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지 4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기장님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0 챕터

제11화

“어머, 이유가 뭐가 중요해요. 어쨌든 오늘부터 남 선생님을 괴롭힐 사람이 없다는 게 중요하죠.”장은서는 남예린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비밀스럽게 말했다.“남 선생님, 허 과장님에 대해 알고 계세요?”남예린은 고개를 저었다.“허지형 과장님을 모르시는 거예요? 보건복지부 최연소 보건사무관이잖아요. 이제 곧 우리 병원 부원장님이 되신대요. 집안 3대가 전부 의료계에 종사했대요. 과장님 아버지가 예전에 우리 병원장님이셨는데 지금은 다른 곳에서 일하고 계신대요. 엄청 대단한 집안이죠.”남예린은 흠칫했다.“게다가...”장은서가 목소리를 더 낮추며 말했다.“배씨 가문이랑 사이가 굉장히 좋대요. 배씨 가문 아시죠? 항공기 사업으로 시작해 엄청난 재벌이 된 강진 그룹 말이에요. 허지형 과장님이 배씨 가문 둘째 아들이랑 죽마고우래요.”남예린은 옷걸이에 옷을 걸다가 잠시 멈칫했다.그러나 이내 흰 가운을 잘 걸어 놓고 몸을 돌렸다.“그건 저랑 상관없는 일이죠.”남예린이 말했다.눈치가 빠른 장은서는 혀를 빼꼼 내밀더니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남예린은 책상 앞에 앉아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 위장까지 차갑게 만들었다.허지형이 배진성과 친한 사이라니.그래서 오늘 조영진의 사무실에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그렇다면 오늘 일은...’남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허지형은 단지 규정대로 일을 처리했을 뿐이다.남예린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복도 모퉁이 쪽에 배진성이 벽에 기대서 있었다.배진성은 나서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배진성은 장기천이 삿대질하며 남예린에게 윽박지르는 모습을, 무력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예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남예린은 마치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언덕 위에 선 나무 같았다. 사방에서 바람이 들이닥쳐 가지와 잎이 사정없이 흔들렸지만 뿌리만큼은 땅속 깊이 박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배진성은 답답하고 또 괴로웠다.당장 뛰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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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제야 두 번째 사람이 보낸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안녕하세요, 허지형입니다.]‘아, 이 사람이었구나.’앞으로 응급의학과를 관리하게 될 미래의 부원장이 병원 의사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내가 오해했네. 다른 한 명은 내 직장 동료야.”남예린이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산오랑 잘해보도록 해.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새 친구를 사귄다고 생각하면 돼. 산오는 연기과 대학원생인데 정말 괜찮은 애야. 얼굴이 잘생긴 건 걔의 수많은 장점 중 가장 별거 아닌 장점이야. 서로 천천히 알아보도록 해.”“응.”전화를 끊은 뒤 남예린은 윤산오와 허지형에게 답장을 보내려고 했다.지하철을 탄 남예린은 휴대폰 화면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고민했다.그런데 두 사람이 먼저 남예린에게 또 메시지를 보내왔고 남예린은 당황했다.[안녕하세요, 남 선생님. 저 윤산오예요. 다음 주 수요일에 경원 극장에서 연극을 하는데 저도 출연할 예정이거든요. 혹시 보러 와 주실 수 있을까요?]남예린이 답장을 보냈다.[좋아요. 몇 시에 해요?]윤산오가 문자를 보냈다.[오후 5시요. 제가 티켓 보내드릴게요! 도착해서 QR 코드 찍으시고 입장하시면 돼요.][남 선생님이 보러 와주신다니, 정말 너무 기뻐요!!!]메시지 끝에는 느낌표가 세 개나 붙어 있었다.남예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알겠어요. 그러면 수요일에 봐요.]남예린은 윤산오와의 채팅창을 끈 뒤 허지형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남 선생님, 저 허지형입니다. 이번에 응급실 우수 의료진 명단에 문제가 좀 있었어요. 병원에 해당 사항을 반영했으니까 곧 재평가가 진행될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 주세요.]아주 사무적인 말투였고 불필요한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남예린은 상당히 정중한 문자 내용에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으며 감사함을 느꼈다.남예린이 답장을 보냈다.[감사합니다, 과장님. 앞으로도 쭉 열심히 하겠습니다.]허지형이 메시지를 보냈다.[네. 그러면 일찍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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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배진성의 손이 잠시 멈췄다.“그런 거 아니야.”“아니긴.”