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 Chapter 21 - Chapter 30

30 Chapters

21화 협곡에서의 혈투

시월의 날씨는 낮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밤에는 제법 쌀쌀했다. 북쪽으로 이동할수록 공기가 차가워졌다. 나흘쯤 지나자 싸리눈이 살짝 흩뿌리고 주변의 나무들은 예민한 초식동물이 허리를 곧추 세운 듯 보였다. 사신단의 붉은 비단 깃발은 이미 먼지 너머로 사라졌고 그 뒤를 따르던 상단은 아직 협곡을 빠져 나가는 중이었다. 그때였다.‘휘익’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습격이다! 일단 달구지 밑으로 숨어라!”한이 급하게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찰나 오른쪽 절벽 위에 시커먼 형체들이 서서히 눈에 띄었다. 그중 가장 체격이 크고 마치 들짐승처럼 보이는 자가 말했다.“그 보따리들을 모두 내려 놓아라. 짐을 모두 내려 놓고 속곳을 제외한 옷을 모두 벗은 후 돌아온 길로 내려가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족히 열댓 명은 되어 보였다.“알겠소. 그럼 목숨 만은 살려 주시오.”무리들에게 봇짐을 내려 놓는 척 하는 순간 한이 잽싸게 활시위를 당겼다. 산적 떼의 두목처럼 보이는 자의 오른쪽 어깨 쭉지에 화살이 꽂혔다.“으-윽!” 두목처럼 보이는 자가 잠시 휘청거리는 듯 하더니 활을 뽑아 냈다. 누더기 옷에 짐승 가죽을 걸친 자들, 창과 도끼, 녹슨 환도를 든 산적 떼들이 한꺼번에 절벽을 타고 내려왔다. 마치 자기들의 근거지인 마냥 머뭇거리지 않고 한걸음에 고함을 지르며 순식간에 다가왔다.달구지를 잡고 뒤따르던 상인들과 종들이 겁에 질려 다리를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동안, 한은 말에서 뛰어내리며 칼을 뽑았다. 날이 빛에 번뜩였다. 첫 놈이 창을 찔러왔다. 한은 몸을 낮추어 창대를 걷어차고 손목을 베어버렸다.“악!”창을 놓고 손을 부어 잡는 상대가 주춤하는 동안 놈의 급소를 찔렀다.고꾸라지는 첫놈을 보며 다른 놈이 한에게 단검을 들고 덤벼 들었다. 그러나 무술을 수년간 연마하며 무과에 장원 급제할 정도의 고수의 실력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두 번째 놈도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어깨에 부상을 입은 두목이 이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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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머물 수 없는 봄

영수는 마늘밭에서 갑자기 머리가 빙그르르 돌았다.‘조금만 더 덮으면 돼.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영수와 최나인 그리고 승덕 어멈은 심어 놓은 마늘 밭을 짚으로 덮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 심어 놓은 마늘이 겨울을 나고 이듬해 초여름 수확을 할 수 있었다.“억”영수가 그만 현기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근처에서 짚을 한참 옮기고 있던 승덕 어멈이 발견하고 달려왔다.“마님! 마님!”“아이구 우짠데요 마님!”승덕 어멈의 비명 소리에 최나인이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짚을 내던지고 달려왔다.“아이고 이게 무슨 일인가? 빨리 의원으로 가보세.”“네 그라야죠. 제가 마님을 업을 테니 얼른 앞장 서세유”승덕 어멈이 영수를 들쳐 업고 마을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허벅지에 힘이 풀리는 듯 했지만 승덕 어멈은 멈추지 않았다.“물.. 물좀…..”의원에 도착하여 급하게 뉘이니 영수가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었다.“마님… 뭐시요? 물요?”물을 조금 마신 영수는 다시 눈을 감았다.의원이 진맥을 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어찌하다 여인을 업고 오셨소?”“예, 저희가 같이 마늘 밭에 나가 짚으로 덮고 있다 마님이 그만 쓰러지셨구만유. 그래서 발견하자마자 업고 이리로 한걸음에 달려 왔습니다. 우리 마님 괜찮으신거죠? 의원님?”승덕 어멈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흥분하여 말했다.“빨리 이리 데려 오셔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밭일은 하지 마시고 집에만 계셔야 하겠습니다.”“예, 사실 저희도 나오시지 말라고 한사코 말리는데도 기어이 따라 나오시니 막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런데 밭일을 하면 안될 만큼 상황이 안좋은가요?”“다른 맥이 잡힙니다.”“다른 맥이라니요?”“음.. 그게…”“의원님 왜 그러십니까? 우리 마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최나인이 울 듯이 의원에게 가까이 몸을 굽히며 물었다. 활맥이 잡힙니다. 아마. . . . 회임을 하신 듯 합니다.”“예? 회임을요?”최나인과 승덕 어멈은 서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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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움직이는 사람들

