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11화 마지막 충성

정적을 가르는 것은 승덕 어멈의 날카로운 비명이었다."불이야! 안부엌에 불이 났다!"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인시의 끝자락에 모두들 깜짝 놀라 마당으로 뛰어 나왔다. 안채 뒤편에서 매캐한 연기가 솟구쳤다. 아궁이 근처에 쌓아둔 마른 짚단에 불씨가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불길은 부뚜막을 타고 올라와 나무 기둥을 핥기 시작했다. 승덕어멈은 두 손을 걷어 부치고, 당황해 멈춰 선 종들의 어깨를 거세게 밀치며 호통을 쳤다."멍하니 서서 무엇들 하시오! 어서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길어 오시오! 어서!"그녀의 서슬 퍼런 외침에 정신을 차린 종들이 허겁지겁 양동이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뒤이어 달려온 유모는 불길이 살창으로 번지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찬방에 있던 커다란 멍석을 집어 들었다."이걸 물에 적셔라! 어서!"유모의 지시에 따라 여종들은 힘을 다해 멍석에 물을 적셔 불길 위를 덮었다. ‘치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거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승덕어멈은 치마폭을 걷어붙인 채 물양동이를 직접 날랐고, 유모는 젖은 멍석으로 불길이 번지는 통로를 막아섰다."조금만 더! 아궁이 쪽 불길만 잡으면 된다!"승덕어멈의 진두지휘 아래, 집안의 모든 식솔이 하나가 되었다. 누군가는 마당의 모래를 퍼다 날랐고, 누군가는 우물가에서 쉴 새 없이 두레박질을 했다. 승덕 어멈의 냉정한 대처와 유모의 신속한 행동에, 겁에 질려 있던 어린 종들도 이내 안정을 찾고 제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한참을 사투했을까. 붉게 혀를 내밀던 불길이 마침내 기세가 꺾이며 검은 연기만을 내뿜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불씨 위로 승덕어멈이 물 한 바가지가 시원하게 부어지자, 지독한 연기 사이로 안도의 한숨들이 터져 나왔다.그을음으로 얼굴이 거뭇해진 승덕어멈이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옆에 서 있던 유모 역시 젖은 옷자락을 쥐어짜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기둥은 조금 그을이다 말았고, 불길은 안부엌 경계 안에서 멈췄다.“승덕 어멈, 괜찮소? 다친데 없소?”영수는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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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그날, 이름 하나

악 아-악’지나가는 마차의 바퀴가 갑자기 빠져 굴러 왔다. 놀란 말이 앞발을 크게 치켜 들었다. 말 위의 사내가 다급하게 고삐를 채 보지만 이미 늦었다. 말은 그대로 영수를 향해 달려들었다.사내가 고삐를 놓으며 몸을 날렸다. 영수의 허리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굴렀다. 먼지가 일고 숨이 서로 맞닿았다. 영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싼 채 영수가 몸을 서서히 일으킬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난전의 주인인 듯한 여자가 나와 소리 질렀다.“아이고 내 물건. 아이고.”말이 발버둥을 치다 가게의 좌판을 건드려 물건이 죄다 쏟아진 것이었다.최나인이 허둥지둥 달려 오며 영수에게 걱정스레 말했다.“아씨. 많이 다치신 건 아니죠? 이를 어째!”영수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괜찮아 유모. 살짝 스쳤을 뿐이야. 걱정 안해도 돼.”좌판이 땅에 내동댕이 쳐질 때 그 중 하나가 지나던 영수의 팔 언저리를 친 것이었다.“아씨 얼른 우리 집에 갑시다. 집에 가서 어디 함 봐요.”“그래”둘이 걸음을 제촉하려던 찰나였다.“낭자. 괜찮으시오? 본의 아니게 정말 미안하오. 우리 말이 갑자기 흥분을 하는 바람에…”이목구비가 뚜렷한 이십여세쯤 보이는 갓을 쓴 남자가 매우 난감해 하며 영수에게 말을 건넸다.“아.. 아니에요.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럼..”