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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신을 삼킨 소녀: Chapter 11 - Chapter 20

32 Chapters

11화 마리타는 엄마가 더 많잖아

노엘이 눈을 감자 서늘한 바람이 다시금 불어왔다.그가 잡고 있는 소매 자락도 함께 차가워져 이미 하얀 이의 정체를 대충은 알 수 있었다.노엘은 실눈도 뜨지 않고 오직 소매만을 동앗줄처럼 잡았다. 어머니를 구하고 자기도 살기 위해서.마리타는 힘을 세밀하게 쓸 줄 몰랐다.이 호수의 넓이나 건너편 빵집에 있을 소년 어머니와의 거리를 계산해 그녀가 할 수 있을 만큼만끌어내는 방법은 몰랐다. 다만 당장으로는 도시라면 가능할 법하다.크지만 하나의 단위이니 괜찮을 성 싶어 소녀는 방향을 잡았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눈이 정통으로 연무를 바라보았다.그제야 웅성대는 비명들이 고음의 공명음을 내며 마리타와 노엘에게로 돌진해왔다.소녀는 박수를 치듯 양손을 모으고 그 다음 어떤 말을 중얼거렸는데 웅웅대는 비명 때문에 노엘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눈을 떴을 때 호수의 물 일부가 바람에 휘날리듯 거대한 덩어리로 공중에 떠 있고 연무가 마치 그들을 공격하는 벌레떼처럼 튀어나와 바로 코앞에 굳어져 있었다.그 속에서 바람도 없이 물방울이 떠 있는 허공 속에 소녀는 익숙하고 또 외로워 보였다.왜인지 그는 귓전을 울리고 기분 나쁜 이 공기가 소녀에게 익숙한 종류의 것이라면 몹시 슬플 것 같았다. 이유를 생각할 틈도 없이 마리타가 그에게 말했다.“시간을 벌 거야. 그대로 네...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가.”마리타는 단어를 고르고 고르다가 말을 건넸다. 꼭 자기는 여기서 끝일 것같은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여전히 찌푸린 채로 말이다.노엘은 그제야 헐레벌떡 어머니에게로 뛰어갔다. 얼마나 급한지 정작 마리타를 뒤돌아볼 생각도 못했다.그래서 휘청이는 다리와 약간의 피가 흐르기 시작한 팔꿈치와 완전히 풀린 동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마리타에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전기가 튀는 덕에 아파서 정신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병원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오늘에서야 대충 알 듯했다.병원 안에서 보던 것들보다 훨씬 징그럽게들 생겨서 전부 불 속에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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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여기 있소

마리타는 사계절 중에 겨울을 가장 좋아했다.춥다는 핑계로 제레미의 곁에 온종일 앉아 책을 읽어도 그녀를 내쫓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올해는 예외였다.베버는 문 앞에서 어깨를 잔뜩 치켜세워 한숨을 쉬었다가 노크를 했다. 그는 자고 있고 곁에서 담요를 덮은 소녀가 책을 읽고 있었다.소나무를 닮은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을 만큼 자라고, 혼자서 식사도 치료도 정리할 줄 알게된 아이는 지난 번 사건 이후 부쩍 어른스러워졌다.베버의 뒤를 따르는 무리들을 보고 이미 책을 덮고 있었다.의자 위에 대충 책을 놓아두고 마치 제레미를 위로하듯, 손을 몇 번 두드리고는 베버에게 눈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갔다.문을 열 때면 언제나 아이의 행복을 가져가는 도둑이 된 기분이라 베버는 이 순간을 가장 싫어했다.그가 눈을 질끈 감고 무리들에게 제레미의 상태를 설명하고, 느린 걸음은 뚜벅거리며 복도로 멀어졌다. 헤게는 베버가 제레미의 병실에 가는 걸 보고 서둘러 주머니 가득 사탕을 챙겨다 마리타의 방으로 향했다.“마리! 우리 간식 먹을까?”계절이 하나 흘러갈 동안 서로 애칭을 부르게까지 됐다.이제 베버는 종종 제레미에게서 마리타를 떼어놓고 나면 뒤처리를 그녀에게 맡겼다.문을 열어도 안에는 하얀 침대와 협탁 뿐이었다. 둥글게 솟은 이불 속 언덕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헤게는 마리가 어른스러워졌다는 베버를 볼 때마다 그가 얼마나 눈치가 없고 무심한지 생각했다.“오늘은 누가 우리 황제 폐하를 속상하게 했을꼬?”지난 번 사건, 마리를 데리러 병원 밖으로 제레미가 다녀온 일은 모두가 잘 숨긴 덕에 괜찮았지만 한 번 힘을 쓴 탓일까, 제레미가 그 뒤로 크게 앓아 보름 가까이 의식이 없었다.문 앞에 매번 쪼그려 앉은 아이가 자기 탓이라고 떨고 있는 모습을 헤게는 매일 아침 봐야했다.그 일 때문에 조금 아프게 성장한 마리가 안쓰러워 일부러 황제라고 장난스럽게 불렀다.“베버 씨인가? 아니면 노엘이 그랬을까? 아니면 마담 시몬?”빵을 주기적으로 주러, 또는 마리의 안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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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미네르바 테일러

