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의 형과 불륜하겠습니다: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상태를 기록하던 강정연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다가 돌연 멈췄다.이상했다. 분명 심현호의 오른손은 배 위에 평온하게 놓여 있었는데, 어느새 지금은 침대 시트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파동 없는 모니터와 방금 전 이곳에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떠올리던 강정연은 헛웃음을 삼켰다.‘설마... 의식도 없이 누워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그를 자신들의 유희를 위한 소품 취급까지 했단 말인가?’기괴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스치자 심현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연민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복잡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강정연은 기록을 마치고 이도훈의 조언대로 심현호의 팔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기계와 병행하여 근육에 자극을 주어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함이었다.그런데 팔을 두어 번 주무르던 강정연은 다시금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힘없이 늘어져 있어야 할 팔 근육이 묘하게 긴장하며 수축하는 듯했던 것이다.그녀가 의아해하며 자세히 살피려던 순간, 이도훈이 학생들을 데리고 들어왔고 한 학생이 자연스럽게 마사지를 이어받았다.강정연은 이도훈을 향해 물었다.“교수님, 환자가 예상보다 빨리 회복될 가능성은 없나요? 이를테면 ‘최소 의식 상태’ 같은 단계로 진입한다든지요.”심현호처럼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에 놓인 환자에게 근육 반응이나 신경 제어를 기대하는 건 사실상 기적에 가까웠다. 외부 자극에 미세하게나마 반응하려면, 적어도 최소 의식 상태까지는 호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도훈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임상 치료를 시작한 지 고작 며칠이야. 이론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강정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어쩌면 곤두설 대로 선 신경이 만들어낸 환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앓아누운 환자가 하루아침에 기적처럼 호전될 리는 만무하니까.그녀는 미련 없이 생각을 떨쳐내고 종일 이도훈을 돕다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텅 빈 집에서 김미선이 저녁을 차려내며 상황을 전했다.“대표님은 접대가 있으시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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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정연아, 난 널 정말 사랑해. 네가 다른 놈의 자식을 가졌어도 난 다 상관없었어. 우리 제발 잘 지내자...”심주혁은 그녀를 끌어당겨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취기에 젖어 웅얼거렸다.‘다른 놈의 자식?’그 단어는 거대한 망치가 되어 그녀의 머리를 사정없이 강타했다.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감각 속에서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선명하게 뇌리를 스쳤다. 유산 소식을 들었을 때, 왜 그랬냐고 오열하던 자신을 그저 복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심주혁의 침묵을 말이다.강정연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날 밤 이후로 다른 누구와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고 유산 후에는 몸조리를 핑계로 그와도 동침하지 않았다.그렇다면...황당함을 넘어선 기괴한 가설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강정연은 온몸이 얼어붙는 오한과 함께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그날 밤의 남자는 심주혁이 아니었다.깨달음과 동시에 그녀는 자신을 안고 있던 남자를 본능적으로 밀쳐냈다.술기운 탓인지 심주혁은 힘없이 침대 위로 고꾸라졌고 알아듣지 못할 잠꼬대만 웅얼거릴 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강정연은 경련하듯 떨리는 손을 꽉 맞잡고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가다듬으며 무섭도록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사실 그녀가 몸을 아껴온 건 고리타분한 정조 관념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 게다가 냉정히 따져보자면 그날 밤의 남자는 퍽 훌륭했으니, 그녀 입장에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지금 그녀를 괴롭히는 의문은 따로 있었다.강정연은 미간을 좁히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아내가 외도를 했다는데 그걸 참고 넘길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심주혁은 그걸 견뎠고 심지어 받아들였다.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날 밤, 심주혁 역시 다른 여자와 몸을 섞었다는 것. 그리고 그 상대는 보나 마나 허수정일 터였다.