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스님 만들기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24 챕터

제11화

강주혁은 감정을 추스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갔다.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한지영이 환하게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고 그 순간, 강주혁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거실에는 그녀뿐만 아니라 한태준과 최명희도 함께 있었다.“주혁아, 좋은 소식이 있어!”한지영이 그를 껴안으며 눈을 반짝였다.“내 병이 오진이었대! 나 이제 안 죽는대...”강주혁은 그녀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으나,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정말 오진이래?”“그럼, 확실하고말고!”한태준이 감격 어린 표정으로 검사 결과지를 강주혁 앞에 내밀었다.“지영이는 그저 양성 종양이었어. 제거만 하면 아무 문제 없다는군. 오진했던 의사는 이미 해고했어.”강주혁은 고개를 숙여 손에 든 결과지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고 물었다.“이 사실, 소희도 알아요?”순간 한태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색해졌다.그때 최명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강주혁 앞으로 다가왔다.“주혁아, 우리도 마침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어.”그녀가 말을 멈추더니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너도 알다시피 지영이랑은 이미 혼인신고도 마쳤고 결혼식까지 올렸잖니. 이제 지영이 건강도 회복됐으니, 너랑 소희도 이제는...”“소희와 정리하라는 말씀이신가요?”강주혁이 최명희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반문했다.최명희가 멈칫했다.어떻게 하면 체면을 차리며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강주혁이 덤덤하게 내뱉었다.“그러죠.”순간 정적이 감돌았다.강주혁이 이토록 순순히 승낙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한지영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진심이야?”한지영이 까치발을 들고 두 손으로 강주혁의 얼굴을 감쌌다.“정말 소희를 포기하고 나를 택하겠다고?”강주혁은 한지영의 허리를 감싸 안았으나 표정에는 여전히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우린 원래 명실상부한 부부니까.”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애초에 내가 소희와 결혼했던 것도 너 때문이었어.”그 말에 한지영의
더 보기

제12화

두 달 후, 한지영이 임신했다.임신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녀를 괴롭히던 불안감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갔다.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강주혁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내밀었다.“주혁아, 나 임신했어. 너 곧 아빠가 될 거야.”강주혁은 테스트기를 건네받아 긴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문질렀다.“표정이 왜 그래? 기분이 별론가 봐.”한지영이 강주혁의 목을 껴안으며 물었다.“소희가 가버리니까 마음이 허전해?”강주혁은 한지영의 허리를 감싸 쥔 손에 힘을 살짝 주며 대답했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아이한테 안 좋으니까.”강주혁은 몇 마디 말로 한지영을 달랜 뒤, 모레로 예정된 병원 검진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밤이 깊어지자 강주혁은 테라스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자욱한 담배 연기 너머로 그는 다시 한번 한소희를 떠올렸다.한소희는 출국한 이후 단 한 번도 먼저 연락해오지 않았다.비서를 통해 한소희가 A국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강주혁은 매일 그녀의 사진을 한 장씩 찍어 보내라고 명령했다.마침 새로운 사진이 도착했다.강주혁이 확인한 사진 속 한소희는 길가에 쪼그려 앉아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고 따스한 햇살이 그녀의 실루엣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강주혁은 사진 속 한소희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그가 지금 당장 한소희를 찾아가지 않는 건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 계획을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잘 알고 있었다.지금 한소희에게 달려가 봤자 입에 발린 사과 말고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을.한소희에게 상처를 준 인간들을 하나하나 처리한 뒤에야, 비로소 그녀 앞에 설 자격이 생길 터였다....이틀 뒤, 강주혁의 비서가 산전 검사를 위해 한지영을 데리러 왔다.한지영은 가는 내내 친구들과 통화하며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꼭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중에 가업을 물려받아서 주혁의 짐을 덜어줄 수 있을 테니까...”백미러로 한지영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비서의 눈에 찰나의 동정심이 스쳤다.한참을
더 보기

