했는지 준우가 내리자마자 비명을 지르듯 액셀을 밟아 사라졌다.

“다른 능력자는요? 물이나 소화 능력자 없습니까?”

준우가 다가간 소방대원들은 방화천과 소화기를 동원해 불길을 가두느라 정신이 없었다. 땀과 재로 뒤범벅된 소방관 하나가 헬멧을 젖히며 준우를 확인했다.

“정화 능력자십니까?”

“네, 방금 도착했습니다.”

“제발 좀 막아주세요. 능력자들이 붙었는데도 저 불이 꺼지질 않아요. 이미 안쪽 사람들은….”

말끝을 흐린 소방관이 다급하게 일반용 방화복을 내밀었다. 준우는 눈을 감았다. 최악의 컨디션, 2급 기밀, 그리고 이미 발생한 사상자. 이 모든 악조건이 한데 어우러진 현장으로 등떠밀려 들어가는 기분은 참으로 엿 같았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푸른 불꽃 사이사이에 검푸른 선들이 섞여 맥동하고 있었다. 단순한 화재가 아니었다. 길목마다 타버린 생명체의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무들은 이미 숯조차 되지 못한 채 전소되었고, 지지하던 쇠 받침대만이 용암처럼 녹아 흐르고 있었다.

소화기 두 대를 전부 비우고 방화복 하나에 의지해 불길의 진원지에 도달했을 때, 준우는 제 눈을 의심했다.

‘가수 이현승? 저 사람이 능력자였다고?’

화면 속에서 미소 짓던 발라드 가수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황홀경에 빠진 듯, 혹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듯한 일그러진 표정으로 사방에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준우를 발견한 현승이 본능적으로 화염 줄기를 날렸다. 준우는 간발의 차로 피했지만, 뒤쪽의 고목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빨리 끝내야 한다.’

준우는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집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손끝에서 피어올라야 할 정화의 에너지가 방화복 안쪽에서 맴돌며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아, 이런….”

능력자용 특수 복장이 아닌 일반 방화복이었다. 외부 열기는 막아주지만 내부의 에너지를 밖으로 투과시키지 못하는 절연체나 다름없었다. 물 능력자가 일반 잠수복을 입고 잠수했다가 제 능력으로 만든 물에 갇혀 익사했다는 웃지 못할 뉴스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사이 현승은 폭주 주기가 짧아졌는지 화염 미사일을 사방으로 난사하기 시작했다. 불길의 방향은 이미 공원 너머 아파트 단지를 향하고 있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불나방은 타 죽기라도 하지, 나는 죽지도 못하고 구워지겠네.’

준우는 거칠게 방화복 지퍼를 내리고 옷을 내던졌다. 수트를 벗자마자 폐부를 찌르는 열기가 온몸의 수분을 앗아갔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통이 피부를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

“씨발!”

준우는 비명과 같은 욕설을 내뱉으며 지면을 박찼다. 한계를 넘어서는 출력으로 신체 기능을 가속했다. 찰나의 순간, 현승의 눈앞에 나타난 준우가 타오르는 그의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달궈진 불판 위에 맨손을 올린 것 같은 감각이 전해졌다.

“비명은 감옥 가서 질러.”

준우는 자신의 모든 생체 에너지를 현승의 머릿속으로 구겨 넣었다. 현승 역시 비명을 지르며 남은 불꽃을 전부 준우의 가슴팍에 쏟아부었다.

“으아아아악!”

누구의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공원의 불길을 압도했다. 시각도, 청각도 사라졌다. 오직 타 들어가는 통증만이 준우가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준우는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뼈가 드러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정화 에너지가 현승의 폭주한 핵을 잠재울 때까지, 그 고통의 시간을 온전히 견뎌냈다.

불길이 잦아들고 현승이 힘없이 늘어지자, 준우는 재생력이 돌아오기 시작한 앙상한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갈겼다. 확실한 제압이었다.

잠시 후, 불길이 잡힌 공원 중앙으로 소방관들과 다른 능력자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들은 그곳에 서 있는 무언가를 보고 경악하며 멈춰 섰다.

전신이 새까맣게 타버려 뼈와 살이 겨우 붙어 있는, 마치 해부학 표본 같은 형체가 현승 앞에 서 있었다. 그 괴기스러운 형체 위로 새살이 돋아나고 원래의 피부가 덮이기 시작했다.

준우는 피 냄새 진동하는 가래를 뱉어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다음엔... 능력자용 방화복 좀... 제때 챙겨주세요.”

