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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삼촌이라 부르지 마: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정훈은 룸미러 너머로 뒷좌석에 앉은 은후의 표정을 살폈다.은후의 차갑게 잘생긴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주변을 짓누르는 공기만 한층 낮아졌다.“약혼 날짜는?”“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정훈은 확인한 내용을 그대로 보고했다.“오늘 보운정 보망산채 룸에서 양가가 약혼 날짜를 논의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범 도련님과 관계가 있던 여자가 갑자기 들이닥쳐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날짜 이야기는 그대로 보류됐습니다.”말이 끝나자, 은후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깊고 위험한 시선은 앞서가는 택시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이라의 자세는 그대로였다.긴 머리카락만 밤바람에 밀려 뒤로 흩날렸다.두 대의 차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다.그런데도 바람에 흩날리는 이라의 머리카락은 마치 은후의 손끝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택시는 호텔 앞에 멈춰 섰다.이라는 차에서 내려, 뒤따라 멈춘 검은 마이바흐를 스치듯 바라본 뒤 곧장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려던 이라를 프런트 직원이 불러 세웠다.“손님.”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손님께서 이용 중이신 객실에 갑자기 전기 설비 문제가 생겨, 긴급 수리를 요청한 상태입니다. 오늘 밤은 투숙이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이라의 머릿속이 잠깐 멍해졌다.“그럼 다른 방은요? 방을 바꿔 주시면 안 돼요?”직원의 미안한 표정이 더 짙어졌다.“정말 죄송합니다. 다른 객실은 모두 만실입니다.”다시 말해, 밤 9시가 넘은 이 시간에 이라는 다른 호텔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었다.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직원을 더 난처하게 만들지 않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챙겼다.직원은 이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분명 이 손님의 객실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호텔도 만실이 아니었다.그런데 매니저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서, 강이라 손님에게 그렇게 안내하라고 지시했다.직원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그나마 강이라 손님이 까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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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이라는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슴 안쪽이 시고 쓰렸다.은후와 보냈던 그 2년의 관계는 어두운 구석에 묻힌 씨앗 같았다. 영원히 햇빛을 받을 수 없고, 축축한 구석에서 곰팡이가 피고 썩어 갈 수밖에 없는 것.‘고씨 집안 둘째 도련님처럼 높고 귀한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창피할 만도 하지.’은후는 살짝 시선을 돌려 이라를 바라보았다. 이라는 몸을 틀어 창밖만 보고 있었다. 잔뜩 억울한 일을 당한 토끼처럼 조그만 몸에 서운함을 가득 품은 얼굴이었다.은후의 미간이 희미하게 좁혀졌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너무 심했나, 잠깐 되짚어 보았다.이라는 원래 예민하고 여렸다. 예전에는 은후가 조금만 말을 세게 해도 눈물이 금방 떨어졌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오빠’ 하고 부르던 어린 이라의 눈가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마치 은후가 잡아먹기라도 할 사람처럼 겁먹어 있었다.은후가 울었느냐고 묻기 위해 입을 열려던 때, 시선이 이라의 가느다란 발목에 닿았다.이라는 차에 오르자마자 하이힐을 벗어 던진 상태였다. 희고 말간 발을 좌석 아래 깔린 부드러운 러그 위에 놓았다.연한 분홍빛이 도는 왼쪽 뒤꿈치에 살갗이 까져 있었다. 드러난 붉은 상처가 유난히 선명했다.은후는 이라가 벗어 둔 가늘고 높은 하이힐을 바라보고서야 알아차렸다.뒤꿈치가 쓸렸다.은후의 시선이 다시 이라의 얇은 뒷모습에 머물렀다. 예전 같았으면 조금만 다쳐도 이라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은후에게 안아 달라며 달려왔을 것이다. 위로해 달라고 조르기도 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척 참고 있었다.2년 사이에 참는 법을 배운 모양이었다.창밖 풍경은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양옆의 가로등은 흐릿한 빛줄기처럼 스쳐 지나갔다.