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헤어진 지 4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기장님: Bab 1 - Bab 10

30 Bab

제1화

새벽 3시 12분. 응급실에 손목을 그은 여성이 실려 왔다.그 곁에는 큰 키에 기장 제복 차림을 한 남자가 서 있었고, 어깨 위 4줄 견장에는 야간 비행으로 인해 한기가 어려 있었다.남자의 그윽한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했다.남자는 아마도 여자의 남편일 것이다.그리고 남예린의 전 연인이기도 했다.흰 가운 속에 숨겨진 남예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남예린은 간호사가 건넨 차트를 받는 것도 잊어버렸다.4년 만에 보는 배진성은 예전의 풋풋함과 오만함을 벗어던졌고 대신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 차분함과 날카로움이 더해졌다.“선생님.”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예린이 차트를 건네받았다.그와 동시에 배진성의 눈길이 남예린에게로 향했다.남예린을 발견한 순간 배진성은 놀란 기색을 보였고 속눈썹마저 파르르 떨렸다.남예린은 배진성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환자의 상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고 힘줄도 다치지 않았다. 다만 출혈량이 많아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다친 것처럼 보였다.남예린은 평온한 어조로 환자의 상태를 설명했고, 배진성은 옆에 가만히 서서 그 얘기를 들었다.침대 가드를 힘주어 꽉 쥔 탓에 배진성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상처를 봉합해야 하니 수술실을 준비해 주세요.”수술실로 향하는 길에 남예린은 자신의 왼쪽 손목에 있는 흉터를 만져 보았다.4년 전, 배진성은 남예린에게 프러포즈를 한 다음 날 이별을 통보했다.그 일 때문에 남예린은 손목을 그었고, 손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욕조를 온통 빨갛게 물들였다.당시 남예린은 지금의 환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심각해 응급실에 실려 가고 나서 이틀 뒤에야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남예린이 정신을 차린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친구 임하영에게 부탁해 배진성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스피커폰을 켜고 있었기에 남예린은 정신이 흐릿한 상황에서도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죽고 싶으면 죽으라고 해. 걔 죽어도 장례식에 안 갈 거야.”남예린은 그제야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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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무슨 일이요?”남예린은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우리 부모님 만나러 가는 거 말이야. 이번에 경원시에 오셨는데 너를 만나고 싶대.”주시윤은 마음이 좀 급했는지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복도는 매우 조용했다.너무 고요해서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라이터 뚜껑이 닫히는 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릴 정도였다.탁.짧고 선명한 그 소리는 마치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 같았다.남예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주시윤은 남예린이 대답하지 않자 말을 보탰다.“네가 나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인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오해하지는 마. 우리 부모님이 마침 경원시에 놀러 오셨는데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한 번 얘기해 본 거야. 혹시 부담되면 내가 대충 둘러댈 테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시락을 든 남예린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복도 끝에서는 여전히 빨간 불씨가 깜빡이고 있었다.굳이 보지는 않았지만 남예린은 배진성이 그곳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좋아요. 만날게요.”주시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알겠어. 그러면 부모님한테 그렇게 전할게.”남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주시윤은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집까지 바래다줄게.”복도 끝의 불씨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담배를 세게 한 모금 빨아들인 것처럼 말이다.곧이어 담뱃불이 꺼지고 담배꽁초는 쓰레기통 안에 버려졌다.배진성은 그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그들의 대화를 배진성은 한 마디도 빠짐없이 전부 들었다.남예린은 곧 남자의 부모님을 뵙게 될 것이다.배진성은 눈을 감았고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던 탓에 바닥에 담뱃재가 수북했다.몸을 돌린 배진성은 비상계단으로 걸어갔고,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무거운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쿵, 쿵.마치 심장 박동 소리 같았다....7시 10분. 날은 아직 밝지 않았다.남예린은 주시윤의 차에 올라탔다.주시윤은 차에 시동을 건 뒤 바로 출발하는 대신 먼저 열선 시트를 켰다.“춥지?”주시윤이 물었다.“괜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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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배진성은 아이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 곁에는 정효민이 있었다.네다섯 살 되는 남자아이는 예쁘게 생겼고 배진성을 똑 닮았다.아이는 배진성의 품 안에서 몸을 비틀며 작은 손으로 옷깃을 잡아당겼다.그들은 한 가족이었다.컵을 쥔 남예린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수도 없이 상상했던 광경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으나 배진성의 곁에 있는 건 다른 여자였다.“예린아.”김정미의 목소리에 남예린은 정신을 차렸다.“나도, 시윤이 아빠도 네가 마음에 들어. 우리는 네가 우리 집 며느리가 되었으면 좋겠어. 진심이야.”남예린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대답하기도 전에 2층에서 시선이 느껴졌다.배진성은 아이를 안은 채로 계단 위에 서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남예린을 내려다보았다.눈이 마주치는 순간, 배진성의 표정이 굳었다.