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에 미친 남편 조련법: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그러자 검은 셰퍼드는 곧장 고개를 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기분이 좋은 듯 꼬리를 더 세차게 흔들었다.“이 아이 이름이 뭐예요?” 슬비는 고개를 들어 이재에게 물었다.이재는 슬비를 내려다봤다. 슬비는 바닥에 쪼그린 채 앉아 있었다. 흰 원피스가 연꽃처럼 퍼졌고, 손가락은 검은 셰퍼드의 머리 위에 놓여 있었다. 그 눈동자는 별빛을 머금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그 검은 셰퍼드는 편안한 소리를 내면서 온몸을 슬비의 다리 쪽으로 기댔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드러눕고 싶은 모양이었다.이재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흑풍.”“흑풍? 이름도 멋지네요.” 슬비는 다시 귀를 쓰다듬었다. “얘가 저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흑풍은 꼬리를 더 신나게 흔들었다.이재는 슬비와 개를 잠시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도우.”“예, 회장님.”“우리 안에 가둬.”도우는 얼떨떨했다.평소 흑풍은 이 집에서 마음껏 돌아다녔고 한 번도 우리에 가둬 둔 적이 없었다.‘오늘 회장님이 왜 이러시는 거지?’‘게다가 사모님을 물지도 않고 이렇게 얌전한데...’이재는 설명하지 않았다. 담담하게 도우를 한 번 훑었을 뿐이다.도우는 바로 입을 다물고 앞으로 나가 흑풍의 목줄을 잡았다.흑풍은 끌려가면서도 몇 걸음마다 뒤를 돌아봤다. 억울한 눈으로 슬비를 바라보며 낑낑거렸다.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슬비가 이재를 보고 말했다.“되게 억울해 보이네요.”이재는 슬비의 손을 잡고 안으로 걸었다. 손끝이 슬비의 손목뼈 아주 가볍게 쓸었다. 목소리에는 서늘함이 감돌았다.“야성을 길들이기 힘드니까 멀리하는 게 좋아.”집 안은 극도로 절제된 모던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높은 천장의 거실, 정원의 밤 풍경을 그대로 끌어들인 듯한 통유리창,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라인의 가구들.드문드문 놓인 예술품 몇 점만이 넓은 공간의 빈틈을 채우고 있었다.공기에는 은은한 시더 향기가 났다. 이재에게서 나던 향기와 같았다.“우리 방은 2층에 있어.” 이재는 손을 놓고 나선형 계단
Read more

제12화

이재는 손목시계 버클을 풀어 옆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딸깍-맑은 금속음이 살짝 울렸다.“내가 데려다줄게.”“번거롭게 그렇게 안 하셔도 돼요...” 슬비는 바로 사양했다. “택시를 부르면 돼요.”이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지면서, 깊은 눈동자에는 살짝 장난기가 스쳤다.“그래? 여기서 택시가 잡힐 것 같아?”슬비는 말을 잇지 못했다.조금 전 차가 이쪽으로 들어올 때부터 슬비는 이미 알아차렸다. 이곳은 ‘예담만’ 단독주택 단지에서도 가장 조용한 사유지 구역이었다. 길 양옆에는 짙은 나무와 닫힌 철문뿐이었다. 택시는커녕 지나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슬비가 대답하지 않자, 이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지.”검은 세단은 곧장 서문경찰서로 향했다.차창 밖으로 번화가의 불빛이 물결처럼 흘러갔다.호강시의 밤이 이제 막 시작되는 참이었다.뒷좌석 창가 자리에 앉은 슬비는 무심결에 치맛자락을 잡고 비비 꼬았다. 새하얀 새틴 치마는 차창 밖 흘러가는 빛에 부드러운 광택을 머금었다. 그 결에 드러난 종아리가 한층 더 하얗게 보였다.“많이 걱정돼?”옆자리에서 이재의 목소리가 들렸다.슬비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이재는 가죽 시트에 기댄 채 긴 다리를 느슨하게 꼬고 있었다.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불빛 사이에서 이재의 옆얼굴은 더 도드라졌다.“네.” 슬비가 조용히 대답했다. “지범이 성격이 급해서요. 괜히 더 다쳤을까 봐...”“걱정하지 마.” 어두운 차 안에서 이재의 먹빛 눈동자가 슬비를 바라보았다.목소리에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기색이 드러났다.“큰일은 아닐 거야.”슬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끝은 여전히 살짝 말려 있었다.이재의 시선에서 보자면, 지범 정도 또래의 사내아이가 누군가와 주먹다짐을 벌이는 일쯤은 호강시 부유층 무리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들 중 사고 한두 번 안 친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하지만 슬비가 걱정하는 건 그쪽이 아니었다.방금 전
Read more