제13화

최명희는 곧 한지영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한지영과 도통 연락이 닿지 않자 그녀는 할 수 없이 부하에게 차를 대기시키라 일렀다. 세강 그룹으로 가서 강주혁을 직접 찾아낼 생각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믿었던 부하가 그녀를 기절시켰다.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최명희를 맞이한 건 아찔한 절벽 위의 풍경이었다.손발은 꽁꽁 묶여 있었고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만장 심연으로 추락할 위기였다.“이준아, 이게 무슨 짓이야!”최명희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남자가 차갑게 대꾸했다. “사모님과 한지영 씨가 저지른 일들, 강 대표님이 전부 알아버리셨습니다. 사모님이 한지영 씨에게 절벽 투신 자작극을 제안하신 것까지 말이죠.”최명희가 충격에 휩싸여 눈을 부릅떴다.“이준아, 넌 내 사람이야! 어떻게 강주혁의 개 노릇을 할 수 있어?”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틀린 말은 아니죠. 당신 밑에서 개처럼 구른 지 10년이니까. 그런데 그 대가로 제게 주신 게 뭡니까?”최명희는 말문이 막혔다.“우리 어머니가 위독하셨을 때 사모님은 모른 척 방관한 것도 모자라, 병원비로 날 협박했습니다. 이제 내 아들이 아프니까 이번에도 그 아이를 이용해 더러운 짓거리를 시킬 생각부터 하더군요.”남자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하지만 이제, 그 짓거리도 끝입니다. 더는 사모님 밑에서 기어 다닐 이유가 없어졌거든요!”“이준아, 너 이러면 안 돼... 아악!”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명희는 절벽 아래로 밀려 떨어졌다.딱딱한 돌덩이에 뼈가 부딪히자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한지영은 밀려드는 통증에 숨을 들이켜며 남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두고 봐. 돌아가자마자 한태준한테 말해서 널 갈가리 찢어 죽여버릴 테니까!”그러자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회장님도 지금 제 코가 석 자라, 사모님 뒤처리해 줄 여유는 없으실 텐데요.”같은 시각, 세강 그룹 회의실.한태준은 먹구름이 잔뜩 낀 얼굴로 앉아 있었다.강주혁이 무슨 귀신에 홀
더 보기

제14화

세강 그룹의 파상공세는 빠르고도 잔인했다.한태준은 평생 일군 가업을 넘겨줄 수 없어 밤잠을 설치며 버텼지만, 강주혁의 무자비한 수단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한태준을 더욱 절망하게 만든 것은 회사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아내와 딸마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이었다.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한태준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사인할게!”그는 강주혁의 사무실로 들이닥쳤다.“주식 양도서 어디 있어? 지금 당장 사인할게!”그러나 강주혁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한진 그룹은 곧 빈 껍데기가 될 텐데 그런 종이 쪼가리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그 순간 한태준은 눈앞이 캄캄해졌다.더 이상 강주혁과 실랑이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처자식을 찾아 나섰지만, 돌아온 것은 두 사람이 이미 국내에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뿐이었다.부하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보고를 이어갔다.“한지영 씨는 병원 폐건물에 사흘간 갇혀 있었습니다. 철문이 열렸을 때 한지영 씨가 흘린 피는 이미 까맣게 굳어 있었고 복중의 아이를 유산한 채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최명희 역시 전신 분쇄 골절로 폐인이 된 채, 미쳐버린 정신으로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잘라버린 상태였습니다.”강주혁이 이토록 잔인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한태준은 그의 악행을 세상에 알리려 했으나 그를 도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한진 그룹이 공중분해 되어 강주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병석에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모든 복수를 마친 강주혁은 비로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마침내 한소희를 괴롭혔던 자들을 처단한 것이다.그리고 이제, 스스로를 단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강주혁은 비서를 찾아 한소희의 현재 주소를 물었다.그런데 뜻밖에도 비서가 강주혁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대표님을 속였습니다.”강주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똑바로 말해.”“사모님께서 출국 후 A국으로 가신 건 사
더 보기