심주혁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동시에, 혹시라도 아이를 갖게 된다면 심씨 가문과 심주혁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굳힐 수 있으니까.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침대 위에서 인사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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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숙취로 몸이 고단할 텐데도 다정한 목소리로 사과하며 오직 자신의 기색을 살피는 데만 급급한 모습을 보니, 어젯밤의 실언은 완전히 잊은 모양이었다.강정연은 내심 안도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괜찮아. 일이 먼저지. 오늘 출근 안 해?”마침 김미선이 제비집을 내오자 심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며 말했다.“형수님이 회장님께 부탁해 손을 써주시긴 했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노력해야지. 난 바로 출근할 테니 넌 집에서 몸이나 잘 추스르고 있어. 저녁엔 할아버지 댁에 가서 밥 먹자.”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승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강정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주혁이 나가는 것을 배웅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가시지 않는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그녀가 숟가락으로 제비집을 떠먹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다시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나갔던 심주혁이 사색이 된 얼굴로 돌아온 것이다.“정연아, 형수님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아기가 또 발작을 일으켜서 지금 응급 처치 중이래. 난 지금 안성 쪽 사람들과 급한 약속이 있어서... 미안하지만 네가 병원으로 가서 형수님 좀 챙겨줄 수 있을까?”다급한 눈빛을 한 그의 이마에는 옅은 식은땀마저 맺혀 있었다. 그녀가 아무 대답이 없자 그는 덥석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는데, 하필이면 다친 오른손을 건드리고 말았다.상처가 깊진 않았지만 손바닥 쪽이라 아무는 속도가 더뎠고 이제 겨우 딱지가 앉은 참이었는데 그가 세게 쥐는 바람에 상처는 기어이 다시 터져버리고 말았다.강정연이 짧은 비명을 삼키며 헛숨을 들이켜자 심주혁은 그제야 제정신이 든 듯 황급히 손을 뗐다.“정연아, 미안해. 내가 너무 경황이 없어서...”진작에 이 사내에게선 일말의 기대조차 거두었다고 믿었건만, 어찌 된 일인지 붉게 배어 나오는 피멍 위로 시큰한 통증이 가슴까지 번져왔다.“알았으니까 어서 가봐.”강정연은 눈빛에 서린 귀찮음을 숨기며 손을 빼냈다. 심주혁은 그제야 안심한 듯 몇 가지 당부를 더 늘어놓고는 다시 집을 나섰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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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나도 안다고요?”허수정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경계 가득한 눈초리로 강정연을 훑어보았다.하지만 이내 여유를 되찾은 듯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다.“농담도 참. 내가 그런 대단한 분을 알 리가 있나요. 어쨌든 정연 씨가 그 조 교수라는 분을 안다니 서둘러 모셔와 봐요. 알다시피 주혁 씨가 우리 준이를 친자식처럼 예뻐하잖아요.”거기까지 말한 허수정은 입가를 가리고 살짝 웃어 보였다.“정연 씨가 조 교수님만 무사히 모셔와 주면, 나랑 주혁 씨가 이 은혜는 톡톡히 갚을게요.”누가 들어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의도적인 도발이었다.아니나 다를까 곁에 있던 의사가 입을 열었다.“허 여사님과 남편분이 아이 때문에 얼마나 속을 끓이시는지 모릅니다. 고모님 되시나 본데, 조 교수님만 모셔와 주신다면 저 두 분이 고모님께 제대로 한턱내야겠습니다.”강정연은 태연하게 서 있는 허수정을 흥미롭다는 듯 훑어보며 의아한 척 되물었다.“고모요? 의사 선생님, 단단히 오해하셨네요. 전 아이의 숙모고 이분은 제 남편의 형수님입니다. 아주버님이 중병으로 입원하시는 바람에 제 남편이 형수님과 조카를 대신 돌봐주고 있는 것뿐이죠.”가차 없이 진실을 찌르는 말이었다.의사는 화들짝 놀라 안색이 잿빛으로 굳어버린 허수정과 여유롭게 미소 짓는 강정연을 번갈아 보더니,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는 헛기침을 했다.“보호자분들, 일단 아이부터 보시죠.”말을 마친 그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의사가 진료실로 발걸음을 재촉하자 근처에서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간호사들마저 흥미진진한 눈빛을 교환하며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한결 홀가분해진 강정연이 허수정에게 물었다.“형님, 저도 들어가서 아이 좀 봐도 될까요? 불편하시다면 그만두고요.”강정연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허수정의 표정이 험악하게 뒤틀렸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황을 반전시키려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돌연 눈시울을 붉히며 가련한 피해자로 돌변했다. “정연 씨, 다 내 탓이에요. 내가 잘못했어요. 