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강주혁과 결혼한 지 4년째 되던 해, 한소희는 아이를 가졌다. 보건소에 임산부 등록을 하러 갔을 때,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산모님, 남편분과 아직 혼인신고 안 하셨나 봐요? 전산상으로 지금 미혼으로 나오시는데요?” 한소희는 당황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4년 전에 구청에 같이 냈는걸요.” 직원은 난처한 듯 모니터를 돌려 보여주었다. “혼인관계증명서상에 배우자 칸이 완전히 비어 있어요.” 한소희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구청까지 달려가 확인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똑같았다. “강주혁 씨는 이미 혼인신고가 되어 있습니다. 배우자분 성함은 한지영 씨로 되어 있네요...” 한지영? 한소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한지영은 한소희의 이복 언니이자 강주혁의 첫사랑이었다. 그해, 한지영은 꿈을 좇아 외국으로 떠나며 결혼식 당일 도망쳤고 강주혁을 매몰차게 버렸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한지영이 강주혁의 법적 아내로 되어 있다니...
View More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또다시 새해 첫날이 밝았고 한소희는 평소처럼 교외의 사찰을 찾아 보육원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초봄의 산속 공기에는 아직 서늘한 기운이 남아있었다.한소희는 캐시미어 숄을 여미며 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절을 올렸다.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청연이 불상을 감돌았고 은은한 향나무 냄새는 한소희의 마음을 평온하게 감싸 안았다.기도를 마친 한소희는 사찰 마당의 거대한 고목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염원을 담은 붉은 비단 끈을 소원 나무에 정성스레 묶었다.문득 한소희의 시선이 고개를 숙인 채 낙엽을 쓸고 있는 회색 승복 차림의 승려에게 머물렀다.낯익은 뒷모습에 한소희의 호흡이 멎었다.강주혁이었다.과거의 위풍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야윈 뺨을 한 강주혁의 눈동자에서는 살기 어린 집착 대신 맑은 정적이 느껴졌다.“저분은 정천 스님이십니다.”한소희가 강주혁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곁에 있던 어린 행자승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저분은 어쩌다 출가한 거죠?”그러자 행자승이 나직이 대답했다.“사랑하는 사람을 저버린 죄를 씻기 위해 이곳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찰이 워낙 고요하니 속세에서 온 많은 이들이 잠시 안식을 찾으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더군요. 저분처럼 귀하게 자란 분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강주혁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수년 전의 원한과 악몽에 시달리던 밤들이 한소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강주혁은 그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한소희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절을 올린 뒤 말없이 돌아섰다.“뭘 그렇게 보고 있어?”어느새 다가온 유지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한소희는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어디서 본 적 있는 스님이라서.”한소희는 자연스럽게 유지호의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가자, 이제 내려가야지. 아이들이 제가 돌아와서 같이 수공
6개월 후, 유지호는 한소희를 위해 성대한 결혼식을 마련했다.조경시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별장은 백장미로 가득 찼고 샴페인 타워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한소희는 신부 대기실의 전신거울 앞에 서서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치 전생의 일인 듯 묘한 기분에 젖었다.반년 전 건강검진을 마친 뒤 그녀는 병원 복도에 앉아 꼬박 한 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그 시간 동안 그녀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예를 들면 유씨 가문은 후계자가 필요하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나, 유지호와의 감정이 아직 아주 깊은 것은 아니니 지금이라도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었다.그러다 유지호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서야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지금 어디예요?”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유지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침착했다.“저... 밖에서 쇼핑 중이에요.”유지호는 그녀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듯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30분 뒤에 주소를 보내줘요. 기사를 보낼 테니 같이 본가로 오세요.”한소희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본가요?”“네, 저희 부모님이 소희 씨를 보고 싶어 하세요.”유지호의 말이 끝나자 한소희의 가슴이 순식간에 철렁 내려앉았다.“지금 뵙는 건 너무 빠르지 않을까요?”“내가 하도 소희 씨 이름을 입에 올린 터라, 아마 다들 무척 친숙해 하실 거예요.”유지호는 한소희의 긴장을 눈치채고 낮은 목소리로 다독였다.“걱정 말아요. 두 분 다 정말 다정한 분이거든요.”한 시간 후, 한소희는 유씨 저택의 거실에 서 있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치맛자락의 주름을 펴며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소희 왔니?”유지호의 어머니 김미선이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나오며 반갑게 맞이했다.“음식 금방 다 되니까 지호랑 먼저 좀 쉬고 있으렴.”한소희는 멍해졌다.오늘 만남이 무척 엄숙하고 격식 차린 자리일 거라 예상했는데, 이렇게 가정적이고 따뜻한 풍경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주