영수가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그 사내가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정말 미안하오. 많이 놀라셨을 터인데… 내 꼭 사과를 하고 싶소. 팔에 상처가 난듯 한데..”영수는 제법 아리는 듯한 오른 팔꿈치를 왼손으로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별 것 아닙니다. …그럼.”“낭자. 그럼 살펴 가시오. 다음에 장에서 혹여 보게 되면 내 꼭 미안함을 보답하겠소. 내 이름은 한이요. 혹시 낭자의 이름은 어찌되시오?“저는 영수라 하옵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최나인과 영수의 마치 쫒기는 듯한 뒷 모습을 한은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아이고 아씨 꽤 깊이 베였네요. 이를 어째...”최나인이 안타까움에 어찌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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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심장에 꽃씨가 내려 앉다

“유모 쇠스랑의 모가지 부분이 덜렁거려 아무래도 곧 탈이 날 거 같아. 내가 오늘 장에 내려가서 새것으로 사와야겠어.”“아씨. 저는 기옥이네 김매는 밭에 품앗이 해주러 가기로 되어 있는데 어쩌죠?”“응. 나 혼자 얼른 다녀 올 수 있어. 유모 이따 봐”영수는 엽전 몇닢을 귀주머니에 넣고 채비를 했다. 웬지 장에 가는 마음이 가볍고 설렜다. …… 영수가 장에 노리개에 잠시 한눈을 팔고 있었다.“낭자, ...영수 낭자?”영수가 사뭇 놀라 위를 올려다 보았다. 한도령이었다.“어. 도련님. 한 도련님 아니신지요?”그 이름이 영수의 혀끝에 부드럽게 맺혔다.“아니 이런 우연과 인연이 다 있구려. 나도 오늘 장에 어머니 심부름도 하고 내 볼일도 볼 겸 나왔는데 낭자도 오늘 장에 왔구려.”“네. 도련님. 저는 마늘밭을 고르는 데 쓸 쇠스랑을 보러 나왔어요. 전에 쓰던 것이 이제 많이 낡아서..”“낭자가 농사를 직접 짓나보오?”“네? 네.. 그렇습니다.”영수는 얼굴이 다시 빨개지며 뭔지 모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잘 생긴 남자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 때문인지 아님 자기가 농사를 짓고 있는 처지를 밝힌 것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영수 낭자. 우리가 지난 번 장에서 사고가 있었을 때 기약도 없이 헤어졌지만 이렇게 다시 우연히 만난 건 정말 인연이 아니겠소? 영수 낭자가 너무 부담을 갖는 것 같기에 내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지만 영수 낭자를 다시 만나면 꼭 사례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소. 하늘이 내 마음을 읽으셨나보오.”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할 때 그의 고른 이가 영수의 눈에 들어왔다.“우리 장을 같이 구경하고 맛난 것을 먹읍시다. 그리고 낭자는 쇠스랑을 사고 돌아가면 되지 않겠소?”“예? 아 예.”영수는 다시 얼굴이 빨개지며 어깨가 마치 고뿔에 걸린 사람처럼 움츠려졌다. 한의 제안에 달리 핑계를 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수는 하는 수 없이 한을 따라 나섰다.“저기 모퉁이에 가면 국밥집이 있는데 우리 고을에서 가장 맛난집이오. 내 한 그릇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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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연등 아래