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이라는 문득 이 길이 낯익다고 느꼈다.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발목에 따뜻한 감촉이 닿았다. 온기가 피부로 스며들자 이라의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다.“왜 떨어?”은후의 낮고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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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이라는 부드러운 시트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입가에는 작은 보조개가 옅게 번져 있었다.이라의 시선은 은후가 천천히 상처를 돌보는 손끝에 머물렀다.가느다란 발목은 은후의 손안에 붙들려 있었다.드러난 살결은 은후의 검은 정장 바지와 맞닿아 더 희고 선명해 보였다.은후가 이렇게 이라의 상처를 봐 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학교에 다닐 때였다.이라는 은후가 무심코 던진 ‘운동이 부족한 것 같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학교 체육대회 100미터 달리기에 이름을 올렸다.결과는 엉망이었다.결승선이 코앞이던 때, 이라는 발을 헛디뎠다. 우승을 놓친 건 물론이고, 무릎까지 까졌다.은후가 전화받았을 때는 시청 쪽 고위 관계자들과 저녁 자리에 있었다. 술도 꽤 마신 뒤였다.이라는 은후가 정훈을 보내 데리러 올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은후가 직접 왔다.그때 은후는 25살이었다.먹빛에 가까운 고급 정장을 입은 은후는 키가 크고 자세가 곧았다. 아직 젊은 남자의 날 선 분위기와 성숙한 남자의 묵직한 기운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사람들 사이에서도 은후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학교 여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은후에게 쏠렸다.막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나이의 여자애들에게, 은후는 이야깃거리이자 몰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친구 하나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이라야, 저 엄청 잘생긴 남자 네 오빠야?”이라는 잠깐 생각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우리... 옆집 오빠야.”그때 이라는 왜 그랬는지 모르게, 은후와 자신 사이에 놓인 어른과 아이의 선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런 마음도 들었다.은후를 아무도 보지 못하게, 아무도 욕심내지 못하게 숨겨 두고 싶다는 마음.은후는 곧장 보건실로 들어왔다.의자에 얌전히 앉아 기다리던 이라를 한눈에 발견했다.이라의 눈가는 빨갰고, 고개는 축 처져 있었다.마치 아무도 데려가 주지 않아 속상한 아이처럼 안쓰러운 모습이었다.희고 고운 무릎은 거친 트랙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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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이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은후의 긴 손가락이 익숙하게 제 무릎 위에 거즈를 붙이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그가 던진 ‘평생’이라는 말은 이라의 가슴속에서 몇 번이고 되울렸다.그 울림이 가슴 안쪽을 아프게 두드렸다.은후는 아마 영영 모를 것이다.보건실 선생님은 이미 이라의 상처를 다 봐 주었고, 거즈를 붙이려던 것도 이라가 거절했다는 걸.은후가 데리러 온다는 걸 알게 된 뒤부터, 이라는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기대하고 있었다.‘이렇게 다친 걸 보면, 그 사람이 조금은 더 마음 아프지 않을까?’...차 안에는 익숙한 향기가 가득했다.그 향기가 이라의 온몸을 감싸고, 은후가 발목을 받친 손바닥은 유난히 따뜻했다.거기에 술기운까지 더해지자, 이라의 머리는 점점 몽롱해졌다.결국 이라는 흐릿한 정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고요한 차 안에 이라의 고른 숨소리가 희미하게 번졌다.늘 차갑고 정적이던 차 안에는 오래전부터 익숙했던 은은한 향이 감돌았다. 이슬을 머금은 꽃 같기도 하고, 물기를 머금은 과일 향 같기도 했다.은후는 곁에 반듯하게 앉았다.손끝은 이라의 여린 발목 언저리를 아주 가볍게 스치고 있었다.이라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잠들 수 있도록, 은후는 다른 한 손으로 이라의 발목을 받쳐 제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남자의 시선이 옆자리에 앉은 이라에게 머물렀다.이라는 차의 시트에 기대 눈을 감았다. 빽빽하고 긴 속눈썹이 눈 아래에 가느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콧대는 곧고 섬세했으며, 작게 맺힌 코끝은 살짝 둥글었다.화려한 이목구비에 어린아이 같은 귀엽고 사랑스러움을 조금 더해 주었다.잠든 이라의 붉은 입술은 살짝 앞으로 내밀려 있었다.묘하게 귀여웠다.은후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가, 곧 다시 가라앉았다.