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Bab 11 - Bab 20

32 Bab

11화 그 남자의 집 -1

엘리베이터 문이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유리문 안쪽에서는 이른 시간부터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공간 전체에 얇은 긴장과 업무의 열기가 깔려 있었지만, 강현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공기는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직원들의 인사가 이어졌지만, 강현은 짧게 고개만 끄덕인 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곧장 복도 끝 회의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그의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 위로 규칙적으로 울렸다. 회의실 문 앞에 잠시 멈춘 채 짧게 숨을 내쉬고 강현은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강현은 역시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무표정한 얼굴, 단정하게 정돈된 슈트, 흐트러짐 없는 걸음. 어젯밤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그는 상석에 앉아 테이블 위 서류를 넘겼다. “신흥물류 건은 어떻게 정리됐죠.” “이사님 쪽 정리는 끝났습니다. 하청 라인 조율만 남았습니다.” “내일까지 마무리하세요.”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 감정은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강현은 미지근해진 커피잔을 들어 입술만 적신 뒤,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쌉쌀한 맛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머릿속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아니, 철저하게 고요한 척을 연기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매끄럽게 스며들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단 한 자락의 음영조차 비치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 정도의 숙취나 피로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밤을 새우고 병째 술을 비워내도 멀쩡히 거대한 투자 그룹의 판을 짜고 일을 처리해 온 사람이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명치 끝이 거슬렸다. 독한 알코올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현은 무심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유를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생각의 자락을 여는 순간, 가슴 가장자리를 긁어대던 쓸데없는 이름 한 개가 기어이 머릿속을 통째로 점령해 버릴 테니까. 그 여자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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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그 남자의 집 -2

설화는 무심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티셔츠 하나만 걸친 다리 위로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순간, 피부 위로 소름이 잘게 돋았다.이게 뭐야.원래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 비에 젖어 무겁게 들러붙어 있던 낡은 티셔츠도, 축축한 청바지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지나치게 큰 흰 티셔츠 한 장이 어깨부터 허벅지 위까지 헐겁게 걸쳐져 있었다.낯선 옷. 아니, 낯선 남자의 옷.설화는 반사적으로 티셔츠 자락을 움켜쥐었다. 원단에서 희미한 향이 났다. 이 방에 배어 있는 차갑고 건조한 스킨 향. 어젯밤 희미한 의식 너머로 스쳤던, 남자의 품에서 나던 향이었다.누가 갈아입힌 거지.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더 나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이미 가장 불편한 가능성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설화는 속으로 숨을 삼키며 급히 담요를 끌어올렸다. 손톱이 천을 파고들 만큼 세게 움켜쥐고 나서야, 간신히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이런 곳에 내가 왜…….불안이 발목부터 스며들었다. 낯선 침실, 지나치게 넓은 침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가구들. 어느 것 하나 자신 것이 아니었다. 설화는 한동안 침대 위에 굳어 있다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렸다.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집 안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난간 손잡이를 붙잡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설화는 담요가 구명줄라도 되는 듯 몸에 바짝 감고 있었다.시야에 들어온 거실은 상상보다 훨씬 넓었다. 높은 천장, 반듯하게 놓인 가구들, 차갑게 빛나는 대리석 바닥. 통유리 너머 정원에는 밤새 내린 비가 아직 남아, 나뭇잎과 꽃잎 끝마다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설화는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세상 불공평하네……."그 순간, 뒤쪽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일어나셨습니까."놀란 설화가 고개를 돌렸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자세는 지나치게 단정했고, 시선은 예의 바르면서도 차가웠다."대표님께 방금 연락드렸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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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그 남자의 집 -3

식탁 위에는 이미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고급 저택의 주방에 어울릴 법한 한식 상차림도, 호텔 조식 같은 접시들도 아니었다.편의점 도시락 몇 개. 삼각김밥. 컵수프와 작은 우유, 플라스틱 포크까지. 그것들이 지나치게 반듯한 식탁 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설화는 잠시 말문을 잃은 채 헛웃음이 나왔다."이건……." "먹을 수 있는 걸로 사 오라고 했어."강현은 의자 쪽을 턱으로 한번 가리켰다."비싼 거 차려 놔 봐야 못 먹을 것 같아서."그 말에 설화는 미묘하게 얼굴을 굳혔다. 배려인지, 무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말투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는, 그녀가 이런 음식을 더 익숙하게 느낄 거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그게 조금 불쾌했다.설화는 의자 앞에 서서 식탁 위를 내려다보았다. 삼각김밥 포장지에 맺힌 작은 물기, 아직 온기가 남은 도시락, 옆에 놓인 나무젓가락.강현은 맞은편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앉아." "저, 괜찮……." "유설화."주방에 이름이 낮게 불렸다. 말하는 법도, 부르는 법도 익숙한 사람처럼. 그 한마디에 설화는 입을 다물었다. 강현의 눈빛은 차갑고 무심했다."먹고 말해."설화는 결국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담요를 무릎 위로 끌어당긴 채, 조심스럽게 삼각김밥 하나를 집었다. 포장지를 뜯는 작은 소리만이 식탁 위에 어색하게 번졌다.강현은 그런 설화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맞은편 의자에 앉지 않은 채 식탁 끝에 비스듬히 기대섰다."옷은."설화의 손이 멈췄다. 강현의 시선이 그녀의 티셔츠 자락으로 잠깐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젖어서 버렸어."설화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그를 쳐다봤지만 돌아오는 건 무료한 눈빛뿐이었다."버렸다고요?"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제 옷인데요." "그럼 다시 가져다줄까? 기름이 배고 빗물에 절어서 냄새나는걸."냉정한 말에 설화는 할 말을 잃었다. 맞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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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가치를 정하는 사람