그날 밤 영수는 꿈을 꾸었다.자신이 냇가를 건너려 하는 데 불어난 물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을 디디는 순간 미끄러져 물살에 떠내려 갈 것 같았다. 산나물을 가득 뜯은 광주리를 양손에 붙들고 어떻게 해서든 물을 건너 보려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갈 길도 없었고 거기서 밤을 지샐 수도 없었다.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던 찰나, 한 사내가 뒤에서 오더니 말을 건넸다.‘업히시오. 얼른 업히시오. 내가 저쪽으로 낭자를 데려다 주겠소.’익숙한 목소리와 풍채, 그리고 체취, 그 사내는 한이었다. 영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얼른 업히시오. 꾸물거리면 물이 더 불어나겠소. 얼른’영수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난처했지만 한의 제안에 따라 그의 등에 업혔다.한의 등은 넓었고 정말 따뜻했다. 영수가 한의 온기를 느끼며 안도를 하던 찰나, 그가 그만 오른발을 헛디뎠다.‘으악’둘 다 첨벙 물에 빠지고 말았다.영수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꿈이었다. 옆에 누워 있던 최나인이 눈을 비비며 영수에게 말했다.“아씨 악몽을 꾸신 게지요? 우리 아씨 요즘 몸이 허하신가 보네.. 제가 다음 번 장날에 토종닭 한마리 사서 고아야겠어요.”영수는 꿈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 무언가 아쉬움이 있었다. 한의 등에 업혔던 그 순간이 물에 빠졌던 순간보다 오히려 생생했다. 영수의 마음에 연모라는 감정이 생겼다는 것을 영수도 이제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초목이 제법 파랗게 물들고, 따뜻한 햇살이 쌀쌀한 바람을 밀어내는 춘사월이 되었다.. 영수는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초조하기도 하였다.아는 것이라곤 이름 뿐이었다. 어느 집 자제인지 과거를 준비하는 서생인지 그저 시나 읊조리는 한량인지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영수는 한의 그 따뜻하고 묵직한 목소리, 선한 눈빛, 그 모든 것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혼자만의 연모이기에 누구에게 혹 마음이 들킬까 혼자 조마조마했다. 유모가 부르기만 해도 괜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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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처음으로 함께 걷다

영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초파일의 축제에 빠져 있었다. 어느덧 해가 넘어가려 하자 그제서야 최나인과 약조하고 혼자 집을 나선 기억이 머리에 떠올랐다.‘아. 유모가 걱정하고 있을텐데 어쩌지?’돌아가야 했다. 영수가 한에게 난처해 하며 말했다.“저... 도련님 이제 저는 돌아가봐야 할 거 같아요. 유모가 혼자 있거든요.”“낭자 그게 무슨 말이요? 초파일 축제는 이제 시작이오. 밤에 연등이 하늘로 올려질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겠소. 분명 낭자도 좋아할 게요.”“예 도련님 저도 보고 싶습니다. 허나 유모에게 볼일이 끝난 후 바로 돌아오겠다고 약조하였습니다. 지금쯤 아마 제 걱정을 많이 하고 있을 것이옵니다.”“오늘은 통행금지도 없는 유일한 날이오. 낭자 입장을 알겠으니 우리 초경까지만 있다 갑시다. 내 집까지 바래다 주겠소. 그리고 내가 잘 설명하면 유모도 분명 이해해 줄 것이오.”영수는 거절하고 돌아서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몸이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그리고 거절하는 말도 입에서 나오지가 않았다. 그만큼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하고 가슴 벅찼다. 궁에 대한 기억, 자신을 예뻐 해 주던 아버지 연산과 흐뭇해 하며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던 어머니 녹수에 대한 기억, 그 모든 기억들은 이제 바위에 부서지는 흰 파도처럼 아스라이 영수의 머리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최나인과 함께 했던 지난 십 육여년의 세월은 행복이라기보다는 살아야 했기에 살아졌던 삶이었다. 그저 눈을 뜨고 숨을 쉬었던 하루하루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스무살의 꽃 같은 나이의 영수의 마음에도 마치 본능처럼 연모도 하고 품에 안겨 보고도 싶은 감정이 크게 피어 올랐다.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저녁 어스름이 깔렸다. 이제 연등의 형형색깔이 서서히 빛을 드러냈다. 영수는 난생 이런 아름다운 빛을 본적이 없었다. 참으로 황홀하게 눈에 박히는 불빛이었다. 그동안 영수의 눈에 들어온 빛은 잿빛이거나 그저 밝기만 하여 눈이 부시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한과 연등을 바라보며 색이 천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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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주초위왕

