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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스님 만들기

남편 스님 만들기

By:  꿀떡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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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혁과 결혼한 지 4년째 되던 해, 한소희는 아이를 가졌다. 보건소에 임산부 등록을 하러 갔을 때,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산모님, 남편분과 아직 혼인신고 안 하셨나 봐요? 전산상으로 지금 미혼으로 나오시는데요?” 한소희는 당황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4년 전에 구청에 같이 냈는걸요.” 직원은 난처한 듯 모니터를 돌려 보여주었다. “혼인관계증명서상에 배우자 칸이 완전히 비어 있어요.” 한소희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구청까지 달려가 확인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똑같았다. “강주혁 씨는 이미 혼인신고가 되어 있습니다. 배우자분 성함은 한지영 씨로 되어 있네요...” 한지영? 한소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한지영은 한소희의 이복 언니이자 강주혁의 첫사랑이었다. 그해, 한지영은 꿈을 좇아 외국으로 떠나며 결혼식 당일 도망쳤고 강주혁을 매몰차게 버렸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한지영이 강주혁의 법적 아내로 되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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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한소희는 초점 잃은 눈빛으로 비틀거리며 구청을 빠져나왔다.눈앞에 멈춰 선 택시에 올라타고 나서야 꾹 참았던 눈물이 소리 없이 쏟아져 내렸다.4년 전, 가문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도망친 언니 대신 강주혁과 정략결혼을 했던 그녀였다.초반만 해도 얼음처럼 냉랭하기만 했던 강주혁이었다. 하지만 묵묵히 제 곁을 지키며 살뜰히 내조하던 한소희의 정성에 그의 단단했던 마음의 빗장도 결국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어느덧 그는 그녀가 자신의 일정을 마음대로 바꿔놓는 것을 허락했고 시시한 농담도 묵묵히 들어주었으며 기밀문서까지 그녀에게 맡길 만큼 신뢰했다.시간이 흐를수록 한소희를 향한 그의 애정은 바닥을 모른 채 깊어만 갔다.한도 없는 블랙카드를 쥐여주는 것은 예사였고 이름난 맛집을 수소문해 찾아다니는 것 또한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일과가 되었다.한밤중, 느닷없이 붕어빵을 먹고 싶다는 한소희의 엉뚱한 투정에도 그는 기꺼이 차 키를 쥐었다. 한참 뒤 돌아온 그는 따스한 온기가 남은 붕어빵 봉지를 품에 안겨주며 그녀의 볼을 장난스럽게 꼬집었다.“정말 못 말리는 먹보라니까.”강주혁의 다정한 눈빛을 마주하며 한소희는 마침내 그의 마음을 온전히 가졌노라 확신했다.하지만 두 달 전, 암 진단을 받은 한지영이 갑작스레 귀국했고 그날 밤 아버지 한태준은 가족회의를 소집했다.한태준은 엄숙한 표정으로 한소희에게 통보했다.“네 언니 암 말기란다. 길어야 반년이래. 주혁이랑 결혼하는 게 지영이 마지막 소원이라니 네가 잠시 양보하거라. 어차피 결혼식이 끝나고 지영이가 떠나고 나면 주혁이는 다시 네 남편으로 돌아올 것 아니냐.”곁에 있던 계모 최명희가 애원했다.“지영이는 네 친언니잖아, 이번 한 번만 양보해줘, 응?”한지영 또한 오열하며 그녀에게 매달렸다.“나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야, 제발 부탁해.”한소희는 제 귀를 의심했다.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한소희는 붉어진 눈으로 악에 받쳐 소리쳤다.“처음엔 저를 꼭두각시처럼 떠밀어 대타로 시집보내더니, 이제는 주혁 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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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한소희는 넋이 나간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멍했던 정신을 간신히 수습했을 땐, 이미 지하 1층에 도착해 있었다.때마침 한 인턴 직원이 밝은 미소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한지영 작가님 전시회 보러 오셨죠? 이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그제야 한소희는 자신이 층수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녀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전시장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를 따르는 인턴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귓전을 때렸다.“이번 전시회는 저희 강 대표님께서 전액 직접 후원하신 거랍니다. 이후 전국 순회 전시도 예정되어 있고요.”그때 한소희의 시선은 한 유화 작품에 머물렀다.남자의 탄탄한 등 근육과 허리 뒷부분의 독특한 흉터가 유난히 선명했다.어둠 속에서 수없이 손길로 그 흉터의 윤곽을 더듬었던 그녀였기에, 그림 속 남자가 누구인지 모를 리 없었다.한지영은 강주혁을 모델로 수많은 그림을 남겼고 캔버스 우측 하단에 적힌 날짜는 하나하나가 가시가 되어 한소희의 가슴을 찔렀다.6월 20일. 주방에서 요리 중인 강주혁의 뒷모습 위로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다.그날은 한소희가 감금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단식으로 항의하다 극심한 위경련으로 혼절했던 자신과 달리, 그는 이곳에서 한지영을 위해 다정히 죽을 끓이고 있었다.7월 1일. 붓꽃이 수놓아진 실크 잠옷을 개고 있는 섬세한 손가락 위로 차가운 빛을 내뿜는 결혼반지가 보였다.