다만 문제는, 말투였다. 최근에 중세식 동화를 자주보고는, 거기 나오는 기사들의 말투를 흉내내는 데 꽂힌 것이다. 제레미를 치료할 때처럼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소년의 주위를 에워쌌고 그가 연맹 측의 사람임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헤게는 소년과 소녀의 앞을 막아선 채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소년의 경호원이 나서려는 것을 한쪽 손을 들어 그가 막았다. 그리고는 먼저 운을 뗐다.“연맹 내 이아고 마르샬라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직계 자녀인 마리타 마르샬라의 동행을 요구합니다.”마리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퍼뜩 올렸다. 아빠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따라붙는 단어가 낯설다. 시신. 동행 명령. 이아고. 세 단어가 뇌리를 어지럽혔다. 윙윙 귀를 울리는 바람에 머리가 세게 조여와 통증을 느꼈다.동행 명령에 놀란 헤게 역시 마리의 한쪽 손을 잡고, 강하게 나갔다.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다는 듯 소년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헤게가 마리를 등 뒤로 숨기며 소년의 요구에 반박했다.“본 기관은 환자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이미 자료가 전산에 포함되어 있을텐데 굳이 미성년자인 유가족을 통해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요.”“이아고 마르샬라의 경우 사건의 잔혹함을 고려해 정확한 수사를 원한다는 게 연맹의 의견입니다. 헤게 선생님.”“제가 그렇게 유명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 미네르바.”“마르샬라 양, 수사와 공익을 위해서 같이 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마르샬라 양. 처음듣는 호칭에 마리타가 진저리를 쳤다. 뒤에서 보던 율리아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노인의 밭은 숨소리가 섞인 웃음소리로 복도가 울리자 모두가 뒤를 돌았다. 휠체어에 앉은 율리아가 손을 뻗자 마리타가 금세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주름진 손을 잡아주었다.“마리타는 사고 당시 무척 어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귀하도 그를 모르시지는 않을 터, 이제와 어린 아이에게 과거를 들여다보라는 건 자비로운 연맹에서도 바라지 않는 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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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내 보물