이미 삼경(밤 11시경)이 지났으나 왕은 잠이 오지 않았다.“주상 전하. 대사헌 대감이 알현을 청하옵니다.”“정암(조광조의 호)이?”“예 전하”“들라 해라”이제 반정이 성공하고도 십육년이라는 제법 긴 세월이 흘렀다. 백성들의 머리 속에 폭군 연산군은 이제 희미해져 갔다. 왕도 늘 형님의 폭정 속에 혹여 목이 달아날까 늘 몸을 낮추고 또 낮추다 뜻하지 않게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 반정에 의한 정권, 그 정점에 서서 늘 대신들에게 빚을 진 듯하여 마음이 불편한 것을 왕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조광조는 달랐다. 도덕적 이상과 명분을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고 그 누구도 무엇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왕은 조광조가 마치 자신의 분신인 듯 아꼈고 자신이 두는 장기판의 말처럼 힘차게 치고 나갈 때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왕은 이제 두려웠다. 자신이 감탄하고 한편으로 우러러 보았던 그 기개가 이제 자신을 뛰어넘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두려움이 되었다.“이렇게 늦은 시각에 대사헌께서 어인 일이오?”점점 희미해지는 촛불에 왕의 표정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전하, 선왕 연산의 여식 말이옵니다. 지난 병인년 행방이 묘연한 연산의 여식이 하나 있사온데……”조광조가 왕의 표정을 잠시 살폈다. 왕의 표정에서 약간의 호기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그래?”“전하께서 보살펴 주시고 계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疏而不漏):하늘의 그물은 넓으나 빠져나갈 수 없다 하였습니다. 연산의 자식이고 장녹수의 여식입니다. 그들의 자식이 살아 왕의 보호를 받으며 천수를 누리는 것은 의가 아니옵니다. 전하.”“그 아이는 지난 병인년에 부모가 어떤 자였는지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다. 그런 천지분간도 모르는 아이에게까지 죄를 묻는 것은 지나친 것 아닌가?”왕은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자 애썼다. 그것이 그가 연산의 폭정 아래 살아 남은 자신만의 보호본능이었다.“전하. 부모지죄, 자식불면(父母之罪 子息不免)이라 하였나이다.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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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금지된 혼인

영수에게 지난 삼년은 마치 삼일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영수는 왕의 딸이었고 왕이 사랑하고 총애한 여자, 천하를 잠시 호령했던 여자가 잉태한 자식이었지만, 지금은 연모하는 남자가 있고 그에게서 아낌을 받는 지극히 평범한 한 여자였다.“아씨, 그게 뭐에요? 색깔이 참 곱네요.”최나인이 묻자 영수가 대답했다.“응. 두루 주머니야 색깔 진짜 곱지?”영수가 흡족한 얼굴로 주머니를 최나인 얼굴에 들어 올렸다.“우리 아씨 한 도련님이 그리 좋아요?”“유모 나는….”영수는 잠시 마음이 살짝 가라앉았다.‘나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희생한 유모, 우리 유모도 남자의 품에 안겨 위안과 쉼도 얻고 의지도 하고 싶었을 때가 있었을텐데…’영수가 괜히 최나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자 얼굴이 굳어졌다.“아씨 왜 그래요? 제 말 때문에 언짢아 지셨는지요?”“아니야 유모 그런거 아니야”영수는 다음번 장에 가면 최나인에게 어울리는 예쁜 꽃신을 사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손에 노란색 꽃신을 쥔 영수는 발걸음이 나는 듯 가벼웠다. 