영수는 이제 제법 허리도 두툼해 지고 가녀리던 손에도 살이 올랐다. 문갑 위에 상자를 옮기려 하자 옆에 있던 한이 얼른 상자를 집어 들었다.“부인, 내가 하겠소. 자자. 이리 주시오.”거의 상자를 빼앗듯 잡아 채는 한을 보며 영수가 어이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서방님, 그정도는 할 수 있사옵니다.”“아니오. 부인 그러다 허리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오? 내가 하겠소. 부인은 절대 조심하셔야 하오.”마침 사랑방에 들어오던 최나인이 눈을 흘기는 척 하며 말했다.“아이고 두 분 이제는 깨가 더 쏟아지시는군요. 이거 어디 서방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습니까?”최나인은 한이 멋적어 하고 영수가 부끄러워 하는 모습을 즐기듯 큰 소리로 말했다.“유모, 그리고 서방님 잠시 앉아 보시겠습니까?”“무슨 일이오?”“지난번 서방님께서 알려지지 않은 연고로 무과 장원 급제에서 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필시 뒤에서 손을 쓴 자가 있을 듯 합니다. 그 자가 누구인지 찾아내야 할 듯 하옵니다.”영수가 힘을 주듯 말했다. “꼭 그래야 하오?”한이 물었다.“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그 자는 필시 저희 모두와 장래 우리 아이에게도 분명 해가 될 것이옵니다. 누군지를 알아야 저희도 대처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이건 마님 말이 맞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계속 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적어도 누구의 짓인지는 알아야 겠습니다.”유모가 영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우선 궁에 사람을 보내 내금위장께 전갈을 넣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분이라면 궁의 사정을 잘 아실 것이옵니다.”“좋은 생각이긴 한데 내금위장께 어떻게 전갈을 넣을 수 있겠소?”“제게 좋은 방도가 있습니다.”유모가 말했다.“무슨 방도요?”“우리집 승천이를 보내 내금위장에게 문안을 요청드리는 쪽지를 건네드리는 겁니다. 내금위장께서 우리 승천이를 두어번 집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에 필시 낯이 익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설령 기억 못한다 해도 인시 경 훈련도감의 병사들이 교대할 틈을 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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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궁궐의 가장 깊은 밤