‘저렇게 부드러운 입술로 어떻게 그런 말들을 했을까?’‘내가 싫다, 역겹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이제 끝내자고. 그런 모진 말들을...’‘10년을 곁에 두었더니, 결국 이렇게 야속한 애가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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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은후는 이라가 갑자기 눈을 뜰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이라의 맑고 촉촉한 눈에는 아직 잠기운이 남아서 얌전하고 유순해 보였다.은후의 깊은 눈동자가 잠시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러나 곧 다시 차갑고 담담한 기색으로 돌아왔다.“깼으면 네 다리로 직접 걸어.”목소리는 무심했고, 말투는 흔들림이 없었다.이라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은후의 정장 재킷이 언제부터인지 이라의 몸 위에 덮여 있었다.천에는 아직 은후의 체온이 남아 있는 듯했고, 그 온기가 이라의 몸에 닿아 묘하게 섞여 있었다.은후는 허리를 숙인 채 차 안으로 몸을 들이고 있었다.한쪽 팔은 이라의 몸을 감싸 허리를 안정적으로 받치고 있었고, 다른 손은 이라의 무릎 아래를 지나 몸을 살짝 들어 올린 상태였다.은후가 말을 끝내자마자, 이라를 다시 좌석에 내려놓으려는 듯 손에 힘을 풀려고 했다.이라의 몸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이라는 반사적으로 은후의 목을 끌어안았다.이라의 고운 얼굴은 술기운으로 붉어져 있었고, 커다란 눈에는 아직 흐릿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저택 밖의 따뜻한 조명이 차 안으로 스며들어 이라의 얼굴 위에 내려앉자, 이라는 더 여리고 아름다워 보였다.“저 취했어요.”이라가 은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안아 주세요.”은후가 눈을 내리깔았다.“억지 부리는 거야?”이라의 두 팔은 은후의 목을 더 단단히 감았다.억지든 아니든, 이라는 술기운을 핑계 삼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발 아파요.”말끝에는 제법 서운한 기색까지 묻어 있었다.은후가 가볍게 웃었다.시선이 밴드를 붙인 이라의 뒤꿈치에 닿았다.그 정도면 이유는 되는 셈이었다.은후는 이라의 몸 위에 덮인 검은 재킷을 여며, 이라를 통째로 감싸듯 안았다.긴 손가락으로 이라의 하이힐 끈을 걸어 들고, 이라를 차 안에서 완전히 안아 올렸다.은후는 그대로 저택 본채를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지나는 길 양쪽의 화단에는 따뜻한 조명이 차례로 켜져 있었다.불빛은 밤 속에서 별처럼 반짝였다.이라는 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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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짧고 단정한 한마디가 이라의 마음을 가늘게 찔렀다.이라의 입가에 피어 있던 보조개가 굳었다. 웃음은 그대로였지만, 눈가에는 희미한 붉은 기가 번졌다.술 때문인지, 서운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손끝에 들어가 있던 힘이 풀렸다. 희고 가느다란 팔이 은후의 어깨에서 힘없이 떨어졌다.이라는 늘 알고 있었다.감정의 세계에서 은후는 이라에게 유일한 존재였다.하지만 은후에게 이라는 여러 여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은후는 침대 옆에 높고 곧게 서 있었다.잠시 이라의 표정을 살피던 은후는 이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그때 이라의 맑은 목소리가 은후의 등 뒤로 들려왔다.“몇 명인데요?”은후의 걸음이 멈췄다.목소리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했다.“하나.”술기운 때문인지, 이라는 소나무처럼 올곧은 은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대담하게 물었다.“그 여자랑도 잤어요?”말이 끝나자 방 안이 숨 막히게 조용해졌다.이라는 저도 모르게 옆에 놓인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붉은 입술도 살짝 다물렸다.알고 싶었다.하지만 진심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은후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깊은 눈동자가 이라의 희고 고집스러운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오늘 저녁 술이 과했어?”남자의 목소리는 느긋했고, 태도는 여전히 오만했다.이라는 끝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런데도 가슴 안쪽의 쓰라림은 더 짙어졌다.앞의 두 질문에 은후는 굳이 그렇게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아도 됐다. 못 들은 척 넘길 수도 있었다.하지만 은후는 대답했다.이라가 쓰던 침대에 다른 여자가 잔 적이 있다고.있고, 단 한 명이라고.은후는 거짓말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었다.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건, 그 여자가 은후에게 가볍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연인일까?’