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os capítulos de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Capítulo 31 - Capítul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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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차가운 계산

전통 창살 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최고급 한정식집, 담초.상 위에는 코스 요리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지만, 테이블을 사이에 둔 두 남자는 좀처럼 손을 대지 않았다. 서강현은 맞은편의 박 회장을 응시한 채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방 안을 채운 건 숨 막힐 듯 묵직한 침묵뿐이었다.강현은 잔을 들어 목을 축인 뒤,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러나 도자기가 받침에 닿는 순간 맑은 울림이 오히려 공기의 긴장을 더 또렷하게 드러냈다.“서 대표, 본론으로 들어가지.”박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어조에는 노련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강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단계에서 미래드림이 주도권을 내려놓을 이유는 없습니다. 회장님도 이미 수익 구조와 리스크는 검토하고 오셨을 텐데요.”“자네가 상황을 단순하게 보는군.”박 회장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내가 어떤 카드까지 고려하고 있는지, 정말 모른다고 생각하나?”강현은 짧게 시선을 내리며 서류를 넘겼다. 감정 대신 숫자를 꺼내 드는 태도였다.“그렇다면 확인하죠. 자금 운용은 어느 라인으로 정리하실 계획입니까.” “기존 루트를 유지한다. 다만 변수를 대비해 우회 계좌 하나를 추가로 확보할 생각이야.” “익명 계좌 말씀이시군요.”강현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이미 그 가능성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리스크 분산 측면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다만 추적 가능성은 최소화해야 합니다. 최근 규제가 강화됐으니까요.”박 회장이 옅게 웃었다.“그 정도 대비 없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나?” “아니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뵙고 조건을 맞추는 겁니다.”박 회장은 망설임 없이 서류에 서명했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이미 결론은 굳어진 분위기였다. 강현이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시선은 끊임없이 맞물렸다. 상대의 의도를 읽고, 빈틈을 가늠하며, 다음 수를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식탁 위에는 정갈한 요리가 놓여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는 수십억 단위의 이해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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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울리지 않는 전화

삼 일이 지나도록 그 사람에게서 연락 한 통 없었다. 물건 배송이라고 뻔질나게 전화하던 사람이었다.처음 하루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강현은 애초에 타인에게 다정한 온기를 내어주는 부류가 아니라는 걸. 그런데 이틀째가 되자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스마트폰으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검게 꺼진 액정 앞에서 설화는 몇 번이나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사흘째가 되던 날, 그녀는 결국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지금 그 오만하고 위험한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이 너무 초라해서, 설화는 자신을 더 바쁘게 몰아붙였다.부르릉, 낮은 기계음과 함께 오토바이가 골목 앞에 멈췄다. 설화가 낮 동안 붙잡은 일은 배달 대행이었다. 정해진 출근 시간도 없고, 오래 붙잡아 둘 상사도 없는 일. 콜만 받으면 움직이고, 필요 없으면 앱을 끄면 그만인 일. 그 남자가 부르면 달려가야 하기에.그 선택이 스스로 우스웠다. 아무 약속도 없는 사람이, 오직 한 사람의 연락 하나를 기다리겠다고 하루를 비워 두는 꼴이라니.“또 오셨네요, 기사님.”골목 초입의 분식집 주인이 붉은 플라스틱 테이블 위로 포장 봉투를 놓으며 넉살 좋게 아는 체를 했다. 설화는 헬멧 끈을 거칠게 조이며 입꼬리만 겨우 올려 웃었다.“근처에 콜이 자주 잡혀서요.” “요즘 아주 자주 보이시네. 바쁜가 봐요.” “네. 그냥…… 시간이 좀 남아서요.”설화는 봉투를 배달 가방에 넣으며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은 시간을 맞추는 게 아니라 비워 두는 중이었다. 누군가 부르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어떤 약속에도 묶이지 않도록.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설화는 무심코 화면을 확인했다. 배달 앱 알림 두 개, 카드 승인 문자 하나,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기다리는 거 아니야.작게 중얼거린 말에 헬멧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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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엄마라는 이름