한편 마리는 두 남자가 사라진 후에도 소년이 준 묘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차분하게 가라앉았지만 집요한 눈동자는 연맹의 낙하산이 갖기엔 너무 사연이 많아보였다.그는 그대로 등을 돌린 채 돌아갔고 연맹은 뒤로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한 가지만을 제외한다면.우유를 다 마시고 컵을 테이블에 올려둔 마리의 손에 이제는 작은 편지지가 들려있었다. 소년에게서 온 것이다.누구인가 싶어 헤게에게 먼저 보여주니, 이 필기체를 자기가 볼 줄은 몰랐다며 그녀는 내내 소란스러웠다.이상한 글씨는 안 적혀있느냐, 그냥 편지지냐. 폭탄이 설치된 것은 아니냐며.반면 소년의 편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뒤늦게 베버에게 들은 엄청난 배경을 가진 사람치고는 그랬다. 아니 사실 그런 사람이 편지를 보냈다는 게 이미 평범하지 않았지만, 일단 편지 자체만은 종이와 편지 봉투가 전부였으니까.마리는 자기가 무슨 잡생각을 하나싶어 일부러 거칠게 편지 봉투를 뜯었다.사자가 먹이를 베어 물듯 뜯겨 나간 편지 안에는 작은 편지지와 풀잎이 하나 들어있었다. 너무 염려스러운 일이 벌어져 죄송합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편지를 써서 사죄드립니다. 도움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망측한 광경을 보여드렸네요. 갈대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거짓없이 당신께 좋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요, 장문의 편지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네르바 테일러.헤게는 급하게 마리를 달래주려는 듯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었다.“위로해주고 싶었나봐. 진짜 미안해서 사과를 서툴게 한 걸수도 있어. 아니면 회의장에서 또래를 만날 일이 없으니까 그런 걸 거야 마리.”“아니, 이건...”마리는 조용히 초록색 풀잎을 손으로 짓이겼다.푹 숙인 둥근 머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헤게는 알 길이 없어 그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을 뿐이었다.그날 밤에는 오랜만에 꿈을 꿨다. 오래된 일었다. 아버지는 해변에 서 있었다.그를 여전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마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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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꽃이 폈어

복도 끝 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고 비번을 섰던 베버가 제 깍 끝방으로 향했다. 요새 잠잠하다했다.제레미랑 같이 쓰던 방을 분리하자 밤마다 악몽을 꿨다.최근 들어 약이 좀 효과를 보나 했다. 그가 문을 열었을 땐 이미 잠에서 깬 제레미가 그녀를 품에 안고 달래고 있었다.“늦네, 테오.”“제레미.”하고 싶은 말을 눈으로만 담아서 대꾸하는 테오를 제레미가 그냥 지나쳤다.품에 안은 마리가 뒤척였다. 테오가 마리의 머리 위로 자기 가운을 벗어 감싸 줬다.제레미가 못마땅한 듯 가운을 벗기려 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가운처럼 새하얀 머리가 얼핏 보였다. 일을 더 키우지 말라는 뜻이다. 제레미가 입모양으로 그에게 말했다.이번에만 넘어가주겠다는 듯했는데 소리없이 세 글자를 말하고 사라졌다. 마카롱.테오는 머리를 긁적이다 자기 방으로 돌아가며 다이어리에 마카롱 주문을 써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복도 끝을 지나 방향을 꺾어 정원으로 나가는 동안 일부러 굳었던 표정을 풀더니 제레미는 오히려 안심한 것처럼 보였다.“꽃이 폈네 마리.”그들이 말하는 사건은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 소년도 연맹도 이제와 그걸 어린 아이에게 물으니 제정신은 아니다.이마 위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제레미가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여전히 밤이 길었고 마리는 아마 오래도록 괴로운 꿈을 꿀 것이다. 별은 보이지 않았고, 그가 마리를 업고 돌아온 밤처럼 달만 빛났다.사건의 원인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마지막 임무라며 수행하고 다들 은퇴를 선언했다.누명을 씌우기는 쉬웠다. 감옥 안에 화약은 충분했다.동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섬 하나를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수사관들은 오두막에서 혈흔이나 흉기 등 학대 정황을 포착해 이아고 마르샬라를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몰았다. 바위에 깔려 죽었을지라도 먼저 범죄자를 풀어준 후 부루를 도와 수용소를 폭발시켜 섬주민들이 죽게했다는 추정은 신빙성이 있었다.대외적으로 알려진 혹은 연맹이 발표하고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제레미는 병원 앞에 그녀가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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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과거