제15화

유지호는 거대 다국적 해운 기업인 유현 그룹의 후계자로 주요 항구의 운영 실태를 직접 시찰하기 위해 이 여객선에 올랐다.그가 한소희를 처음 발견한 것은 어느 화려한 연회장이었다.소란스러운 유흥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구석에 앉아 키보드 위로 가느다란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던 그녀의 모습은 유지호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그는 무턱대고 다가가 말을 거는 대신 웨이터를 시켜 신선한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바에 기댄 채, 글 속에 완전히 몰두해 있는 그녀를 조용히 눈에 담았다.본래라면 평생 접점이 없었을 두 사람이었으나,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던 한 남자가 한소희를 위협하려던 순간 유지호가 거침없이 나서서 상황을 해결해주며 두 사람의 거리는 급속도로 좁혀지기 시작했다.그때 유지호는 한소희가 작가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어떤 글인지 궁금한데, 실례가 안 된다면 볼 수 있을까요?”유지호는 소파 등받이에 긴 손가락을 얹고 한소희의 노트북 화면 끝자락에 시선을 둔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한소희는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보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럼요.”그녀는 유지호의 이메일로 원고를 보냈고 그날 이후 유지호는 꼬박 이틀 동안 자취를 감췄다.자신의 소설이 재미없어 유지호가 등을 돌린 줄 알았던 그때, 그는 놀랍게도 출판 계약서를 들고 나타났다“소희 씨가 쓴 소설이 정말 좋습니다. 제가 투자를 해서 출판하고 싶은데, 관심 있으신가요?”한소희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의 글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흔쾌히 승낙했고 그 일을 계기로 유지호와의 관계는 한층 더 가까워졌다.유지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고 바닷바람이 그의 단정한 옆모습을 스쳐 지나가며 눈썹 뼈 아래로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팬 미팅 현장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계속 소희 씨 곁에 있을 겁니다.”한소희는 잠시 멍해졌다. 갈매기 소리가 파도 소리와 섞
더 보기

제16화

한소희가 몸을 돌려 나가려 할 때, 문고리에 손끝이 닿기도 전 강주혁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레스토랑을 통째로 봉쇄했으니 나갈 수 없어.”한소희의 뒷모습이 딱딱하게 굳어졌다.천천히 몸을 돌린 그녀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서리가 서려 있었다.“강주혁, 나를 속여 여기까지 불러내느라 참 대단한 공을 들이셨네.”낯선 눈빛에 강주혁의 심장이 찔린 듯 아려왔다.그가 급히 다가와 쉰 목소리로 말했다.“한지영이 너를 함정에 빠뜨린 일, 전부 알아냈어. 그리고 네가 유산한 일까지...”‘유산’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한소희는 가슴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의 손이 목을 세게 움켜쥔 듯 숨조차 쉴 수 없었다.그녀는 즉각 반걸음 물러나며 강주혁과 거리를 두었다.“그래서?”그녀가 물었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강주혁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거부하는 그녀의 반응에 숨이 턱 막혔다.“소희야, 내가 그 여자에게 속았던 건 죽음을 앞둔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야. 만약 그 여자의 병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절대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거야...”과거의 한소희는 강주혁이 자신을 믿어주길 수만 번도 더 바랐었다.하지만 정작 그가 자신의 편에 선 지금, 그녀의 마음에는 더 이상 아무런 파동도 일지 않았다.“강주혁.”그녀가 어렵게 입을 뗐다.“한지영의 꾐에 빠졌든 아니든, 당신이 내게 준 상처는 결코 아물 수 없어.”그가 한지영을 위해 그녀에게 남긴 상처들은 오랜 시간 그녀의 삶을 갉아먹었다.지금 이 순간에도 강주혁이라는 존재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온몸을 집어삼키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소희야...”강주혁이 한소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제발 기회를 줘. 예전처럼 다시 되돌릴 수 있게 내가 다 보상할게.”그의 손이 닿은 피부가 불에 데인 듯 아파오자 한소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밀쳐냈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선물도 바닥으로 떨어졌다.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그때, 한 남자가 성
더 보기