원망하려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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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허수정은 흠칫 놀라며 경악에 찬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주혁 씨...”그러나 심주혁은 이미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강정연에게 다가간 상태였다.“형수님이 출산 후유증 때문에 지나치게 예민하신 거니까 네가 참아. 아까 말한 그 교수님, 네가 나서서 모셔와 줄 수 있어?”그 질문에 허수정마저 시선을 집중했다.하지만 강정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조 교수님과 친분이 있는 건 맞지만, 그분께 집도를 부탁하려면 먼저 치러야 할 조건이 있어.”허수정의 눈에 일순간 서늘한 독기가 서렸다. 강정연은 분명 이 핑계로 심주혁의 시선을 끌어당기려는 속셈이었다.그녀는 다시 심주혁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됐어요, 굳이 정연 씨한테 번거롭게 부탁할 것 없어요. 지금 당장 집에 가서 엄마, 아빠께 연줄을 알아봐 달라고 매달려 볼 거예요. 혹시 또 방법이 있을지 모르잖아요.”그러나 심주혁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강정연을 응시했다.“조건이 뭔데?”강정연의 입가에 돌연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1년 전 그 뺑소니범부터 잡아 와.”“정연아, 억지 부리지 마.”“억지 아니야.”심주혁의 눈빛에 노골적인 실망감이 서렸다.“말도 안 되는 고집 좀 그만 피워. 그 일은 내가 꼭 밝혀주겠다고 약속했잖아. 하지만 지금은 준이가 사경을 헤매는 상황이야.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잔인하게 굴 수 있어?”강정연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허수정을 똑바로 응시했다.허수정이 무언가 찔린 듯 시선을 피하자, 심주혁은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기며 강정연의 시선을 차단했다.“정연아, 너 변했어.”심주혁은 짧게 한숨을 내쉬곤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허수정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세심하게 여며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뒤돌아서며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굳이 네 손 안 빌려도 되겠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강정연이 물었다.“정말 내 도움 필요 없어? 나중에 후회하지 마.”그 말에 허수정의 심장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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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그것은 장식 하나 없는 은빛 초승달 모양의 펜던트였다.작고 동그스름한 펜던트는 가장자리가 부드럽게 마모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얕게 ‘소’자가 새겨져 있었다.강정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고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가득한 두 눈은 물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이 펜던트는 다름 아닌 그녀의 것이었다.중학교 시절 하굣길에 물에 빠진 오빠를 용감하게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생명의 은인이라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건네준 선물이었다.하지만 1년 전, 그 참혹했던 교통사고의 소용돌이 속에서 펜던트는 자취를 감췄다. 영영 잃어버린 줄로만 알고 체념했던, 소중한 추억의 파편이었다.그런데 이 펜던트가 대체 왜 여기에 떨어져 있는 걸까?강정연은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보살피며 이제 곧 고통이 끝나고 좋은 일이 찾아올 거라 속삭여주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바닥에 밟힌 탓에 붉은 매듭 끈은 조금 더러워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물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레 가방에 집어넣고서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병원 밖으로 나오자 승우가 이미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차에 올라탄 그녀는 집이 아닌 낯선 아파트 단지의 이름을 댔다.승우가 물었다.“사모님, 거긴 어쩐 일이십니까?”“친구를 좀 만나기로 해서요.”강정연의 말에 승우도 더는 캐묻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길가에 차를 세우며 말했다.“대표님께서 사모님을 꼭 안전하게 집까지 모셔다드리라고 당부하셨으니, 전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근 마트에 들러 우유와 비스킷을 샀다. 하지만 그렇게 단지 안으로 사라졌던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기다리던 승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벌써 나오셨습니까? 더 안 머무르시고요?”“얼굴만 잠깐 보러 간 거라 그래요.”강정연은 말을 아꼈다. 승우는 심주혁의 사람이니 말을 길게 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차에 올라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어르신 댁으로 가요. 방금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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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심종수는 올해로 팔순을 바라보지만 정정하고 기운이 넘쳐 목소리에 늘 힘이 실려 있었다.