설화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여자가 서 있었다. 낡은 가방끈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설화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1년 반 전보다 훨씬 야위고 초라해진 얼굴이었다. 낯선 듯 익숙한 그 모습에, 오래 묻어 두었던 기억이 서늘하게 들춰졌다.엄마였다.여자는 한발 다가오려다 멈췄다. 설화가 물러선 만큼 골목 한가운데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예전엔 그 선을 넘어서 엄마를 붙잡고 싶었다. 지금은 다시는 넘고 싶지 않았다.지옥 같던 빚쟁이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같이 살자고 매달리던 딸의 손을 뿌리치고, 야반도주하듯 사라진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1년 반 만에 다시 나타나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잘 지내니…….”설화는 입술을 다물었다. 대꾸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는 딸을 보며 여자는 마른 입술을 짓씹었다.“우리 딸, 이쁘게 잘 자랐네.”그 말에 설화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온기가 빠졌다. 갑자기 나타나서 내뱉는 첫마디가 고작 저것이라니. 미안함도 염치도 없는 안부가 골목 안에 얄팍하게 걸렸다.침묵이 길어지자, 여자의 손이 가방끈을 더 세게 쥐었다.“설화야, 내가 지금 좀 많이 아파. 그래서 말인데…… 병원비가 조금 필요해서.” “…….” “진짜 갈 곳이 없어서 그래. 엄마가 미안해.”기어이 조소 섞인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노나 슬픔이란 단어로는 형언할 수 없는, 이 잔인한 현실에 대한 순수한 경멸이었다. 설화는 어깨를 잘게 떨며 웃다가, 이내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눈앞의 여자를 똑바로 쏘아보았다.“어쩌죠. 내가 돈이 어디 있다고.” “설화야, 그래도 네가 젊으니까 일해서…….” “혼자 살겠다고 그 빚더미에 딸년 던져놓고 도망갈 땐 언제고. 이제 와 병원비요?”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골목 안에 또렷하게 박혔다.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그때 엄마만 아팠어? 아빠 죽고 매일 같이 찾아오는 빚쟁이들한테 시달리면서, 나도 매일 밤 죽고 싶었어. 매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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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조금 덜 외로운 밤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설화는 테이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작은 진동이 손끝에서 어깨까지 번졌다. 술기운 탓인지, 기다림 탓인지 속이 울렁거렸다.한참 뒤, 낮고 느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대표님… 어디세요?”설화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혀끝에 술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흔들리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왜. “그냥… 시간 되시면, 저랑 술 한잔, 하실래요?”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거절도 허락도 아닌 침묵이었다. 설화는 그 침묵 속에서 숨을 삼켰다. 손가락이 휴대전화 모서리를 더 세게 붙잡았다.— 거기 어디야.마침내 들려온 대답은 짧고 낮았다. 설화는 그제야 눈을 감았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여기, 고깃집 바로 옆 포장마차예요.” — 끊어.전화는 그렇게 끝났다. 귓가에는 그의 목소리만 희미하게 남았다. 설화는 헛웃음을 삼키며 잔에 남은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과연 올까.나 같은 전화 한 통에 움직일 사람이었나.기대와 체념이 뜨거운 공기 속에 섞였다. 우동은 젓가락에 한 번 건드려진 채 식어 가고 있었다. 누군가 포장마차 입구를 지나갈 때마다 설화는 고개를 들었다. 대부분은 취객이거나 길을 묻는 사람이었다.기다린다는 감정이 얼마나 비루한지, 설화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 비루함조차 필요했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장면 하나가 절실했다.테이블이 하나둘 비고, 포장마차 안이 조금 한산해질 무렵이었다. 설화는 잔을 내려다본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밤공기를 맞으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회색 셔츠에 재킷을 걸친 남자였다. 큰 키, 넓은 어깨, 한 손에 무심히 쥔 자동차 키. 서강현이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좁은 공간의 공기가 달라졌다. 떠들던 사람들의 시선이 짧게 그에게 닿았다가 흩어졌다.시원한 머스크 향 사이로 담배 냄새가 희미하게 스쳤다. 강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설화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설화는 그 움직임을 멍하니 좇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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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삼청동 저택