말을 마친 준우의 몸이 힘없이바닥으로 꺾였다. 다시 시작된, 지긋지긋한 응급실행이었다.

***

7일.

준우에게 허락된 휴식의 유효기간이었다.

그중 사흘은 병원 침대 위에서 수액 줄을 단 채 의식 너머를 헤맸고, 나머지 사흘은 집 안의 커튼을 모조리 친 채 시체처럼 뻗어 있었다. 인간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씹어 넘긴 삼각김밥 몇 개를 제외하면, 기억에 남는 건 천장의 무늬뿐이었다.

마지막 하루. 준우는 구태여 집 밖으로 나와 카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연유를 과하게 추가한 차가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당분이 뇌에 닿자 비로소 세상의 색채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준우는 소매를 걷어 제 팔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묘했다. 화염에 휩싸여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녹아내렸던 피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재생된 살결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매끄러웠다. 하지만 그 매끄러운 피부 위로, 능력을 얻기 전 스스로 그어대며 남겼던 낡은 자해 흉터들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준우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삼켰다. 전신의 피부가 통째로 갈렸는데도, 영혼에 새겨진 것 같은 이 비루한 상처들은 정화조차 거부한 채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긴, 타버린 머리카락이 하루 만에 제 길이로 자라나는 마당에 논리를 따져서 뭐 하나.'

이 몸이 된 이후로 미용실 비용은 굳었지만,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꾸미는 즐거움 따위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재생의 기준점은 늘 '그날'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주일 전의 지옥도와는 상반된,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유모차를 밀며 담소를 나누는 부부, 햇볕을 쬐며 느릿하게 걷는 노인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뛰어가는 아이들까지.

순간, 귓가에 이현승의 찢어지는 비명과 살이 타들어 가는 비릿한 냄새가 스쳤다. 준우는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래도 이번엔 크게 한 건 했으니 당분간은 뒤치다꺼리나 시키겠지. 고인 물 웅덩이 정화나 공원 청소 같은 거나 하면서.'

그런 실없는 기대를 하며 멍하니 커피를 들이켜던 그때였다. 감각이 마비된 탓이었을까, 바로 옆자리에 누군가 다가와 앉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최준우 씨?"

[철컥]

사고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준우의 오른손에 실체화된 소형 리볼버가 옆 사람의 옆구리를 정확히 겨냥했다. 해머가 당겨지는 서늘한 금속음이 카페의 소음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상대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짙은 감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여자였다. 뒤로 바짝 묶은 머리와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그녀는, 당혹감을 억누르며 품 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대능력자 특수팀, 김현수 경위 입니다."

준우는 잠시 그녀의 눈을 응시하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리볼버를 흩뿌려 소환 해제했다. 그리고는 다시 특유의 의욕 없는 표정으로 돌아와 미지근해진 커피를 빨았다.

"경찰이 그때 현장에서 수거해 갈 건 다 가져갔을 텐데요. 전 폭주자를 패느라 바빠서 아는 거 없습니다."

적당히 둘러대면 형식적인 질문 몇 가지나 던지고 가겠지 싶었다. 준우는 벌써 그녀를 보낼 궁리부터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준우의 나태한 예상을 정면으로 깨부숐다.

"최준우 씨. 일주일 전 그 현장, 단순 폭주가 아니었습니다."

커피를 빨아들이던 준우의 볼 근육이 미세하게 멈췄다.

"이현승의 체내에서 발견된 건 과부하 된 마력만이 아니었어요. 정교하게 설계된 '촉매'가 나왔습니다."