그녀가 감금 13일 차를 버티지 못하고 칼날로 손목을 그으며 저항하던 날이었다. 피로 물든 침대 시트 위에서 고통받던 그녀와 달리 강주혁은 한지영의 옷가지를 정성스레 정리하고 있었다.7월 15일. 우산을 쓴 채 가로수길을 걷는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 속, 프레임 끝자락에는 누군가와 맞잡은 손이 어렴풋이 보였다.그녀가 감금된 지 28일째 되던 날이었다. 한태준에게 물러서길 강요당하며 쇠사슬에 묶인 채 고열과 싸우던 그녀가 식은땀에 젖은 시트 위에서 신음할 때 그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한지영과 여유롭게 산책을 탐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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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한소희는 강주혁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덤덤하게 대답했다.“한지영이 이 집으로 들어오기로 했잖아. 괜히 이런 거 보고 불편해할까 봐 미리 치우는 거야.”강주혁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며 그대로 제품에 끌어당겼다.“아직도 나한테 화난 거야?”“아니.”“소희야, 너는 정말 거짓말이 서툴러.”강주혁은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녀의 턱을 치켜올리며 억지로 눈을 맞추게 했다.“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난 그냥 저쪽 장단에 맞춰주는 것뿐이라고. 정말 한지영이랑 결혼할 생각이었으면 4년 전에 벌써 데려왔어.”한소희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돌연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강주혁.”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읊조렸다.“당신이 진짜 누구랑 결혼하고 싶은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벨 소리가 정적을 깨고 그녀의 목소리를 덮어버렸다.발신인을 확인한 강주혁은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았다.“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어.”짧은 통화 끝에 그는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멀어지는 강주혁의 뒷모습을 보며 한소희는 이제 그와 마주 앉아 진실을 따지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어떤 감정은 유통기한이 지난 사탕 같아서,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이미 까맣게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다.그러니 억지로 삼켜봤자 입안 가득 쓴맛만 남을 뿐이었다.강주혁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지영에게 카톡이 왔다.사진 속 강주혁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마디가 선명한 손으로 한지영의 발목을 정성스레 잡은 채 붉은 실을 묶어주고 있었다.한소희는 문득 예전에 강주혁과 함께 연등축제에 갔던 기억을 떠올랐다.노점 앞에 쪼그려 앉아 붉은 실을 한참 동안 고르다 고개를 돌렸을 때, 강주혁은 서너 걸음 뒤에 서서 짜증 가득한 얼굴로 시계를 보고 있었다.“이런 미신을 왜 믿어?”회상에 잠긴 사이, 한지영의 메시지가 이어졌다.[내가 그냥 좀 아프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주혁이가 바로 절에 가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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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한소희를 바라보았다.멍하니 한소희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멀리서 최명희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지영아!”스크린에 박힌 저주의 충격으로 한지영이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강주혁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지체 없이 몸을 숙여 한지영을 안아 들고는 의무실로 달려갔다.한소희의 머릿속이 하얘진 그 순간, 매서운 손찌검이 그녀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고개가 꺾이며 눈앞에 불꽃이 튀는 통증이 일어서야 그녀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짐승만도 못한 것!”한태준은 눈을 부릅뜬 채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며 포효했다.“네 언니가 저렇게 아픈데, 감히 저주를 해?!”한소희는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옆에 위태롭게 솟아 있던 샴페인 타워를 들이받았고 술잔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날카로운 유리 조각과 번진 술로 가득한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통증을 참으며 해명했다.“저 아니에요!”“닥쳐!”한태준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그녀의 처절한 항변을 짓밟았다.“우리가 네 언니에게 잘해주는 게 꼴 보기 싫었던 거겠지. 죽음을 앞둔 이에게 어찌 이리 잔인할 수 있어! 이 불효막심한 년을 당장 가둬버려!”...한소희는 좁고 어두운 방에 내던져졌다.어릴 때부터 어둠을 무서워했던 그녀에게는 폐쇄공포증까지 있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숨이 턱 막혔고 사방에서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그녀는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다. 피로 얼룩진 두 손이 문짝 위에 번뜩이는 핏자국을 남겼다.“문 열어! 