제13화

성준의 가슴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더 커졌다. 그는 핸드폰을 거칠게 옆으로 던졌다.‘원슬비, 기다려.’‘네가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자.’‘이번에 나도 쉽게 달래 줄 생각이 없으니까.’...경찰서 로비는 밝았다.슬비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구석 벤치에 웅크린 지범이 보였다. 머리는 닭집처럼 헝클어졌고, 입가에는 멍이 들었다. 교복 재킷도 크게 더러워져 있었다.옆에는 또래 남자아이 둘이 앉아 있었다. 둘 다 얻어맞은 흔적이 있었다.지범은 슬비를 보자마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이쪽을 볼 용기가 없어 보였다.‘끝났다. 작은누나한테 잔소리 듣다 죽겠네.’온 집안의 사랑을 받고 자란 큰누나 지민보다, 지범은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작은누나 슬비와 더 가까웠다.슬비가 오늘 호강시에 돌아온다는 걸 알고, 지범은 오후 수업을 몰래 빠졌다. 도원구의 오래된 게장집에서 슬비가 좋아하던 간장게장을 사 주려던 참이었다.줄을 서 있던 중, 뜻밖에도 너무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바로 성준이었다.‘저 자식이 작은누나랑 같이 호강시에 온 건가?’‘진짜 질긴 인간이네.’지범은 원래부터 성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슬비가 좋아했기 때문에 참고 있었을 뿐이다.그냥 무시하고 간장게장만 사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 일행이 입을 함부로 놀리는 소리가 들렸다.“성준아, 이번에 슬비한테 제대로 해 주네. 진짜 호강시까지 데리러 왔어?”“화가 난 것뿐이야.” 성준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여자는 달래면 풀려.”“역시 우리 성준이 통이 크다니까.”“그러게. 슬비는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긴 하지. 아쉬운 건 귀가 안 들린다는 거? 그래도 성준 형이 받아 주잖아.”“뭐가 좋아. 며칠 전에 시연이 뺨 두 대 때렸다며?”“진짜? 생각보다 성격 거치네?”성준은 담배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앞으로는 제대로 길들여야지.”‘길들여?’‘이 새끼가 지금 누구 앞에서 잘난 척이야!’지범의 안색이 굳어지면서 들고 있던 봉투를 친구에게 넘겼다
Read more

제14화

이재는 더 말하지 않고 몸을 살짝 틀었다. 시선은 접수대 쪽으로 향했다.그때 제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안쪽에서 빠르게 걸어 나왔다. 경찰서 부서장급 간부, 그러니까 서장의 바로 아래쯤 되는 인물이었다.부서장은 이재 앞에 서자 허리를 낮췄다. 말투는 지나칠 만큼 공손했다.“회장님, 직접 오셨습니까? 이런 일은 전화 한 통이면 되는데요.”이재는 담담하게 받았다.“집안의 아이라서 보러 왔습니다.”부서장의 눈이 곧장 지범에게 향하더니 눈빛이 환해졌다.“아, 하씨 집안 막내도련님이셨군요. 오해입니다, 오해였어요!”지범의 입꼬리가 떨렸다.‘하씨 집안 막내도련님?’‘난 ‘원’ 씨인데?’‘아니, 잠깐... ‘하’ 씨?’지범의 머릿속이 ‘웅’ 하고 울렸다.이제야 저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떠올랐다.경제지 표지에 자주 나오던 얼굴. 가끔 연예지 첫머리에도 오르내리던 이름. 기사는 죄다 근거 없는 소문에 가까웠지만, 사진 속 얼굴만큼은 지범의 기억에 또렷했다.너무 눈에 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연예계에 들어가도 최상급이라 할 얼굴인데, 하필 하씨 집안에서 태어나 엄청난 권력까지 손에 쥔 사람.하씨 집안 둘째 아들, 하이재.‘내 예비 큰매형이잖아.’‘그런데...’갑자기 뭔가 떠올린 듯, 고개를 홱 돌려 슬비를 바라보던 지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이상한데?’‘하이재와 정략결혼하는 사람이 큰누나 아니었어?’‘왜 작은누나하고 같이 나를 데리러 경찰서에 왔지?’당직 데스크 쪽에선 슬비가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슬비의 옆얼굴은 거의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보였다.부서장이 직접 나선 덕분에 일 처리 속도가 놀라울 만큼 빨랐다.10분도 되지 않아 모든 절차가 끝났다.“가도 된대.” 벤치 쪽으로 돌아온 슬비가 접수증을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지범은 곧장 임시 조사실에서 나왔다.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다가 슬비 옆에 바짝 붙어서 목소리를 낮췄다.“누나, 저 사람 하씨 집안 그 사람 아니야? 누나가 어떻게
Read more