"……제가 어떻게 사는지 구경하면서, 한심하다고 비웃으신 거네요." "비웃을 시간도 없고. 네가 얼마나 무력했는지 확인했을 뿐이지." "……." "알바를 세 개를 뛰든, 밤을 새우든, 결국 네 처지는 내 손바닥 안이라는 것."설화는 잠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오기를 부리듯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이건 싸움조차 되지 않는 부분이란 걸. 이 집 안에서 자신의 분노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이 식탁 위에 차려진 것들은 배려가 아니라, 네 한계를 알게 하려는 노골적인 조롱이었다.강현은 아무 말 없이 설화의 시선을 받아주었다. 그 시선은 점점 더 무겁고 차가워졌다. 설화는 결국 손에 들고 있던 삼각김밥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왜. 입맛이 없어?" "네."설화는 고개를 숙인 채 단호하게 받아쳤다."너무 질려서, 이제는 손이 안 가네요."강현의 입꼬리가 얄팍하게 올라갔다. 벼랑 끝에 몰려서도 고개를 꼿꼿이 드는 생존 본능이 제법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나직하게 명령했다."오 실장님, 이것 좀 치워 주세요."곧 처음에 봤던 남자가 다가왔다. 편의점 도시락과 삼각김밥, 컵수프가 빠르게 봉투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설화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저도 이제 가볼게요."그 순간, 강현의 짙은 눈썹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그녀가 몸을 틀려는 찰나, 그의 커다란 손이 손목을 단번에 낚아채 그대로 자신 앞에 세웠다."누가 가도 된다고 했지?"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설화의 등줄기가 얼어붙었다."……네?" "아버지 빚 때문이라면, 제가 어떻게든 갚을게요." "갚아?"강현이 식탁 테이블을 밀고 완전히 일어섰다. 압도적인 체구가 설화의 시야를 차단하듯 가로막았다.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그의 시선이, 설화의 숨통을 기어이 틀어쥐었다."원금에 이자까지 붙으면 하루에도 돈이 불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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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정해진 가치

강현은 말없이 설화를 바라보았다.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그의 얼굴은 철저하게 닫혀 있었다. 감정도,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설화는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차라리 화를 냈다면, 차라리 비웃기라도 했다면 견딜 수 있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강현은 이미 결론을 끝낸 사람처럼 고요했다. 이윽고 그의 입꼬리가 아주 느리게 올라갔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에는 온기가 없었다.“그럼 시작해 볼까. 네가 뭘 할 수 있는지.”잠시 사이를 둔 그가 낮게 덧붙였다.“2층에서.”말뜻을 이해하는 순간, 설화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더니, 곧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전……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작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을 누르고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지막 저항이 남아 있었다. 강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한 걸음 다가오며 낮게 물었다.“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몰라?”설화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모욕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강현은 그녀의 침묵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이것도 못 해, 저것도 못 해. 그럼 넌 대체 뭘로 갚을 건데.”잔인한 현실이 정면으로 박혔다. 설화는 숨을 삼켰다. 하지만 수치심 속에서도 억눌려 있던 감정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물건처럼 무너질 수 없다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네. 먹고살기 바빠서 연애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고, 그런 거 모릅니다. 돈 없는 처지가 비참해서 밑바닥 기는 게, 그게 그렇게 우스운 일인가요?”떨리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강현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짧은 침묵 뒤, 그의 입술 사이로 낮은 욕설이 새어 나왔다."씨발. 끝까지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지.”강현의 손이 설화의 손목을 잡았다. 크고 차가운 손아귀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설화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잠깐…….” “잠깐? 방금 그렇게 큰소리치더니, 이제 서 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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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꺾인 날개