마치 주먹으로 얼굴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배진성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남예린을, 남예린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집안 어른들과 남예린의 곁에 앉아 있는 주시윤을 보았다.화목한 가족처럼 보이는 따뜻한 광경이었지만 배진성은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아이는 배진성의 품에서 꿈틀거리며 말했다.“아빠, 왜 안 가요?”배진성은 움직이지 않고 시선을 내려 남예린을 바라보았다.시선이 남예린의 얼굴로, 다시 컵으로, 마지막에는 남예린의 곁에 앉아 있는 주시윤에게로 향했다.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정효민은 배진성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가 안색이 돌변했다.남예린은 배진성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그저 컵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여유롭고 차분한 모습이었다.배진성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아이를 안고 있는 팔에서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오늘 남예린은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옷깃에 작은 진주 브로치를 하고 있었다.예전에 배진성은 남예린에게 진주 브로치를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남예린은 그걸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매일 그 브로치를 하고 다녔다.그러나 지금 남예린이 하고 있는 브로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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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말문이 막힌 주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결혼하게 되면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임신한 상태로 계속 응급실에서 힘들게 일할 수는 없잖아.”남예린은 덤덤히 대꾸했다.“그건 시윤 씨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잖아요. 나랑 의논하지도 않고 왜 멋대로 나 대신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거죠?”분위기가 얼어붙었다.체면을 잃었다고 느낀 주시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불편했다면 사과할게. 하지만 나는 우리 둘의 미래를 생각해서 그런 거야.”남예린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그동안 자신과 주시윤 사이에 뭔가 벽이 있다고 느꼈었는데 이제야 그 벽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둘은 생각이 달랐기에 함께할 수 없었다.이 나이쯤 되었는데 그럭저럭 괜찮다는 이유로 타협할 수는 없었다.자리에서 일어난 남예린은 주시윤의 부모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죄송해요. 저는 두 분의 며느리가 되기 힘들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말을 마친 뒤에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책방을 나서는 순간, 남예린은 정효민과 부딪칠 뻔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정효민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묘한 미소를 띤 채로 남예린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치 상품에 값을 매기듯, 또는 패배자의 처지를 확인하듯 말이다.남예린은 정효민이 우월감을 느낀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멈춰 서지 않고 곧장 정효민을 지나쳐갔다.남예린의 뒷모습이 사라진 뒤 정효민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곧이어 주시윤이 굳은 표정으로 따라 나오며 빠른 걸음으로 정효민을 스쳐 지나갔다.정효민은 고개를 들어 2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배진성을 쳐다보았다.남예린이 떠난 방향을 좇고 있는 배진성의 눈빛에서 정효민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정효민은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쥐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그리고 조금 전 복도에서 배진성이 했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우리 어머니 앞에서 쓸데없는 얘기를 한다면 지금 네가 누리고 있는 것들 하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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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휴대폰을 움켜쥔 남예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건 중요하지 않아.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남예린은 그 일을 언급한 게 조금 후회됐다.갑갑한 기분에 남예린은 서둘러 화제를 끝내려고 했다.임하영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우리 반에 나랑 꽤 친한 애가 있거든? 걔가 배진성 친척이야. 내가 물어봤을 때 걔가 그랬어. 배진성은 결혼식을 올린 적이 없다고. 배씨 가문은 생각보다 엄격한 집안이라 배진성 형이 결혼식을 올려야 배진성도 결혼식을 할 수 있대.”남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해도 사실상 부부와 다름없었고 심지어 아이까지 있었다.남예린은 가슴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예전에 배진성은 정효민이 임신해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했었다.그것이 남예린이 손목을 그은 직접적인 이유였다.분명 그 전날까지만 해도 결혼하자며 프러포즈를 했었는데 말이다.배진성과 3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남예린은 두 사람이 서로를 깊이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실 배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단 한 번도 배진성의 마음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남예린은 정효민의 존재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효민이 자신과 배진성 사이에 끼어들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배진성과 정효민은 언제부터 만났던 걸까?정효민은 또 언제 임신한 걸까?수많은 질문들이 밀물처럼 밀려오기 시작하더니 예전에 배진성의 가족이 자신을 무시했던 모습, 정효민을 특별하게 대하던 모습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숨이 막혀 왔다.임하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예린아, 혹시 아직 마음이 남아 있다면 내가 대신 알아봐 줄게.”“됐어.”남예린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이미 오래전에 신경을 껐어. 