다음날 아침으로는 감자수프가 나왔다. 율리아가 제안한 금요일 메뉴였다. 매번 자기 취향은 고려도 하지 않는 렘즈의 환자식에 화가 난 입소자들이 만든 금요일만은 내가 먹고 싶은 걸 먹겠다는 게 이 메뉴제안의 시작이었다.율리아가 무릎 위에 냅킨을 깔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 마리도 방에서 문을 열고 나와 식탁에 모여앉았다.방에서 먹을 수도 있었지만 금요일은 되도록 모여서 먹자는 게 그들의 이유였다. 다만 제레미는 오지 않았다. 베버는 마리타의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잔뜩 성이 난채로 수프를 먹었다.거의 입에 쑤셔박는 수준이라서 맛이 느껴지기는 할까 싶었다. 마리타는 베버의 표정으로도 제레미의 진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때때로 죽을 것같은 표정을 짓곤 했다. 아주 어릴 적에도 그랬다.미간을 잔뜩 찡그린 그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미소를 짓지만 정말로 그건 노엘의 어머니가 짓던 미소랑 똑같았다. 허전하고 도무지 웃고 싶어서 웃는다고는 볼 수 없는 얼굴이다.불안이 그 무렵에 아이의 폐에 들어찼을까. 마리타는 종종 밤에 그와 함께 침실에서 잘 때면 그의 코에 손을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해보기도 했다.슬그머니 아이의 시선이 이층으로 향했다가 그릇으로 향하는 걸 눈치챈 다른 환자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 마저 식사를 마쳤다. 제레미가 식사를 나오지 않는 일은 드물었다.자기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내라고 매번 금요일마다 잔소리가 얼마나 심했는데. 헤게는 마리와 베버, 율리아의 복잡한 표정을 읽고는 이따가 제레미의 방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마리는 엘리의 사진을 방 안에 둔 채 침대 위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테오가 직접 마당의 단풍나무를 깎아 만든 액자 안에 엘 리가 있다. 아가하고 부르던 말투를 좋아했는데 제레미 때문에 마리는 그 말만 들어도 기분이 울적해졌다. 가라앉을 때면 자연스럽게 옛날이 떠오르고 후회도 뒤따랐다.보통 부르는 호칭은 아가. 야, 너. 정도였다. 좁은 섬이었고 작은 세계여서 가능했다.어렸을 적에도 통증은 멋대로 번지는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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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아빠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몇 번을 불러도 대답없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회상을 넘어서 자기도 모르게 아이가 능력을 쓰고 있는 걸 알았다.‘마리타.’제레미는 오늘은 그 애의 세상에 찾아가지 않으려 했다. 무정한 말을 듣고도 소리 없이 울던 아이에게 바로 얼굴을 비출 만큼 낯이 두껍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혼자 두는 것보다야 나을 거라는,뻔뻔한 핑계 혹은 무책임한 어른의 걱정으로 그는 복도 끝 문 앞에 섰다. 소녀의 이름은 그에게 마법의 주문이었다. 문을 열면 나무 바닥이 아닌 안개로만 이루어진 통로가 나오고 그는 그곳을 지나 악몽에 빠진 아이를 구하러 갔다.별이 내려왔다고, 그가 처음 꿈에 찾아갔을 때 마리에게 들은 말이었다.까만 하늘과 타버린 땅이 전부였는데 별이 하늘에서 빛나더니 금세 그가 보였다나. 제레미는 이유를 알았고,마리에게 말해줄 의향도 있었지만 테오는 숨기라고 했다.일상에서 더 멀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이미 붙어있는 꼬리표로도 충분히 평범함과는 빛의 속도로 멀어지는 아이를 굳이 위한답시고. 속으로 빈정거리는 제레미의 마음도 모르고 그 시각 테오는 수면 양말을 신고 곤히 자고 있었다.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마리는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도 똑같이 웃어주었다. 그가 자그맣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려고, 마리의 얼굴에 고개를 가까이 댔다. 마리가 말했다.“아무도 구할 수 없었어요.”소녀는 때때로 그를 지나치게 믿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를 탓해야 마땅한 상황에 가만히 눈만 내리깐 채 손톱을 뜯었다. 제레미가 화를 낼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아이는 생각한다. 어제 그 말을 해놓고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던 그는 막상 작은 머리며 손톱을 마주하자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실감나기 시작했다. 또 저질렀다. 앞으로 종종 꿈을 꾸면 아이는 불안감과 뼈도 녹일 위태로움에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건 다 잡고 싶어질 지도 몰랐다. 어쩌면 마리를 살인자로 만드는 건 그일 것이다. 제레미는 마침 그런 순간을 숱하게 지내온 사람이었다. 선량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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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테오도르 베버의 휴가(1)