박우태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내가 너랑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너는 고민이 있을 때면 항상 미간을 찌푸리고 있고 왼쪽 눈썹이 오른쪽 눈썹보다 더 높이 올라가. 지금도 그래.”배진성은 무심코 자신의 눈썹을 만졌다.박우태는 웃음을 터뜨렸다.“내 말 맞지? 안 그래도 이상하다 싶었어. 비행 때문에 술은 입에 거의 대지 않던 놈이 오늘 갑자기 우리한테 연락해서 술 한잔하자고 한 걸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겠지.”박우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진성아, 가장 중요한 건 자식이야. 나처럼 후회할 짓은 하지 마.”룸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박우태는 웃음을 거두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너도 알다시피 나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이혼했고 아이는 내가 키우게 됐어. 내가 지금 가장 후회하는 일이 우리 딸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주지 못한 거야.”박우태는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우리 딸은 지금 나랑 같이 살고 있고, 내가 촬영할 때면 촬영장에 따라와서 스태프들이랑 같이 놀아. 그러다가 가끔 그런 질문을 해. 왜 다른 사람들은 다 엄마가 있는데 자기는 없냐고.”잔을 내려놓은 박우태는 목이 메어왔다.“대답을 못 하겠더라.”배진성은 박우태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까 말이야.”박우태는 배진성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효민 씨랑 잘살아 봐. 아이 상처받게 하지 말고.”배진성은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잔을 비웠다.“알겠어.”말을 끝맺자마자 배진성의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에 정효민의 이름이 떴다.박우태는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고는 웃었다.“뭐 하는지 궁금해서 연락한 건가? 걱정하지 마. 내가 대신 설명해 줄게.”“꺼져.”배진성은 박우태의 얼굴을 밀어내며 전화를 받았다.“여보, 지금 어디야?”정효민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우태랑 지형이랑 같이 있어.”“그래.”정효민은 마음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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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윤산오가 준 티켓은 1열 정중앙이라 자리가 굉장히 좋았다.티켓을 들고 안으로 들어간 남예린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극장은 아주 넓었고 천장에는 큰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으며 무대의 막은 아직 오르지 않아 푸른색 스포트라이트 한 줄기가 무대 중앙을 비추고 있는 것만 보였다.남예린은 연극에 관한 정보가 적힌 프로그램 북을 펼쳐 출연진을 확인해 보았다.비행사 역을 맡은 배우는 윤산오였다.남예린은 윤산오의 사진을 바라보았다.아주 젊고, 맑고 깨끗한 인상의 남자였다.“와, 저 배우 진짜 잘생겼다!”그때 등 뒤에서 여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비행사 역할을 맡은 배우잖아. 프로그램 북에 사진이 있어!”“진짜네? 끝나고 사인받아야겠어!”남예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이내 시야 안으로 무대 뒤편 커튼 사이로 걸어 나오는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윤산오는 항공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지퍼는 반쯤 내려져 있어 안에 입은 흰 셔츠의 셔츠 깃이 보였다.머리카락은 자연스러운 검은색이었고 염색도, 펌도 하지 않았다. 이마 위로 내려온 앞머리가 무대 조명을 받아 부드러워 보였다.윤산오는 객석을 한 번 훑어보더니 남예린을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남예린에게 걸어갔다.“남 선생님!”윤산오는 허리를 숙이고 무대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더니 환하게 웃으며 남예린을 바라보았다.“와주셨네요!”남예린은 시선을 들어 윤산오를 바라봤다.그 각도에서는 무대 조명이 윤산오의 등을 비추어 몸 주위로 금빛의 테두리를 만들었다.항공 점퍼, 흰 셔츠, 젊은 얼굴, 반짝이는 눈동자.남예린은 순간 심장이 조여오는 걸 느꼈다.윤산오 때문이 아니라 너무 비슷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10년 전, 대학교 1학년 오리엔테이션 때 대학교 2학년이었던 배진성은 항공 점퍼를 입고 비행교육생 견장을 한 채로 무대 위에서 섰었다. 그때 스포트라이트는 배진성을 비추고 있었다.가장 뒤에 서 있던 남예린은 배진성을 본 순간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뛰었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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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제 곧 공연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휴대전화를 무음 모드로 설정해 주시기 바랍니다.”안내 멘트에 남예린은 정신을 차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프로그램 북을 내려놓았다.