제17화

한소희는 귀가하자마자 지독한 고열에 시달렸다.깊이 봉인해 두었던 기억들이 해일처럼 밀려와 한소희를 빈틈없이 옥죄었던 것이다.그동안 유지호는 한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한소희가 오한에 떨던 깊은 밤에도 유지호는 쉼 없이 그녀의 이마 위에 놓인 따뜻한 수건을 갈아주었고 갈증에 목이 타 눈을 뜬 새벽이면, 늘 머리맡에는 유지호가 준비해 둔 적당한 온도의 물이 놓여 있었다.사흘이 지나서야 마침내 한소희의 열이 내렸다.유지호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을 손에 든 채 한소희의 이마를 짚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몸은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한소희는 힘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답했다.“괜찮아요.”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유지호는 그녀가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한소희를 알고 지낸 지난 반년 동안 그는 그녀의 사생활을 단 한 번도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강주혁이 나타난 이후에야 그녀에게 이토록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는 사람을 시켜 한소희의 과거를 조사했고 그 진실을 마주할수록 가슴이 서늘해졌다.4년 전 그녀는 이복 언니를 대신해 강씨 가문의 후계자 강주혁에게 시집갔으며 4년 뒤 한지영이 귀국하자 강주혁은 온갖 배신을 일삼았던 것이다.회상을 끝낸 유지호가 한소희에게 서류 한 뭉치를 내밀었다.“강주혁이 대체 어떤 수단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불과 몇 달 만에 한진 그룹을 손에 넣었더군요. 그리고 지금, 그 회사를 소희 씨에게 주겠다고 합니다.”“아니요, 필요 없어요!”강주혁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한소희는 사색이 되어 서류를 밀어냈다.유지호는 미간을 좁혔다.한소희가 고열에 시달리던 며칠 동안 그는 그녀의 잠꼬대를 수없이 들었다.“살려줘...”“내가 한 게 아니야...”그는 그것이 한소희를 괴롭히는 트라우마의 파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한소희는 마치 타조처럼 제 몸을 웅크린 채 과거의 기억을 외면하려 애썼지만, 깊게 파인 상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아문 적이 없었다.
더 보기

제18화

곧 별장 대문이 열리고 유지호의 훤칠한 실루엣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으며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쥔 그의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끊임없이 배어 나와 하얀 셔츠를 자극적인 붉은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다친 거예요?” 한소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유지호를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유지호는 그녀의 손목을 가로채듯 붙잡으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오라고 했어요?”한소희는 유지호의 시선을 피하며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차분하게 대꾸했다.“먼저 상처부터 치료해요. 강주혁의 일은 내가 해결할게요.”그 말에 유지호는 상처가 터져 피가 배어 나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소희를 거칠게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강주혁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에요. 지금 들어가면 제 발로 덫에 걸려드는 거라고요.”한소희는 유지호의 피 묻은 손가락을 맞잡으며 그의 손바닥을 살며시 눌렀다.“지호 씨, 나를 믿어줘요.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어요.”그때 뒤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재촉했다.“한소희 씨, 사람을 만났으니 이제 들어가실까요?”“알았어요.”한소희는 짧게 대답하고는 유지호를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기다려요. 금방 올 테니까.”유지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무언가 말하려는 듯 목울대를 들썩였으나, 끝내 한소희를 깊은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한소희가 무사히 별장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순간, 유지호의 꼿꼿하던 몸이 휘청였다.비서가 급히 달려와 탈진해 쓰러지는 유지호를 받아냈다.“빨리 차 대! 병원으로 가자!”...검은 양복의 남자를 따라 방으로 들어선 한소희는 문이 닫히자마자 뒤에서 덮쳐오는 뜨거운 가슴팍을 느꼈다.강주혁의 두 팔은 철갑처럼 한소희를 가두었고 그의 뜨거운 숨결은 한소희의 뒷덜미와 예민한 피부 위로 흩어졌다.한소희는 온몸이 경직되었으나 거부하며 발버둥 치지는 않았다.벽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를 응시하는 한소희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차
더 보기