병원은 산을 뒤로 등져서 햇빛이 아침 창문에 물감처럼 번졌다.마리는 대개 늦잠을 자기보다는 재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좋아하는 풍경을 보는 것으로 주말을 시작했다.그러나 오늘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 위를 뒹굴거리며 제발 오지 말아라 하고 해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오늘은 헤게의 휴가였고 다른 환자들이 연맹에 있는 외부 병원에 나가 검사를 받는 날이었다.보통 의사들의 휴가가 겹치는 날이 많지는 않아 몇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했다. 연맹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결과를 위해 그를 밖으로 불렀다.꼭 제레미만 그런 건 아니고 종종 다른 사람들도 밖으로 불러냈다.그러곤 다들 밤이 되어서야 돌아와 지친 얼굴로 마리를 품에 꼭 끌어안아줄 뿐이었다.그러면 마리도 아침보다 흐트러진 머리나 옷에서 풍기는 먼지냄새로 그들의 하루가 피로했음을 알고 똑같이 다독여주곤 했다. 제레미가 잠이 안올 때 해주는 것처럼.그래도 저녁을 먹고서 차를 홀짝일 때면 돌아오니 외롭지는 않았다. 헤게랑 놀거나 제레미랑 놀았으니 심심함은 덜었다. 오늘은 그럴 수도 없었다. 테오만 남는다. 넓따란 병원에 항상 딱딱하게 그녀에게 하지 말라는 말과 가만히 있으라는 말밖에 하지 않는 ‘그’ 테오도르 베버와 함께 남는 것이다.건물이 유달리 조용했다. 3층짜리 계단 어디에서도 인적이 느껴지지 않아 테오는 잠시 멍해졌다가 오늘이 그날이라는 걸 생각해냈다.안경을 대충 낀 그가 잠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오늘 상대해야할 작은 괴물이 자고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방 안에는 마리타가 혼자 책을 펼친 채 문을 등지고 침대에 앉아있었다.문 열리는 소리에 등을 돌리자 테오가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열어놓은 창문에서 바람이 불어 이리저리 뻗친 그의 악성 곱슬머리가 바람에 나부꼈다.마리가 얼굴을 대놓고 찌푸렸다. 텔레비전에서 하는 샴푸 광고가 떠올라 불쾌해졌다며 테오에게 한마디 쏘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머리가 꼭 잘 빗은 갈기 같네요, 베버.”칭찬 같지만 교묘하게 찌푸린 눈빛을 보면 빈정거린다는 걸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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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테오도르 베버의 휴가(2)