다음 날 저녁, 설화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친 설화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생수를 들이키는 동안에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물기가 서늘하게 식어 갔다. 밤은 깊었고, 오래된 빌라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딩동. 딩동.정적을 깨고 현관 초인종이 두 번 울렸다. 설화는 마시던 물병을 내려놓고 그대로 멈춰 섰다. 잠시 망설임 끝에 문을 살짝 열어 밖을 확인한 뒤, 천천히 잠금장치를 풀었다.문 앞에는 한두 번 본 적 있는 미래드림 직원이 서 있었다. 단정한 차림으로, 손에는 지퍼를 끝까지 잠근 검은색 보스턴백이 들려 있었다. 설화는 그걸 보는 순간, 말보다 먼저 무게부터 느꼈다.“대표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남자는 짧게 말하고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설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건네받았다. 손끝에 걸리는 묵직함에, 더 묻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문이 닫힌 뒤에도 설화는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 보스턴백을 발치에 놓여 있었고, 메모지에는 삼청동 주소 하나가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어제는 말없이 와주더니, 오늘은 또 이런 식으로 나오네.설화는 낮게 헛웃음을 흘리고는, 가방을 한 번 내려다봤다. 손끝에 남은 묵직함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밤은 그렇게 지나갔다.현관에 남은 정적도, 마음 한구석에 걸린 찜찜함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다음 날 아침, 설화는 옷장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삼청동이라는 단어 하나가 이상하게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티셔츠를 꺼냈다가 넣고, 청바지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거울 앞에서 옷을 대어 보던 설화가 결국 작게 웃었다.“이젠 옷까지 신경 써야 하고.”혼잣말은 방 안에 낮게 떨어졌다. 옷장 안쪽에서 대학 시절에 입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꺼냈다. 옷을 털자, 묵은 냄새와 먼지가 희미하게 일었다. 설화는 손바닥으로 천을 눌러 주름을 폈다.택시에 오른 뒤에는 창밖만 봤다. 메모지에 적힌 주소는 삼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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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달콤한 흔적

설화는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지금 끝났어?“네, 방금 나왔습니다.”— 별일은 없었고?“네. 지시하신 대로 가방만 내려놓고 나왔습니다.”설화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그분이, 제가 어떤 사람의 눈을 닮았다고 하더군요.”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낮게 가라앉았다. 강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설화는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담장 너머에서 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수고했어.짧은 한마디가 늦게 도착했다. 더 묻지도, 설명하지도 않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끝에 힘이 풀렸다.“네.”통화가 끊겼다. 설화는 한참 동안 꺼진 화면을 내려다봤다. 그 한마디가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칭찬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짧고 사무적인 말투. 그런데도 오늘은 그 말이 싫지 않았다.설화는 화면을 조작해 메시지 보관함을 열었다. 오래된 메시지 아래쪽에 한 달 동안 감정 쓰레기처럼 남아 있던 기프티콘 하나.[STB 달콤한 디저트 세트 교환권]처음 받았을 때는 그냥 넘겼다. 발신자도 없는 쿠폰 하나가 불쾌했고, 동시에 무서웠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걸 써도 될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하루에 작은 구멍 하나를 내고 싶었다.설화는 지도 앱을 켜고 가장 가까운 S매장을 찾았다. 신호등 앞에 멈춰 선 채 화면을 내려다보니, 유효기간과 교환처가 초록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여름빛은 아직도 강했고, 아스팔트 위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공기가 묘하게 눅눅했다. 바람이 살짝 불어왔지만 금세 지나가 버렸고, 블라우스 소매 끝이 손목을 스칠 때마다 땀기 어린 피부가 잠깐씩 드러났다.매장 앞에 도착하자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초록빛 로고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바깥의 무더운 공기가 잘려 나가고 서늘한 냉기가 피부를 감쌌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차가웠고, 그 뒤를 따라 볶은 원두의 쌉쌀한 향이 천천히 번졌다. 안쪽에서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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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가라앉은 해