지난 1년간 심주혁이 허수정을 유독 편애하며 도를 넘는 행동을 할 때마다, 그를 따끔하게 혼내고 강정연을 감싸준 건 늘 심종수였다.강정연의 마음 한구석에 훈훈한 온기가 번졌다.허수정이 뺑소니 사고의 진범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감싸기만 하던 심주혁이 심지어 그녀와 아이까지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강정연은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을 누르며 복수를 다짐했었다. 그러나 자신을 걱정해 주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온기가 닿는 순간, 억눌러온 서러움은 둑이 터지듯 터져 나오고 말았다.강정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노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심종수는 즉시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서릿발 같은 기세로 엄하게 물었다.“주혁 그놈이 네 속을 썩이는 게냐? 내 진작부터 수정이더러 여기 들어와 살라고 일렀거늘. 보살필 사람이 필요하면 전문 간병인을 몇 명이고 더 붙여주면 될 일이지, 너희 어린 부부끼리 수발드느라 진을 뺄 게 뭐 있다고 고집을 피워!”다혈질인 심종수는 강정연이 말릴 틈도 없이 곧장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심주혁, 당장 본가로 튀어 오너라. 할 말이 있으니!”폭풍처럼 전화를 끊어버린 노인을 보며 강정연은 체념 섞인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혈압 높으시잖아요. 의사 선생님이 절대 화내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는데... 주혁 씨랑은 아무 일 없으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마세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종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등을 쓰다듬으며 거친 호흡을 진정시켜 드렸다. 다만 그녀의 눈빛에는 어쩔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연세가 많으신 데다 큰 병을 몇 번이나 넘기셨기에, 겉으론 정정해 보여도 심종수는 작은 자극조차 견디기 힘든 상태였다. 만약 심주혁과 허수정 사이의 추악한 진실이 밝혀진다면, 그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그녀는 내심 불안했다.강정연은 적어도 지금은 할아버지께 진실을 내색해서는 안 된다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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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진 변호사는 주경시에서 가장 실력 있는 변호사다. 그 집안 어른과 내 인연이 깊어 특별히 당부해 두었으니, 네 사건을 직접 맡아줄 게야.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해자가 죗값을 치르는 건 시간문제다.”강정연은 명함을 받아 들고는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톱 변호사였다.사실 간단한 뺑소니 사건이 1년이나 제자리걸음이었던 건 가해자가 법을 교묘히 이용해 빠져나갈 구멍만 찾았기 때문이었다.그녀도 진작 진 변호사를 선임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완벽하게 처리하겠다며 온갖 감상적인 핑계를 늘어놓던 심주혁 탓에 지금까지 지체된 일이었다.심종수가 직접 인맥을 써서 도와주는 모습에 강정연은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무언가 더 대답하려던 순간, 현관 쪽에서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둘째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고개를 돌리자 심주혁이 문밖에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에 나갈 때 입었던 양복 차림 그대로,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사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듯한 모습이었다.“할아버지,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급하게 부르셨어요?”심주혁이 웃으며 다가와 강정연의 옆에 앉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 했으나 헛손질만 하고 말았다.강정연이 그와 신체 접촉을 하고 싶지 않아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기 때문이다.심주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거두고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심종수의 엄중한 목소리가 거실을 무겁게 내리눌렀다.“이제 수정이도 아이를 낳았으니 너도 마음잡고 정연이 곁을 지켜야지. 며칠 내로 일 정리하고 정연이랑 같이 여행이라도 다녀오너라.”심종수의 말투에는 명백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심주혁은 할아버지가 왜 이토록 급하게 자신을 불러들였는지 단번에 눈치챘다.그는 약간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강정연을 돌아보며 말했다.“정연아, 기분 안 좋은 게 있으면 나한테 직접 말해. 할아버지 연세도 많으신데 사소한 일로 자꾸 걱정 끼쳐 드리지 말고. 내가 조만간 너랑 시간 보내겠다고 약속도 했잖아.”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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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허수정은 들어오자마자 생긋 웃으며 심종수 곁으로 다가갔다. 