침실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강현은 설화를 침대 앞까지 밀어붙였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물러서자 그의 손이 다시 손목을 붙들었다. 빠져나갈 틈은 없었다. 작은 손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흔들렸지만, 그 움직임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고 무력했다.“이제부터 잘 들어.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내가 정해.” “대표님…….” “그렇게 부르지 마. 지금은.”설화의 눈가가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버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걸 이 사람은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방 안에는 말 없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침실을 짓누르는 정적이 공기마저 무겁게 만들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듯한 고요가 천천히 공간을 잠식해 들어왔다.강현은 설화를 침대 위로 밀어 눕혔다. 등이 매트리스에 닿는 순간 설화의 숨이 짧게 끊겼고, 그의 손끝이 아주 잠깐 굳었다. 그러나 그 멈춤은 곧 사라졌다. 도망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강현은 곧바로 다가와 그녀의 두 손목을 움켜쥐었다. 설화의 가느다란 손목은 그의 한 손안에 쉽게 갇혔다.“이제부터 잘 배워. 그래야 쓸모가 있지 않겠어?”목소리는 낮고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부드럽게 들리는 만큼 더 잔인했다.설화는 얼어붙은 채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가 갈아입혀 놓은 티셔츠가 어깨 위로 헐겁게 흘러 있었고, 그 사실이 다시금 그녀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공포와 혼란, 그리고 모멸감이 뒤섞여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강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앉았다가 다시 그녀의 눈으로 돌아왔다. 그 눈빛 안에는 냉정함과, 끝내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교차하고 있었다. 설화는 그 시선에 붙들린 채 눈을 떼지 못했다. 마주 보는 순간마다 자신이 조금씩 작아지는 기분이었다.그의 손끝이 티셔츠 자락에 닿았다. 얇은 천이 위로 걷어 올려지며 하얀 맨살이 드러나는 감각만으로도 설화의 몸은 굳어 버렸다. 작은 오한이 목덜미에서 시작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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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만족하셨나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방 안에는 끈적하게 가라앉은 고요만 남아 있었다.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빛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설화는 그 빛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몸은 침대 위에 있었고, 마음은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마침내 모든 움직임이 멈췄을 때, 방 안에는 끈적하고 무거운 고요만 남았다.강현은 한동안 설화의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거친 숨을 골랐다. 조금 전까지 거칠게 몰아붙이던 남자는 이제 기묘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설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베개 끝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강현이 몸을 물리자마자 설화는 후다닥 담요를 끌어당겨 엉망이 된 몸을 감싸 안았다. 뒤늦은 수치심이 해일처럼 밀려왔다.그때 강현의 큰 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설화의 뺨 위로 흐른 눈물 자국을 닦아내려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러나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설화가 발작하듯 몸을 웅크리며 거부했다.그 움직임에 강현의 손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흔들림이 스쳐 지나갔다. 한참 뒤, 그가 어울리지 않게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괜찮아?”설화는 웃고 싶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정말 실소라도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짓이겨진 입술 끝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괜찮아요.”대답은 놀랄 만큼 얇고 건조했다. 그 말은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다. 더는 아무것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비참한 방어에 가까웠다.설화는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였지만, 강현을 향한 시선만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했다.“이제 만족하셨나요? 그럼. 다행이고요.”강현의 굳은 얼굴이 순간 거칠게 일그러졌다. 아주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 끝내 뱉지 못하고 피식, 의미를 알 수 없는 서늘한 웃음만 흘렸다.“그래. 앞으로도 잘해 봐. 만족스럽게.”그 말에 설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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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그의 이름

강현은 2층에서 내려오는 조심스러운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설화가 계단 끝에 서 있었다. 그가 준비해 둔 원피스를 입은 채였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제 것이 아닌 듯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설화는 시선을 바닥에 둔 채 원피스 자락만 연신 만지작거렸다. 희고 마른 손가락이 천 끝을 붙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강현의 시선이 그 손으로 내려갔다.손목을 붙잡았던 감각이 뒤늦게 손끝에 되살아났다. 가늘고, 힘을 주면 쉽게 부러질 것 같았던 뼈마디. 그는 무의식적으로 엄지와 검지를 한 번 문질렀다. 그 짧은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곧 손을 내렸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 키를 집어 든 강현은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자.”설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순종인지, 거부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검은 세단이 저택을 빠져나와 강변북로로 합류했다. 평일 오후의 도로는 한산했다. 차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흘렀고, 강현은 무심하게 차선을 바꾸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는데도 내비게이션에는 이미 설화가 사는 동네가 찍혀 있었다.설화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이미 일 년 동안 철저하게 감시당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다 들킨 뒤였다. 무엇을 먹는지, 어디를 오가는지, 어떤 처지로 하루를 버텼는지까지. 이제 와 주소 하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었다.차 안에는 지독한 침묵만 흘렀다. 엔진음과 타이어가 도로를 스치는 낮은 소리만이 맴돌 뿐이었다. 창밖으로 한강 물줄기가 빠르게 밀려났고, 가드레일 너머로 유월의 햇살이 하얗게 번졌다.강현은 앞만 보고 운전했다. 그러나 유리창에 비친 설화의 옆얼굴이 자꾸 시야 끝에 걸렸다. 젖었던 머리카락은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았고, 창백한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울고 난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그 모습에 괜한 짜증이 치밀었다.울렸으면 울린 대로 끝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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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불편한 진실 -1