통화를 마친 강현은 스마트폰을 책상 위로 밀어냈다. 탁, 짧은 마찰음이 대표실의 정적을 갈랐다. 이마를 짚은 손끝이 뜨거웠다.“이런 씨발.”낮게 새어 나온 욕설 뒤로 더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설화를 보고 그 사람이 단번에 알아챘다고 했다. 눈이 닮았다고, 아주 오래전 잊었다고 믿은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고. 그 한마디가 기분 나쁘게 정확했다.강현은 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구두 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통유리 너머의 도시는 한여름이었다. 얽히고설킨 빌딩 숲 아래로 무표정한 행인들의 어깨가 쉼 없이 흘러갔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버티고, 견디고, 또 흘러가고 있었다.오늘따라 그 모습이 유난히 거슬렸다. 나만 멈춰 서 있는 것 같은 기분. 가장 단단하게 봉인해 두었던 안쪽이 통째로 들켜 버린 듯한 불쾌감에 입안이 썼다.“돌아버리겠네, 진짜.”혼잣말이 유리창에 닿자마자 흩어졌다. 창틈으로 비스듬히 스며든 오후의 햇살 속에서 먼지들이 조용히 반짝였다. 따뜻해야 할 빛이었지만, 강현의 살결에 닿는 온기는 기분 나쁠 정도로 차가워 눈을 감았다.***그 빛 사이로 오래된 냄새가 먼저 돌아왔다. 기름 냄새, 젖은 행주 냄새, 좁은 식당 안에 눌어붙은 매캐한 연기 냄새. 그 위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긁었다.“아들, 그만하고 들어가 자.”물기 젖은 고무장갑이 물기를 끌고 테이블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어머니 손에 들린 행주를 빼앗아 기름진 테이블을 거칠게 닦아낼 뿐이었다. 어머니의 손등은 퍼석했고, 굳은살은 손마디마다 층처럼 박혀 있었다.“숙제는 다 했어?” “예.” “거짓말하지 말고.” “저 못 믿어요? 서예린 여사님?” “아이고, 또 시작이네.”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머니는 웃었다. 설거지통 앞에서는 거칠고 빠르던 손이, 강현의 뺨에 닿을 때만 유난히 조심스러워졌다.어머니는 늘 웃고 있었지만, 그 눈 깊은 곳에는 가끔 닿을 수 없는 어딘가가 남아 있었다. 강현은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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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버려지는 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늘 눅눅했다. 곰팡이 냄새와 오래 묵은 담배 연기가 벽지처럼 들러붙은, 시장통 뒤편의 사채 사무실. 강현이 손을 뻗어 두꺼운 철문을 밀자, 기름칠이 말라붙은 경첩이 날카롭게 울었다. 문틈 사이로 탁한 열기가 먼저 쏟아져 나왔다.“왔네, 서강현.”검붉은 패딩 조끼를 걸친 차기광이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주황색 조명 아래서 그의 눈이 강현의 얼굴에서부터 어깨, 손끝까지 천천히 훑고 내려갔다.“요즘 손끝이 굼뜨다며. 돈 받으러 다니는 놈 손이 그렇게 느려서야 쓰겠냐.” “죄송합니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변명도, 분노의 기색도 없었다. 그 무색무취한 반응이 오히려 기광의 신경을 긁은 듯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짧게 웃었다.“넌 늘 그 말뿐이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옆에 있던 정만수가 강현의 뒷통수를 툭 쳤다.“저러다 언젠가 우리 팔아먹는 거 아닙니까.”옆에 있던 조직원 하나가 전표를 뒤적이며 피식거렸다. 강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조용히 구석진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전표와 구겨진 지폐들이 뒤엉킨 자리 앞에 서서 손을 움직였다.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지폐는 축축했고, 손끝마다 끈적한 기름때가 묻어났다. 역겨움조차 오래 버티면 일상이 되었다.“제대로 세. 할당 못 맞추면 네 손가락부터 세게 될 줄 알아.”강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무줄로 지폐를 묶자 팽팽한 탄성이 손목을 툭 쳤다. 기광은 묶인 돈을 집어 들어 대충 무게를 가늠했다.“그래도 오늘은 모자라진 않았네.”그의 시선이 다시 강현에게 꽂혔다.“내일 3번가 슈퍼. 장부대로 받아 와. 또 울면 진열대 하나 엎고. 그래도 버티면 팔을 꺾어. 알아듣지?”“알겠습니다.”강현이 몸을 돌리자, 뒤에서 웃음이 따라붙었다.“난 저 새끼 눈이 싫어.”차기광의 목소리가 문 닫히기 직전까지 따라왔다.“독한 것도 아니고, 빈 것도 아니고. 꼭 아직 뭘 고르고 있는 사람 눈이야.”골목의 찬 공기가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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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2094