초경을 넘긴 시각이었다.“안내하거라”“예”하인 하나가 주위를 살피며 백인걸을 병판의 서재로 안내했다. 누구도 백인걸의 방문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보였다.“연산의 피를 이은 자가 서인의 집에 들어앉아 아이까지 품었다지요.”병판의 낮은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러니 바로잡아야 합니다.”백인걸의 대답은 짧았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 속내는 냉정함이 베어 있었다.“문제는 전하요. 저렇게 침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닐 것입니다.”병판이 한손을 말아 쥐며 말했다.“침묵은 허락이 아닙니다.” 백인걸이 조용히 받았다. “망설임이지요. 그리고 그 망설임은 신하가 바로잡아야 할 틈입니다.”잠시 정적이 흘렀다."좋은 방도가 있소?"병판이 백인걸을 응시하며 물었다. “제가 다시 상소를 올리겠사옵니다.” 백인걸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미 바깥의 사림들은 어느 정도 뜻을 모아 두었습니다. ""그럼 난 어떻게 도우면 좋겠소?"대감께서는 조정 안에서 우리와 뜻을 함께할 이들을 더 모아 주십시오.”병판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연산의 여식이 머무는 사가를 한 번 더 치는 건 어떻겠소?”백인걸의 눈빛이 잠시 가라앉았다.“제 스승 조광조께서 그 길을 택하셨다 좌절을 겪으셨지요.”그는 낮고 단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물론 방법이 될 수는 있습니다. 허나 대감, 저희가 복수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저희가 좇는 것은 보위를 굳게 하고, 정도를 밝히며, 의를 세우는 일입니다.”병판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우선은 전하를 움직여 혼인을 파하게 하십시오. 그 뒤의 일은… 그때 가서 논해도 늦지 않습니다.”병판은 한참 만에 숨을 내쉬었다. “……좋소.”……….영수는 초조해졌다. 흐르는 시간이 너무도 아까웠다. 이제 영수에 대한 이야기는 대신들 사이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사실과 거짓이 뒤범벅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임금의 심중이 어떤 것인지 영수는 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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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왕의 결단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편전 안에서 1시간 째 백인걸은 상소를 올린 후 무릎을 꿇고 움직이지 않았다. 편전 밖에서 수십명의 유생들이 영수와 한을 벌하라고 되풀이하고 있었다. 백인걸이 입을 열었다.“전하, 왕실 가문이 서자와 결혼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옵니다. 게다가 폐위된 연산의 자식이옵니다. 그들을 벌하시어 정도를 세우셔야 합니다.”. 백인걸이 입을 열었다. “처벌이 두려워 숨어 살다가 비밀 혼인까지 하였습니다. 본인들이 떳떳하다면 비밀리에 혼인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자신들의 혼인이 불가함을 알면서도 끝내 혼인을 한 것입니다. 국법과 임금을 능멸한 것을 두고 보는 것은 의가 아니옵니다. 그들을 처벌해야 합니다.”병조판서가 거들며 왕을 압박했다.백인걸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무릎이 저려 왔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전하, 연산의 여식은 죄인의 자식입니다. 죄를 지은 이는 이미 죽었으니 그 핏줄은 무고하다고 하신다면, 이는 군왕의 도를 사사로운 인정으로 허무는 것이옵니다. 부자(父子)란 본디 한 몸이라 하였사온데, 어찌 한쪽의 죄만 베어내고 다른 한쪽은 깨끗하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그렇사옵니다.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미치지 않는다면, 부모의 공으로 자식이 은전을 입는 일 또한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조정은 늘 공과 죄를 함께 물어 가문을 세우고 또 벌하여 왔사옵니다. 이 일을 전하께서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시면 태조께서 이 나라 조선의 기틀을 세우고 일백년이 넘도록 유지해온 근본을 무너뜨리는 일이옵니다. 부디 성군의 도에서 벗어나지 마소서.”중종이 어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그대들은 들으라. 영수는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었다. 지난 세월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 들며 죄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 죄는 사람에게 있다 하였고 이미 그 죄를 지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죽은 죄를 살려내어 살아 있는 자의 목을 누르는 것이 성리의 도란 말이냐?”신하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미 벌을 치른 자에게 죄를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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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죄인이 된 밤

그날 이후 조정에서는 그 누구도 영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명분을 앞세워 권력을 탐하고 숙적을 제거하는 데 능숙한 신하들은 영수가 그들의 먹이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새 알아 차렸다. 조정에서 영수의 이름은 이미 의미 없는 존재 였으나 밖에서는 달랐다. 밖의 여론은 더 느리고 집요했다. 영수가 연산의 자식이며 게다가 서자와 비밀 혼인을 한 사실이 연기처럼 서서히 퍼져 나갔다.“이보게 한수 나 좀 잠깐 보시게나.”행수가 창고에서 짐관리를 하는 한수를 불렀다.“예 행수 어른. 무슨 일이시온지요?”“자네 우리 가게에서 일한 게 얼마나 되었지?”“이제 일년 넘은 것 같사옵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음. 그게 흠흠.”행수가 뜸을 들였다.“사실 우리 숙부가 당신의 아들을 우리 상단의 호위 무사로 좀 써달라 하시네. 물론 그 아이보다 자네가 뛰어나다는 걸 잘 알지. 자네를 계속 두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세. 허나 나 세상이라는 게…. 혼자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예”“이번 달 말까지만 일해 주면 될걸세. 미안하게 되었네 자 그리고 이건 좀 챙겨 두게 내 자네 처와 자네를 생각해서 좀 더 쳐줬네.”동전 꾸러미를 한에게 거의 떠넘기듯 건네 준 행수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한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너무 괘념치 마시어요. 나으리”이 소식을 들은 최나인이 한수에게 부드럽게 위로했다.“아마도 나으리와 우리 마님과의 혼인, 그리고 우리 마님의 출생 때문에 행수 어른도 부담이 되셨나 봅니다.”“서방님, 제가 서방님 만나기 전에 유모랑 밭도 갈고 옷도 만들고 해서 생계를 유지 했습니다. 그때 처럼 살면 됩니다. 걱정마세요. 서방님.”“….고맙소 부인”영수의 양손을 다정하게 잡은 한수의 표정이 내내 어두웠다.………………… 그날 밤, 한수는 집을 나섰다.최나인과 영수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숨결이 고른 것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닫았다.골목 끝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한수.”달빛을 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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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돌아갈 수 없는 강