배진성이 결혼을 했든 안 했든, 결혼을 몇 번이나 했든 나랑은 상관없어.”임하영은 한숨을 쉬었다. 남예린이 안쓰러워 차마 솔직해지라고 할 수가 없었다.“그러면 결혼 생각은 있어?”“응.”남예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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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주희선은 국을 뜨다가 아주 잠깐 멈칫했다.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정부에게 국자를 건네며 고개를 돌려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남예린?”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 겨우 떠올린 것처럼 말이다.“혹시 의대 다니던 걔 말이니? 걔는 왜? 무슨 일 있었어?”배인호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들면서 고개조차 들지 않고 말했다.“언제 적 일인데 이제 와서 그 얘기를 꺼내는 거야? 나이도 적지 않으니 지금쯤이면 결혼해서 애까지 낳았을 텐데.”두 사람은 마치 수없이 연습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반응했다.그래서 더 수상했고, 두 사람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배진성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더 이상 캐물을 이유는 없었다.어차피 그들에게 물어봤자 진실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대신 직접 알아볼 수 있었다.다음 날 배진성은 아침 일찍 차를 타고 나갔다.백미러 속 배씨 가문의 별장이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아침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휴대폰이 울려서 확인해 보니 주희선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날짜 정했어. 6월 18일이야. 좋은 날이래.]배진성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곧 메시지가 또 한 통 도착했다.[진성아, 너는 지금 아주 행복한 거야. 가족끼리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데. 현우에게도, 효민이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네가 필요해.]늘 쓰던 방식이었다.배진성은 헛웃음을 쳤다. 배진성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들은 배진성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배진성은 화면을 끈 뒤 휴대폰을 조수석에 던져 놓았다.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3월의 눈 부신 햇살 때문에 배진성은 눈이 시렸다.목적지는 경원에서 가장 실력 좋은 대학병원이자 남예린이 근무하는 병원이었다.그곳에서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지는 배진성도 알 수 없었다.진료 기록은 개인정보였기 때문에 병원 측에서 쉽게 보여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의료정보실은 오래된 병동의 4층에 있었다.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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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배진성은 간호사가 자신의 정성이 가득 담긴 도시락을 들고 당직실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도시락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 걸 보았다.간호사가 들뜬 얼굴로 도시락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옆에 있던 간호사가 다가가서 물었다.“어머, 정말 푸짐한 도시락이네요. 누가 가져다준 거예요?”“그건 모르겠지만 남 선생님이 싫어하는 분이신지 안 먹겠다고 하시면서 저한테 먹으라고 하셨어요.”복도 저편에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것 아닌 일을 이야기하듯 가벼운 어조였다.배진성의 정성은 남예린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간호사가 한 말에 배진성은 마치 따귀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통증이 얼굴에서부터 시작해 관자놀이로 퍼져갔고, 목덜미를 타고 가슴속까지 파고들어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처럼 괴로웠다.배진성은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더니 그대로 구석에 웅크려 앉았다.그리고 센서 등이 꺼지는 순간 더욱 깊은 어둠 속에 잠겼다.그러다 누군가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얘기 들었어요? 남 선생님 이번에 완전히 찍혔대요.”배진성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원래 우수 의료진 명단에 남 선생님도 포함돼 있었대요. 거의 확정된 거나 다름없었는데 글쎄 발표 직전에 갑자기 남 선생님 이름이 빠지고 다른 사람 이름이 올라갔대요.”“응급실에서 엄청 열심히 일하시는 그 남예린 선생님이요? 정말 안 됐네요.”“맞아요. 너무 건방지게 굴다가 장기천 과장님 쪽 사람들한테 찍혔대요. 정말 큰일 난 거죠.”“버틸 수 있을까요?”“글쎄요. 그건 남 선생님한테 달렸죠. 고개 숙이고 눈치 좀 보면서 처신하면 괜찮겠지만 계속 예전처럼 굴면 본인이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마 죽어날걸요.”...오후 4시. 응급실 쪽은 환자들로 붐볐고 남예린은 한 노인의 혈압을 재고 있었다.그때 조영진이 복도 저편에서 걸어왔고 그 곁에는 흰 가운을 입은 중년 남성이 있었다.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모습이 마치 시찰하러 온 임원 같아 보였다.“남 선생님, 잠깐만 이리 와볼래요?”조영진은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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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남예린은 곧바로 몸을 돌려 조영진의 사무실로 달려갔다.도착해 보니 사무실 문이 닫혀 있었다.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남예린은 곧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너무 조급했던 나머지 조영진의 사무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남예린은 조영진의 앞으로 걸어가서 다급한 목소리로 단호히 말했다.“과장님, 지금 환자분 심근경색이라 당장 수술해야 해요. 이 선생님은 외래 진료 나가셔서 20분 뒤에야 도착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할게요.”조영진은 서류를 내려놓고 남예린을 바라보았다.“남 선생님, 남 선생님 실력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지금 기획조정실에서 남 선생님 데이터를 확인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남 선생님이 집도를 하면...”“제가 집도를 하면요?”남예린은 감정이 살짝 격해져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지금까지 심근경색 환자들을 많이 살렸어요. 