‘아니면, 애인?’한때 은후와 이라 둘만의 공간이었던 이곳에 다른 여자를 데려와, 이라의 침대에 눕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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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그때 아직 열아홉도 되지 않았던 이라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나중에야 이라는 알게 되었다.아니었다.은후는 이라를 사랑하지 않았다.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가장 가까운 관계가 된 뒤에도, 침대 위에서 서로를 놓지 못하던 때에도.은후는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2년 전, 이곳을 떠나고 나서야 이라는 뒤늦게 깨달았다.그 2년의 다정함과 가까움, 침대 위의 뜨거웠던 시간은 모두 이라 혼자만의 착각이었다.은후에게 이라는 반드시 붙잡아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은후에게 이라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이라의 가슴에 서운함이 차올랐다. 코끝이 시큰하고 목 안쪽이 쓰렸다.“무슨 조카사위야. 어른인 척은.”“나보다 고작 몇 살 더 많으면서, 진짜 내 삼촌이라도 되는 줄 알아?”“어느 삼촌이 조카랑 자?”주먹질 몇 번에, 값비싼 정장 재킷은 금세 구겨졌다.은후는 모든 면에서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옷차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이라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은후가 이 정장이 이렇게 구겨진 걸 보면, 그 잘난 얼굴이 얼마나 차갑게 굳을지.한바탕 화를 풀고 나니, 이라의 기분도 조금은 나아졌다.몸에 술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이라가 침대에서 내려와 씻으러 가려던 때, 문가에 선 길고 곧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똑바로 바라보니, 문 앞에는 은후가 서 있었다.소나무처럼 반듯한 몸.잘생긴 얼굴 위로 눈썹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은후는 느긋한 태도로 이라를 보고 있었다.이라가 멈칫했다.곧바로 구깃구깃해진 정장 재킷을 집어 팔에 걸쳤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밝은 눈을 크게 뜨고 억지로 웃었다.“삼촌?”이라의 얼굴에는 그럴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속으로는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쳤다.은후가 아까 나갔다가 돌아온 건지, 아니면 애초에 가지 않았던 건지 알 수 없었다.‘대체 언제 다시 돌아온 거야?’‘방금 한 말들을... 들었을까?’“뭐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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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은후는 위층을 한 번 바라본 뒤 지시했다.“먹을 것 좀 준비해. 해장국도.”잠시 뒤, 은후가 덧붙였다.“이라가 어둠을 무서워하니까, 밤에는 정원 등 끄지 말고.”은후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조서경은 바로 알아들었다.“네, 대표님.”은후가 대문 밖으로 나오자, 정훈은 이미 차 문을 열어 두고 있었다.은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손끝의 붉은 불씨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였다.이어 몸을 숙여 뒷좌석에 올라탔다.고요한 차 안에 아주 낮은 웃음이 스쳤다.‘어느 삼촌이 조카랑 자?’‘그 말은 틀리지 않았네.’은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뒷좌석에 몸을 기댔다.연기 사이로 반듯하고 잘생긴 옆얼굴이 흐릿하게 드러났다.‘난... 이라랑 잤지. 그것도 2년이나...’‘내가 무슨 자격으로 어른 행세를 하겠어?’...밤 11시.먹빛 하늘에는 별들이 드문드문 떠 있었다.거대한 통유리창 밖으로는 넓은 강이 펼쳐져 있었고, 맞은편의 화려한 불빛은 별빛 속에 희미하게 섞여 들고 있었다.이라는 샤워를 마친 뒤, 익숙하게 욕실 옷장에서 따뜻한 분홍빛 목욕가운을 꺼내 걸쳤다.가운은 이라의 몸에 꼭 맞았다.천에서는 이라가 좋아하던 향이 은은하게 났다.2년이 지났는데도,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인 것 같았다.하지만 현실은 달랐다.모든 것이 다 달라졌다.머리는 반쯤 말라 있었다. 풍성한 긴 웨이브 머리가 흘러내리며, 크지 않은 이라의 갸름한 얼굴선을 더 또렷하게 감쌌다.술기운도 대부분 가셨다.이라는 깨끗하고 환한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 젊은 여자를 바라보았다.피부는 희고 맑았다. 방금 씻고 나온 탓에 뺨에는 엷은 붉은 기가 올라왔다. 촉촉한 눈매는 물기를 머금은 듯했고, 붉은 입술은 장미 꽃잎처럼 선명했다.이라는 조용히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눈매가 서서히 어두워졌다.어릴 때 누군가 이라에게 말했다.이라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눈매와 이목구비가 놀랄 만큼 비슷해서, 마치 같은 틀에서 찍어 낸 것 같다고.