소나무 숲은 빽빽하게 울창하여 낮인데도 마치 밤처럼 느껴졌다. 새 지저귐이 나무 사이에 울려 퍼져 메아리로 갈라졌다.“이제 이 숲만 빠져나가면 마지막 성문이 보일게요. 거기 지나서 강이 보이면 거기가 바로 국경이오. 거기까지만 가면 되오.”본진 마차를 모는 마부가 말고삐를 바짝 당겨 쥐었다. 한이 뒤를 바짝 따랐다. 한 식경쯤지나니 빽빽했던 숲이 조금씩 헐거워 지며 빛이 드러났다. 햇빛을 받으니 짐을 덮은 천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휘익’흑마를 탄 십여 명의 무리들이 좌측과 우측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한이 활을 쏘기엔 이미 너무 가까웠다. 한은 검을 꺼냈다. 검을 들고 경계하며 본진 마차로 접근하는 순간, 마부가 별안간 단도로 한의 옆구리를 찔렀다.‘욱’얼굴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한은 발로 마부의 정강이를 걷어 찼다.‘악’마부는 엉덩방아를 찧자마자 얼른 일어나더니 앞쪽으로 물러섰다.“살아서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 보아라.”“처음부터 속일 속셈이었던 게요?”한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차피 돌아가 봐야 너는 변명조차 못할 신세 아니더냐. 짐승 밥이 되지 않길 빈다. 놓아주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라.”“왜 나를 끌어 들인 것이오?”한이 물었다.“여기까지 무사히 오는 데 보호해 줄 호위무사가 필요했다. 이제 네 역할은 끝났으니 당장 꺼져라.”한은 분노가 들끓었으나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마부와 숲에서 나타난 검은 무리들이 마차 두 대를 자신들이 데려 온 말에 연결시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한은 분노를 삼키며 뒤에서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서방님! 얼굴이 대체… 서방님”영수가 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몸이 얼었다.‘퍽’영수를 보자마자 한이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얼른 안으로 모셔라 얼른!”최나인이 옆에 같이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승철이에게 소리쳤다.한은 이틀을 사경을 해맸다. ‘악 으악’식은땀을 흘리는 한은 계속 허공에 헛소리를 질러 댔다.“서방님, 정신 차리세요! 서방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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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꽃샘바람

대청 마루에는 밤마다 서늘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한은 멍하니 초점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한은 말이 없어졌고 점점 야위어 갔다. 최나인은 한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했고 영수는 소리를 내지 못한 채 가슴으로 울었다.“부인”“예, 서방님”“우리 아가를 이리 주시오. 한 번 안고 싶소.”“예”이제 제법 무거워 진 아이를 한의 품에 안겼다.“이 아비를 용서해 다오.”아이를 안고서 한참을 가만히 있자 아이는 답답한지 몸을 비틀었다. 한은 아이를 다시 영수에게 건네 주었다“서방님…?”다음 날 아침 영수가 그의 손을 흔들었다.“서방님, 제발… 눈 좀 떠 보세요.”대답은 없었다.눈은 반쯤 열린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아이는 어미 옆에서 무슨 일인지 모른채 몸을 좌우로 한들고 있었다.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한의 손을 가슴에 끌어안았다.그 손이,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 영수는 아이를 안고 동산에 올랐다.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리던 언덕이었다.혼인을 약조하던 날 강아지풀이 바람에 너풀 거리던 그곳, 길을 떠나던 날,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던 그곳, 영수에게는 추억이 많은 그 동산을 한을 묻고 난 뒤 다시 올랐다. 차가운 꽃샘바람이 가슴을 꿰뚫었다. 그렇게 영수는 한을 가슴에 묻었다.‘아가야 아버지는 널 정말 사랑했단다. 그리고 하늘에서도 늘 너를 지켜 주실 거야.’영수는 한을 목놓아 불렀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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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꽃샘 바람이 지난 뒤