강현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포라이터의 불꽃이 강바람에 한두 번 흔들렸다. 손바닥으로 불씨를 감싸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첫 모금을 깊게 들이마시자 연기가 폐 안쪽까지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목을 타고 내려간 연기는 쓰기만 했다. 혀끝에는 씁쓸한 재 냄새가 남았고, 속은 더 텁텁해졌다. 창문을 조금 더 내리고 고개를 젖혔다. 강물 위로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세상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 일정한 속도로 지나가는 자전거들, 오후빛을 받아 반짝이는 건너편 빌딩 유리창들. 그 평온함이 오히려 이질적이게 느껴졌다.강현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한동안 강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자 설화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차갑게 식은 눈빛, 울고도 끝내 꺾이지 않던 표정, 명함을 받아 들던 작은 손. 그 손목을 붙잡았던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지독하게 남아 있었다.사람 하나를 몰아붙이는 일은 낯설지 않았다. 돈을 받아 내고, 약점을 잡고, 무너지는 얼굴을 보는 일은 오래전부터 익숙했다. 세상은 늘 그런 식으로 굴러갔고, 강현은 그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누구보다 빨리 배웠다.무너지는 인간들에게는 대개 비슷한 표정이 있었다. 처음에는 억울해하고, 그다음에는 애원하고, 끝내 제 처지를 이해한 사람처럼 조용해졌다.그런데 유설화는 달랐다. 다르다고 인정하는 순간, 더 불쾌해졌다. 강현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안쪽에서 부서진 것이 새어 나온 소리였다.“이게 뭐야.”혼잣말이 바람에 흩어졌다. 그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연기가 천천히 올라와 시야를 흐렸다. 그 연기 너머로 강물이 움직이고 있었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조용하지만 끝내 제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줄기. 강현은 그 물결을 오래 바라보았다.***그리고 문득, 오래전 자신의 대표실로 들어오던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미래드림 대표실 문이 조용히 열렸던 날이었다.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차분한 인상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 입은 듯한 양복은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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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불편한 진실 -2

강현이 손을 내밀자, 오 실장은 준비해 온 서류철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장례식장 정보와 요청하신 가족 자료입니다.”강현은 말없이 서류를 펼쳤다. 첫 장에는 장례식장 위치와 일정, 사망 진단서 사본이 정리되어 있었다. 다음 장을 넘기자 빼곡하게 정리된 신상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유병호. 58세. 생생물산 대표. 사망. 유설화. 22세. 대학 중퇴. 편의점, 식당 등 아르바이트. 이금희. 55세. 전업주부. 현재 소재 불명.간단한 가족 관계도와 주소, 최근 이동 경로, 그리고 모녀가 함께 찍힌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가난에 눌린 집안 특유의 공기가 사진 속에서도 느껴졌다. 허름한 앞치마, 낡은 외투, 웃지 않는 얼굴들. 그 안에서 유설화는 유독 눈에 들어왔다. 꾸민 데라고는 없는데도, 이상하게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모든 것을 감추려 하면서도 감춰지지 않는 얼굴이었다.“대학은 왜 그만뒀지.” “학비 미납으로 자퇴한 것으로 보입니다. 뒤로는 계속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요.”강현은 손끝으로 설화의 사진이 붙은 페이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사진 속 여자는 카메라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옆얼굴에 가까웠다. 피곤이 내려앉은 눈매, 그러나 어딘가 쉽게 꺾이지 않을 것 같은 선. 가난에 오래 마모된 얼굴들 사이에서, 이상하게도 그 얼굴만은 완전히 닳아 없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이젠 혼자겠네.”감정이 섞이지 않은 진술처럼 들렸다.“빚도, 인생도.”오 실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현의 시선은 여전히 사진 위에 머물러 있었다. 서류 속 숫자와 기록은 익숙했다. 채무자의 재산, 소득, 가족 관계, 이동 경로. 모두 판단을 위한 자료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종이 한 장의 무게가 손끝에 오래 남았다.“장례식장은.” “경기도 쪽 사설 장례식장입니다. 비교적 조용한 곳입니다.”강현은 한참 서류를 바라보다가 잔에 남아 있던 물을 한 모금 삼켰다. 물은 미지근했고, 목을 넘어가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표정 없는 얼굴 위로 말로 설명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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