테오는 마리가 조용히 침대에 앉아있는 걸 열린 문틈 사이로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그는 아이가 조용한 게 마음에 들었다.서로에게 다가갈 틈이 없었고 사실은 그럴만한 여유도 없는 테오로서는 마리가 가능한 한 조용하게 하루를 보내주기를 바랐다. 제레미가 아이가 조용할 때는 혼자두지 말라는 말을 한 것같기도 했지만 그는 그의 환자가 마음이 불안정해 너무 과하다고 믿었다.이제 열 살이 가까운 나이인데 고작 혼자있는 게 무슨 문제이겠는가.그는 내일 회진을 돌 환자 명단을 책상에서 꺼내 집게로 집고 스케줄과 각종 기구들을 하나씩 꺼내 굳이 소독했다. 헤게와 번갈아가면서 하는 일이고 내일 당번은 헤게였으니 그가 굳이 할 필요없는 일이란 뜻이다.손가락 끝이 뭉특하고 투박한 손으로 그는 계속해서 펜이나 노트 등 자잘한 문구따위를 손에 쥐었다가 풀었다.그러더니 결국에는 졌다는 듯 종이를 대충 구겨 휴지통에 넣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두르는 발걸음에 하얀 가운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 끝, 그 방의 문을 열었다.“왜요.”아이는 반쯤 지루하게 감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서둘러 오느라 헉헉대는 테오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마리는 또 방에서 나오라는 말이겠거니 싶어 침대에서 내려왔다. 테오를 지나쳐 방을 나서려는데 테오가 마리를 불렀다.“마리타.”마리가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마저 말하라는 듯 바라보았다. 테오는 그 모습이 제레미를 대할 때랑은 전혀 달라 탐탁치 않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혼자두지 말 것, 조용히 있어도 함께 있어줄 것.아무렇지 않아보여도 그렇지 않은 걸 기억할 것. 그는 제레미와 헤게가 단단히 일러준 말들을 떠올리고 다시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마리에게 손을 내밀었다.“같이, 산책 갈까?”마리는 그가 내민 손이 무슨 속셈인가 싶어 한참을 쳐다봤다.곱슬머리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우스워 보이는 의사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평소라면 제레미 앞에서 팔짱을 끼고 깔끔한 셔츠나 가운에 주름이 갈 일도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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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너도 도망갈거지(1)

마리는 오랜만에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이 말할 때인 것을 알았다.테오에게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그가 계속 궁금해 할테고 가족을 잃은 사람으로서,알아야 마땅하다고.특히 그녀가 능력을 대놓고 쓰게 된 이후부터 내내 입 밖에 내고 싶었을, 그러나 결국 하지 못했을 말을 마리가 먼저 해야 했다.마리가 알겠다고 했고, 테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목 뒤가 이상하게 굳어서 잘 돌아가지 않았다. 테오에게 마리가 미소를 지었다.“엘리요 아니면 우리 아빠요?”테오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못했다.전자는 감히 입에 올릴 주제가 못됐고 후자는 생각보다 가볍게 나와서 오히려 그가 가시에 찔린 듯했다.“엘 리가 죽을 걸 알면서 그대로 뒀는지, 아니면 부모님을 내가 죽였는지 뭐 그런 거 아닌가요.”테오는 생각보다 가볍게 돌아오는 답변에 안색이 굳었다.“선생이 상상할 수 있는대로 생각해요.”마리는 테오에게 구실좋은 변명을 덧붙일 생각도 없었다.그러면서도 사실 마리는 더 많이 대답을 하면 렘즈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 순간 걱정됐다. 테오가 속삭이듯이 말했다.“엘 리가 오던 그날을 말하는거야?”그 말에 마리가 혼자 웃었다.“글쎄요. 대답하면 믿을 수는 있구요? 재판이 열리면요, 그거면 믿을 수 있겠죠. 그다음에 얘기해요.”재판이니 뭐니 하는 굵직한 말들이 순식간에 그의 귓전을 때리고 지나갔다. 테오가 마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마리가 먼저 산 아래로 내려갔다.허탈해진 그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러 바위에 앉았다.마리의 생각은 전혀 모르는 채로.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도 남았을 것이다.마리의 눈에 오늘은 떠나기에 가장 완벽한 날이었다. 테오의 뜻도 알았고, 그가 산에서 혼자 생각에 빠진 지금이라면, 시간이 충분하다. 마리는 짐을 챙겼다.발찌는 미네르바 테일러가 준 열쇠로 순식간에 열렸다. 나가는 동안에도 아무도 그녀의 두 번째 탈출을 몰랐다. 방문을 닫고 다시 긴 렘즈의 오솔길을 지나 그녀는 다시 바깥 세상으로 나왔다.이번에는 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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