제발, 제발 나 좀 내보내 줘요!”하지만 밖은 죽은 듯 고요할 뿐이었다.한소희는 서서히 기력을 잃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가빠지는 호흡 사이로 시야가 검게 점멸하기 시작했다.영겁 같은 고통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의식을 잃기 직전 구원처럼 문이 열렸다. 그녀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밖을 향해 기어나갔다.하지만 그 찰나...최악 하는 소리와 함께 비릿하고 걸쭉한 선혈이 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연이어 두 번째, 세 번째 핏물이 폭포처럼 쏟아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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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한소희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드디어 깨어나셨군요.”의사는 한소희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유산으로 인한 과다출혈이었어요. 몇 분만 늦었어도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한소희는 다음 날 식사를 가져다주던 가정부가 실신한 그녀를 발견한 덕분에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을 의사를 통해 전해 들었다.“가족들이 너무 무책임하더군요. 어떻게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특히 남편분은 전화를 아예 안 받으시던데, 나중에 병원에 오면 제가 꼭 환자 대신 따끔하게 말해줄게요.”“선생님.”한소희는 시트를 꽉 움켜쥐며 의사의 말을 잘랐다.“임신했던 사실, 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어차피 그는 믿지도 않을 터였다.이미 마음이 떠난 강주혁과 더 이상 그 어떤 인연의 끈도 남기고 싶지 않은 한소희였다.그녀의 말에 의사는 무언가 말하려다 결국 고개를 저으며 나갔다.한소희가 입원해 있는 동안 강주혁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한지영의 SNS 속에서 강주혁은 마치 그림자처럼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었다.첫날은 삼계탕 사진과 멘트 한 줄이었다.[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둘째 날엔 침대 옆에서 잠든 그의 모습이었다.[밤새 악몽을 꿨는데 눈을 뜨자마자 네가 보여서 다행이야!]한소희는 문득 자신이 아플 때마다 강주혁이 끓여주던 삼계탕을 떠올렸다.고열로 고생할 때면 그도 지금처럼 침대 곁을 지키며 그녀의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았었다.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다정함은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음을.강주혁은 그저 그녀를 통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퇴원 당일, 강주혁에게서 마침내 전화가 왔다.“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기사를 보냈어.”한소희는 따지지도, 히스테리를 부리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답했다.“알았어.”전화를 끊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평평한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이제 강주혁은 그녀의 연락처에서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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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출국을 앞두고 한소희는 고목이 울창한 산사를 찾았다.유산한 뒤로 매일 밤 피칠갑을 한 아이가 울부짖는 꿈을 꿨기 때문이었다.그래서 그녀는 아이를 달래줄 천도재를 올리기 위해 큰스님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그런데 막상 절에 도착하니, 대웅전 한복판에 웬 체격 좋은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그 뒷모습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강씨 가문 도련님의 애인이 불치병이라며? 그 여자한테 줄 호신부를 받으려고 산 아래부터 삼보일배로 예까지 왔다잖아...”“마지막 구간은 경사가 엄청 가파른데,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대!”지나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한소희의 귓가에 박히자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시선이 닿은 곳, 남자의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상처에선 여전히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그녀가 알기로는 강주혁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다.절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고 집안에 그 어떤 신상도 모시지 않았다.회사 연말 행사에서 받은 유명 고찰의 부적조차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서에게 던져주던 사람이었다.심지어 그녀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는 무심하게 담뱃불을 끄며 이렇게 말했었다.“죽은 사람은 죽은 거야. 향을 피우고 백날 절해봤자 살아있는 사람의 자기만족일 뿐이지.”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지금 거대한 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차가운 바닥에 붙인 채 비굴할 정도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한소희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며 조소를 흘렸다.