그때 왼쪽 통로 쪽에서 발소리와 함께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우야, 천천히 걸어.”그 순간 남예린은 자기도 모르게 의자 손잡이를 꽉 쥐면서 마치 녹슨 기계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통로에서 배진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배진성은 짙은 갈색 스웨이드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마침 허리선까지 오는 짧은 기장이라 다리가 더 길어 보였다.배진성은 아이를 안고 있었고 정효민이 그들을 뒤따랐다. 흰색의 니트 원피스를 입은 정효민은 오늘 한껏 꾸민 모습이었다.배진성이 고개를 드는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남예린은 배진성의 눈동자에서 당혹감을 보았다.‘여기서 이렇게 마주친다고?’놀란 건 배진성뿐만이 아니었다.배진성의 시선이 남예린을 지나쳐 남예린의 빈 옆자리로 향했다가 다시 남예린의 얼굴로 향했다.남예린은 1열 정중앙에 앉아 있었고 그들의 자리는...배진성은 고개를 숙여 티켓을 보았다.그들은 남예린의 바로 옆자리였다.정효민은 배진성의 시선을 따라가 보더니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남 선생님.”정효민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여기서 뵙네요.”“그러게요.”남예린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무대를 바라봤다.정효민은 배진성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안은 뒤 먼저 걸어가 남예린의 옆에 앉고 아이를 자신과 배진성의 중간에 앉혀 통로 쪽 자리를 배진성에게 남겨주었다.배진성은 자리에 앉은 뒤 시선을 무대에 고정했다.비록 중간에 두 사람이 있었지만 배진성이 자리에 앉을 때 남예린은 그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여전히 그때 그 시절 시원한 우디향이었다.“혹시 혼자 연극 보러 오셨어요?”정효민은 남예린의 옆자리에 노부부가 앉아 있는 걸 보고 물었다.보통 연극은 누군가와 함께 보러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남예린은 혼자인 듯했다.정효민의 질문은 남예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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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가죽이 꽉 움켜쥐는 소리였다.배진성이 마디가 뚜렷한 두 손으로 깍지를 꼈다. 포개진 엄지손가락은 힘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는 것 같기도 했다.한가운데에 앉아 아주 진지하게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는 수시로 앳된 목소리로 정효민에게 물었다.“엄마, 어린 왕자는 왜 장미를 떠난 거예요?”“너무 바보라서 그래.”정효민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웠지만 남예린은 또렷이 들렸다.“자기에게 뭐가 중요한지 몰랐던 거야.”남예린은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것...’7년 전, 배진성과 함께 이 연극을 볼 때 배진성이 본인 입으로 말했다.‘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하지만 배진성은 결국 떠났다.무대 위에서 어린 왕자는 비행사를 만났다.비행사가 어린 왕자에게 물었다.“너는 왜 장미를 떠난 거야?”어린 왕자가 대답했다.“그때 내가 너무 어려서... 장미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어.”이 한마디에 남예린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마치 큰 돌멩이를 물속에 던진 것처럼...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그런데 바로 그때 배진성이 눈을 감는 모습이 보였다.입술이 아주 살짝 움직였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남예린은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급히 시선을 거두었다.한가운데에 앉은 정효민은 배진성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본능적으로 아이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그러자 녀석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엄마, 아파요.”정효민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를 꽉 깨물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남예린을 한 번 보았다.자리에 앉아 무대를 보고 있는 남예린은 표정이 아주 평온했다.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스토리를 보는 것처럼...하지만 정효민은 남예린이 무척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잠깐의 휴식 시간, 정효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여보, 오늘 연극 어때?”배진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내 생각에 어린 왕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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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정효민은 좌석에 앉아 등을 아주 곧게 펴고 있었다.심호흡을 한 번 한 뒤 고개를 돌려 남예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매우 예의를 차린 미소였다. 