살갑게 안부를 물으며 병원에 있는 아기 소식을 은근슬쩍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심종수는 허수정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증손주에게는 관심이 많았기에 몇 마디 더 묻더니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고생했다.”그사이 가정부가 몇 가지 요리를 더 내오면서 식탁은 여럿이 먹기에 충분할 만큼 풍성해졌다.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자, 강정연은 대화의 빈틈을 타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숙모님들이랑 삼촌들은 오늘 어쩐 일로 다 같이 오셨어요?”그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기 위한, 가벼운 인사치레에 불과한 질문이었다.그러자 둘째 숙모가 허수정을 힐끗 보더니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안 그래도 우리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어. 수정이가 그러더구나. 다 같이 본가에 모여서 아버님 말동무도 해드리고, 또 주혁이한테 무슨 좋은 소식이 있다고 다들 모이라고 하길래 왔지.”모두의 시선이 허수정에게로 쏠렸다.그러자 허수정은 심주혁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주혁 씨, 안성 쪽 프로젝트는 이미 해결됐잖아요? 워낙 큰 사업이니 가족들에게도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숙모님들 댁 아이들도 다 졸업했으니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시켜서 실무 경험도 쌓게 해주면 좋잖아요.”‘안성 프로젝트라고? 분명히 무산된 것 아니었나?’강정연은 속으로 의아해하며 선배 쪽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심주혁을 바라보았다.심주혁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허수정의 격려 어린 눈빛에 힘입어 입을 뗐다. “사실 안성 프로젝트가 최근 난관에 부딪혔던 건 맞습니다. 그런데 형수님이 허 회장님을 통해 그쪽 하 본부장님과 연결해 주신 덕분에 여기 오기 직전에 계약서를 썼습니다. 아직 세부 절차가 조금 남긴 했지만요.”그 소리에 둘째 삼촌 심태웅이 무척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그거참 잘됐구나. 현호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회사에 난리가 날까 봐 다들 걱정이 많았는데, 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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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저기, 심 대표님, 계약은 아무래도 어렵게 됐습니다. 심현호 대표님이 직접 챙겼다면 이 프로젝트는 분명 성사됐을 텐데 말입니다.”하 본부장은 다급하게 말을 마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가뜩이나 조용한 분위기는 이제 적막하다 못해 살얼음판 같았다.심주혁은 거의 본능적으로 허수정을 바라보았고 허수정 역시 사색이 된 얼굴로 횡설수설할 뿐 방금 전까지의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풋.”정적을 깬 것은 심재열의 짧은 비웃음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종수에게 술 한 잔을 올린 뒤 아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내 말이 맞지? 누구나 현호처럼 무너져가는 회사를 바로잡을 능력이 있는 건 아니야. 구경할 만큼 했으니 이만 가자고. 애도 어린데 회사에서 폼이나 잡고 있는 것보다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게 훨씬 낫겠어.”심태웅도 아내와 함께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떴다.반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요리를 들고나온 가정부는 텅 빈 식탁을 보며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다들 어디로 가신 거예요?”강정연은 사실 웃음을 참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그녀는 어두운 안색으로 자리에 다시 앉은 심주혁 그리고 당혹감과 난처함이 얼굴에 가득한 허수정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마침내 직접 일어나 해삼 계란찜을 심종수 앞으로 가져갔다.“주혁 씨는 아직 젊으니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믿어주시는데 주혁 씨도 절대 그 기대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심종수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더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음식만 입으로 가져갔다.심주혁은 프로젝트가 결국 무산되었다는 번잡한 마음에 깊이 빠져 있다가, 강정연의 부드러운 위로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려 그쪽을 바라보았다.그의 아내는 심종수 곁을 지키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심종수가 못마땅한 듯 심주혁을 나무라려 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며 남편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다.그의 마음속에 갑자기 미안함이 피어올랐다.요즈음 강정연이 자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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