그러고 보니 강주혁은 신을 부정했던 것이 아니라, 그를 무릎 꿇릴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던 것이다....절을 나설 때쯤은 이미 황혼이 짙게 깔려 있었다.서늘한 바람에 한소희가 옷깃을 여미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숲 사이에서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튀어나왔다.상대의 동작이 너무나 빨라 그녀는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이 코끝을 찌르는 약 기운과 함께 시야가 암전됐다.다시 눈을 떴을 때 한소희는 커다란 나무 옆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다급해진 의료진 몇몇이 들것을 들고 낭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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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한소희, 지영이를 죽일 뻔하고도 잠이 오냐!”한소희가 고통 속에 간신히 고개를 들자 눈에 핏발이 선 한태준이 보였다.그 곁에선 최명희가 고개를 숙인 채 끊임없이 흐느끼고 있었다.“소희야... 네 언니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왜 이리 모질게 구는 거니? 고별회 일은 우리가 참았지만 이번엔... 아예 지영이를 죽이려고 작정한 거잖아?”한소희는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며 최명희의 가식적인 모습에 치를 떨었다.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워 한 자 한 자 똑똑히 내뱉었다.“고별회의 저주는 제가 한 거 아니에요. 지영이를 민 적도 없고요. 한지영이 절 함정에 빠뜨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방관하는 당신은 천벌이 두렵지도 않나요?”찰싹.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서운 타격음과 함께 한소희의 고개가 돌아갔고 입가엔 붉은 선혈이 배어 나왔다.“이런 막돼먹은 년!”한태준은 당장에라도 한소희를 잡아먹을 듯 기세를 높였다.“네 엄마도 죽을 때까지 제 잘못은 모르더니 너도...”“여보, 진정하세요! 다 소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제 잘못이에요...”최명희가 한태준의 등을 다독이며 가식적인 위로를 건네자 한태준은 매몰차게 한소희를 쏘아보았다.“당신 잘못이 아니야! 한소희, 네가 정 그렇게 잘났다면 오늘부터 넌 더 이상 우리 한씨 집안 딸이 아니다!”한태준은 말을 마치자마자 최명희를 데리고 문이 부서져라 닫으며 떠나갔다.그와 동시에 번개가 허공을 가르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한소희는 기력이 다해 바닥에 주저앉았고 가녀린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정신이 몽롱한 와중에 임종 직전 어머니가 남긴 유언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마른 손으로 한소희의 손을 꼭 쥐고 끊어질 듯한 숨을 몰아쉬며 한 자 한 자 내뱉던 목소리였다.“소희야, 앞으로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렴... 엄마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게...”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소희는 지난 시간 동안 억지로라도 밥을 먹고 잠을 청하며 자신을 채찍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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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한소희가 출국한 바로 다음 날, 한지영은 기다렸다는 듯 집안의 커튼과 카펫을 전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바꿔버렸다.해 질 녘, 강주혁이 집안으로 들어서다 눈길이 멈췄다.가정부들이 한소희의 서재에서 그녀가 평소 쓰던 만년필과 책들이 놓인 단목 책상을 밖으로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지금 뭐 하는 거죠?”낮고 서늘한 강주혁의 목소리에 거실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가정부들은 당황하며 멈춰 서서 변명하듯 말했다.“저기, 한지영 씨가 이 방이 채광이 좋다며 화실로 바꾸겠다고 하셔서요...”강주혁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화실로 만든다고요? 그럼 소희가 돌아오면 어쩌려고?”가정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미 며칠 전부터 한지영은 몰래 한소희의 물건들을 내다 버리라고 시켰기에 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무거운 정적이 흐르던 그때, 뒤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주혁아, 사람들을 나무라지 마라. 내가 시킨 일이야.”한지영이 휠체어를 타고 천천히 다가왔다. 창백한 얼굴은 한 떨기 시든 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그녀는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강주혁을 올려다보았다.“남은 날 동안 그림을 조금 더 그려보고 싶어서 그래. 소희가 돌아오면 바로 방을 돌려줄게. 응?”강주혁은 그런 한지영을 내려다보았다.예전 같았으면 한소희의 물건을 건드리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그였다.하지만 한소희가 한지영의 전시회장에 불을 질렀던 일을 떠올리자, 강주혁은 결국 찰나의 순간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그는 손을 들어 가정부들에게 지시했다.“서재에 있는 한소희 물건들 전부 챙겨서, 일단 창고로 옮겨 둬요.”