꽃신을 보고 환하게 웃을 유모를 머리속에 그리니 영수는 미소가 절로 나왔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 제법 사람이 뜸한 고갯길에 들어서는 순간, 두 사내가 영수의 앞길을 가로 막았다.“이봐!”“예? 무슨 일이 십니까?”“보아 하니 몰락한 양반집 규수 같은데 맞지?”두 사내 중 좀 더 험상궃게 보이는 자가 영수를 음흉하게 쳐다보며 투박하게 말했다.“무슨 일이십니까? 왜 이러세요? 더 다가 오면 소리를 지르겠습니다.”“소리를 지를 테면 질러봐 소리를 지르면 우리야 더 좋지”다른 사내가 영수의 팔목을 덥썩 잡았다.“이거 놓으세요. 소리를… 윽”험상 궃은 사내가 영수의 입을 굳은 살이 배긴 거친 손으로 덮었다.영수는 숨이 쉬어 지지 않는 것 같았다.그때였다.‘퍽’느티나무 뒤편에서 늠름한 사내가 영수의 입을 틀어 막은 사내의 목덜미를 손날로 강하게 내리쳤다.한이었다.‘윽’사내는 마치 급소를 가격 당한 듯 괴로워 하며 영수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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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달빛 아래 혼례

영수는 그날 너무나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조선 최고의 미녀라고 해도 무색할 정도였다. 색감이 아주 선명하고 또렷한 홍색치마, 백분화장을 하여 달빛처럼 뽀얀 양볼, 연지를 바르고 초승달처럼 길고 검게 그린 눈썹에 붉은 앵두 같은 입술 그리고 가지런히 땋아 올린 머리 뒤편에 꼽은 은비녀, 비록 방안에서 둘만 치르는 약식 혼례라 족두리는 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였다.한 또한 단령을 차려 입고 영수를 마주하며 바라보는 모습이 마치 신선을 보는 듯 했다. 한은 영수를 그윽히 부드럽게 바라보았다.정적 속에 놓인 소반 위로 두 개의 표주박 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유모가 조심스레 술을 따르자, 한이 먼저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쌉싸름하면서도 달큰한 곡주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한이 먼저 술을 목으로 넘기자, 그를 마주 보고 앉은 영수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뒤따라 잔을 들었다.긴 활옷 소매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들어 올려진 영수의 하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비로소 두 조각의 박이 하나로 합쳐지듯, 두 사람의 인연이 끊어질 수 없는 매듭으로 묶이는 찰나였다.“두 분 모두 감축드리옵니다. 이제 정말 부부의 연을 이으셨군요.”최나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유모 정말 고맙소. 이제 내 유모에게도 정성을 다하리다.”한이 감격한 듯 목소리가 약간 떨리며 말을 건넸다.“도련님, 이 늙은 몸은 염려 마셔요. 아씨를 부탁드립니다. 부디 귀한 옥석처럼 아껴주시고 지켜주셔요.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창호지 문 너머로 스며든 희뿌연 달빛이 방 안의 정적을 메우고 있었다. 촛불조차 숨을 죽인 밤, 한과 영수는 서로의 숨소리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앉았다. 지난 삼 성상(3년)의 세월이 이 찰나의 침묵 속에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한의 손길이 영수의 뺨을 타고 내려와 조심스레 옷고름에 머물렀다. 영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바스락거리는 명주 천의 마찰음이 고요한 방 안에 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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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복수의 그림자