입꼬리가 올라간 각도, 눈이 휘어진 폭, 모두 적절했다.“남 선생님.”정효민은 최대한 담담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오늘 연극 어때요?”남예린이 마침내 고개를 돌려 정효민을 흘끗 쳐다보았다.“괜찮은 것 같아요.”남예린은 짧게 대답한 뒤 바로 시선을 돌려 무대를 계속 바라보았다.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정효민은 얼굴에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완전히 얼어붙었다.자기가 왠지 백조 사이에 낀 미운 오리 새끼가 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스스로 미운 오리 새끼임을 인정할 수 없어 계속 발버둥 쳤다.“남 선생님도 이제 가정을 꾸리셔야죠. 우리 남편 보세요, 아들과 저를 정말 잘 챙겨요...”남예린이 손을 들더니 검지를 살짝 입술 사이에 갖다 대며 ‘쉿’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마치 떠드는 아이를 달래듯 동작 또한 아주 무심했다.“효민 씨.”높지도 낮지도 않은, 딱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공공장소니까 예의 지키시죠. 배우들도 존중해 주시고죠.”잠시 한 박자 멈춘 후 한 마디 덧붙였다.“다른 관객들 관람하는 데도 방해가 되니까요.”정효민은 더 이상 미소를 유지할 수 없었다.배진성은 연극이 거의 막을 내릴 때쯤 돌아왔다.물을 정효민에게 건넸지만 정효민은 그것을 받아 팔걸이에 바로 내팽개쳤다.아이는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게 힘들었는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좌석에서 꼼지락거렸다. 등받이에 엎드리기도 하고 좌석 아래로 내려가기도 했다.“현우야, 똑바로 앉아.”정효민이 한마디 했다.그러나 아이는 엄마 말을 듣지 않고 좌석에서 미끄러져 내려 통로로 뛰어갔다가 다시 뛰어왔다.마지막으로 뛰어올 때 조금 전 정효민이 내팽개친 물병을 손에 쥐고 있었다. 뚜껑도 제대로 닫지 않은 채 뛰면서 흔들고 있었다.그러다 물이 때마침 남예린에게 쏟아졌다.짙은 파란색 치마 위에 이내 검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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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정효민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늘 그렇듯 부드러웠지만 약간 억눌린 듯한 답답함이 묻어났다.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배진성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팔짱을 꼈다.배진성 손에 쥔 물티슈와 남예린 치마 위의 물 자국을 번갈아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끝내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여보, 아까 엄청 불렀는데도 대답 안 한 거 알아? 당신도 참, 남 선생님 옷이 젖었으면 나한테 말하지 그래. 내가 닦아줬을 텐데. 괜히 당신 불편하게...”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남예린에게 미소를 지었다.여전히 아주 예의를 차린 미소였다.“남 선생님, 죄송해요. 우리 현우가 너무 말썽꾸러기라서 선생님이 이해해 주세요. 저랑 남편이 집에 가서 잘 타이를게요.”남예린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돌리려 했다.하지만 정효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몸으로 유일한 통로를 막았다. 말투에는 상대방을 깔보는 듯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남 선생님, 다음에 연극 보러 오실 때는 짝꿍이라도 데려오시는 게 어때요? 그래야 무슨 일 생겨도 돌봐줄 사람이 있잖아요. 연극 보러 온 분들 좀 보세요, 다 커플이거나 저희 같은 가족이잖아요.”한 번 숨을 고르고는 입꼬리를 더 올리며 말했다.“그리고 남의 남편한테 자꾸 폐 끼치면 안 되잖아요, 안 그래요?”“정효민.”배진성이 정효민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말투는 매우 무거웠다.정효민은 즉시 사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실제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남 선생님, 죄송해요. 제 말, 너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저도 진심으로 선생님을 위해서 한 말이니까. 여자는 선생님 나이 정도 되면 더 늦기 전에 결혼 서둘러야 해요. 안 그러면 나중에 정말 못 갈지도 몰라요. 평생 혼자 살 순 없잖아요? 얼마나 외로워요.”배진성이 정효민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말 좀 그만해.”이를 악문 듯 한 글자 한 글자 겨우 내뱉었다.하지만 정효민은 팔이 아픈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 끝장을 보겠다는 듯 웃으며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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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이 순간, 남예린의 머릿속에는 오직 환자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어? 그쪽 누구예요? 아이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옆에서 중년 여성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구급차 올 때까지 기다려요!