김 경위의 낮은 목소리가 준우의 평화롭던 휴가 마지막 날을 잔혹하게 찢어발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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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 새로운 지원
003경찰차의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앞서 달려 나갔다. 준우는 헬멧 실드 너머로 멀어지는 경광등의 궤적을 쫓으며 가속 레버를 당겼다. 아스팔트의 진동이 손목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현장에 도착해 바이크 세우기가 무섭게 준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공기는 이미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사건 현장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 대신 허탈한 소란함만이 감돌았다. 멀어지는 앰뷸런스의 뒷모습, 그리고 이미 노란 폴리스 라인을 걷어내고 있는 경찰들. 현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굳은 얼굴로 남아 있는 대원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들의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절도 있게 휘두르는 현수의 손짓에서 당혹감이 읽혔다.그 사이 준우는 길가에 남은 흔적을 훑었다. 겉보기엔 말끔했다. 물 능력 폭주자가 할퀴고 간 자리는 소방 호스로 씻어낸 듯 축축하기만 했다. 하지만 준우의 감각은 예리한 바늘 끝처럼 한 지점을 찔렀다.‘이게 정말 끝이라고?’구석진 가로등 밑, 보도블록 틈새에 고인 물웅덩이 속에서 그것이 일렁였다.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기름띠나 오염물처럼 보이겠지만, 준우의 눈에는 명확했다. 썩은 멍자국처럼 번져 있는 검푸른 약흔. 정화 능력자가 개입한 흔적이었다. 그것도 아주 필사적으로, 하지만 어설프게 지우려다 실패하고 도망치듯 남겨진 잔해.“이미 상황 종료라네요.”어느새 다가온 현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수사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경찰 쪽에서 '빠르게' 제압하고 신병까지 확보했답니다. 능력 폭주범 치고는 이례적일 만큼 신속하죠. 하, 그런데 말이에요…….”현수의 시선이 준우가 보고 있던 보도블록 끝에 머물렀다. 찰나의 침묵.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이번에도 역시, 이게 있네요.”“네. 지우려고 애는 쓴 모양인데, 이 실력이면 차라리 안 건드리는 게 나았겠어요.”현수는 대답 대신 스마트폰을 꺼냈다. 셔터 소리조차 조심스러운 듯 여러 각도에서 약흔을 담았다. 액정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표정은 수사관이라기보다 거대한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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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 사거리 전투
004사내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을 때, 공기는 이미 비릿한 약의 잔향으로 진득해져 있었다. 살점이 터져 나가며 돋아난 검푸른 털과 거대한 골격. 5미터에 육박하는 괴수 곰이 사거리 한복판에 우뚝 섰다.“쿠어어어엉—!”단순한 포효가 아니었다. 물리적인 충격파가 대기를 찢었다. 근처 승용차들의 유리창이 일제히 비명 지르듯 박살 났고, 고막을 찌르는 진동에 현수와 준우는 본능적으로 귀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평화롭던 도심의 정오가 단숨에 지옥으로 변했다.아비규환은 순식간이었다. 유턴을 시도하던 차들이 엉겨 붙어 경적을 울려댔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운전석을 버리고 아스팔트 위로 쏟아져 나왔다. 인도 위를 걷던 이들 역시 구두 굽이 부러지는 것조차 모른 채 필사적으로 반대편을 향해 달렸다.준우가 현수의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파앗!]짧은 점멸과 함께 거리감을 벌린 준우가 낮게 으르렁거렸다.“지원 좀 불러주세요. 저 혼자 감당할 사이즈가 아닙니다.”대답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준우는 곧장 괴물을 향했다. 놈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아스팔트가 크래커처럼 부서져 나갔다. 준우는 품에서 익숙한 M66을 뽑아 들었다. 총구가 놈의 거대한 머리통을 정조준했다.[탕! 탕! 탕! 탕! 탕! 탕!]여섯 발의 총성이 연달아 고막을 때렸다. 탄환은 정확히 미간과 안구 주변에 박혔다. 하지만 경악스러운 광경이 이어졌다. 찢겨 나간 살점이 꿈틀거리더니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새살이 돋아 탄환을 밀어냈다.‘제길, 주사 두 개 분량은 역시 말이 안 되네.’속울음을 삼키는 찰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준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낚아챘다.“지금 네 바로 근처에 괴물이 나타났….”“상대 중이니까 지원이나 빨리 보내요!”팀장의 당황한 기색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늘 여유롭던 목소리가 멍청하게 “어? 어, 그래.”라고 답하곤 끊겼다. 준우는 핸드폰을 대충 쑤셔 넣었다. 놈이 이미 준우를 명확한 타깃으로 고정한 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기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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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 병실 대화