제15화

슬비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최대한 차문 쪽으로 붙었다. 하지만 차 안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이상해!’‘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상해!’지범은 부모에게서 하씨 집안과 혼인이 성사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게다가 큰누나 지민이도 말했었다. 이재는 큰 병에 걸려서 오래 못 살 것 같고, 그래서 액막이 결혼이 필요하다고.그런데 지금 이재 옆에 있는 건 지민이 아니라 슬비였다.‘설마... 저 아저씨가 작은누나도 마음에 들어 한 거야?’...검은 세단이 원씨 저택 앞에 도착했을 때, 지범이 뒤를 돌아본 횟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소년의 시선은 너무 뜨거웠다. 만약 눈빛이 칼이라면 이재는 이미 수십 군데나 찔렸을지도 몰랐다.이재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손으로 슬비의 손을 감쌌다. 슬비의 매끄러운 손등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면서.“다 왔어. 내리자.”지범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에서 내렸다. 이재가 아직 슬비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바로 다가가서 떼어 놓으려 했다. 하지만 막 손을 뻗으려고 할 때, 집의 현관문이 열렸다.“지범아!”정여진이 급히 걸어 나왔다.“이놈 자식, 어딜 가서 뭐 했어? 전화를 그렇게 해도 안 받고...”“엄마...” 지범은 어색하게 손을 거두며 얼버무렸다. “친구들이랑 농구하다 왔어.”정여진은 더 따져 볼 겨를도 없었다. 시선이 이재에게 닿자 숨이 멎은 듯 굳어졌다.남자는 저녁 어스름 속에 서 있었다. 검은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서, 희고 단단한 팔뚝이 드러났다. 그 손으로 옆에 선 슬비의 손을 잡고 있었다.정여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는 저절로 팽팽해졌다.“하... 회장님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세요.”“장모님.” 이재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편하게 제 이름을 부르셔도 됩니다.”“아, 네. 그래...” 정여진은 연달아 대답했지만, 끝내 이름을 편하게 부르지는 못했다.곧 일행은 거
Read more

제16화

“아... 아니야.” 정여진은 급히 손을 저었다. “그냥 물어본 거야. 정말 그냥...”옆에 있던 지범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었다.“무슨 서류? 무슨 신고? 엄마, 지금 다 같이 무슨 암호 주고받는 거야?”정여진은 아들이 혹시 말실수라도 할까 봐 바로 손목을 잡아끌었다.“됐어. 어린애가 별걸 다 알려고 해. 너 교복이 왜 이렇게 더러워? 얼른 올라가서 갈아입어.”“아, 엄마. 잡아끌지 말라고...”지범은 못마땅한 얼굴로 끌려 올라갔다.슬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엄마, 나도 올라가서 짐 좀 챙길게.”이재 곁을 지날 때, 슬비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천천히 해. 안 급하니까.”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세 사람이 위층으로 올라간 뒤, 거실에는 이재와 원국한만 남았다.이재는 다시 찻잔을 들고 천천히 한 모금을 마셨다.차 향은 맑았다. 그는 잔 속에서 가라앉고 떠오르는 잎을 내려다보며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반면 원국한은 바늘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불편했다. 마른 입술을 핥은 뒤 억지로 입을 열었다.“그... 하 서방, 정략결혼 일에 대해서... 세부 사항을 다시 한번 좀 더...”“장인어른, 걱정하지 마세요.” 이재가 조용히 말을 끊었다. “저희 쪽에서 약속한 투자금 60억 원도 내일 들어갈 겁니다.”원국한의 눈이 번쩍 뜨였다.“정말?”“그리고 서문구 쪽의 사업은 저희 쪽에서 맡겠습니다.”이재의 목소리는 평온했다.원국한은 손이 떨릴 만큼 들떴다.서문구 쪽의 그 사업은 최근 원국한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투자 실패로 자금줄이 막히면서, 원씨 집안이 운영하던 원송그룹까지 거의 무너질 뻔했다.그런데 이재의 한마디로 해결된 것이다.“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원국한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또 공손한 호칭이 튀어나왔다.이재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눈을 들었다.“저한테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잠시 말을 멈춘 뒤, 시선이 2층 쪽으로 향했다.“감사를 드리려면... 딸을 잘 키우신
Read more