봉분에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아 붉은 채로 있었다.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열어라. 관에서 나왔다.”영수는 아이를 안은 채 문 앞으로 걸어 나갔다. 최나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 나섰다.문이 열리자, 푸른 도포를 입은 군관 둘과 아전 하나가 서 있었다.“이 집에 거하는 한수의 처가 누구냐.”“접니다.”영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아전이 서책을 펼쳤다.“한수는 국경 인근에서 불온한 물건을 나른 혐의가 있다.죽었다 하나,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가산과 호구를 조사할 것이다.”최나인이 분개했다.“사람이 죽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러시는 겝니까?”영수가 조용히 손을 들어 막았다.“무슨 물건이라 하셨습니까.”군관이 영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관의 화약이다.”아이를 안은 영수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증좌가 있습니까?”잠시 공기가 멈췄다.아전이 눈을 치켜올렸다.“지금 따지는 것이냐.”“따지는 것이 아닙니다.”영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억울한 자의 집을 뒤지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할 터.남편은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이미 눈을 감은 자에게 죄를 더 씌우는 것이 관의 도리입니까.”군관의 눈이 가늘어졌다.“말조심하라.”“저는 조심하고 있습니다.”영수는 아이를 고쳐 안았다.“호구를 보시려거든 보십시오.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역적으로 꾸미려 하신다면… 그 일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그 말에 군관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연산의 피.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집 안을 훑던 아전이 낮게 속삭였다.“이 아이도 기록에 올려야겠군.”그 순간, 영수의 눈이 달라졌다.슬픔은 사라지고, 다른 것이 자리 잡았다.“아이의 이름은 제 입으로 올릴 것입니다.”조용했지만 물러섬이 없었다.군관은 한참을 바라보다 서책을 덮었다.“오늘은 기록만 하겠다. 그러나 다시 부를 것이다.”문이 닫혔다.잠시 후, 최나인이 속삭였다.“마님… 어찌 그리 담담하십니까.”영수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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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남겨진 이름

“마님 승철이옵니다.”“그래 승철아, 알아낸 것이 있느냐?”“예, 마부의 집은 이미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웃의 말로는 이사한 지 한 석달 되었다 하옵니다. 아마 마부가 밀반출한 화약을 싣고 떠난 직후인 듯 하옵니다.”“그렇구나. 그래 혹시 어디로 이사를 갔다더냐?”“그건 이웃도 모른다고 하옵니다. 갑자기 소문도 없이 이사를 갔다 하옵니다. 하온데…”영수는 귀를 쫑긋 세웠다.“마님… 화약 인계를 맡았던 군관이 있었습니다. 그 자가 며칠 전 병조 좌랑으로 승진했다 합니다.”“화약이 사라졌는데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말이냐.”“오히려 공을 세웠다 하더이다. 변방 화약 유통 체계를 정비했다는 명목이라 합니다.”“그래 승철아 네가 이번에도 크게 수고를 했구나. 계속 사라진 마부 주변을 잘 감시하거라. 분명히 단서가 더 있을 것이다.”“예 마님.”‘분명 화약을 내주고 승진한 사람은 필시 뭔가가 있을 것이야. 반드시 알아내야 겠다!’영수는 다짐을 하고 짐을 꾸렸다.………………………..“병조좌랑! 자제가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지?”“아닙니다 대감! 이렇게 불러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그래 술 한잔 하세나. 자 받게”“예, 대감!”“마지막 뒤처리까지 잘 부탁하네 흔적이 남으면 나중에 귀찮아 질걸세. 그날 기록은 남길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예 대감, 명심하겠사옵니다.”“자네가 내 사람이 되어 참으로 기쁘이. 자. 한 잔 더 받게”병조판서의 집에서 나온 병조좌랑은 골목에서 쓰개치마를 입고 갑자기 나타난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수였다.“아이고 깜짝이냐 뭐냐! 이런.”“나으리, 어디를 다녀 오시는지요?”“넌 누구냐? 네따위가 뭐길래 어디서 왔는지 묻는 게냐? 썩 물러나라.”“나으리, 제가 병판대감 댁에서 나으리가 나오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사옵니다. 이번에 승진하셨다지요?”“넌 도대체 누구냐? 누구길래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것이냐?”다소 겁에 질린 듯한 좌랑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저는 지난 화약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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