제19화

강주혁의 의도적인 환심 속에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갔다.강주혁은 한소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전 세계의 보물들을 긁어모았다. 최고급 경매품부터 한소희만을 위한 명품 옷들이 끊임없이 한소희 앞으로 배달되었다.하지만 이제 아무리 값비싼 선물이라 해도 한소희의 마음속에는 단 한 조각의 파동조차 일으키지 못했다.한소희는 늘 정원에 홀로 앉아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둔 채 키보드를 두드리며 가느다란 타자 소리를 내곤 했다.강주혁은 처음에 그것을 그저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소일거리라 여겼다.그러던 어느 오후, 비서가 태블릿 PC를 내밀었다.“대표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비서의 표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할 만큼 복잡해 보였다.강주혁이 화면을 들여다보자 그곳엔 한소희가 연재 중인 소설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잠시 글을 읽어 내려가던 강주혁의 안색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한소희가 써 내려간 소설 속 여주인공의 삶은 그녀가 겪은 비극과 소름 끼칠 정도로 판박이였다.지난 며칠간 한소희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자신의 흉터를 문장으로 빚어내어 세상 사람들의 품평 속에 내던지고 있었던 것이다.누리꾼들은 한소희의 소설을 통해 강씨 가문과 한씨 가문의 추악한 과거사를 낱낱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지영의 파혼과 도망, 한소희의 대리 결혼, 그리고 이어진 강주혁의 배신까지... 모든 조각이 맞춰지자 세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최근 회사도 큰 타격을 입은 데다 여론의 뭇매까지 맞고 있습니다. 지금 제어하지 않으면 협력사들 쪽에서...”“그대로 둬.”강주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비서의 말을 잘라냈다.“이게 한소희가 원하는 거라면, 난 기꺼이 맞춰줄 거야.”비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는 오랫동안 강주혁을 곁에서 지켜봐 왔기에, 그가 어떤 부분에서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편협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처럼 유지호가 세강 그룹을 무너뜨리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한소희의 손에 의해 기업이 조금씩 망가져 가는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더 보기

제20화

멀어져 가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를 뒤로한 채, 한소희의 창백한 얼굴 위로 차가운 빗줄기가 눈물과 뒤섞여 흘러내렸다.별장 앞 시멘트 바닥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여전히 강주혁의 피가 끈적하게 남아있었다.그때 눈 부신 헤드라이트 불빛이 빗줄기를 가르며 나타났다.검은색 마이바흐가 그녀 앞에 급정거했고 유지호는 우산을 챙길 겨를도 없이 차에서 내려 자신의 코트로 그녀를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소희 씨.”유지호는 그녀를 제 뼈와 살 속에 새겨 넣으려는 듯 세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겁내지 말아요, 다 끝났어요. 우리 이제 집으로 가요.”한소희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익숙한 시더우드 향기를 맡았다.포옹이 너무나 강렬해 갈비뼈가 아려올 정도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통증이 그녀의 떨림을 멎게 했다.온기가 가득한 차 안에서 유지호는 담요로 한소희를 겹겹이 감싸주었다.그제야 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그동안 형통, 만승등 일곱 개 회사와 연합하여 세강 그룹의 모든 시장 점유율을 빼앗아 왔어요. 어제 법원에서 강주혁의 모든 자산을 동결했고요.”백미러에 비친 유지호의 눈빛은 밤보다 더 깊고 어두웠다.“강주혁은 이제 한 푼도 남지 않았어요. 다시 일어설 밑천조차 안 남은 거죠.”그제야 정신이 든 한소희가 나직이 물었다.“부상은 좀 어때요?”아까 그녀를 너무 세게 끌어안은 탓에 혹여 상처가 덧나지는 않았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유지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난 진작 다 나았어요. 오히려 소희 씨가 걱정이지.”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덧붙였다.“소희 씨, 앞으로는 나를 좀 더 믿어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소희 씨를 안전하게 지켜줄 테니까.”...그 후 한소희는 유지호 소유의 산 중턱 별장에 머물며 한동안 평온한 시간을 보냈고 유지호는 대부분의 업무를 재택으로 처리하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두 사람은 소파와 식탁에 각각 자리를 잡고 앉아 각자의 일에 몰두하곤 했는데, 따로 떨
더 보기
이전
123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