제17화

정여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슬비가 입을 열었다.“혼인신고서에는 원지민 이름이 올라갔어.”“뭐라고?”정여진이 크게 놀라 발을 동동 굴렀다.“아니, 왜 네 신분증을 안 썼니? 나중에 이혼하면 지민이가 이혼녀가 되는 거잖아.”슬비는 차갑게 웃었다.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엄마가 걱정하는 건 지민이었다.“그럼 나는?”정여진은 곧장 달래는 말투로 변했다.“슬비야, 괜찮아. 내가 들었는데... 하이재 병이 꽤 심하대. 무당도 액막이 결혼을 해야 명을 붙들 수 있다고 했다더라.”“그쪽 일은... 아마 안 될 거야. 그냥 형식만 맞춘다고 생각해. 우리 집이 위기만 넘기면, 그때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이혼하면 돼. 너도 지민이도 자유가 되는 거야.”너무 가볍게 말했다. 마치 이혼이 장 보러 갔다 오는 일처럼 쉬운 줄 아는 사람 같았다.“엄마.” 슬비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하이재가 내가 가짜 원지민이라는 사실을 알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봤어?”정여진은 멈칫했다.“하이재가 원 회장과 원송그룹을 그냥 둘까?” 슬비는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나는?”“그건...”정여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정확히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당장 가장 급한 건 원씨 집안을 살리는 일이었다.그래야 자신도 이 집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까.“엄마.” 슬비는 캐리어를 닫고 지퍼를 올렸다. “이번이 내가 원 회장을 돕는 마지막이야. 앞으로는... 우리도 서로 빚 없는 사이로 지내.”정여진의 표정이 변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가 너를 몇 년이나 키웠는데...”슬비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바로 캐리어를 끌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런데 문을 열자, 문 밖에는 이재가 서 있었다.그는 은색 라이터를 손에 쥐고 있었다. 뚜껑이 열렸다 닫힐 때마다 ‘딸각, 딸각’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조용한 복도에서 그 소리는 더 선명했다.슬비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했다.정여진은 안색이
Read more

제18화

정여진은 말문이 막혔다.옆에 선 슬비는 난처해진 엄마의 표정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그동안 그녀는 이런 차별에 익숙했다.원씨 집안의 진짜 큰딸인 지민은 좋은 옷과 좋은 음식, 가족들의 칭찬과 시선을 모두 다 받았다.그럼 슬비는?정여진이 재혼하면서 데려온 아이였다. 먹고 잘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배웠다.그래서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엄마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슬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슬비를 위해 처음으로 나서 준 사람이 이재일 줄은 몰랐다.만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남자였다.이재는 정여진을 더 보지도 않고, 몸을 숙여 작은 캐리어를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장모님이 딸을 아끼는 법을 모른다면...” 돌아선 이재가 먹빛 눈으로 슬비를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제가 아끼겠습니다.”정여진의 몸이 굳어졌다.슬비도 흠칫하며 멈췄다.복도의 따뜻한 조명이 이재의 등 뒤에서 번졌다. 남자의 몸은 옅은 빛에 감싸인 듯 보였다.슬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이재는 더 머물지 않고 슬비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걸었다.정여진의 곁을 지날 때, 이재는 발걸음을 멈추고 슬비를 곁눈질로 바라봤다.“앞으로 제 사람은 제가 지킵니다.”이재의 그림자가 정여진을 완전히 덮었다. 시더 향기와 옅은 담배 냄새가 가까워지자, 정여진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친부모라 해도 예외는 없습니다.”정여진은 입을 열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계단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그녀는 미친 듯 뛰는 가슴을 누르며 벽에 기대었다. 등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다행이야.’‘하이재는 내가 지민이를 함부로 대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하이재도 모르겠지... 자신이 지금 보호하는 사람이 지민이 아니라 슬비라는 사실을...’정여진은 한참 벽을 짚고 있다가 겨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이재는 슬비를 지민이로
Read more