또 누군가는 엄마가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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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아래층 거실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이라는 입가에 옅은 보조개를 띤 채 계단을 내려왔지만, 어디에도 은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평소 이 시간이라면 은후는 거실에서 통화중이거나, 서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을 것이다.적어도 은후가 잠들 시간은 아니었다.이라는 다시 타다닥 계단을 올라갔다. 곧장 은후의 서재로 향했다.서재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다.이라는 문을 두드렸다.“삼촌, 옷 갖다주러 왔어요.”말이 끝났지만 안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이라가 다시 불렀다.“삼촌?”대답은 없었다.“그럼 저 그냥 열고 들어가요?”이라의 손이 문손잡이에 닿았다. 막 문을 밀고 들어가려던 때, 뒤에서 누군가 이라를 불렀다.“이라 아가씨.”이라는 몸을 돌렸다.맞은편에서 낯선 중년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이는 40대 안팎으로 보였다.조서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대표님 댁을 관리하고 있는 조서경입니다.”이라는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다가, 잠시 뒤 저택 안을 둘러보았다.그제야 예전에 이곳에서 일하던 익숙한 직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래서 이 사람이 이라를 ‘이라 아가씨’라고 부른 것이었다.예전 이곳에서 이라를 알던 직원들은 모두 이라를 그냥 ‘아가씨’라고 불렀다.이라가 의아한 듯 물었다.“관리인이세요? 동희 이모는요?”예전 이곳에는 직원들 말고도 이라의 생활을 따로 챙겨 주던 아주머니가 있었다. 이름은 민동희였다.이라는 민동희와 사이가 좋아, 다정하게 동희 이모라고 불렀다.“죄송합니다, 이라 아가씨. 말씀하신 동희 이모라는 분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조서경은 공손하게 대답했다.그러고는 이라 뒤쪽의 닫힌 서재 문을 한 번 보고 물었다.“이라 아가씨, 대표님을 찾으시는 건가요?”“서재에 계세요?”이라가 물었다.“대표님은 이미 가셨습니다.”“가셨어요?”이라의 고운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럼 언제 돌아오시는데요?”조서경은 고개를 저었다. 은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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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사진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것을 주워 은후에게 돌려준 사람도 조서경이었다.은후는 고맙다고 말했다.그러고는 사진 위에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털어 내듯 손끝으로 가볍게 쓸었다. 그때의 목소리는 조서경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그날 밤, 은후는 혼자 소파에 앉아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마지막에는 소중한 물건처럼 사진을 조심스레 품에 넣고, 그대로 저택을 떠났다.“이라야...”조서경은 그제야 사진 속 여자아이를 또렷이 떠올렸다.한 번 보면 쉽게 잊기 어려울 만큼 예쁜 아이였다.눈매가 곱게 휘어 있었고, 웃음은 장난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입가에는 옅은 보조개가 피어 있었다.그 얼굴이 지금의 이라와 완벽하게 겹쳤다....다음 날 아침.맑은 햇살이 얇은 커튼 너머로 방 안에 스며들었다.반질한 바닥 위로 가지런히 잘린 빛과 그림자가 내려앉았다.공기 중의 작은 먼지들이 햇살 속에서 가볍게 떠다녔다.침실 문이 조심스럽게 두드려졌다.이라가 문을 열자, 앞에 선 사람을 보고 입가를 살짝 휘었다.“좋은 아침이에요.”이라의 미소는 달콤하고 환했다.맑은 두 눈은 이른 아침의 햇살처럼 밝아서 초가을 새벽안개마저 걷어 낼 듯했다.조서경은 문 앞에 공손히 서 있었다.손에는 신상 고급 맞춤 투피스 한 벌이 들려 있었다.이라의 미소를 마주하자 조서경의 입가에도 저절로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좋은 아침입니다, 이라 아가씨. 대표님께서 입으실 옷을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하시려고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아침 일찍부터 왔다고?’“고마워요.”이라는 옷을 받아 들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투피스는 명품 브랜드의 프라이빗 맞춤 라인이었다. 가격은 기본이 몇천만 원대에서 시작하는 옷이었다. 이라가 예전에 즐겨 입던 브랜드이기도 했다.사이즈는 지나치게 잘 맞았다.이라의 몸에 꼭 맞아, 한 치도 남거나 모자라지 않았다.색도 이라가 좋아하던 따뜻한 화이트 계열이었다.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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