그런데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저를 괴롭히는 건 상관없지만 지금은 환자 목숨이 달려있다고요!”조영진의 안색이 달라졌다.“남 선생님,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내 앞에서 건방 떨지도 말고요.”“지금 환자분은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해요! 한시도 지체하면 안 된다고요!”남예린은 너무 조급한 나머지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동료들에게 외면당할 때도, 헛소문에 시달릴 때도, 우수 의료진이 되지 못했을 때도 남예린은 울지 않았다.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환자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수술하게 하세요.”옆에서 갑자기 누군가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크지 않고 차분했다.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남예린은 창가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30대로 보이는 남자는 흰 가운을 입고 있었고 안에는 파란 셔츠를 입고 있었다.강직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는 지금 사무실 안의 권위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남예린은 그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병원 회의 때 발언한 적이 있는 직급이 꽤 높은 사람이었다.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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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데이터에 문제가 없는데 왜 계속 조사하고 있는 거죠?”허지형은 조영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응급실 진료 건수 최다, 응급처치 성공률 최고인 남 선생님한테 7일간 연속으로 야간 근무를 배정했다면서요. 조사를 하려는 겁니까? 아니면 사람 하나 괴롭히려고 작정한 겁니까?”조영진의 미소가 굳었다.“오늘까지 조사를 마치세요.”허지형은 서류를 덮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결론은 단 하나, 데이터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뿐입니다.”조영진이 입술을 달싹였다.“네, 알겠습니다.”허지형과 배진성은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햇빛이 창문 너머 복도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눈이 시렸다.허지형은 고개를 돌렸다.“이름이 뭐야?”“남예린.”허지형은 남예린의 이름을 한 번 읊어보더니 몸을 돌려 배진성의 어깨를 토닥였다.“너는 우리 병원에서 근무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나보다도 우리 병원 사정을 더 잘 아는 거야?”배진성을 바라보던 허지형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어제 나한테 4년 전 환자 진료 기록 좀 알려달라고 했을 때 나한테 거절당할 줄 알았던 거네. 그래서 그 뒤에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서 내가 직접 나서게 한 거잖아. 그러면 내가 거절하기 어려워할 거라는 걸 예상하고 말이야. 맞지?”배진성은 부정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약아빠졌네.”허지형은 고개를 젓더니 웃으며 말했다.“배씨 가문 둘째인 네가 아주 치밀한 놈이라는 걸 내가 잠시 깜빡했어.”“그러지 않았다면 네가 도와줬겠어?”배진성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4년 전 일은 네가 조사할 수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규정상 그럴 수 없다는 거 나도 알고 있고 또 이해해. 그래서 굳이 너한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지만 예린이가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돼. 너희 병원은 물이 너무 흐려. 따지고 보면 너에게도 책임이 있어.”허지형은 잠시 침묵했다.“부끄럽네.”배진성은 허지형이 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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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허지형은 복도 저편에 서 있었고 조영진은 바로 옆에 있었다.허지형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여유롭게 걸어왔다. 구두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그 순간 장기천의 안색이 달라졌다.“허, 허 과장님이 여기는 어쩐 일로...”“제가 사인했습니다.”허지형이 장기천의 앞에 멈춰 섰다.“남 선생님이 규정을 위반하고 수술을 집도했다던데, 제가 규정을 위반했다는 말씀인가요?”장기천의 표정이 굳었다.“아니요. 과장님.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과장님께서 사인하신 줄 모르고...”“몰랐다고요?”허지형이 장기천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직 조사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던데 장 팀장님은 벌써 사람들을 끌고 와서 남 선생님에게 처분을 내리겠다고 하시네요. 장 팀장님, 방금 몰랐다고 하셨는데 그 말은 본인이 직무를 소홀히 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일부러 그랬다는 건가요?”장기천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과장님, 저는 그저 절차대로 처리한 것뿐이고...”“절차대로 처리했다고요?”허지형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또렷하게 들렸다.“첫 번째,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남 선생님의 면허는 유효합니다. 두 번째, 과장이 승인서에 사인을 했으면 기획조정실의 승인은 필요 없어요. 세 번째, 장 팀장님이 기획조정실 팀장인 건 맞지만 방금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사에게 의사 자격을 박탈당해도 이상할 것 없다고 고함을 칠 권리는 없어요.”복도는 멀리서 울려 퍼지는 의료기기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매우 고요했다.장기천의 얼마 없는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축축하게 달라붙었다.장기천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허지형은 고개를 돌려 주변에 모여든 의료진들을 바라보았다.이미 십여 명 넘게 모여 있었고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다들 모였으니 이참에 얘기할게요.”허지형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복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첫 번째, 남 선생님의 진료 데이터는 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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