제19화

슬비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을 때, 욕실 문이 열렸다.이재가 욕실에서 나왔다. 허리에는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가슴 근육의 골을 따라 흘러내렸다.이 남자의 몸은 정말 좋았다.넓은 어깨와 날렵한 허리, 근육선도 딱 알맞았다. 조금 더하면 부담스럽고, 조금 덜하면 아쉬울 정도였다.슬비는 뺨이 달아올라 급히 고개를 숙였다.“빨리 씻어.” 이재가 머리를 닦으며 말했다. 물기 어린 나른함이 목소리에 묻어 있었다. “욕실에 잠옷 준비해 뒀어.”슬비는 도망치듯 욕실로 뛰어들어갔다.문을 닫자마자 문에 등을 기댔다. 심장은 거세게 뛰고 있었다.욕실은 넓었다. 공간은 건식과 습식으로 나뉘어 있었고, 세면대 위에는 새 스킨케어 세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선반에는 잠옷 한 벌이 걸려 있었다.실크 소재의 원피스. 옅은 핑크색이었다.슬비가 몸에 대 보자 길이는 허벅지 중간 정도까지였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샤워기를 틀었다.따뜻한 물이 쏟아지며 욕실 안에 김이 차올랐다.슬비는 샤워기 아래 선 채 가슴속 불안을 씻어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씻을수록 긴장감은 더 커졌고, 심장은 계속 가라앉지 않았다.거의 한 시간을 미적거린 뒤에야 그녀는 그 실크 잠옷을 입고 나왔다.잠옷은 얇은 슬립 원피스였다. 마치 옅은 안개 한 겹을 두른 것처럼 가볍게 몸에 감겼다.은은한 핑크빛 원단은 슬비의 피부를 더 희게 보이게 했다. 가느다란 슬립 끈 아래로 마른 쇄골과 둥근 어깨선이 드러났다.샤워를 막 마쳐서 젖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고,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가슴 앞쪽을 살짝 적셨다.얇은 원단 아래로 피부의 부드러운 빛이 희미하게 비쳤다.따뜻한 물기 때문인지 뺨은 달아올랐고, 젖은 눈동자는 물을 머금은 흑진주처럼 반짝거렸다.창가에 서 있는 이재를 본 슬비는 그대로 발걸음을 멈췄다. 손에 쥔 수건으로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닦았다.이재는 짙은 회색 샤워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허리끈은 느슨하게 묶여
Read more

제20화

슬비는 온몸이 경직된 상태였다.이재의 팔은 단단하고 힘이 있었고, 슬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면서 손바닥은 아랫배에 닿아 있었다. 얇은 슬립 천을 지나 뜨거운 체온이 그녀의 피부 위에 내려앉았다.두 겹의 천이 있어도 남자의 가슴이 얼마나 단단하고 뜨거운지 느껴졌다.“피하지... 않았어요.’슬비는 작게 답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이재가 소리 없이 웃었다. 남자의 숨결이 슬비의 귓바퀴를 스치자 짜릿한 느낌이 번졌다.이재의 손가락이 슬비의 허리 위로 내려앉았다. 슬립을 사이에 두고도 그 손바닥은 놀랄 만큼 뜨거웠다.슬비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익숙한 답답함이 다시 밀려왔다.그녀는 가슴이 보이지 않는 손에 꽉 눌린 것만 같았다. 숨이 얕아지면서 호흡이 빨라졌다. 손가락은 자신도 모르게 말려 들어갔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통증으로 자신을 삼키려는 두려움을 누르려고 했다.이재의 엄지가 허리 옆을 천천히 쓸었다. 힘은 세지도 약하지도 않았다.“허리가 이렇게 가늘다니.” 그가 조용히 말하자 숨결이 슬비의 귓가에 닿았다. “한 손으로도 잡을 수 있겠네.”슬비의 뺨은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몸의 반응은 통제되지 않았다.오히려 등줄기는 딱딱하게 굳어 갔고, 온몸의 피부가 지금 당장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재의 팔이 그녀를 단단히 감싸고 있어서, 슬비는 쉽게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하필 그 순간, 이재가 고개를 숙여 슬비의 입술에 키스했다.슬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두 손으로 이재의 가슴을 밀었지만, 손끝에 닿은 단단한 근육이 너무 뜨거워서 손끝이 저렸다.키스는 점점 깊어졌다. 숨이 닿는 거리조차 사라질 만큼 가까웠고, 밀려드는 감각은 슬비의 몸에서 힘을 빼앗아 갔다.슬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손끝은 무의식적으로 이재의 가슴팍에 닿은 수건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그 순간, 슬립 끈이 어깨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하얀 어깨선이 달빛 아래 희미하게 드
Read more
PREV
12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