한소희와 유지호가 정식으로 연인 관계가 된 후, 일상은 평온하게 흘러갔다.다만 한소희의 마음 한구석에는 차마 말하지 못한 비밀이 남아있었다.과거 강주혁 때문에 유산을 겪었을 때, 의사는 대출혈로 인해 자궁이 심하게 손상되어 앞으로 다시 임신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었다.유지호는 아이가 없어도 상관없다고 몇 번이고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한소희는 유현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인 그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설령 유지호 본인은 개의치 않는다 해도 유씨 가문의 어른들이 이 문제를 가볍게 넘길 리 없다는 사실은 가시처럼 밤낮으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댔다.결국 병원을 찾은 한소희에게 의사는 무력하게 고개를 저으며 현재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절망적인 진단을 내놓았다.그녀는 검사 결과지를 손에 쥐고 진료실을 나섰다. 가벼운 종이 한 장이 마치 천 근 무게의 바위처럼 그녀를 짓눌렀다.그때 어디선가 그녀를 부르는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소희야...”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환청 같은 부름에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선이 반쯤 열린 병실 문틈에 머물렀다.그곳에는 한때의 당당했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한태준이 누워 있었다.해외로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던 한태준의 비참한 몰골에 한소희는 무의식적으로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마지막 만남에서 자신을 향해 온갖 독설을 퍼부으며 더 이상 한씨 가문의 딸이 아니라고 포효하던 그의 모습이 생생했다.이성적으로는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배신감과 연민이 뒤섞인 감정 탓에 그녀의 발걸음은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한소희는 핏발이 서고 생기가 가신 한태준의 눈동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병실 안으로 무거운 발을 들였다.“소희야, 정말 너로구나...”한태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환각을 본 줄 알았다.”한소희는 스스로도 낯설 만큼 냉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여기 있는 거예요?”한태준은 자
한소희의 소설이 상을 받던 날, 창밖에는 가느다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창가에서 설경을 눈에 담던 한소희의 어깨 위로 유지호가 다가와 부드러운 캐시미어 코트를 걸쳐주었다.“회전 레스토랑에 자리를 예약해 뒀어요. 오늘 밤은 우리 같이 축하해요.”두 사람이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은 그들을 전망이 아름다운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했다.삼면이 통유리로 된 그곳은 도시의 찬란한 야경을 품에 안은 듯한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했다.홀 중앙의 테이블 위에는 붉은 벨벳 식탁보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정교하게 배치된 수정 촛대와 화려한 붉은 장미가 놓여 있었다.유지호는 와인잔을 들어 한소희와 가볍게 부딪친 뒤, 어디선가 빛바랜 붉은 끈으로 묶인 편지 뭉치를 꺼내 한소희 앞으로 밀어 놓았다.“소희 씨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에요, 한번 열어봐요.”한소희가 붉은 끈을 풀었다. 봉투 위에 적힌 만년필 글씨는 이미 희미해져 있었지만, 모퉁이에 적힌 ‘M’이라는 글자를 본 순간 한소희의 호흡은 멎어버렸다.“이것들은...”“소희 씨가 고등학교 시절 펜팔 친구 Z에게 보냈던 편지들이에요.”유지호는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총 마흔세 통인데, 단 한 통도 빠짐없이 내가 다 보관하고 있었어요.”한소희는 맨 위에 놓인 편지를 조심스레 열었다.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오자 한소희의 동공이 순식간에 수축했고 손가락은 자기도 모르게 편지지의 가장자리를 꽉 쥐었다.이 편지는 분명 한소희가 열여섯 살 때 쓴 것이었다.한소희는 학생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만 번번이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했었다.포기할 수 없었던 한소희는 ‘Z’라는 필명의 펜팔 친구를 찾아 정기적으로 자신의 원고를 보내 조언을 부탁하곤 했다.디지털 세상이었지만 한소희는 아날로그적인 교감을 선호했다.다행히 Z는 한소희와 취향이 잘 맞았고 두 사람은 금세 무엇이든 털어놓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Z는 한소희가 보낸 원고를 단 한 줄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꼼꼼하게 읽어준 뒤 옆에 세심한 주석까지 달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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