005준우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사흘이라는 시간이 통째로 증발한 뒤였다.처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천장의 백색등이 망막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러다 고요를 깨는 기이한 소음이 고막을 두드렸다.[우직, 우직, 우직.]단단한 것이 으스러지는 소리. 뼈가 나가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목재가 부러지는 소리도 아니었다. 준우는 천근만근 같은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병실 한구석,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사과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는, 무슨 종이컵을 구기듯 가볍게 으깨고 있었다. 옆에는 이미 반파된 수박이 놓여 있었다. 남자는 조각난 과일을 정성스럽게 쟁반에 담다가, 준우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었다.“채은아, 준우 님 깨셨다. 간호사 불러와.”그의 굵직한 음성에 맞은편 침대에서 꾸벅꾸벅 졸던 단발머리 여자가 눈을 번쩍 떴다.“아, 응!”여자는 제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 있던 또 다른 여성, 포니테일 머리의 여자를 조심스럽게 밀쳐내며 일어났다. 포니테일 여자는 이미 깨어 있었는지 무심한 표정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여자가 병실 밖으로 튀어 나간 건 거의 찰나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들이닥쳤다. 그녀는 준우의 상태를 빠르게 체크하더니 투명한 액체가 담긴 '생체에너지 수액'을 새로 교체했다. 소란이 지나간 자리, 준우의 침상 주변에는 낯선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웬일로 1인실인가 했더니.’준우는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짜 내 입을 열었다.“그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덩치 큰 남자, 재범이 손을 내저었다.“아니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해야죠. 준우 님 아니었으면 저희 셋 중 하나는 오늘 이 자리에 누워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옆에 앉은 두 여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준우의 눈에 그들의 기이한 외형이 들어왔다.스포츠머리를 투박하게 깎은 재범과 달리, 단발머리 채은은 흑발과 금발이 뒤섞인 머리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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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 복잡한 생각
006준우는 병원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짐 가방을 현관 구석에 던져두었다. 돌아온 집은 낯설 만큼 고요했다. 준우는 등기로 도착한 새 유심 칩을 끼워 넣었다. 작은 칩 하나가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사실 누군가 이 회선을 가로채거나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발끝을 간질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일개 공무원 신분의 능력자가 국가 단위의 정보망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그저 '설마 아니겠지'라며 눈을 감는 것뿐이다.화면이 밝아지며 통신사 로고가 떴다. 진동은 없었다. 당연히 쏟아질 줄 알았던 팀장의 호출도, 밀린 업무 메시지도 보이지 않았다.'일이 터질 타이밍인데.'준우는 단말기를 식탁 위에 엎어두었다.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만큼 살가운 성격도, 넘치는 사명감을 가진 이도 아니었다. 뜻밖의 정적은 달콤하기보다 오히려 찜찜한 뒷맛을 남겼다.침대에 몸을 뉘었다. 등받이 없는 고요함 속에서 시선은 자연스럽게 얼룩진 천장 모서리로 향했다. 눈을 감으면 과거의 잔상이 망막 위를 유령처럼 떠돌았다.어머니는 늘 무언가에 쫓겼다. 어린 준우에게 그것은 실존하는 '거대 조직'의 감시였다. 모자는 커튼을 굳게 치고 숨소리조차 죽인 채 어둠 속에서 서로를 확인했다. 창밖을 지나는 구두소리 하나에도 어머니의 눈동자는 비정상적으로 커졌고, 준우는 그 공포를 유전처럼 물려받았다.그 지옥 같은 숨바꼭질은 어머니의 자살로 끝이 났다.대학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날, 준우를 맞이한 건 싸늘해진 집안의 공기였다. 입관 전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얼굴은 기묘했다. 평생을 짓누르던 감시망에서 마침내 벗어났다는 듯, 그녀는 생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머니를 보내고 나서야 준우는 깨달았다. 자신들을 옥죄던 조직도, 도청 장치도, 검은 양복의 사내들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망상이 남긴 상처는 깊었다. 이미 아버지는 이혼 후 세상을 떠난 뒤였고, 준우는 텅 빈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아가 되어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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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 서류 조사
007 밤 공기가 내려앉은 경찰서 안은 적막했다. 꺼진 형광등 대신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광채만이 현수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화면 가득 띄워진 ‘승인 거절’ 팝업창들. 현수는 마른세수를 하며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하다못해 이것까지?” 실소가 터졌다. 이번엔 일부러 보안 등급이 낮은 외곽 데이터 위주로 접근했다. 그런데도 결과는 전부 반려였다. 경찰 전산망과 관리청 사이트를 쥐잡듯 뒤졌지만, ‘그것’에 관한 기록은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소거되어 있었다.  현수는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시스템이 거부한다면, 결국 아날로그로 회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진 곳에 자리한 수기 자료 보관소로 향했다. 철문을 열자마자 눅눅하고 매캐한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먼지가 내려앉은 서류 더미들이 천장까지 빼곡했다. 수십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그 공간은 묘한 압박감을 주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형체가 발밑에서부터 현수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짧게 호흡을 가다듬고 가장 안쪽, 연도가 가늠되지 않는 낡은 박스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종이 질감이 거칠었다. 서류를 한 권씩 빼낼 때마다 현수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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