“나으리. 알아냈사옵니다.”“그래 그 남자의 정체가 무엇이더냐?”“권한이라 하는 서자이옵니다.”“서자라고?”“예. 그런데… 그 자가 혼인을 하였사옵니다.”“혼인?”“연산의 여식과 말이옵니다. 한 달 전, 집에서 비밀리에 치렀다 하옵니다.”“예 유모가 혼례의 증인을 섰다 하옵니다.”“그게 사실이냐?”"예! 확실하옵니다."양반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눈빛에는 집요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내일 다시 와서 앞장 서거라. 내 직접 확인해 보아야 겠다.”“예! 나으리.”…………………………………………………………………………………..“부인, 오늘은 어쩐 일로 손이 이리 거친 것이오?”“서방님, 아닙니다. 다른 때랑 다름 없는데요?”“아니오. 여기는 없던 물집도 잡혀 있고”한은 영수의 손을 매만지면서 안쓰러워 했다.“내가 검술 연습에 집안일을 너무 소홀히 했소. 내일은 나도 나가 도울 것이오.”“서방님 아닙니다. 서방님은 연습에 매진하세요. 무과 시험도 얼마 남지 않으셨잖아요? 농사일은 저에게 맡기셔요. 어차피 승덕어멈과 유모가 대부분 하고 있고 저는 옆에서 도울 뿐입니다.”“아니오 부인. 내가 무과를 핑계로 생계를 어찌 아녀자에게만 맡기고 나몰라라 한단 말이오. 그것은 가당치 않소. 내일은 나도 나가 도울 것이니 제발 말리지 말아 주시오.”한이 사정하듯 말하자 영수도 더 이상 말릴 방도가 없었다.다음날, 마늘밭을 고르고 집에 오는 길에 승덕 어멈이 말했다.“역시 서방님이 계시니께 밭일도 하나도 안 힘들고 금방 끝나부렸구먼유”모두가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 한 양반 사내와 그의 수하로 보이는 자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나으리. 제가 알아본 바로는 맨 앞에 저 여자가 승덕어멈이라고 아래 동네 밭을 부치는 농부의 아내입니다. 그리고 뒤에 여자가 아마 연산의 여식이고 그 옆에 흰저고리가 유모임에 틀림 없습니다. 유모 옆에 키가 훤칠한 자 보이시죠? 제가 붙여 둔 아이 말에 따르면, 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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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사라진 장원

그 시각, 승덕 어멈이 헐레벌떡 영수의 집에 찾아왔다.“나으리. 나으리!”“허허 웬 소란이냐?”“나으리 지가 관아 벽보에 나으리 이름을 보았구먼요. 장원 권-한. 떠억 하니 붙어 있었구먼요. 정말 감축드립니다.”옆에 있던 영수가 너무 놀라, 잡고 있던 골무와 바늘을 내려 놓았다.“승덕 어멈, 그게 참말 인가?”“예 마님. 참말이구먼요. 제가 똑똑히 보았고 혹시나 해서 옆 사람에게도 되물었구먼요. 장원 권-한 진짜구먼요.”“서방님 우리 같이 확인하러 가봐요. 네?”정말 벽보에는 권한의 이름이 제일 앞에 적혀 있었다. 영수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서방님 정말 고생이 많으셨어요. 흑흑”“부인, 부인의 고생에 비하면 내가 무슨 한 것이 있겠소? 다 부인 덕이요. 내 부인에게 더 잘하리다.”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이상하네. 방방례(과거합격행사)에 참석하라는 기별이 와야 할터인데 왜 아무 소식이 없을까요?”최나인이 의아해 하며 말했다.“글쎄요 좀 이상하네요, 유모.”영수는 약간 불안해 하며 서책을 읽고 있는 한 옆에서 속삭이듯 말했다.“아무래도 제가 관아에 좀 다녀 오겠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 못견디겠습니다.”영수가 관아에 찾아가 말했다.“저희집 부군께서 이번 무과에 장원 급제를 하셨는데 기별이 오지 않아 궁금하여 찾아왔습니다.”“존함이 어찌되는가?”“예 권한이옵니다.”“권한? 그런 이름은 없네.”영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예? 합격자 명단에 없다니요? 제가 벽보에 장원이라고 제일 앞에 이름이 쓰인 것을 보았습니다.”“허허 권한이라는 사람은 명단에 없다니까? 이만 돌아가게.”“뭔가 착오가…..”“여봐라 얼른 이 여자를 끌어내라.”………………………“서방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난 괜찮소. 부인 신경쓰지 마시오.”“장원 급제라고 똑똑히 제 눈으로 보았는데 관에서는 명단에 없다고 하니 영문을 모르겠습니다.”“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오. 심려치 마시오 부인. 몸 상하시겠소. 좀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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