그 말에 한지영의 얼굴에는 즉시 화사한 미소가 번졌고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소매를 살며시 붙잡으며 속삭였다.“주혁아, 역시 너밖에 없어.”강주혁은 시선을 내린 채 길쭉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릿결을 쓸어 넘겨주었지만 그 손길에는 상냥함과 동시에 절제된 거리감이 서려 있었다.“내가 약속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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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강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가슴 한구석을 스치는 기묘한 위화감 때문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눈가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마음속을 헤집는 그 이질감을 애써 억눌렀다.“이사회 늦겠다. 얼른 가봐야 해.”침대 시트를 몸에 감고 일어난 한지영은 손가락 끝으로 그의 등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그럼... 오늘 저녁엔 일찍 와줄 거야?”충족감에 젖어 발그레해진 얼굴 위로 찰나의 계산적인 빛이 스쳐 지나갔다.강주혁이 방을 나서자마자 한지영은 휴대폰을 낚아채 어머니에게 성공 소식을 알렸다.“내 진즉 말했잖니, 강주혁은 널 절대 놓지 못한다고.”최명희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희열이 배어 있었다.“병원 쪽은 이미 입을 맞춰뒀으니 담당 의사가 오진이라고 말을 바꿀 게다. 네가 임신만 하면 한소희 그 계집애가 무슨 재주로 네 앞길을 막겠어.”...강주혁이 회사에 출근해 회의실로 들어서자, 이사진들이 한 임원 주변에 모여 안부를 묻는 모습이 보였다.“조 이사님, 몸을 잘 챙기셔야죠.”“앞으로 이런 회의는 화상으로 참여하세요.”남자는 힘겹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살날이 하루하루 줄어가는데, 지금 안 오면 나중에 기회가 없지 않겠습니까.”강주혁의 시선이 그에게 머물렀다.조신우, 회사의 핵심 인재이자 암 말기 환자였다.확진 판정 이후 그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지금은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고 의사가 선고한 남은 수명 역시 반년이었다.회의가 시작되고 임원들의 보고가 이어졌지만 강주혁의 신경은 온통 조신우에게 쏠려 있었다.같은 시한부임에도 조신우는 생기를 잃은 채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고 피부는 거무죽죽한 빛을 띠고 있었다.그런데 한지영은...“강 대표님, 이상 마케팅부 보고를 마칩니다.”임원의 목소리에 강주혁은 정신을 차리고 담담하게 말했다.“내용은 메일로 보내주세요.”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는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어 지난번 진단 기록을 보내 달라고 했다.한지영은 즉시 경계하며 되물었다.“내 진단 기록은 갑자기 왜?”“실력 있는 전문가를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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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사방에 어스름이 깔리고 하나둘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강주혁은 서늘한 달빛을 받으며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그의 앞에는 온몸이 꽁꽁 묶인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강 대표님, 제발, 제발 제 아들만은 살려주세요!”강주혁의 부하가 유모차를 밀어붙이자, 바퀴가 강둑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진실을 말해. 그럼 살려주지.”남자의 눈에 극심한 공포가 스쳤다.“강 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모른다고?”강주혁이 비릿하게 웃었다.“셋까지만 센다. 그 안에 나를 만족시킬 답이 안 나오면 네 아들은 영원히 못 볼 줄 알아.”강주혁은 사시나무 떨듯 떠는 남자의 얼굴을 응시하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셋...”“둘...”유모차가 강물 쪽으로 기울어지려는 찰나, 남자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처절하게 울부짖었다.“말하겠습니다! 다 말할게요!”“고별회 때의 저주 영상, 절벽 추락, 전시회장 화재 사건까지... 전부 최명희와 한지영 모녀가 꾸민 자작극입니다! 제 아들이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그들이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서... 한소희 씨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남자는 바들바들 떨며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여기 그 모녀와 주고받은 대화 내역이 다 있습니다. 강 대표님, 저도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휴대폰을 건네받은 강주혁이 아무 음성 파일이나 하나 클릭하자, 한지영의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저주는 당연히 독할수록 좋지. 그래야 한태준이랑 강주혁이 한소희한테 화풀이를 할 거 아냐? 어차피 내가 진짜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한소희가 내일 절에 갈 거야. 그때 네가 그년을 기절시켜서 절벽 끝으로 끌고 가. 그다음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가서 내 전시회장에 불 좀 질러줘. 단 한 장도 남김없이 싹 다 태워버려야 해. 강주혁이 한소희한테 완전히 정떨어지게 만들 거니까...”음성을 들을수록 강주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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