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아이 다쳐요!”“맞아요, 본인 아이도 아니면서 문제 생기면 그쪽이 책임질 거예요?”바로 그때 배진성이 무거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제가 아이 아빠입니다. 문제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분은 종합병원 응급실 주치의입니다. 경험이 풍부한 의사이니 모두들 조용히 해 주세요.”그러고는 남예린 맞은 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안색은 매우 안 좋았지만 목소리는 늘 여느 때처럼 안정적이었다.남예린은 한 손으로 현우의 가슴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현우의 등을 잡아 얼굴이 아래로 향하게 한 뒤 자신의 팔뚝 위에 엎드리게 했다.손바닥으로 현우의 어깨뼈 사이를 세게 내리쳤다.한 번, 두 번, 세 번...그러나 현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입술도 이미 보라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남예린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그저 의사로서의 칼 같은 결단력으로 움직이며 아주 프로패셔널한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정효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온몸을 떨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현우야... 현우야, 엄마 놀래키지 마...”손을 내밀어 남예린의 소매를 잡으려 했다.“남 선생님... 제발... 제발 우리 애 좀 살려주세요...”조금 전 가식적인 미소를 띠던 여자는 온데간데없었다.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것은 공포에 질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엄마라는 존재뿐이었다.남예린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저 사람 좀 옆으로 치워주세요.”일부러 정효민을 저격한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큰 손이 뻗어 나와 정효민을 바로 끌어냈다.배진성은 정효민을 옆으로 데려간 뒤 아주 차분한 눈빛으로 남예린을 바라보았다.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의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배진성은 단호하게 그녀를 믿기로 했다.남예린은 현우를 뒤집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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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남예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일부러 고개까지 딴 곳으로 돌려 멀리 있는 가로등을 바라보았다.3월이라 산에 벚꽃이 만발했다. 핑크빛을 머금은 흰 꽃잎이 바람에 몇 장 떨어져 가로등 불빛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바로 그때 살짝 쉰 듯한 배진성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아까...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 했네...”남예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진성은 남예린과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서 있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다.밤바람이 불자 배진성의 향기가 콧속에 스며들었다. 여전히 익숙한 그의 냄새였다.“가는 길이니 데려다줄게...”“사람 기다리는 중이야.”남예린의 냉랭한 말투에 배진성은 잠시 침묵했다.정효민이 현우를 품에 안은 채 뒤에서 따라왔다.이미 울음을 그친 현우는 정효민의 어깨에 엎드려 있었다. 다만 녀석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정교했던 정효민 얼굴의 화장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마스카라가 눈 아래에 검게 번졌고 립스틱도 지워져 입술이 창백했다. 마치 폭우에 맞은 연꽃처럼 초라해 보였다.하지만 이렇게 큰일이 있었음에도 뼛속까지 남예린을 경계하고 있었다.남예린과 배진성의 모습을 번갈아 보더니 낮은 소리로 한마디 했다.“여보, 우리 병원에 가야지... 남 선생님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 친구가 있겠지. 우리 방해하지 말자.”정효민은 겉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눈빛에는 남예린에 대한 경멸이 그대로 드러났다.속으로 남예린이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게 거짓말이라 생각했다.그저 일부러 도도한 척하기 위해 없는 일을 지어낸 것이라고 여겼다.“남 선생님, 오래 기다리셨죠?”극장 입구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내 윤산오가 옆문에서 뛰어나왔다. 플라이트 재킷은 앞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의 흰 티셔츠는 바람이 불자 몸에 달라붙었다.온몸으로 시원시원한 아우라를 거침없이 내뿜었다.그 뒤로 몇 명의 팬들이 쫓아 나왔지만 경호원이 문 앞에서 그들을 막았다. 누군가는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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