기광의 구둣발이 옆구리를 걷어찼다. 둔탁한 소리가 좁은 슈퍼 안에 울렸다. 과자 봉지가 짓눌리고, 빈 유리병이 바닥을 굴렀다. 강현은 신음하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 뺨을 댄 채 가게 형광등을 바라봤다. 의식이 한 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정리해. 장부는 저쪽으로 넘기고, 현장은 그대로 둬.”서기광의 말에 조직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정만수가 봉투를 계산대 아래로 밀어 넣었고, 다른 조직원이 슈퍼 주인의 손에 억지로 장부를 쥐였다. 강현은 바닥에 엎어진 채 그 모든 걸 봤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머리는 차갑게 깨어 있었다.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 같았다. 곧 붉고 푸른 불빛이 깨진 유리창 너머로 번갈아 스며들었다. 조직원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슈퍼 안에는 쓰러진 주인과, 피 묻은 입술로 바닥에 엎어진 강현만 남아 있었다.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의 어깨를 짓눌렀고, 팔을 뒤로 꺾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목을 파고들었다.철컥.그 소리는 이상하게 선명했다. 오래된 문이 닫히는 소리처럼, 무언가가 완전히 끝나는 소리처럼.강현은 끌려 나가며 고개를 들었다. 겨울 밤공기가 허파 깊숙이 박혔다. 가로등 불빛이 얼어붙은 아스팔트 위에 희멀건 원을 만들고 있었다. 그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직은 깨끗하게 사라졌고, 남은 죄는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호송차 뒷좌석에 밀려 앉는 순간, 강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창밖으로 겨울눈이 내렸다. 하얀 눈은 타이어 자국 위를 빠르게 덮었다. 더러워진 바닥도, 발자국도, 방금 전의 흔적도 잠깐은 깨끗해 보였다.구치소의 첫날 밤은 차가웠다. 회색 벽은 축축하게 식어 있었고, 얇은 담요에서는 오래된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강현은 벽을 마주한 채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손목에는 수갑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왔지.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숨이 가라앉고 온몸의 감각이 무뎌질 즈음, 복도 끝에서 쇠문이 끌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누군가 잠깐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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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아틀리에 뮤즈

서강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몇 걸음 물러서서 눈치를 보던 최 과장이 나직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건조한 헛기침 소리가 정적을 가른 뒤에야 강현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희고 빳빳한 종이 가장자리에 서늘한 손끝이 닿았다. 사르륵,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두어 번 고요를 깨다 어느 한 페이지에서 흐름이 뚝 끊겼다. 검은 활자들 위로 그의 손끝이 걸린 채 멈춰 있었다.“이대로 진행하면 됩니까?”강현의 물음에 최 과장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큰 틀은 그렇습니다. 세부는 대표님께서 보시면 됩니다.”강현은 대답 대신 집게손가락 끝으로 하얀 종이 표면을 눌렀다. 종이 위로 얕은 자국이 생겼다.“나가보시죠.”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최 과장은 더 말을 얹지 못했다. 서류철을 고쳐 잡은 그가 소리 없이 물러나자 묵직한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대표실 안에는 오직 에어컨 바람만 공간에 감돌았다. 잠시 후, 문 너머로 다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오정민 비서실장이 정장 매무새를 가다듬고 단정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내일 일정이 빽빽하게 정리된 태블릿을 책상 한쪽에 조용히 내려놓았다.“대표님, 내일 VIP 자선 파티 동반 파트너는 어떻게 하실까요. 늘 하시던 대로 태성건설그룹 정유라 씨 쪽으로 안내할까요.”태블릿 화면을 넘기던 강현의 손이 잠깐 멈췄다. 화면에 두고 있던 시선이 천천히 오 실장에게로 옮겨갔다. 짧게 눈이 마주친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이번에는 유설화 씨로 하죠. 그렇게 정리해 주세요.”그 이름이 강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자, 오 실장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반응은 금세 사라졌다.“대표님.”오 실장이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설화 씨는 그 자리가 조금 버거우실 것 같습니다.”강현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입가로 가져갔다. 다문 입술 끝에 비웃음 같은 기색이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는 아무 감정도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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